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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은 허보가 천적을 만났기 때문에 주인으로 살게 될 팔자가 사라졌다고 했다. 본래 사람을 부리는 팔자였으나, 지금은 기(氣)도 제대로 못 펴는 팔자가 된 것이다. 집에 돈이 많아도 허보의 삶은 한계가 있다고 했다. 자신과 천적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자는 누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태유새끼...’
중학생 시절, 태유가 전학을 오기 전에는 ‘동물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처럼 모든 녀석들 앞에 군림했다. 그러나 녀석을 만나고 나서 ‘동네바보 형’으로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무엇보다 녀석에게 기(氣) 한번 못 펴고 살았다. 또한 녀석과 내기를 하거나, 게임을 해도 매일 지는 것이 이상했다. 자신이 제일 잘하는 종목으로 내기를 걸어도 태유한테 번번이 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적도 그랬다. 아무리 좋고 비싼 학원을 다녀도 매일 수업시간에 조는 태유보다 성적이 좋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놈은 공부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학원가는 것을 돈과 시간을 버리는 짓이라며 비아냥댔다. 늘 녀석에게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니, 언젠가 한번 태유를 이겨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단 한 번도 녀석을 이겨 본 적이 없다. 녀석과 18년을 친구로 지내면서 이상하게 주눅이 들고, 아직도 눈치를 보면서 말을 하게 된다. 특히 정치 이야기 같은 걸 할 때, 이읍읍 대통령이나, 박읍읍 대통령을 옹호라도 하면, 섬뜩한 눈빛으로 돌변한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덜컥’하는 것이, 중학생 때 맞았던 부위가 욱신거리는 것 같다. 녀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색도 바꿔야만 했다.
하긴 녀석이랑 떨어져 있으면 좀 인생이 순탄한 것 같다. 대장 기질을 발휘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대학생 시절에도 자신이 주도해서 늘 이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태유 녀석만 나타나면 놀림을 받고 우스꽝스러운 예전의 ‘허대두’로 돌아가는 것 같다. 녀석과 함께 있는 동안, 무려 18년을 ‘머리만 큰 동네 바보 형’으로 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허보는 보살에게 이 모든 걸 털어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허보의 엄마는 아들의 말에 내내 씩씩거렸다.
“이런 태유새끼, 감히 우리 아들에게 어떻게 대한거야? 그러니까 예전부터 태유랑 놀지 말라고 그랬잖아? 어휴 속상해,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네가 평범한 회사에 다닐 놈도 아닌데 말이야.”
허보의 엄마는 가세가 기운 것도 태유 때문이라고 했다. 보살에게 뭉칫돈을 건네어 주며, 제발 어떻게 해달라고 했다. 20년간 전국곳곳을 돌며 도를 닦은 보살치고는 돈 앞에 미소를 숨기지 못 했다. 보살은 충분히 태유가 허보의 천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다만, 괜한 사람 잡을 수가 있으니, 허보에게 태유의 생년월일, 태어난 시를 물어보라고 했다. 허보는 보살의 말에 따라, 태유에게 문자를 보냈다.
태유야, 내 용한 점집에 왔다. 니 토종비결도 봐줄게.
생년월일이랑 몇 시에 태어났는지 가리켜도^^
1분도 안 돼서 태유에게 답장이 왔다.
음력 198X, 02, XX / 오전 12시 42분에 태어남
허보는 보살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그것을 보자, 보살의 손이 빨라졌다. 혼자서 뭔가를 읊조리며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뭔가를 세는 듯 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천적이 틀림없구먼?”
보살은 치를 떨며 태유가 허보의 천적 중 천적이라 했다. 태유의 기운은 불(火)인데, 허보는 나무(木)라고 했다. 태유가 허보의 모든 것을 태우며 기운이 강해지는 유형이라 했다. 허보는 승부사의 사주를 타고났지만, 태유만 만나면 백전백패라고 했다. 무엇보다 태유는 허보보다 사주가 좋지 않았다. 단지 천적이기 때문에 태유가 허보보다 강하다고 했다. 허보는 운명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밀려왔다. 정말 보살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지만, 여지 것 태유의 눈치를 안 보고 살았던 적이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줄 알면서도 녀석과 노는 것이 워낙 재밌었기 때문에 관계를 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밥으로 살기 싫었다. 녀석이 그런 취급을 한 적은 없지만, 가끔 주위에 취업도 못하는 친구들이나, 상황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해주려고 하면 눈치를 주는 태유가 원망스러웠다. 또한 녀석에게 뭐든지 내기를 하면 패배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천적이랑 만나지 않으면 되나요?”
보살은 혀를 차며 못마땅한 눈빛으로 허보를 바라봤다.
“이미 얽혀 있는 실은 풀기가 어려운 법이요. 어차피 세상에 만난 이상 누군가가 운명이 다 할 때까지 이런 관계로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 명줄이 기니, 당하는 건 당신뿐이지요. 쯧쯧쯧...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외다.”
허보는 태유를 이기고 싶은 마음에 뭐든지 하겠다고 했다. 보살은 태유의 사진을 달라고 했다. 허보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재빠르게 꺼내어 태유의 얼굴을 사진첩에서 찾아서 보여줬다. 보살은 한참을 얼굴을 뚫어져라 본 뒤, 누군가가 들을까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허보와 허보의 엄마를 가까이 모은 후, 속삭였다.
“그러니까, 태유라는 청년은 조상신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군요. 특히 외가 쪽 조상들이 과할 절도로 지켜주고 있어요. 아마도 이 양반한테서 조상신들을 몰아내면 자연적으로 기운이 쇠퇴해서 허보씨가 기를 펴고 살 듯 싶군요. 하지만...”
보살은 태유에게 조상신을 몰아내는 순간, 녀석의 모든 운이 끝날 수 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만드는 일이라며,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운명을 바꾼 다는 것은 수많은 가능성에 손을 댄다는 것이다. 특히나 태유처럼 조상신 때문에 덕을 보는 녀석들은 그것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쩌면 잡귀나 불운으로부터 지켜주는 이가 없기 때문에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운명이 될 수도 있었다. 보살은 그렇게 되어도 좋으냐고 물었다.
허보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18년간 죽마고우였지만, 그래도 녀석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녀석의 눈치를 본 지난날과 놀림감으로 살아 온 보상이 그 정도는 된다고 여겼다. 녀석 때문에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 수 없었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녀석과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보살은 조상신을 떨어트리는 부적을 꺼냈다. 보통 조상 신(神)이 아닌, 고약한 조상 귀(鬼)가 후손들에게 붙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들을 떨어트리게 하는 부적이었다. 태유에게 부적을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마시게 하면 조상신이 떨어져 나간다고 했다. 한번 떨어져 나간 조상신은 다시는 붙지 못한다고 한다. 허보와 허보의 엄마는 조심스레 부적을 받았다. 한 녀석의 인생을 이런 방법으로 떨어트릴 수 있다니 왠지 흥분이 되었다.
허보는 태유에게 새해가 되었으니, 술을 사겠다며 연락을 했다. 미끼를 덥석 문 태유는 처음으로 약속 시간에 맞추어 나왔다. 허보는 보살이 시킨 대로 부적을 태운 재를 커피에 타서 보온병에 가져왔다. 그래서 태유를 술에 취하게 한 뒤, 커피를 마시게 할 샘이었다.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갔다. 본래 말이 많은 녀석이, 더욱 말이 많아졌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메이져리거 만큼 말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태유 녀석도 충청남도 출신이지 않은가? 허보는 실컷 떠들게 나뒀다. 그렇게 떠들고, 또 떠들다가 태유는 목이 말랐는지 물을 찾았다. 허보는 조심스레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누가 비싼 커피를 주더만... 함 마셔볼래?”
워낙 공짜를 좋아하는 태유가 마다 할 리가 없었다. 술도 취했겠다, 판단력이 흐려진 녀석이었다. 허보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컵에 얼음을 담아 커피를 따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유에게 건네었다.
“함 마셔봐라.”
태유가 컵을 받아 입에 댔다. 허보는 긴장이 되었다. 저것만 마시면 태유를 지켜주는 조상신이 떠나게 된다. 그리고 태유는 나락의 길로 걸을 것이다. 무엇보다 녀석의 기운이 약해지면 그날부터는 자신의 세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앞으로 태유 녀석에게 당한 것을 어떻게 갚아 줄지, 행복한 고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태유에게 전화가 왔다.
태유는 마시려던 컵을 내려놓고 한 동안 통화를 했다. 허보는 초조해졌다. 빨리 전화를 끊고 고것을 마셔야 하는데, 끊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태유는 전화 속 누군가와 싸우기 시작했다. 언성을 높이면서 흥분했다. 그러면서 탁자 위에 놓아둔 컵을 쏟아버렸다. 태유는 짜증이 났는지, 욕을 하면서 나갔다.
“아이, 십팔...”
조상신이 태유를 지켜주고 있다는 보살의 말이 틀림없었다. 허보는 엎지른 커피를 휴지로 닦아내고 다시 컵에 얼음을 넣고 남은 커피를 따랐다. 그리고 태유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녀석은 들어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누군가와 투덜투덜 전화만 해댔다. 허보는 혼자 있기 어색해서 홀로 술을 홀짝, 홀짝 마셔댔다. 이상하게 술이 달았다. 귀신 들린 듯 혼자서 한잔, 두잔 술을 비워냈다. 독한 양주에서 바나나향이 나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태유가 전화를 끊고 들어왔을 때, 허보는 만취상태가 되어 있었다.
“허보새끼야, 정신 좀 차려 봐봐... 새끼, 와이리 술을 많이 마셨노?”
태유는 자신의 자리에 담긴 커피를 허보에게 먹였다. 시원하고 달달한 커피를 마시니 취기가 좀 가시는 것 같았다. 태유는 허보의 가방에서 커피를 꺼냈다. 컵에 얼음을 놓고 커피를 부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허보에게 마시게 했다.
“새끼, 잘 마시네? 정신 좀 차려 봐라.”
허보는 자신이 가져온 커피를 마셔댔다. 그리고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데, 태유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비웃고 있음을 알아챘다. 웬 대머리 할아버지가 허보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깔깔’ 웃고 있었다. 아주 얄밉게 웃어대는데, 눈매가 태유와 닮은 것을 보니...
“푸훼훽...”
허보는 놀란 나머지 먹고 있던 커피를 뱉고 말았다. 그리고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서 입 속 끝까지 손을 넣고 모든 것을 토해냈다. 속으로 온갖 욕이 나왔다.
“이런 시발, 태유새끼...”
허보는 부적을 태운 커피를 자신이 먹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속 안에 든 것을 모두 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입에서 커피향이 나는 것 같았다. 지침과 혼란 속에서 허보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이후 허보에게 안타까운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날 술병이 난 허보는 집에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크게 다쳤다.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하게 되었고, 꽤 오랜 시간 입원해 있었다. 문제는 입원해 있는 동안에 다니던 회사가 도산했는데, 사장이 외국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월급도, 퇴직금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되는 일이 없었다.
문제는 문병을 오는 태유를 볼 때마다 경기(驚氣)를 일으키는데, 병이 더욱 악화 되었다. 허보의 엄마는 태유에게 말도 못하고 친구들 모두에게 병문안을 오지 말라고 했다. 그날 이후, 태유는 허보를 볼 수 없었다. 허보는 입원한 병원을 태유도 모르는 곳으로 옮겼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 마음에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아무래도 전화번호를 바꾼 것 같았다.
PS : 정말 천적이라는 것은 존재 하는 것인가요?
천적 完
출처 | 문화류씨가 쓴 모든 이야기가 개정되었습니다. 맞춤법, 문장, 내용 등 개선 시켰습니다. 본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끝나지 않는 지배'를 개정 중입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s/?novel_post_id=46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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