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실록 12년(1430년) 8월 10일에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호조에서 중외(中外)의 공법(貢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논을 갖추어 아뢰기를, 서울의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안수산(安壽山)·총제 이천(李蕆)·동지총제(同知摠制) 박규(朴葵)·전 총제 이순몽(李順蒙)·전 동지총제 이희귀(李希貴)·전 도관찰사 이정간(李貞幹)·전 판목사(判牧事) 김사청(金士淸)·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남실(南實)·전 동지총제 최견(崔蠲)과, 3품 이하 현재 재직 중에 있는 2백 59명과, 전함(前銜) 4백 43명 등은 가하다고 하고, (중략) 경기(京畿)의 수령(守令) 29명과 품관(品官)·촌민(村民) 등 1만 7천 76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5명과 품관·촌민 합계 2백 36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고, (중략) 평안도의 수령 6명과 품관·촌민 등 1천 3백 26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관찰사 조종생(趙終生)과 수령 35명, 그리고 품관·촌민 등 2만 8천 4백 74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황해도의 수령 17명과 품관·촌민 등 4천 4백 54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17명과 품관·촌민 합계 1만 5천 6백 1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충청도의 수령 35명과 품관·촌민 6천 9백 82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관찰사 송인산(宋仁山)과 도사(都事) 이의흡(李宜洽)과 수령 26명과 그밖에 품관·촌민 등 1만 4천 13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강원도는 수령 5명과 품관·촌민 등 9백 39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10명과 품관·촌민 등 6천 8백 88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고,(중략) 함길도에서는 수령 3명과 품관·촌민 등 75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관찰사 민심언(閔審言)과 수령 14명, 그리고 품관·촌민 등 7천 3백 87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경상도에서는 수령 55명과 품관·촌민 등 3만 6천 2백 62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16명과 품관·촌민 3백 77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중략) 전라도에서는 수령 42명과 품관·촌민 등 2만 9천 5백 5명은 모두 가하다고 말하고, (중략) 관찰사 신개(申槪)·도사(都事) 김치명(金致明), 그리고 수령 12명과 품관·촌민 등 2백 57명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옵는데,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백 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백 49명입니다.” 하니, 황희(黃喜)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권49, 세종 12년 8월 10일 -
이게 뭔 내용인가 하니 새로운 공법(貢法)의 가부를 놓고 전국적인 규모의 투표를 실시한 호조의 보고입니다. 기록으로 보면 전국적으로 양인 17만 2천 8백 6명이 참가한 투표에 참가하여 9만 8천 6백 57명이 공법에 찬성을 하고, 7만 4천 백 49명이 반대를 한 결과로 새로운 공법에 대한 찬반투표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과 노비를 제외하고 글을 아는 양인은 대부분 참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공법(貢法)은 조선의 세법인 공법수세제(貢法收稅制)에 의한 그 유명한 연분 9등법(年分 9等法)과 전분 6등법(田分 6等法)에 대한 새로운 세법이었습니다. 기록상 세종 26년에 들어서 최종적으로 공법이 완성되고 시행되었지만, 이 공법을 시행하기 위해 장장 17년에 걸쳐 대대적인 조사와 투표와 시범시행을 하고, 이를 위해서 국민투표까지 하게 됩니다. 가히 치밀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종이 처음 새로운 조세법을 시행할 것을 물었던 것은 세종 9년(1427년) 3월 16일 인정전에서 과거 책문(策問)의 제(題)를 공법(貢法)으로 내리면서 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권47, 세종 12년 3월 5일 (을사) 4번째기사 / 호조에서 공법에 의거하여 전답 1결마다 조 10두를 거둘 것을 건의하니 모든 이에게 그 가부를 물어 아뢰게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49, 세종 12년 7월 5일 (계묘) 1번째기사 / 공법의 편의 여부 등의 일들을 백관으로 하여금 숙의케 하라고 말하다
조선왕조실록 권49, 세종 12년 8월 10일 (무인) 5번째기사 / 호조에서 공법에 대한 여러 의논을 갖추어 아뢰다
조선왕조실록 권71, 세종 18년 2월 23일 (기미) 2번째기사 / 공법 시행에 대한 의논
조선왕조실록 권72, 세종 18년 5월 21일 (병술) 3번째기사 / 황희·안순·신개·하연·심도원 등과 공법을 의논하다
조선왕조실록 권73, 세종 18년 윤6월 19일 (갑신) 4번째기사 / 하연이 전토의 차이에 따라 조세를 거둘 것을 건의하다
조선왕조실록 권75, 세종 18년 10월 5일 (정묘) 4번째기사 / 토지의 등급을 나누어 수세할 것을 의정부에서 건의하다
조선왕조실록 권76, 세종 19년 2월 9일 (기사) 6번째기사 / 수세 삭감 여부를 호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77, 세종 19년 4월 14일 (계유) 3번째기사 / 호조로 하여금 공사가 편리하게 수세하도록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78, 세종 19년 7월 9일 (정유) 1번째기사 / 공법의 시행 방안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78, 세종 19년 8월 28일 (을유) 2번째기사 / 공법을 버리고 예전대로 손실법을 행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78, 세종 19년 9월 4일 (신묘) 3번째기사 / 양계에 이주한 백성들에게 3분의 1의 조세를 감해 주다
조선왕조실록 권82, 세종 20년 7월 10일 (임진) 1번째기사 / 의정부와 육조에서 답험손실법과 공법에 대하여 의논하다
조선왕조실록 권82, 세종 20년 7월 11일 (계사) 1번째기사 / 경상·전라 양도에 공법을 시험 실시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83, 세종 20년 10월 12일 (계해) 3번째기사 / 공법의 시행 여부에 대해 논의하다
조선왕조실록 권83, 세종 20년 10월 15일 (병인) 3번째기사 / 공법의 시행에 있어 조관을 파견하여 심사하도록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89, 세종 22년 5월 8일 (기유) 4번째기사 / 우선 경상·전라 양도에 공법을 시행하다
조선왕조실록 권89, 세종 22년 6월 13일 (계미) 1번째기사 / 의정부에서 각조의 공법을 정하여 상정하다
조선왕조실록 권90, 세종 22년 7월 5일 (을사) 1번째기사 / 임금이 공법 시행의 폐단에 대해 전지하다
조선왕조실록 권90, 세종 22년 7월 13일 (계축) 5번째기사 / 의정부가 공법의 편의성에 대해 아뢰다
조선왕조실록 권90, 세종 22년 8월 16일 (을유) 2번째기사 / 호조에서 명주 징수와 공법에 대해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 권90, 세종 22년 8월 30일 (기해) 3번째기사 / 의정부가 미진한 공법의 보완책을 건의하다
조선왕조실록 권93, 세종 23년 7월 5일 (기해) 2번째기사 / 공법에 관해 묻고 의정부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93, 세종 23년 7월 7일 (신축) 6번째기사 / 충청도에 공법을 시행하다
조선왕조실록 권101, 세종 25년 7월 11일 (갑자) 5번째기사 / 하삼도에 우선 공법을 실시하다
조선왕조실록 권101, 세종 25년 7월 15일 (무진) 5번째기사 / 승정원에 공법의 실행 여부를 묻다
조선왕조실록 권101, 세종 25년 7월 19일 (임신) 5번째기사 / 하삼도 관찰사에게 공법의 실행에 대해 자신과 고을 수령·백성들의 의견 등을 수렴해 밀봉해서 알리게 하다
조선왕조실록 권105, 세종 26년 8월 12일 (무오) 1번째기사 / 김종서·이숙치·정인지 등과 제언을 축조하는 일을 의논하다
조선왕조실록 권105, 세종 26년 8월 24일 (경오) 6번째기사 / 도순찰사 정인지에게 세법에 대한 유서를 내리다
국민투표에서 찬성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많은 논의와 시범실시, 상황에 따른 정지를 거치면서 수차례 수정과 보완을 반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인 규모의 국민투표의 실시와 그 후 치밀한 수정, 보완 작업등의 과정을 보면서 세종이란 인물에 대해 다시금 대단함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일 새로운 법이 발의되고 제안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종만큼 치밀하게 수정, 보완과 가부를 묻는 투표까지 거치면서 시행을 한 예가 있을까 생각하면 특히 민생과 국가 재정과 관련된 법을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한 예가 얼마나 될까 생각합니다. 훗날의 대동법도 백년 동안의 논의를거친 예가 있지만, 민생에 관련된 세법의 제정에 최대한 신중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투표냐 아니냐에 대한 짧막한 이야기 주고 받은 작성자)
가 : 국민투표라기 보다는 의견수렴이 정확하겠죠. 사람쪽수로 결정하자는 거는 아니였으니까요.
B : 저는 동원인원의 방대함과 당시의 인구와 신분 제도를 볼때, 투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참가할 사람은 참가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투표란 것이 꼭 결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A : 투표는 표를 가진 개개인이 1/n의 결정권을 가지고 표를 던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정은 결국 세종대왕께서 하므로 투표라기 보다는 정책 시행을 위한 여론조사에 가깝네요. 저 시대에 법 제정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다양한 샘플 집단으로부터 왜곡되지 않은 의견을 최대한 정밀하게 수렴한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정책 시행 가부를 결정하는 찬반투표를 실시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B : 관점의 차이일수도 있겠지요. 저는 넓은 범위에서 투표의 범주에 넣어도 된다 판단해서 적었습니다. 투표로 볼 수 있는 이유중 하나는 12년의 호조의 보고 이후에 상당한 공백기간이 있었는데, 그 공백기간에는 투표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점(제가 기록이 길어서 생략해 버렸지만)에 대한 치밀한 검토과정이 있었고, 본격적으로 시행한 것은 18년 이후였습니다. 만약 부결이 되었다면 공법 시행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애초에 시행되기로 한 공법을 수정 보완하는 것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아 저 투표에 세종이 자신감을 얻고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생각해서 투표라고 본 것입니다. 또한 투표란 것이 원래 찬반을 논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가부를 묻는 형식에서도 투표라고 본 것입니다.
C : 일단 수령 품관과 촌민의 의견이 지역별로 모두 일치하는걸 보면 민주정의 근간으로서의 투표의 정의와 일치하겠느냐는 문제제기가 제기됐을때 반박이 어려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민군주의 전근대적 기준에서는 호평할 일인것은 분명하겠고요.
+(그리고 한 익명의 지나가는 행인)
D : 의견수렴이든 투표든 그 시기의 세계의 어떤 왕이 세금 거두는 방식을 백성들에게 물어보고 하겠습니까? 거의 10여년이 넘게 묻고 또 묻고 조사하고 또 조사하고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세금을 거두는 왕은 전 세계를 뒤져도 세종대왕님 밖에 없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