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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국군 위안부
게시물ID : history_100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날치
추천 : 13
조회수 : 81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14 19:07:13
오늘자 오마이뉴스 이슈털어주는 남자를 들어보니....참 가슴 아픈 진실을 이야기 하더군요.

6.25 전쟁에서 국군에도 위안부대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승만의 직접적인 지시로 위안부대를 창설하여서 대략 600여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구성원들의 많은 사람들이 좌익인사들의 가족들을 붙잡아서 강제로 시켰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더 자세한 내용이 있나 찾아봤더니 블로그나 카페에도 이미 많이 퍼져 있는 내용이여서 올려봅니다.

부끄럽고도 충격적인 기록이 발견됐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이 일본군의 종군위안부를 흉내낸 특수위안대를 운용했다는 것. 이러한 사실은 김귀옥(경남대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박사가 1956년 육군본부가 작성한 공식문건을 찾아내면서 밝혀졌다. 과거 6·25 전쟁당시 국군이 위안소를 운용했다는 주장은 몇몇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을 통해서 언급된 바 있지만 군 당국이 편찬한 공식기록을 근거로 국군이 위안대를 운용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박사는 더구나 문현순(가명·71)씨 등 위안부 생활을 했던 여성과 북파공작원, 군관계자들의 증언을 확보하고 납치·강간에 의해 위안부가 됐던 사례까지 언급해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전 당시 국군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위안부로 삼았다는 기록은 1956년 육군본부가 발간한 ‘후방전사 (인사편)’의 ‘제3장 1절3항 특수위안활동 사항’기록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국군은 위안부들을 ‘특수위안대’라는 부대의 형태로 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표면화한 사리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斷案)하면 별문제 없겠지만 실질적으로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래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고 군 위안대 설치목적도 자세히 기술돼 있다.  

그 규모와 설치장소도 일부 언급돼 있다.  
후방전사(인사편)에 의하면 “일부 부대의 요청으로 출동위안을 행하며, 소재지 내에서도 출입하는 장병에 한하여 위안행위를 당하였다. 한편 위안부는 1주에 2회 군무관의 협조로 군의관의 엄격한 검진을 받고 성병에 대하여는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라며 서울에 3개 소대, 강릉에 1개 소대, 기타 춘천과 원주, 속초 등지에 각각 1개 소대씩 총 7곳에 위안대가 설치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위안부 수에 대해서도 ▲서울 제1소대에 19명 ▲서울 제2소대 30명 ▲서울 제3소대에 13명 ▲강릉 제1소대에 30명 등 89명의 여성이 위안대에 있었다고 언급됐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1952년 1년의 자료인데다 춘천과 원주, 속초 등 기타지역의 위안부 수를 더하지 않은 수치여서 언급된 지역 외에 상부의 묵인하에 비공식적으로 위안부를 두었던 여성들까지 합하면 실제로 한국군 위안부로 생활했던 여성의 수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후방전사에 기록된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에서는 1952년도에 4개 소대에만 89명의 위안부가 있었는데 이들이 연간 20만 4,560명의 병력을 ‘위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6∼7명의 군인을 상대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김 박사는 “당시 상황이 전시상황이라 매일매일 위안대를 사용할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위안활동이 특정일에 몰려 1명의 여성이 하루 20∼30명 안팎을 상대했을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위안부대의 운영방식은 부대마다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넘어(1994)’에서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채 장군의 말에 따르면 60여명을 1개 중대로 서너 개를 운용했다면 공식적으로 운용했던 위안부는 180∼240여명.  
또한 김희오 장군은 회고록 ‘인간의 향기(2000)’를 통해 “연대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군 보급품은 1∼4종밖에 없었음)수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되어 왔다”며 “이는 과거 일본군대 종군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으로 일부러 거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여 온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 박사는 “1952년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연대장의 명령으로 정체가 불분명한 여성 30명 정도가 군용트럭을 타고 연대에 들어왔고, 1개 중대에 5∼6명 정도가 배정되어 주어진 시간은 약 8시간 동안 중대원들은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증언한 한 예비역 장군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여성들은 대개 서울의 사창가에서 사들여 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분명한 것은 전시하에 특별위안대를 이용하는 것 외에도 전방의 부대들은 필요시 군위안부를 채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또한 채명신 장군은 이러한 위안부 이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라고 밝혔다. 채 장군은 회고록에서 “우리 5연대에서는 위안부대를 이용하는 데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위안부대 출입은 티켓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켓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준다. 물론 훈장을 받았다면 당연히 우선권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예비역 장군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당시 군 부대에서는 소위 ‘제5종보급품’이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들이 배정되어 왔고 이동식 천막이나 분대 막사가 위안소로 꾸며졌으며 이용시간은 최전선에서 교전 혹은 대치 후, 후방으로 이동했을 때 위안대를 배정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부대마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운용된 것으로 보인다. 운영방식은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티켓을 나눠줘 티켓제로 운용되거나 희망하는 군인들이 무료로 이용하도록 했다는 것이 이들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찾아온 특수위안대의 위안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직 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국군의 위안부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군 당국은 ‘일부 사창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위안대로 활동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채 장군도 회고록에서 당시의 여성들을 대개 윤락여성들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많은 젊은 여자들이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몸을 팔고 전선 근처에까지 밀려드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사창에는 성병이 만연했고, 사창을 방치할 경우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도 우려되었다. 따라서 군에서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전투력 손실 예방을 위해서 위안대를 편성해 군의관의 성병검진을 거쳐 장병들이 이용케 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윤락여성들을 위안대로 활용한 것은)당시 사회의 필요악으로서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 많은 사창가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 채 장군의 이야기다.  
그러나 김 박사의 이야기는 다르다. 생계가 어려워져 먹고사는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사창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런 점에 비춰볼 때 누가 전쟁 때 어렵고 힘들다하더라도 빚을 갚거나 자의적으로 그만둘 수 있는 사창을 두고 자발적으로 공창의 개념인 위안대에 들어가겠느냐는 것. 이는 당시 위안 여성들의 참여가 강제성을 띠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실은 북파공작원이나 군 내부의 지도계급으로 인해 임의대로 납치·강간을 통해 위안부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한국전에 참전하여 속초에서 위관급으로 군생활을 했던 미국인 폴 팬처씨로 하여금 “자신은 위안소를 이용하지 않았으나 위안소 앞에는 대개 군인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서술하고, 속초에서 수십년간 살아온 박씨로부터 “속초시 중앙동 시청 부근에 1군단 휼병부에서 운영했다고 알려진 ‘호라스’라는 군위안소가 있었다”며 “위안소에는 대략 15명 정도의 여성들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반 사창과는 달리 민간인의 출입은 금지되었다”는 증언을 기술했다.  
또 북한 여성을 납치해왔다는 ‘북파공작원2’라는 사람이 “대장의 지휘에 따라 옆 동네에서 동네처녀들이 있다는 방에 들이닥쳐 여성들 4명을 끌고 섬으로 돌아왔다. 그 중 북파공작원2의 소학교 동창이었던 문모(71)씨는 이모 하사관에게 겁탈을 당해 결국 이 하사관과 정전이 될 때까지 여기에서 아이를 낳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 다른 여성들은 낮에는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해주었고 밤에는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는 증언을 자신의 논문을 통해 소개했다.  
이처럼 납치·강간에 의한 위안부도 당시 상당수 발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파공작원이 당시 북한 여성들을 이처럼 마음껏 농락했다면 이는 남한내에서 공식적인 위안대가 이미 운용이 되고 있었고, 이러한 정황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북한과 남한내 일부 군인들이 북한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일반 여성들을 식모와 위안부로 전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군내 위안대 운용은 누구의 지시로 이뤄졌던 것일까.  
김 박사는 “군 위안소는 육군에 의해 설치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한국군의 작전체계상 군 위안대의 설치 및 관리문제에 대해 위로는 육군본부의 최종 승인 하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래로는 특수위안대 부대장의 책임 하에 총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건 김 박사가 자신이 직접 들은 증언내용에서도 밝힌 것처럼 일개 북파공작원 몇 명이 여성들을 납치해 위안부로 삼거나 북한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던 민간인들을 서울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돌아오는 부대 장교에게 배정하는 등의 행위가 허다하게 벌어졌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현재까지 밝혀진 군 위안부 문제는 퍼즐의 몇 조각에 불과하다”며 “군 관계자료와 피해여성·군인의 증언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미국 내에 보관되어 있을 지도 모를 관계 자료들을 발굴하여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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