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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98027
    작성자 : 익명dbs4389
    추천 : 62
    조회수 : 16329
    IP : 119.196.***.178
    댓글 : 15개
    등록시간 : 2018/02/25 02:20:03
    http://todayhumor.com/?panic_98027 모바일
    제주도에서 만난 여자 (19금 주의)



    * 공포소설은 아니구요 약간 미스테릭한 분위기의 19금 소설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고시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결코 합격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체감하면서도 계속 도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강단에서 평생을 보내신 아버지와 언제나 헌신적이었던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였다. 시작과 끝이 둥그렇게 이어진 철길 위에서, 관성 때문에 꾸역꾸역 앞으로 나가는 기차가 된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난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짜고짜 여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백팩에 간단히 속옷, 양말 몇 켤레만 챙겼다. '공부하느라 고생했는데 며칠 쉬고 가지 않구.' 느닷 없이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에 어머니의 눈은 걱정과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구차한 이야기를 늘어 놓고 싶지 않았다. 채점을 해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고 있었으니까. 말 없이 어머니를 껴안아드리고 집을 나섰다. 손이 차가웠고 전보다 야위신것 같았다. 

    제주도로 향하는 저녁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앞좌석에 달린 작은 테이블을 펴고 공항에서 사온 맥심 잡지를 읽었다. 스튜어디스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독서용 조명을 켜줬다. 빛에 민감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친절이 쓸모 없게 느껴졌다. 드문드문 비어 있는 한산한 비행기 안에서, 따뜻한 느낌이 도는 조명 아래에서, 단아하게 생긴 스튜어디스가 서빙해 준 주스를 마셨다. 창 밖으로 거뭇거뭇한 바다가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비일상적 감각이었다. 비행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졌다.

    뜻밖에 제주 공항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득 서글픈 기분과 함께 접이식 자전거를 끌고 일본 여행을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토를 가로지르는 천변의 어느 벤치에서 노숙을 했었는데, 새벽에 큰 비가 내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 하다가 가까운 빌라 입구 우편함 아래서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잤었다. 이제 그때만큼의 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든 빨리 따뜻한 곳에 눕고 싶었다. 공항까지 픽업을 해주는 민박집이 있어서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혼자 오셨나봐요?' 운전석에서 한동안 말이 없던 사장님이 정적을 깼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것이 뭔가 미안해서 먼 곳까지 데리러 와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2월은 비수기여서 왠만큼 먼 거리가 아니면 태우러 갈 수 있으니 언제든 전화하라고 명함을 내밀었다. 크리스마스나 설 연휴는 지났고 개나리가 피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했다. 의도치 않게 딱 좋은 시기에 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민박집에는 나 말고 한팀이 더 있었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파란색 포카칩을 안주삼아 맥주를 두 캔 마셨다.     

    시험 공부를 하면서 불면증을 얻었다. 낮 동안은 끔찍하게 무기력하다가도 불끄고 누우면 정신이 또렷해졌다. 온갖 방법을 써봐도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도움이 된 것은 정말 두껍고 재미 없는 책을 꺼내 읽는 것이었다. 하루치의 허용량을 초과해 버린 뇌는 새롭게 입력되는 정보를 그대로 흘려보내 버렸지만, 새벽녘에는 다만 몇시간이라도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제주의 해풍이 달싹달싹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 세대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2루타 정도 치는 정도야. 홈으로 불러들이는건 니네들 몫이지' 

    작년 가을에 아버지와 등산을 갔었는데,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버지에게 돈을 부쳐주면서 한번도 사용처를 물어보지 않으셨다는 큰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은 나의 진로나 학업에 대해 무심할 정도로 간섭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침묵 이면에 숨어있는 거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다. 때론 백마디의 거센 질책보다 침묵 끝에 나온 고요한 한마디가 더 무거운 법이니까. 어느 소설에서 본 것 처럼 바닷 바람과 안개 따위로 만든 천연의 수면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느즈막히 일어나 가까운 해변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해수욕장인지 이름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바람 소리와 파도 치는 소리를 들려줬다. '부럽다고 말해. 빨리 부럽다고 하라고!' 뭐 그런 감정이었다. 정처없이 백사장을 걷다가 추워지면 카페에 들어가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허브 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그런짓을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아침 10시가 넘어서 사장님이 깨워줬다. 얼른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점심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사장님에게 뭐가 맛있는지 물어봤다. 갈치국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식당이 많은 거리로 나가서 손님이 몇팀 있는 곳에 들어가 갈치국을 주문했다. '학생이야? 혼자왔어?' 이 질문만 서너번은 받은 것 같다. '제주도 왔으면 갈치 조림을 먹어봐야하는데.' 여사장님이 아쉽다는듯 혀를 끌끌찼다.갈치국이 하얀색이어서 놀랐고 호박이 들어있어서 놀랐고 매워서 놀랐다. 사장님이 작은 냄비에 갈치 조림까지 만들어 주셔서 또 놀랐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든든하게 밥 한그릇을 비웠더니 기운이 났다. 마트에서 500ml 맥주 두캔을 사서 양쪽 주머니에 꽂고 일출봉 쪽으로 출발했다.

    일출봉 정상에는 토끼가 있었다. 정말 뜬금 없는 토끼였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아득히 먼 수평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경치를 구경했다. 아무 생각도 안나고 너무 좋았다. 걱정도 근심도 없이 집이나 한 채 지어놓고 평생 바람이나 맞으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망이 괜찮은 쪽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해풍 덕분인지 맥주가 진짜 달콤했다. '와 씨X 졸라 맛있다!' 이렇게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때 어떤 여자분이 점퍼 주머니 위로 비죽이 튀어나온 캔을 가리키며 말을 걸어왔다.

    "그 맥주 저한테 파시면 안될까요?" 

    약간 당황했으나 돈을 받고 맥주를 나눠 먹는 일 따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난 신사답고 관대한 사람이니까.

    "드, 드리겠습니다."  

    지갑을 꺼내려는 여자분에게 엄청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안주셔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내가 건넨 맥주를 받아들었다. 주위를 배회하며 경치를 보다가 근처에 앉아서 맥주 캔을 땄다. 

    "맥주를 진짜 맛있게 드셔가지구요. 같이 마셔도 되죠?" 

    그렇게 하라고 했다. 누군가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딱히 할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만 이어지는 와중에 토끼 한마리가 뛰어들어왔다. 여자는 쭈그려 앉아서 그 녀석을 데리고 놀았다. 관광객들 손을 많이 탄 놈인지 도망가지 않았다. 구세주 같은 녀석이었다. 

    "아래쪽 식당에서 갈치국 드셨죠?"

    "네? 어떻게...?"

    "아까 식당에서 봤어요."

    "아 그러셨구나.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어서 궁금해졌다.

    "혼자 오신거에요?"

    "네, 혼자왔어요."

    "저도 혼자 왔습니다. 3일째 됐어요." 

    "아 그럼 어디 어디 보고 오신거에요? 아무 계획도 없이 와가지구... 좋은 곳 있으면 알려주세요."

    추천 해줄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름 운치 있었던 해변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 

    "저도 이쪽 지리를 잘 몰라서요, 마라도 같은데 가보시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마라도 꼭 가봐야겠네요. 일출봉 꼭대기까지 맥주 사오신거 보고 진짜 여행 제대로 하시는 분이라고 알아봤어요. 저도 다음부턴 맥주 사가지고 다니려구요."

    여자는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저기...혹시 뭐하는 분이세요?"      

    여자들이 원하는 배우자 직업 순위에서 광부보다 아래에 있는 것이 고시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여자랑 결혼할 생각이 있는건 아니었지만 고시생 보다는 일출봉 정상에서 목숨처럼 소중한 맥주를 나눠 준, 너그럽고 관후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쪽이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는 나를 급하게 제지했다.

    "잠깐, 제가 맞춰볼게요. 저 이런거 잘 맞추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감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기운 같은 것이 있어서 정말 맞춰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가벗겨진 것 같은, 거짓말을 하다가 들켜버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예술 같은거 하시는 분 맞으시죠? 그림이나 글 쓰시는분?"

    너무 황당해서 피식 웃었다가 결국엔 '하하하하' 소리내서 크게 웃어버렸다. 한참을 웃었더니 경계심이 약간 무디어진 것 같았다. 긴장했던 몸도 조금 이완됐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날 웃겨버렸으니 내용이 어떻든 탓하지 않겠다. 

    "저 고시생입니다. 이번에 시험 치고 여행 온거에요."

    "아 그러시구나. 너무 신기해요. 저 고시 하시는 분 처음 만나봐요. 공부 엄청 잘하셨나보다." 

    "아, 아뇨 그런건 아니구요."

    눈을 대빵만하게 뜨고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표정이 다양한 사람을 보고 있으면 즐겁다. 불만은 많고, 책임 질만한 일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 험담이나 늘어놓는 인간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면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표정만 짓게 되니까. 자주 웃고, 자주 울고, 가끔은 화를 내는 사람이 좋았다.  

    입이 트였는지 본인 신변잡기를 늘어놓았다. 집이 서울이라는 것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아무 계획도 없이 왔다는 것 그리고 방 계약이 오늘 밤까지여서 내일은 숙소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수다쟁이들이 좋았다.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좋고 적당한 타이밍에 '진짜야? 너무 재밌다' 이런 리액션만 해도 즐거워 하니까.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멜로디만 연주하는 단선율의 음악같이 들렸다. 문득 제주도 온 첫날 민박집 사장님에게 받았던 명함이 생각났다. 여자에게 민박집을 소개시켜 주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고민이 됐지만 난 추천만 하는 사람이고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니까. 그녀는 명함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고맙다고 했다.

    바닷가는 해가 짧았다. 온세상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빛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그녀의 볼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긴장이 될 만큼 예쁘지도 않았고 밉게 생기지도 않았다. 전체적으로 포근한 인상이었다. 청바지에 캔버스화 차림이었는데 묘하게 나이를 가늠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다른 옷을 입었어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원래 그런건 잘 못맞췄으니까.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가 날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제 젖꼭지 빠는 상상 하셨죠?"

    "??????????????????????"

    정말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다. 새파랗게 질려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저 그게..."

    "아하하하. 미안해요. 미안해요. 너무 재미있게 생기셔서. 킄킄."

    여자는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와 이런 미친...' 

    좋았던 기억이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이런 농담을 하는게 요즘 트렌드인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약간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힘껏 구겼다. 빠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도 분위기를 알아챈듯 주섬주섬 일어설 준비를 했다.  

    "오늘 맥주 잘 마셨어요. 다음에 만나면 제가 술한잔 살게요."

    '다음에 언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남은 기간동안 여행 재미있게 하시구요."

    엉덩이를 툴툴 털고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여자는 민박집 명함을 지갑에 꽂아 넣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나를 불러세웠다. 메모지 크기의 흰색 종이였다. 

    "이게 뭔가요?"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맥주값이에요. 그거 마권인데 나중에 경마장 가시면 바꿔 쓰세요."

    '서울 경마 공원 제X경주' 라는 문구가 보였다. 경마장에 가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마권이 그렇게 생긴건지 처음 알았다. 길게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신기한 사람들이 진짜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작별을 고했다. 약간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쳐버려서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샤워를 하는 내내 까닭 모를 후회가 찾아왔다. '아씨, 그때 재치 있게 받아 쳤어야 하는건데...' 

    정서적으로 잔뜩 들뜨는 체험을 한 날에는 더욱 또렷한 불면의 밤이 찾아온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끔찍한 공허함과 자학의 시간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민박집 책꽂이에서 가장 재미 없어 보이는 책을 골라 방으로 들어갔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이었다. 의외로 재미있었다. 몰입해서 읽다가 새벽에 한두시간 깜빡 잠이 들었다. 깼을때는 이미 새벽의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한라산을 등반하기 위해 일찍 민박집을 나섰다. 날씨가 우중충해서 걱정이 되었는데 성판악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산 관리하시는 분들이 청바지를 입고 이어폰을 꽂은 내 모습을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꼴로는 입장 못시키니까 돌아가라고 했다. 간곡하게 사정을 하자, 매점에 가서 우의와 아이젠이라도 사오라고 했다. 

    정말 우의와 아이젠 값이 아깝지 않았다. 그곳은 눈의 세계였다. 새하얗고, 정돈되어 있고, 은은한 빛이 있었다. 좁고 어두운 방,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책상과는 평행한 다른 우주 같았다. 깨끗한 냉기에는 아직 겨울 냄새가 남아 있었다. 이런 날은 걸어도 걸어도 전혀 힘들지 않다. 눈을 먹으면서 수분을 보충했다. 눈가루에 마약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랜덤으로 설정해 놓은 플레이어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침 듣고 싶은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루야!' 온몸에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백록담은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가려져 있어서 더 보기 좋았다. 보일듯 보일듯 보이지 않는 모습이 더 신비감을 주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등산객들이 많았다. 가방에서 맥주를 꺼내 경치를 보면서 마셨다. 부러워하는 분들도 있고 미친/놈 쳐다보듯 하는 분들도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진달래 산장에서 육개장 사발면으로 속을 풀었다. 진짜 그릇까지 핥아 먹고 싶었다. 

    민박집에 돌아와서 한라산에 갔다왔다고 했더니 '이 날씨에 그렇게 입고 가신거에요?' 라며 경악했다.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사장님에게 혹시 새로오신 손님 있냐고 물어봤는데 전혀 없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약간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다 읽지 못한 책을 뽑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전쟁통에 하반신 불구가 되자, 부인이 불륜을 저지르는 이야기였다. 어쩌겠는가, 운명을 탓하는 수밖에. 사랑이란 내로남불인 것을. 채털리 부인이라는 고리타분한 제목 답지 않게 성애 묘사가 생생했다. 완전히 빠져들어서 읽었다. 정확히 말하면 채털리 부인의 상대역으로 나온 사냥터 지기 캐릭터에 몰입해버렸다. 

    그날 밤 꿈을 꿨다. 거의 몇년만에 꿈을 꾼것 같았다. 꿈속에서 어떤 여인과 격렬한 섹스를 나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얼굴을 알아 볼수가 없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속에 나오는 그런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다. 고깃덩이처럼 풍만하고, 완숙하고, 마음이 푸근해지는 몸이었다. 우린 꽈배기처럼 기묘한 형태로 살을 맞대고 있었다. 두툼한 그녀의 가슴을 양손으로 잡고 사정없이 젖꼭지를 빨기 시작했다. 진짜 정신이 나간듯이 계속 빨았다. 너무 따듯하고 포근한 가슴이었다.

    눈을 떴을때는 거의 12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렇게 깊게 잠들어 본 적이 몇년 만이던가. 정말 꿀맛같은 잠이었다. 머릿속이 너무 깨끗해서 한동안 천장을 보고 멍하니 누워있었다. 속옷이 끈적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속옷을 갈아입고 화장실로 갔다. 거울 속에 나이를 서른 가까이 쳐먹고 제주도까지 와서 몽정한 팬티를 빨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정말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면서도 어쩐지 만족스럽고 마음이 푸근해졌다. 뭔가 어제보다 내 자신에게 더 솔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민박집을 나와 모슬포에 도착했다. 마라도행 배가 출항하는 곳이다. 매표소 직원이 오늘은 바람이 강해서 배가 못뜬다고 했다. 날씨를 보니 그럴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 생각이 안났다. 폭설이 내린 사거리 중앙에서 바퀴가 헛도는 트럭이 된 것 같았다. 기분이 센티멘탈한 날이다. 아무 계획도 없이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가 작은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지붕도 있고 의자도 있었다. 해변의 한적한 도로, 버스정류장, 여기에 느릿느릿한 전차만 지나가면 그대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었다. 

    예전에 연애하던 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누구와도 금새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꽉 막힌 내 심정을 들어주는 사람이라면,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나를 어루만져줄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누구와도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시기였다. 첫 연애는 여자친구 빚을 같이 갚아주다가 끝나버렸다. 그건 연애도 뭣도 아니었다. 생각하면 가슴만 쓰리니 그만두자. 두번째는 동정심에 가까운 감정으로 시작한 사이였는데 결국엔 여자가 먼저 날 차버렸다. 격렬한 열정도 죽을 것 같은 고뇌도 없었다. 마르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성격이 아니라 몸이 차가웠다. 날씬해서 부럽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뭔가 뻣뻣하고 무미건조했다. 그래도 몽정을 할 만큼 욕구불만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아아, 꿈속의 여인. 달콤하고 보드라운 여운이 다시 밀려왔다. 왜 그런 꿈을 꾼걸까. 그녀는 채털리 부인이었을까. 아니면 일출봉에서 만난 그 여자였을까. 젖꼭지 빠는 상상을 했냐고 물었을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제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확신할 수가 없다. 내 눈을 들여다 봤을 때, 빙산 아래 웅크리고 있는 어두운 내 본심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마권을 꺼내 들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제주도에도 경마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 해냈다. 경마장에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간다고 그녀가 거기에 있을까. 만나서 뭘 어떻게 하려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왠지 가야할 것 같았다. 때론 모든 이성적 사고를 정지시키고 본능적 감각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내 성욕과 불면의 비밀이 풀릴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난 말을 좋아하니까. 가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가까운 마트에서 초콜릿을 한 개 사고 경마장 가는 길을 자세히 물었다. 얼른 초콜릿을 입에 쑤셔 넣고 경마장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다행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경마 예상지를 파는 상인에게 눈이 이렇게 와도 말이 뛰나요 하고 물으니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말은 뛴다고 했다. 아니면 경마꾼들 폭동 일어난다고. 평온한 촌구석에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모여들었는지 놀랄 일이다.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건물 내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흰색톤의 깨끗한 마감재, 가지런하게 열이 맞춰진 좌석, 스크린에 빨려 들어갈 듯이 집중해 있는 사람들. 그들은 기묘한 열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외계인이 실험중인 우주선에 탑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번이나 건물을 돌아봐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급격한 허무함과 좌절감이 밀려왔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마권 하나 달랑 들고 경마장에 온 것은 미친짓이었을까. 오늘 같은날은 진짜 흡연자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은 초조하고, 뭔가 빨고 싶고, 빨아야 기분이 진정 될 것 같고. 주머니에 담배만 있다면 몇 대 연속으로 태워버릴 것 같았다. 흡연실 쪽에서 음울한 연기가 가득 밀려왔다. 시체를 태운 것처럼 음습한 기운이 짙게 부유하고 있었다. 뭔가에 끌리듯 흡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카이지에 나오는 절망의 배 에스포와로 호였다. 절망의 연기가 그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호흡이 아니었다. 허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진한 파멸의 날숨이었다. 침침한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녀였다. 음산한 묘지의 까마귀 떼 사이에 홀로 서 있는 고고한 한마리 학이었다. 성스러운 빛이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내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대 드릴까요?"

    "아뇨, 아뇨. 전 안피워요."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 개구진 표정을 지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는 나가자고 말했다. 정말 너무너무 반가웠다. 전에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검정색과 회색이 교차된 체크무늬 스커트에 검정색 면 폴라, 아이보리 빛이 들어간 흰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단정하고 근사했다. 오늘따라 마권이 많이 맞았다고 아이처럼 웃었다. 순간적으로 꽉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꿈 탓일까. 잠깐 만났지만 오래 알고 지낸 것 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의 반가움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비밀이 많은 여자는 매력적이다. 봄철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밀려드는 햇살처럼, 따스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것 같았다. '아, 고단하고 지루한 내 삶을 너의 환한 빛과 향기로 채워 줄 수 있다면...' 감정선이 미쳐버린 것 같았다. 시험, 여행, 여자, 경마, 담배. 아무런 연관성도 연결고리도 없이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 경주로가 잘 보이는 쪽에 자리를 잡았다. 몇 경주를 구경했더니 약간 지루해졌다. 룰을 모르면 백날 들여다 봐도 즐길 수가 없으니까.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이건 뭐하는 거냐. 벌레들의 전쟁이냐' 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그녀에게 베팅 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단승식, 쌍승식, 복승식, 복연승식. 수학 용어처럼 생소한 용어들 때문에 머리가 쑤셨다. 거기다 1000m, 1200m, 1500m 등등 거리도 달랐고 뛰는 마리 수도 적게는 8마리에서 많게는 15마리까지 생각 외로 복잡했다. 마킹 용지를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그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런걸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아세요?"

    "아, 저도 남편 때문에 알게 됐어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리는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척 하려 했지만 눈동자는 풍랑 속의 돗단배 같았다. 아, 진짜. 이 여자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걸까. 진짜 미칠 것 같았다. '하하하 그러셨어요. 좋은 남편이시네요.'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난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그녀는 나의 안색을 보고 왜요? 왜요? 하고 물었다. 열나는 아이 머리를 짚어 보는 엄마 같은 표정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억지 웃음으로 덮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오늘은  솔직한 내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꽁꽁 감추려 해도 다 드러날 것 같았다. 

    "하아, 남편이 있으신지 몰랐어요..."

    "아...그...지금은 없구요. 전 남편, 전 남편."

    뭔가 위로를 하려고 한 말일까. 난 영문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나에게 뭔가를 약속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왜 배신감을 느끼는 걸까. 배신한 사람은 없는데 배신 당한 사람만 있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멍하게 앉아서 말이 뛰는 모습을 바라봤다. 탄식을 하는 사람,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욕지꺼리를 하는 사람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뭐가 재밌어서 이걸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출발해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뿐인데. 눈 가리고 뛰는 말이나 내 모습이나 별 다른게 없는것 같아서 약간 서글퍼졌다. 

    경마가 끝났다. 그녀는 돈을 약간 딴 모양이었다. 나에게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 진짜 아무 생각이 안들었다. 그냥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런 심정이었다. 술집이 있을만한 곳으로 차를 타고 나왔다. 제주도 흑돼지 파는 식당에 가서 된장찌개에 소주나 3병쯤 마시고 빨리 뻗어버리고 싶었다.  나를 이끌고 간 곳은 지하의 어느 조용한 바였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구석에 부스처럼 만들어진 자리가 있어서 거기에 앉았다. 

    그녀는 이름모를 칵테일을 마시겠다고 했다. 나는 독한 위스키를 마시겠다고 했다. 이렇게 입맛이 씁쓸한 날에는 위스키가 달게 느껴질 것 같았다. 온더락스요? 하는 말에 네? 하고 반응했는데 웃으면서 얼음에 타서 먹을거냐고 물었다. 온더락스가 얼음에 타먹는 거였구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그녀도 위스키를 같이 마시겠다고 하고 병으로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 만지작 거렸다. 

    "왜 분홍색을 샀어요?"

    내 핸드폰이 분홍색인걸 보고 그녀가 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약정에 매이는 것은 죽어도 싫었고 새걸 사기에는 돈이 아까웠으니까. 인터넷에서 중고로 산 폰이었다. 기능만 잘 돌아가면 상관 없었기 때문에 디자인은 신경써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중고로 샀어요. 싸더라구요."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앞으로는 중고 폰은 쓰지 말라고 했다. 전남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런 스몰 토크도 정말 즐거웠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쓰렸다. 술이 나왔다. 얼음은 넣지 말고 글라스에 절반쯤 술을 채워달라고 했다. 그녀와 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크게 한모금 꿀꺽 삼켰다. 뜨끈한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가슴이 또 쓰렸다. 

    "오늘 경마장에는 왜 오신거에요?"

    가볍게 위스키에 입술을 적시면서 그녀가 물었다. 이제와서 뭘 어떻게 더 하겠는가. 내 감정을 숨김 없이 말하고 싶었다.

    "그냥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입가에 옅은 미소가 묻어 있었다.

    "저는 저 또래이거나 어리신줄 알았어요. 결혼 하신줄은 진짜 몰랐습니다."

    전남편 이야기에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녀가 술 잔을 내밀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몸도 피곤하고 빨리 취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분이 경마를 좋아하셨나봐요."

    "엄청 싫어했어요."

    아까 경마장에서는 남편에게 경마를 배웠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마학교 출신이었는데 결국 기수는 못되고 말 조교사를 했죠. 저는 경마장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어요. 약간 다혈질이긴 했지만 가정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말 끝을 흐렸다. 경마학교에 조교사라. 진짜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신기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갑자기 전 남편의 캐릭터가 궁금해졌다.

    "근데 어쩌다...헤어지신 거에요?"

    "죽었어요."

    아, 이 여자. 나를 몇번 놀라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 괜한 이야길 꺼내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이제 지나버린 일인걸."

    자책하는 표정으로 술잔만 들이켰다. 술기운이 슬슬 올라왔다. 그녀가 말했다.

    "옛날 이야기 궁금하세요? 들어보시겠어요?"

    난 이런 이야기 듣는게 너무 재미있었다.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뜻밖에 그녀의 어머니는 어느 지역에서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점쟁이라고 했다. 복채로 벌어드리는 수입도 상당했고 여러 유력가들이 점을 보기 위해 몇달 전부터 예약을 할 정도로 용한데가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부모님이 무속인이면 학창시절 친구들이 피하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가끔 밥을 사줄 정도로 사교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한가지 힘들었던 것은 다른 사람 손이 탄 물건을 절대 쓰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어떤 귀신이 붙은 물건인지 모르기 때문에 물건은 거의 새것을 사서 쓸 수 밖에 없었다.

    대학교에서도 원만한 교우 관계를 가졌었는데 과제 때문에 친구 책을 빌려 온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 어머니가 친구의 책을 태워버렸다는 거다. 그 일이 좋지않게 소문이 나서 학교를 휴학하고 몇년을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 지인의 소개로 전 남편과 만남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관상도 좋고 서로 기운이 잘 맞으니 일찍 결혼하라고 부추겼다. 한동안 외롭게 지냈던 그녀는 어머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다. 갑자기 그렇게 기운이 잘 맞는다던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졌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거에요?"

    "아뇨. 말 훈련시키다가 말에서 떨어졌어요. 머리부터 떨어졌는데 하반신에 마비가 왔다고 하더라구요. 그 후로 남편은 침대에 누워서만 지냈어요."

    그녀는 잔에 술을 삼분의 일쯤 붇더니 그대로 삼켜 버렸다. 술기운이 버거운듯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렇게 몇개월이 지나고 남편이 친정에 잠시 가 있으라고 해서 집에 내려와 있었어요. 시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창문으로 투신 자살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하아..."

    피곤과 술기운에 절어가던 정신 순간적으로 확 깼다. 그녀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시울이 붉어져있었다. 안타까워서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비밀이 많은 여자 같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를 아득히 넘어선 수준의 비밀들이었다.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나지 않게 할 방법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주보고 눈물을 닦아주는 것 뿐. 이상하게 가슴이 쓰렸다. 진짜 이 좁은 가슴이라도 괜찮다면 안겨서 엉엉 울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몸을 추스르고 다시 미소를 찾았다. 아직 눈에는 물기가 가득 했다.

    "저 푼수같죠. 혼자 말하고 혼자 울고."

    "아뇨, 아뇨. 저도 예전 여자친구 생각하면서 혼자 많이 울어요. 오늘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마음이 너무 애잔하네요."

    "경마장에서 말 뛰는 모습도 보고 돈도 조금 잃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서요. 저 나름에 위령제인 셈이죠."

    한동안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 없이 술 잔만 기울였다. 술기운 때문에 눈 앞이 핑핑 돌았다. 하드밥 풍의 느릿한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앉은 부스는 자욱한 담배 연기에 감싸져 있었다. 이 공간만 다른 물리법칙 속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잔을 들고 그녀의 옆자리로 잽싸게 옮겨 앉았다. 그렇게 술이 취한 와중에도 긴장이 확 됐다. 시집온 새색시 처럼 무릎을 모으고 술 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도 쳐다 봤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미인이신거 같아요."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킥킥 웃었다. 난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와락 껴안아 입을 맞춰 버렸다. 진한 담배 맛이 났다.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 아아, 천국의 맛이다. 아련하게 장작 타는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겨울에 빈 논에서 연을 날리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큰집으로 돌아올 때 맡은 그 냄새였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봤다. 입은 약간 벌어져 있고 눈은 촛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입술 가에 침 자국이 번들번들 빛났다. 너무 요염했다. 미칠 것 같았다. 다시 입을 맞추고 혓바닥을 깊숙이 집어 넣었다. 찢어진 호떡 꿀 속으로 혓바닥을 쳐박는 기분이었다. 너무 따뜻하고 끈적끈적하고 달콤했다. 정신 없이 입을 맞추느라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양손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밀며 제지했다. 

    "다른 사람들이 봐요."

    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다른데로 가요."

    그녀의 손을 끌고 계단을 오르면서 딱 한가지 생각 밖에 안들었다. 제발 근처에 깔끔한 모텔이 있었으면. 모텔이 많을 것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인기척이 없어서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에 대문짝만하게 모텔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기로 들어갔다.

    난 원래 씻는 것을 좋아했다. 여름이면 하루에 네번, 다섯번씩 샤워를 했다. 딱히 깔끔해서라기 보다 물을 맞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정성들여 씻어야 할 것 같았다. 뭔가 성스럽고 거룩한 일이 있을 것만 같으니까. 이런 날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된다. 가장 멋진 성찬은 햐얀 식탁보가 깔린 작은 테이블에서 은제 식기와 따뜻하게 뎁혀진 그릇에 담아서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법이다. 느리게 또 느리게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를 침대에 앉혀 놓고 씻고 오겠다고 했다. 옷을 빠르게 벗어서 창가쪽 의자에 걸쳐놓았다. 씻으러 들어갔던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녀에게 이리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머리가 젖으면 안되는데 라고 투정을 부리면서 옷을 하나씩 벗었다. 미리 물을 따뜻한 온도로 뎁혀놨다. 정성들여 씻어 줄 예정이다. 그녀의 몸에서 과일맛이 났으면 좋겠다. 그녀는 머리에 수건을 감고 들어왔다. 뽀얗고, 매끈하고, 풍만한 몸매였다. 아랫배에는 수술자국이 보였다. 이제 그런건 놀랍지 않았다. 그녀를 천천히 인도해 따듯한 물로 온 몸을 헹궈줬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반죽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살이 말랑말랑해서 친구들이 쉴새없이 괴롭혔다. 심지어 내가 1반일때 10반에 있던 친구가 쉬는 시간마다 날 괴롭혔다. 샤워 타월로 그녀의 구석구석을 닦아주면서 여자의 몸은 정말 보드랍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피부가 정말 뻑뻑하고 거칠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손으로 머릿 수건을 잡고 있었다. 뽀얀 겨드랑이와 분홍빛 유두가 눈에 들어오자 스프링처럼 발기가 됐다. 정말 부러질 듯이 딱딱하게 발기가 됐다. 비누 거품이 묻은 채로 그녀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쳐박고 낼름낼름 핥았다. 보드레하고 따듯한 감촉 때문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렇게 온 몸을 구석구석 핥았다. 

    같이 씻고 나와서 그녀를 침대에 앉혀 놓고 완전히 불을 껐다. 이불 속에서 그녀의 젖꼭지를 빨았다. 절대 허기가 가시지 않은 아이처럼 계속 빨았다. 달콤한 즙이 나오는 것 같았다. 포들하고 따듯했다. 그대로 몇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능숙한 기수가 말을 타듯이 나를 탔다. 어둠 속에서 뽀얗고 동근 그녀의 유방이 달랑 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아, 이것이 쾌락이구나. 이대로 죽는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사정해버렸다. 몇년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쓸쓸함, 황량함 같은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온 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어버렸다. 너무 따뜻하고 포근한 가슴이었다.

    아침에 뒤척이는 느낌 때문에 잠시 잠에서 깼다. 그녀가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녹은 치즈처럼 나른했던 나는 다시 잠에 빠져 버렸다. 눈을 떴을때 그녀는 가고 없었다. 일어났을때 너무 황망해서 한동안 멍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약쟁이들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을때처럼 무기력하고 억울한 기분이들었다. 나는 옷을 입고 모텔을 나왔다.

    그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경마장을 찾았다.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예정했던 여행 기간이 다 되었다. 경마장에서 그녀가 준 마권을 환급받으려고 했다. 경마장 직원이 그 마권은 적중되지 않은 마권이라고 했다.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자취방 문을 열었을때 찌든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장작 타는 냄새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시험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고 말씀드렸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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