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전투, 탄금대전투, 임진강 방어전투..
왜적들은 조총이란 듣도보도 못한 신묘한 무기로 우리 아군을 공격하였다.
수 많은 전우들이 내 옆에서 죽어갔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전우들을 보며... '이일을 어쩐단 말인가'라는 탄식을 내뱉으며 나는 필사적인 도망을 가야 했다.
임금도 후일을 도모키 위해 파천을 감주마시듯 하시는데 전투 지휘관인 나 역시 어찌 도망을 마다하겠는가.
조령, 탄금대, 임진강에서 희생당한 내 부하들...그 수많은 전우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을만큼 힘이 들어도 겨우겨우 참아가며 도망을 했던 것이다.
내 한 목숨 아까워서 도망 간 것은 아니다.
필사적으로 살아남아야 복수를 할 것이 아닌가!
조령에서 왜군이 들이닥쳐 각개전투를 해가며 겨우 빠져나와 알몸으로 탄금대에 갔더니
도순변사 신립이 추상과 같은 호령으로 나를 죽이려 했던 순간도 있었다.
탄금대에서 우리 조선군이 패몰당하고 나는 또 몇몇 패잔병놈들과 충주 일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던 도중 빨간색 갑주를 찬 왜적놈 장수와 갑자기 마주쳐 그 놈의 "다떼! 다떼!" 소리를 들으며 달리고 또 달린 순간도
있었다.
죽자살자 도망쳐 임진강 방어전에도 참전하였다.
도원수 김명원과 도순찰사 한응인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지휘체계도 엉망이었다.
도원수는 화살과 포를 이용해 철저한 방어전을 펼칠 것을 주장했고
도순찰사 한응인은 성급하게도 선제공격을 하고자 하였다.
도순찰사는 집안도 좋고 기축옥사 이래 임금님의 총애를 받던 자이니 모든 것이 도순찰사 한응인의 뜻대로 움직였다.
진중에 있던 차에 왜적은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길을 비켜달라는 글을 보내왔고 도순찰사는 그글을 본뒤 격분하여
일전을 겨루자는 답서를 보냈다.
나는 전우들의 복수를 이루기 위한 기회가 이때다 싶어 비장한 목소리로
"일전을 겨뤄도 승산이 충분합니다"라며 도순찰사의 결심을 복돋워 주었다.
그러나 간악한 왜놈들은 사패유적의 계략으로 절도사 신할, 조방장 유극량은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고 우리 군대는 무너졌다.
이일을 어쩐단 말인가..
나는 간신히 몸을 빠져나와 패잔병들을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도원수는 조급해하며 전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싶었다.
도원수를 보자마자 나는 침을 삼키며 반갑게 그를 불렀다.
"도.원.수.!!!"
"어? 장군? 어찌 된 일이오?
"함.정.이.었.습.니.다. 적.의. 유.인.책.이.었.습.니.다."
"군사들은! 군사들은요?"
"천.여.명.이. 도.망.쳤.을. 뿐.입.니.다. 적.을. 쫓.다.가. 느.낌.이. 이.상.해. 제.가. 분.명. 퇴.각.하.라.! 했.는.데. 이. 일.을.
어.쩝.니.까.도.원.수.?"
나는 군인답게 문관출신인 도원수 앞에서 절도있고 분명한 대답을 하며 도원수와 함께 울먹였다.
도원수는 참 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임금을 호종하기 위해 평양으로 올라갔으나 임금은 평양마저 버리고 의주로 파천을 가셨으며
세자저하는 분조를 열어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다.
그러던 어느날, 의주에서 세자를 뵙기 위해 잠시 들른 풍원부원군 서애 류성룡 대감이 나를 급히 찾는 것이 아닌가.
내가 평양에 당도하자마자 풍원부원군은 내게 의관을 아낌없이 주었던 정승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나를 슬슬 업신여기는 것 같아
내 심사는 하루하루 달라져갔다.
또한 내가 풍원부원군보다 4살이 많은 무술생인데도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반말을 걸어온다..
붓만 잡던 사람이 어찌 칼 잡는 일을 알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이 풍원부원군 류대감은 진관론의 대표인물이고 나는 제승방략론의 대표인물이 아닌가..
풍원부원군의 부름으로 나는 부원군을 찾았다.
부원군은 내 얼굴을 마주대하지도 않고 등을 돌린채...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몸을 엉거주춤 놀리며 낌새를 눈치채고는 일단 사과부터 하였다.
"대.감.송.구.합.니.다"
대감은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등을 돌려 드디어 나와 마주하였다..
대감의 안광은 매우 번쩍이고 있었다...
대감은 차갑게 한마디 한마디 말을 뱉었다.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 기회를 준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 어쩔수 없이 그리 함을 알아야 할 것이야.
만일 또다시 도망을 치고서 훗날을 도모한다는 엉뚱한 핑계를 댔다가는 그때는 왜적이 아니라 내가 이땅 끝까지 쫓아가서 참할 것이야!
알겠는가?"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나보다 4살 어린 사람이 나더러 자네라니..
우리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머뭇거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네.대.감. 믿.어.주.십.시.요. 이.번.만.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서애대감은 나에게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크게 혼이 나도록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
"그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진실되게 몸을 움직이란 말일세!!!!"
그러고는 횅하니....내 옆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황당하여 말문이 막힌 채로 하늘을 살짝 올려다 보았다.
서러운 심정...이일을 어쩐단 말인가..
나는 그저 진실되게 몸을 움직여 진실되게 살아남아 진실되게 전장터에서 죽어간 내 동료들을 위해 복수하려 했던 것인데..
진실되게 도망하고 진실되게 살아남아 진실되게 훗날을 도모코자 한 내 심경을 이렇게 몰라주어서야 되겠는가.
당장 풍원부원군 대감의 면전에 대놓고 "대.감.나. 맘.에.안.들.죠.?"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나는 천하의 맹장, 조선에서 제일가는 사내가 아니던가..
차마 그러지 못하였다...
이일을 어쩐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