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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우파 영웅의 현실
게시물ID : history_101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분과적분
추천 : 13
조회수 : 97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15 12:30:26

오늘 소개할 인물은 우리나라의 금속과 공물을 수탈해 빈곤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일본 국민들에게도 찰진 핵폭탄을 2발이나 선사한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입니다.

전범국 일본의 지도자로서 그의 삶을 한번 리뷰해 보겠습니다.


사진 1.JPG

도조 히데키. 그는 1884년 동경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도조 히데노리라는 육군 중장입니다. 군인집안 출신이었죠.

그는 1905년 일본 육사를 17기에 졸업하고, 보병 소위,중위를 역임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일본 육군 대학교를 졸업하여 대위의 계급장을 달게 됩니다. 또한 중대장의 직책또한 맡게 되었죠.

 

그는 1920년대 열도의 종특, 파벌 짓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이른바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된 것이죠. 그는 또다른 파벌 황도파와 대립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파벌은 군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으며, 통제파의 지도자인 '나가타 데쓰잔'이란 인물이 죽자, 통제파의 지도자에 오릅니다.

그는 그때부터 군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사진 2.JPG

그는 군사 지휘관으로써 탁월한 실력을 보입니다. 특히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탁월해 고속 승진 테크를 탑니다.

1935년에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을 역임합니다. 도조의 탁월한 직역 수행은 그의 별명, '면도날'을 만듭니다.

빠르게 처리한다는 뜻이죠 뭐..

그런데 1937년, 당시는 중일전쟁이 터질 당시입니다.

중일전쟁을 유발한 공로자중 한명이 바로 이 도조 히데키였죠. 그는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중일전쟁의 확전을 유도합니다.

그의 파벌인 통제파의 영향력 행사를 통해 결국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아시아를 혼돈에 빠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1938년에는 육군 차관, 1940년 고노에 내각에서는 육군 대신에 임명되었습니다.

정계에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 한 것이죠.


사진%2~3.JPG

난징에 입성하는 열도군.jpg

 

그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의 3국동맹을 체결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군측은 히데키의 3국 동맹을 반대합니다.

게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일본군을 본격적으로 동남아에 주둔시킵니다.

 

미국측은 이러한 일본의 행위에 분노하며 석유 수출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닥치고 중일전쟁을 빨리 평화롭게 끝내라고 일본측을 압박합니다.

 

미국횽들의 행동이 앞서는 위협에 심장이 오그라든 고노에는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철수와 중일전쟁을 매듭지을려고 했는데,

히데키가 반대하고 그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켜 버립니다.

그리고는 1941년 10월 18일, 일본 총리에 취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력 지향적이었던 그는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 총장 등을 겸임합니다. 군계 권력을 완전히 독점한 것이죠.

그렇게 그는 군사독재를 시작합니다.


사진 4.JPG

이제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해군 뿐이었죠. 야마모토 제독은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고, 

또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면 그럴 심산이었죠.

 

하지만, 전운은 빠르게 드리워 졌습니다.

야마모토는 이왕 미국과 싸운다면 태평양 함대의 핵심 전력인 항공모함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야마모토는 일본의 항공모함 6척을 진주만 근해로 출격시킵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이 벌어집니다.

이 진주만 공습은 선전포고도 없이 벌어집니다.


사진%2~1.JPG

침몰하는 미국 전함.

 

사실 일본은 이 공습을 통해 미국인들의 공포심을 극대화해 평화협정을 맺어 미국으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은...전 미국이 분노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을 강하게 찬성하고 수백만의 남자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하고 

공장들이 전시체제로 풀가동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전략적 목표인 항모는 코빼기도 안보였고 때려잡은건 낡아 빠진 구식전함들 뿐이었죠.

 

겁없는 민머리 한놈이 사자 수십마리가 자고있는 사자굴에 들어가 분탕질을 한 거죠.

물론 초반에는 꽤 흥했습니다. 동남아에 진출해 완전히 집어삼켰으며, 또한 네덜란드령 동인도도 삼키고 호주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분노한 사자들은 민머리의 살점을 조금씩 맛보기 시작합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의 양상을 뒤바꾼 미국은 열도의 건방지고 약아빠진 육군을 섬에서 차츰 쓸어내기 시작하고,

일본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합니다.

도조는 날이 갈수록 미국이 조여오자, '대동아 공영권!!!!! 우리 니뽄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통합하여 미국과 싸우므니다!!'라고 하며

아시아의 일본 점령지들을 단합시킵니다. 그런데 Fail.


사진 1 (1).JPG

1944년 그는 육해군의 참모들을 다 까고  본인이 참모총장에 올라 군사 전권을 지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같은 해 터진 마리아나 제도 전투에서 패배하여 마리아나 제도가 미국측에 넘어가자 책임을 지고 사임합니다.

 

그 뒤 일본 내각은 '고이소 구니아키'라는 자가 맡게 됩니다. 조선 총독이었습니다만, 고노에와 쇼와 천황이 싫어한 인물입니다.

그도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미국이 상륙해서 본인이 군사권에 개입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히데키처럼요.

하지만 거절당하고 스스로 사임합니다.

 

또 그 뒤에 총리가된 사람은 '스즈키 간타로'라는 인물입니다만, 원폭맞고 항복한 위인입니다. 재임기간은 딱 4달.


사진 212.JPG

일본 국왕 히로히토 : .....

 

도조는 총리에서 사퇴하고 나서, 1945년 8월 권총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실패하죠.(자살도 제대로 못하는 ㅂㅅ)

그는 A급 전범으로 동경 극동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수감되는 내내 반성의 기미따윈 보이지 않으며 불교을 믿으며 뻔뻔하게도 자신의 극락 왕생을 비는 유언시를 짓습니다.

부처님이 그를 극락 왕생시켜 주셨을까요?


사DD40~1.JPG

동경 재판에서의 히데키.

 

그는 14명의 A급 전범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고. 그 시체는 화장되어 항공기에 의해 쓰레기 투하하듯 태평양 한가운데에 버려집니다.

그런데 한 주지가 화장터에서 그의 작은 유골조각을 몰래 들고 갑니다. 1958년 그와 A급 전범들의 무덤을 만들자 하여

1960년 아이치 현의 '산가네 산'꼭대기에 순국 칠사묘에 안치됩니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그의 행위를 일본 극우파가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죽어서도 우리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도조 히데키!

아직도 일본 극우파들은 A급 전범들을 영원한 화신으로 보며 추종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합니다.

그는 그 어떤 행위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악질 전범이며, 극락이 아닌 아귀지옥이나 칼지옥이나 불지옥에나 환생하여

죽음의 고통을 느끼며 참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머릿속에 영원한 '전범'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기억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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