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단편] 주마등
게시물ID : panic_1011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른이의꿈
추천 : 21
조회수 : 2243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20/02/18 04:21:40
옵션
  • 창작글
군대 가서 사람이 바뀐다는 말을 들어봤니?

특히 옛날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하셨지.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 구실 한다고.





이건 내 고등학교 친구 이야기야.

편의상 녀석을 B라고 부를께.

사실 고등학교 시절 B와 나는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였어.

같은 반인 적은 없었지만 시골의 작은 학교여서 누가 누구인지는 대충 다 알고는 있었거든.

B는 몸도 왜소했고,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는 그런 아이였어.

성격은 순둥순둥하고, 부끄럼 많이 타는 타입이었고.

아무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이웃마을에 있는 고아원에 살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고...

아무튼 대충 감이 오지?






내가 B를 다시 만난 건 군대에서였어.

그때 나는 후반기 교육 조교였고,

B는 교육생이었지.





내가 근무했던 부대는 주로 장교와 간부들의 주특기 교육을 하는 곳이야.

그렇다고 늘 간부 기수만 오는 것은 아니었어.

가끔씩 일반병 기수가 들어올 때가 있었거든.

논산에서 이등병 짝대기 하나 달고 군기 바짝 들어서 온 교육생들 보면 그리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어.

아마 내가 교육생일 때 생각이 나서 그런 걸꺼야.

그때 참 힘들었거든.





그곳 교육생들은 일과 시간 중에는 나 같은 주특기 조교들에게 교육을 받고,

일과 후에는 내무생활 조교들이 교육생들의 생활을 관리했어.

그런데 내무생활 조교들이 일반병 교육생들을 괴롭히는 게 아주 악명이 높았어.

간부 교육생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일반병 교육생들에게 푼다고 그랬거든.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때는 군대에 폭력과 구타가 암암리에 허용되고 있던 시기였어.

그래서 일반병 기수들이 들어오면 더 불쌍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





전역이 2개월 정도 남았을 때 일반병 기수가 들어왔어.

주특기 교육이 8주 교육이었으니까,

나에게는 마지막 기수였던 셈이지.

마지막 기수이기도 했고,

군기가 바싹 들어있는 애들이 불쌍하기도 해서 나는 교육생들에게 잘 해주려고 노력했어.





8주 교육이 절반 정도 지났을 때였어.

하루는 휴식 시간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교육생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지.

"제 23번 교육생! 이병! 백!ㅇ!ㅇ! 조교님께! 용무있어! 왔습니다!"

나는 짜증내며 말했어.

"아-- 정말 여기 교장에서는 그렇게 관등성명 좀 붙이지 말라나까."

내 옆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던 후임이 한마디 거들었어.

"야, 이제 곧 민간인 되실 분한테 자꾸 그러면 전역하고 사회 나가서 적응를 잘 못해요. 너 때문에 우리 김병장님 사회에서 적응 못하고 낙오자 되면 네가 책임 질꺼야?!"

"아주 그냥 악담을 해라. 악담을 해."

나는 작은 체구의 교육생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어.

"왜? 무슨 일인데?"

"저.. 김ㅇㅇ 조교님... 혹시 ㅁㅁ 고등학교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녀석의 얼굴과 엉성한 바느질로 녀석의 군복에 붙어있는 명찰을 번갈아 확인했어.

"아-- 백ㅇㅇ! 맞지?"





고등학교 때는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막상 군대에서 만나니까 무지 반갑더라고.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B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것 같아.

군기가 어찌나 단단히 들었는지 B는 처음에는 나에게 말을 놓지도 못했어.

B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입대할 때까지 쭈욱 고향에서만 지냈대.

입대할 때까지 중국집 배달에서 공사판 막노동까지 안해본 일이 없다 했어.

군대 오니까 따뜻한 밥을 삼시세끼 챙겨줘서 너무 좋다는 B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해.

고등학교 졸업하고 고생하고 산 흔적이 느껴지더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마지막 기수의 교육은 끝이 났고,

B는 전방 자대로 배치되었고,

나는 전역과 함께 학교에 복학을 했어.




==
내가 다시 B를 만난 것은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였어.

회사에서 대리로 진급한 해 설날 연휴였으니까..

아마 6,7년 정도 지난 것 같아.

설 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갔는데,

부모님 입에서 B의 이름이 나온 거야.

며칠 전 B가 부모님 집에 다녀갔다고.

그리고 부모님은 B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냈어.

갈비 세트를 들고 나타난 B는 내가 고향에 내려오면 꼭 자기에게 연락해달라고 부모님에게 몇번을 신신당부를 했대.





B에게 연락을 했고,

시내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음식점에서 약속을 잡았어.

시간에 맞춰서 음식점을 찾았을 때,

직원이 음식점 건물의 안쪽 방으로 나를 안내해주며 말했어.

잠시만 기다리라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B가 나타났어.

짠한 모습의 교육생이 아닌 말쑥하게 차려입은 B가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지더라구.

서로 안부를 묻고,

무슨 일을 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B가 주저하는 것 같아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어.

B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음식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오는 종원원들의 태도에서 조금 묘한 느낌이 들었어.

지나치게 깍듯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음식은 정말 맛있었어.

역시 맛집이라 확실히 다르긴 다르더라고.

서비스로 주는 안주들도 메인 요리 못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대만족이었어.

후식이 나올 즈음해서 B에게 화장실을 간다하고 카운터로 갔어.





B를 만나러 간다니까 어머니께서 그러셨거든.

갈비 잘 얻어먹었으니 저녁은 내가 사라고.

B가 가져온 갈비가 꽤 비싼 고급 갈비였나봐.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의 직원에게 방 위치를 말했는데,

직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음식을 주문한 기록이 없다는 거야.

직원은 식당의 매니저를 호출했고,

매니저는 나에게 계산이 이미 다 되었다고 말했어.

나는 B가 그새 계산을 했구나 하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매니저가 작은 목소리로 직원을 다그치는 소리를 들었어.

사장님이 오늘 중요한 손님과 식사하는 방이라고.

그 말 듣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B가 다르게 보이더라고.

예전에 그토록 어수룩해 보였던 B가 잘나가는 음식점 사장님이라니.





그날 헤어지기 전 B는 나에게 이상한 부탁을 했어.

3월 3일 저녁에 ㅁㅁ 지하철역에 절대 가지 말라는 거야.

나는 웃으며 말했지.

ㅁㅁ 지하철역은 갈 일이 없다고.

B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혹 근처에 갈 일이 생기더라도 지하철역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거야.

그때 나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B의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





그리고 3월 3일이 되었어.

B의 당부는 까맣게 잊은 상태였어.

협력업체에서 회의를 위해 외근을 나왔고,

긴 회의가 끝나고 협력업체 사장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어.

술자리가 한창인데 전화기가 울리는 거야.

B였어.

전화를 받자마자 B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혹시 ㅁㅁ 지하철역 근처냐고.

B의 물음에 술기운이 확 달아났어.

나는 B에게 물었어.

어떻게 알았느냐고.

B는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며 집에 갈 때 절대 지하철 타지 말라고 재차 강조하고는 전화를 끊었어.





다음날은 토요일이었어.

아침에 잠에서 깼는데 이불에서 나오기가 싫었어.

그래서 침대에 누운 채 전화기로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지.

그러다가 'ㅁㅁ 지하철역 사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어.

설마하는 생각으로 뉴스 기사를 확인했는데..

어젯밤 취객이 선로에 떨어져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치여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였어.

그때는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지하철역이 그리 많지 않았거든.

사고 시간을 확인했을 때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어.

바로 B에게 전화를 했어.

B는 전화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다며 나중에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말했어.

그리고 B는 주말에는 많이 바쁘다며 일요일 밤에 볼 수 있느냐 물었어.

다음날인 일요일,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저녁에 B와 만날 수 있었어.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을 받고서야 B는 어렵게 입을 열었어.

때는 7년 전인 B가 한창 군복무를 하던 중이었대.

B가 일병을 갓 달았을 무렵.. 총기사고를 당했다고.

내가 물었을 때, B는 어두운 표정으로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말했어.

좌측 가슴에 관통상을 당했는데, 군의관 말로는 천운이라고 그랬대.

총알이 심장도 피했고, 굵직한 혈관도 다 피했고, 늑골이랑 어깨 뼈도 비껴갔다고.

B는 셔츠를 풀러 어깨 뒤쪽의 흉터를 보여주며 말했어.

사고를 당하는 순간 필름이 돌기 시작했다고.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학창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하루 벌어 하루 살던 시절, 군입대, 사고 2주 전 다녀온 일병 정기 휴가, 그리고 야간경계근무 나오기 전 자신을 깨운 불침번 얼굴까지 옛날 무성 영화처럼 눈 앞에 화면이 주마등처럼 주르륵 흘러가더래.

그런데 화면이 거기에서 멈추질 않고 계속 돌아갔다는 거야.

병원에서 치료받고, 부대로 복귀하고, 상병 달고, 병장을 달고, 전역을 하고, 그리고 그 다음 일들까지 화면이 쉬지 않고 넘어가더라는 거야.

잠시 말을 멈춘 B는 나에게 소주잔을 내밀었어.

우리는 서로 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비웠지.

내가 B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고,

B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어.

미래를 보여주는 영상 속, 자신은 시내의 유명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하고 있더래.

자기보다 어린 식당 사장이 자기를 무척이나 갈구었다며 B는 씨익 웃는 거야.

아무튼 영상 속에 자신이 식당에서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고,

손님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신문이 B의 눈에 들어왔는데...

그 신문에 나의 사진과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고.

B는 이야기를 멈추고 소주를 들이켰고,

나는 B의 빈 소주잔에 술을 채우며 물었어.

"신문에 뭐라고 적혀있었는데?"

"네 이름 앞에 의인(義人)이라고 적혀 있더라."

"의인? 내가? 내가 왜?"

"네가 그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했대."

B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어.

그리고는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어.

"그런데... 너는 미쳐 선로에서 올라오지 못해 지하철에 치여 죽었다고 그 신문에 쓰여있었어."

나는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어.

B는 나에게 다시 잔을 내밀며 말했어.  

"야, 너무 많이 생각하지마. 그냥 술이나 마셔."

나는 말없이 B와 잔을 부딪치고 잔을 비웠어.

그날은 B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꽤 취하도록 마셨어.





그렇게 둘이 늦도록 마시고 있는데,

직원 한 명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어.

그 직원은 황태낙지볶음 요리가 가득 담긴 접시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어.

"사장님, 시간 맞춰서 마감했고요. 포스기 정산까지 마쳤습니다. 저도 이제 퇴근 하려고요."

B는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다른 애들은 다 퇴근했고?"

"그럼요. 진작해 했죠."

"그래, 고생했다. 내일 쉬는 날인데, 너도 같이 한잔 하고 갈래?"

직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홀에 불을 끄고 오겠다며 나갔어.

잠시 후 직원은 소주잔 하나와 소주 두 병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어.

B가 나에게 직원을 소개시켜주었지.

"이쪽은 우리 가게 메니저님. 우리 음식점, 나 없이는 돌아가도 우리 장 매니저님 없으면 망한다. 하하."

그리고 B는 나를 가리키며 직원에게 말했어.

"이쪽은 내 고등학교 동창인데, 나 군대에서 후반기 교육 받을 때 조교였어. 우리 천사 조교님! 그때 내가 신세 정말 많이 졌지."

매니저와 인사를 하며 인상을 봤는데 한눈에 사람이 똑부러진 것이 느껴지더라고.

함께 술자리를 하며 B가 다른 직원들에게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매니저를 각별하게 챙기는 것 같았어.





그 일이 있고 고향에 내려갈 일이 있으면 나는 종종 B를 만났어.

하지만 우리는 B의 총기 사고 이야기와 그때 B가 미래를 본 이야기는 하지는 않았어.

B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지하철역 사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했어.

우리는 그냥 시시콜콜하게 사는 이야기를 주로 했던 것 같아.

물론 가끔씩 여자 이야기도 했지.

중소기업 말단 직원이었던 나와는 다르게 B는 나름 잘나가는 프렌차이즈 음식점 사장님이라는 타이틀이 있었거든.

그래서 적극적인 대쉬까지는 아니어도 B에게 호감을 표현했던 여성들이 몇몇 있었던 모양이야.

좋은 사람 소개시켜주겠다며 선 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왔대.

하지만 B 말에 의하면 자기가 다 거절했대.

다 차인 것 아니냐는 나의 말에 B는 피식 웃더라고.

그리고는 문득 J의 이름을 말하는 거야.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 J가 누구인지 알겠더라고.

"혹시 그.. 선도부 J?"

B는 고개를 끄덕였어.





J는 우리 학년의 여학생 선도부원 중 한 명이었어.

공부, 미모, 성격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아이였지.

당연히 남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무척 높았고,

음...... 솔직히 말하면...

나도 한때 J를 짝사랑하기도 했었어.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어.

"갑자기 J 이야기는 왜 꺼내는데? 너도 혹시 옛날에 J 좋아했냐?"

그런 건 아니라며 B는 멋적게 웃으며 말했어.

고등학교 1학년 때 J와 같은 반이었다고.

그때 반에서 B를 괴롭히는 양아치 애들이 있었는데,

반장이었던 J가 B를 많이 감싸주고 챙겨주었다고.

B는 술잔을 비우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어.

J 덕분에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나마 가장 덜 힘들었던 시간이 1학년일 때였다고.





B는 아직도 J와 간간히 연락을 하고 있다고 말했어.

J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은 고향으로 내려와서 군청에서 일하고 있다고.

그리고 J는 다음달에 결혼을 한다고.

B는 J에게 청첩장을 받았는데,

결혼식장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라 했어.

J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아쉽냐는 나의 짓궂은 물음에 B는 말했어.

자신은 J를 여자로 느낀 적이 없다고...

고등학교 시절 자기를 챙겨주고 보호해주던 J에게 받은 느낌은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라고.

그 가냘픈 여자 아이가 덩치 큰 불량 학생들의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바락바락 성을 내는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고.

그리고 한참이 지나 B는 말했어.

자기는 평생 알 수 없겠지만.. 아마도 그건 어머니의 느낌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참고로 B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없었어.




==
시간은 흘렀어.  

그리고 그때 B를 만난 건 5년 정도 지나서였어.

서울까지 올라온 B는 2주일 간 휴가를 내서 전국 일주를 하는 중이라 했어.

음식점 일을 시작하고 이렇게 긴 휴가를 가져본 게 처음이래.

그리고 B는 웃으며 말했지.

자기는 역시 백수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고.

이제 가게를 원래 주인에게 넘겨줄 때가 된 것 같다고.

원래 주인이라니.. 무슨 말이냐 물었을 때,

B는 예전 죽을 고비에 주마등 스치던 이야기를 꺼냈어.





음식점 주력 요리의 레시피,

여러 매장들의 위치 선정와 운영,

그리고 식재료 납품 업체를 관리하고 그들과의 거래하는 요령들..

이런 중요한 정보들을 자기가 어떻게 배웠겠냐며 B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어.

그날 B에게서는 10년 만의 휴가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묘한 비장함 같은 게 느껴졌었지.





술자리를 파하고 B가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을 때 B가 말했어.

자기 호텔 방에서 자고 가라고.

내일 같이 해장국도 먹고, 사우나도 같이 하자고.

일부러 침대가 두 개인 방을 골랐다고.

그렇게 우리는 호텔로 들어갔어.

대충 씻고 각자의 침대에 누웠지.

낯선 침대에 누워있으니까 술기운이 어느 정도 가시면서 정신이 말똥말똥 해지더라.





그리고 그동안 늘 궁금했지만 나 스스로도 머릿속에서 일부러 지워내던 질문이 떠올랐어.

예전 지하철 사고로 죽은 사람.

B의 말 대로라면 내가 죽으면서 살려냈어야 하는 사람.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항상 궁금하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거든.





나는 입을 열었어.

"자냐?"

B의 대답이 돌아왔어.

"아니. 왜?"

"나 뭐 하나만 물어보자."

"그래라."

"7년 전 3월 3일 ㅁㅁ 지하철역 있잖아."

"아.. 그거?"

"그 때.. 죽은 사람 있잖아...... 나... 그 사람한테 좀 죄짓고 사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

"그러지마."

"..........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그때 그 사람 살릴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네가 나에게 미리 이야기 해주었다면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지 않았을까 해서... 그렇다고 네 탓하는 건 아닌데... 그냥...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긴... 아마 네가 미리 이야기 해줬어도 내가 믿지 않았겠지."

어둠 속에 B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렸왔어.

그리고 B가 말했어.

"그게 네가 믿지 않을까봐 미리 이야기를 안한 게 아니야."

"그럼..?"

"그런 일이 사실 그 지하철 사고가 처음은 아니었어."

"처음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야?"

"그때 총 맞고 필름이 돌아갈 때 본 사고가 그 지하철역 사고가 전부는 아니야. 다른 사고들도 꽤 많았어. 그래서... 처음에는 사고를 막으려고 노력도 하고 그랬어. 그러면 무언가 조금 바뀌긴 해.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하고 노력을 해도 사고 자체를 막을 수는 없더라고... 그리고......"

B는 잠시 말을 멈췄고, 나는 말없이 기다렸어.

"그리고... 그게 만약... 사람이 죽는 사고라면...... 누군가는 죽어야 해."

어두운 호텔 방에 침묵이 흘렀어.

한참이 지나 B가 침묵을 깨고 말했어.

"죄책감 갖지말고 그냥 살아. 너는 주어진 상황에서 너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나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고. 만약 내가 죽는 상황이 온다면 다른 누군가가 자기 목숨을 바쳐 나를 구하지는 않을테니까."





다음날 아침.

우리는 함께 해장을 했어.

다음 행선지는 어디냐는 나의 물음에 B는 자신이 군생활을 했던 화천에 가고 싶다며 말했어.

"그쪽 보고는 오줌도 누기 싫었는데.. 하하. 그래도 한번은 가보고 싶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함께 사우나를 하며 땀을 쭈욱 빼고 B는 떠나갔지.




==
그렇게 서울에서 B를 만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나는 B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들어야 했어.

장례식장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에도 나는 B의 죽음이 믿기지가 않았어.

그것도 교통사고로 B가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심지어는 사고가 아니라 범죄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어.

만약 정말 사고였다면.. B는 분명 알고 피할 수 있었을테니까.





늦은 밤.

장례식장에 도착해 B의 이름이 적힌 빈소를 확인하고,

그의 영정사진을 보고 나서야 친구가 죽은 것이 실감이 나더라.

상주는 B의 음식점에서 일하는 장 매니저였어.

B는 가족이 없었거든.

빈소의 한쪽 구석에는 내가 모르는 남성이 B의 영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그 남성 옆에는 5살 정도의 아이가 빈소 바닥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어.





빈소에서 나와서 객실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

흰 상복을 입은 여성이 나에게 식사를 가져다주었는데....

그 여성.. 낯이 익었는데.. 누군인지 기억나지는 않았어.





문상객의 방문이 뜸해졌을 무렵.

장 매니저가 내가 있는 테이블로 와 자리에 앉았어.

나는 빈소에 있는 남성을 가리키며 장 매니저에게 말했어.

"B에게 친척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장 매니저는 고개를 저으며 B의 친척이 아니라 말했어.

그리고 B가 당한 교통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지.





시내의 어린이집 앞에서 발생한 승용차의 급발진 사고였대.

급발진 차량의 운전자는 많은 아이들이 서서 기다리는 통학차량을 비켜 어린이집 입구 쪽으로 핸들을 꺾었는데..

건물 입구 방향에도 아이가 하나 있었고,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B가 그 아이를 밀쳐내고 사고를 당한 거래.

빈소에 잠든 아이가 그때 B가 구한 아이이고,

그 옆의 남성이 아이의 아빠라고.





장 매니저는 B를 형님이라고 불렀어.

"혹시 최근에 형님을 만난 적이 있으세요?"

"한 달 전에 만났어요. B가 그때 휴가라며 서울에 올라왔거든요."

"그때 혹시 형님에게서 무슨 이상한 느낌 받지 않으셨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그건 왜요?"

장 매니저는 입을 열었어.

"그냥...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형님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장 매니저는 빨개진 두 눈을 훔치며 말했어.

일주일 전 B는 서류 한뭉치 들고와 장 매니저에게 사인을 하라고 강요했는데,

그 서류들은 B가 운영하는 모든 매장들의 소유권을 장 매니저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서류였대.

장 매니저는 극구 사양했지만,

B는 닷새동안 장 매니저를 설득해서 결국 서류에 사인을 받아냈다고.





그리고 사고가 있던 날..

점심 시간에 B가 이제 손님으로 왔다며 매장에 들렀대.

B는 자신이 좋아하던 황태낙지볶음을 맛있게 먹고는..

매장의 직원들을 하나하나 붙들고 그동안 잔소리 많이 해서 미안하다며 잘 지내라고 따뜻한 말한마디씩 남겼대.

장 매니저에게는 사장이 바뀌니까 음식이 이제서야 제대로 맛이 난다고 말했다 하더라고.

장 매니저는 그때 형님을 못가게 붙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연신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쳤어.





동이 틀 무렵 나는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장 매니저에게 인사를 하려고 빈소로 갔지.

빈소에는 그 여성이 있었어.

흰 상복을 입고 나에게 음식을 준비해주던 그 여성.

그녀는 잠든 아이 옆에 앉아서 아이 아빠의 손을 잡고 있었어.

그녀와 잠깐 눈이 마주쳤고,

내가 새로 온 문상객이 아님을 확인한 그녀는 다시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어.





나는 장 매니저와 인사를 나누고 장례식장을 나섰어.

차가운 새벽 공기에 밤새 멍해진 머릿속이 맑아진 느낌이었지.

그리고 조금전 빈소에 앉아있던 여성이 누구인지 기억이 났어.

그녀는 J였어.. 고등학교 때 우리 학년 선도부원 J.


- 끝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