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이 없어져 답글 대신 새로운 글로 남깁니다. 어차피 원글이 사라졌기에 이 글이 논의의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답글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글쓴이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생각으로 강한 어조로 적었는데 답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에게는 보충질문을 하셨는데 저에게는 제 태도가 잘 못 된 점을 지적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내용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는 사실이 저에 대해 과대평가를 해준다는 간접증거로 사료되기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퇴고 안하고 그냥 적은 글이라 빈틈이 많을 것입니다.
또한 글쓴이의 글에 답글을 달아주신 분들의 예전 내용을 읽어보니 저보다 더 깊고 폭넓게 사색하시는 분들이라 역시 세상은 넓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질문을 안하셔서 다른 분들에게 한 추가 질문을 천천히 읽어보니 글쓴이의 고정관념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 기분 나쁘시겠지만 몇 가지 점검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나르나르님에게 한 질문 중 일부일처제를 하는 동물도 상당히 많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인터넷 게시판에 글올리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부분은 어떤 동물이 일부일처제를 하는지 한두개라도 언급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아는 상당수 동물은 암컷집단이 있고 강한 수컷이 그 암컷집단을 모두 차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성관계를 가지려면 그 수컷을 이기고 암컷집단을 차지해야 하는거죠. 대표적으로 사자도 있고, 저도 TV에서 봤는데 원숭이들도 그런다고 하더군요. 정확한 이름은 생각이 안나네요. 원숭이 한두종류가 아니라 많았던 것 같은데 생각 안나면 뭐 자료로 써먹을 수 없잖아요. 이건 특이사례긴 하지만 보노보 원숭이는 성관계를 사회생활의 수단으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일종에 집단혼이죠.
원숭이 이름 찾는다고 인터넷 검색하다보니 포유류 중 9%만 일부일처제를 한다고 합니다. 이미 글쓴이가 말한 상당수는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참고로 네이버에서 "일부일처제 동물"로 검색했더니 자료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글쓴이는 계속 결혼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그에 따라 답글 달아주시는 분도(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쓴이의 표현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결혼이란 단어를 계속 쓰는데 결혼보다 동물의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동거죠. 일부일처제를 하는 동물도 몇몇 종류 되지만 그 중 끝까지 평생동안 일부일처제를 하는 동물(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은 그 중 얼마나 될까요?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 양육을 보조하다가 다 크면 헤어지는 동물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유전자에는 관심이 많아 교양서적 몇권은 읽었는데 정작 동물 그 자체에는 초딩 이후부터 관심을 끊어 막상 답을 하기 어렵네요. 뭐 글쓴이도 저희들에게 근거는 안 보여주고 상당수 동물이 일부일처제를 한다는 주장만 하셨으니 저도 이번에는(글쓰면서 계속 그렇게 하겠지만.) 주장만 적겠습니다.
또 나르나르님에게 한 질문 중 "그전에..." 라고 시작하는 문장(그런데 보통 그전에 란 말 경상도에서 쓰는 것 아닙니까? 저도 경남 출신이어서 많이 썼던 기억이 나네요. 요즘은 단어는 경상도말 잘 안쓰는데 억양은 경남 그대로죠. 그래도 가끔 흥분하다보면 저도 경상도말이 타자치는데도 나옵니다. 글쓴이에게 썼던 답글에도 논리 오류, 맞춤법 오류는 당연하고 경상도말도 보이는군요.)의 질문을 보면
엔조이 수단으로 보는 경우가 많을까 결혼의 수단으로 보는 경우가 많을까? 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이건 나르나르님이 결혼주의자도 사람을 결혼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에 대한 반박으로 쓰신 글이죠?
그렇다면 글쓴이의 의도는 엔조이 수단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르나르님의 주장은 별 엔조이 수단에 비해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쓰신 것 같고 이것에 대해 나르나르님에게 재질문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거 글쓴이가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글쓴이의 무지가 다 드러나는 말입니다. 그전에 라는 말이 나온 부분을 읽다보면 문맥상 '예전에' '옛날에' 이런 의미로 쓰신 것 같은데, 우리나라만 예를 들어도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었잖아요.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분을 좋아하지 않아도 만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잖아요. 아무리 지금 연애하면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아직 그런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란 잔재가 남아있어 결혼의 최종적인 승낙권자는 부모님이시잖아요.
도대체 글쓴이가 말한 '그전에'는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입니까? 우리에게, 우리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께, 우리 선조들에게 글쓴이가 말한 시절이 있긴 했습니까?
최소한 우리나라만 한정해서 이야기한다면 우리나라는 연애상대를 엔조이 수단으로 본 것보다 월등히 많은 비율로 연애상대를 결혼의 수단으로 봤습니다.
그러면서 글쓴이는 자신의 증명해야할 입증책임을 은근슬쩍 나르나르님에게 넘겨버립니다.
위에도 적었지만 어차피 이게 논문도 아니고 논설문도 아닌 인터넷 게시판에서 떠드는 소리긴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주장하셨으면 간단한 증거 하나 정도는 보여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몇년 전이던가. 진중권 교수 대 일베대표 미국에서 공학박사 준비중이라고 하던 '간결'과 토론을 한 적이 있었죠?
그 때 간결의 명언이 '주장은 내가 하고 증명은 네가 해라'였죠. 그 토론 스킵하면서 봤는데 진중권의 토론 교실, 글쓰기 교실이라고 할 정도로 좋은 명강의였던 것 같습니다.
간결 이야기가 나오다보니 한마디 거들면 토론하기 전에는 진중권은 허접한 독일에서 박사도 못따고 한국으로 도피한 찌질이, 간결 자신은 위대한 미국에서 공학박사를 전공하는 구국의 영웅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 어이없더군요. 그런데 그 결과는 알다시피 진중권 교수의 일방적인 수업이었죠. 간결은 토론 역사상 아주 위대한 업적, 어마어마한 사례를 잔뜩 남겼죠. 그것만 정리해도 중고생을 위한 토론수업이란 책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글쓴이의 문제는 다음 내용부터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글쓴이가 독신주의자는 나쁘고 결혼주의자는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뜻의 글을 비스무리하게 적다보니 뭐가 단단히 엉켜버렸습니다.
또 나르나르님에게 한 질문 중 하나를 이번에는 그냥 Ctrl+C, V 해서 가져와보겠습니다.
"각설하고, 위에서 말했던 차이는 독신주의자는 상대방을 쾌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반면, 비독신주의자는 상대방을 배우자의 대상으로서 생각한다는 것이겠지요. 이 차이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쾌락이라고 표현하자니, 좀 과격한 감이 없잖아 있는데 남녀간 성관계를 맺는 경우를 예시로 생각해 보면 좋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lastlaugher님에게 한 질문 중 하나를 Ctrl+C, V 해서 가져와보겠습니다.
"여기서 단순히 즐기기위해 성관계를 하는게 아니라면 상대방을 미래의 배우자로 맞을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겠죠. 하지만, 독신주의자는 상대방을 미래의 배우자로 받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지적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 글쓰신 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제가 되묻고 싶습니다."
제가 지난번 답글에 제 억측이긴 하지만 글쓴이가 "희생"이란 의미의 말을 하면서 단어를 밝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억측이 맞다면 "희생"이란 단어 뜻을 깊게 고민해보지 않고 단순하게 쓰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독신주의자를 정의하면서 연애는 하되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 글쓴이의 글에서 풍겨나오는 냄새를 맡아보면 발정난 개처럼 섹스만 미친듯이 하고 여성을 버리는 남자를 가정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독신주의자라고 연애를 다 할까요?
참고로 저도 독신주의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지난번에 적은 글처럼 이상한 여자 만나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몸과 마음(특히 몸)이 다 망가져버려 인간으로서의 여자는 만날 수는 있지만,(군생활 하면서 여성간부들이랑 일 잘했습니다.) 이성으로서의 여자는 크게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가끔씩 끌리는 이성이 있긴 하지만 이미 제 몸이 안경돼지로 망가져버려서 다가갈 생각도 안하더군요. 지금 혼자서 하고 있는 일이 있어 하루종일 컴퓨터에만 앉아있긴 하나 일 끝나면 저도 남에게 더이상 민폐를 끼치면 안되니 최소한 살을 빼는 정도의 몸관리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통해 망가졌는데 그 짐을 다른 죄없는 분에게 잠시만 들어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더군요. 당연히 썸조차 기대할 사람도 없죠. 가장 큰 문제는 살빼도 못났습니다. 비율도 안맞고요.
글쓴이님, 그렇다면 전 자발적 독신주의자입니까?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입니까? 결혼주의자입니까?
만일 자발적 독신주의자면 저도 책임없이 연애만 하는 발정난 개입니까?
저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무성애자, 성욕을 아예 못느끼시는 분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합니다. 그들은 뭡니까?
글쓴이는 자발적 독신주의자를 발정난 개로,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는 숭고한 종교인으로, 결혼주의자를 희생과 인고를 감수하고 가정을 지키는 사회의 일꾼으로 정의했습니다. 나머지 독신주의자를 다 버렸죠. 버린게 아니라 다른 독신주의가 있다는 사실을 글쓴이는 모르고 있습니다.
뭐 고등학교 때 배우는 것 같던데,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입니다.
모든 글에 '이 글에서 이 단어는 이렇게 쓰도록 한다.' 이런 정의를 다 적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논의를 정리하는 최소한의 예의는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신주의자를 발정난 개로 근거하나 제시하지 않고 몰아가다보니 글쓴이 자기 자신이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독신주의자는 섹스만 하는 사람, 결혼주의자는 상대방과 결혼하여 배우자에게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셨죠.
책임이 뭐죠? 글쓴이는 독신주의자를 무리하게 몰아붙이다가, 또 글쓴이의 특성상 아무런 정의조차 내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단어를 막 쓰다보니
책임의 의미가 섹스에 대한 반대급부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즉 섹스만 하는 책임없는 사람은 독신주의자, 섹스도 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 글쓴이가 이런 의도로 적은 것은 아니겠지만 글쓴이는 20세기말 김완섭이란 사람이 PC통신 시절 주장했던 '창녀론'을 21세기에 부활시킬뻔 했습니다. 뭐 저도 잘 모르지만 간단하게 요약하면 '우리나라 여자는 다 창녀다.' 이런 뜻이라고 하더군요.
오히려 글쓴이가 연애상대, 남자이신 것 같아 여자를 가정하고 글을 적고 계신 느낌이었습니다. 즉, 여자 모두를 단지 몸만 대주고 생존을 보장받는 존재로 엔조이 상대보다 더 격하시킨 것입니다. 엔조이 상대는 서로 즐기기라도 하죠. 서로 주체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나 글쓴이의 말은 먹고 살기 위해 몸을 대주는 여자로 여성의 지위를 지층을 뚫고 맨틀을 지나 지구 핵에 가도록 격하시켜버렸습니다.
아주 끔찍한 이야기이긴 하나 글쓴이가 쓴 글의 논리적 구조는 이러합니다. 글쓴이가 이런 내용을 의도하고 적으셨다면 인간말종이겠지만 논리적 인과관계가 맞기 때문에 본인이 의도한 말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쓴이는 자기 생각은 머릿속에 많은데 그 생각을 말 또는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신 분입니다.
기본적인 논증은 당연히 안하시죠? 본인이 쓰는 단어에 대해 별다른 생각 안하시죠? 글쓰기 전에 최소한 인터넷 검색 정도도 안하시죠?
이번 답글 달면서 재질문하셨을 때도 인터넷 창 하나 열어볼 생각 안하셨죠?
그러다보니 글을 쓰면서 상대방이 한 말에 대해 약간 화가 나기도 하고, 자기 말의 원 뜻을 안 알아줘서 속상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감정을 가지고 정리없이 글을 쓰다보니 이렇게 본인이 판 함정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또 글쓴이는 가치판단이란 단어를 잘 못 쓰고 계십니다.
가치판단은 모든 인간이 그렇게 가야한다고 하는 구속력을 지닌 말이 아닙니다.
한 개인이 세상을 보는 기준인 것입니다.
글쓴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 생각이 남에게 피해를 안준다면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저나 다른 답글 다신 분이 글쓴이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유는
글쓴이가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없이 남의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평가하며 지내다가(속으로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상관없죠.)
글로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다 폄하시켜 버렸습니다.
글쓴이는 단순한 질문이라고 하겠지만 질문도 잘 쓰셔야죠. 생각없는 질문은 의도적인 공격보다 더할 때가 있습니다.
일베1충이 자기 법적인 책임안받고 분탕질을 하기 위해 이상한 질문만 막 해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일베1충은 자기는 질문만 했는데 피해의식에 젖어서 물어뜯을려고 한다고 좋아하면서 일베에 인증도 하죠.
질문이었으면 답글을 통해서는 보충질문이 나와야 하는데, 보충질문보다 자기의견의 합리화만 있었습니다. 그것도 논거 하나도 들지 않고요.
심지어 제가 글쓴이 주장과 연관성 있는 논거 더 많이 들었습니다.
글쓴이는 국가주의 공동체주의 사고방식만 강조하시면서 공동체를 위해 결혼을 해야한다고 하시고 남들 다하는 결혼 왜 안하냐고도 하셨습니다.
이건 "남들 다가는 군대 넌 왜 안갈려고 하냐?"의 말과 다를 바가 없군요.
이번에 임병장, 윤일병 사건 터진거 잘 알잖아요. 국가주의, 공동체주의만 강조한 결과 이렇게 되었잖아요. 사건은 뻥뻥 터지는데 그놈의 이념만 따지니 해결되는 모양새 하나도 안보이잖아요.
국가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결혼을 하잖아요. 아동성범죄 언론에서 막 떠들잖아요. 무섭잖아요. 애 학교 보낼때 되면 초등학교부터 학원보내야 할지 고민이잖아요.
외고나 자립형 사립고 안보내면 애가 평생 뒤쳐져 살 것 같잖아요. 정작 갔는데 다 아이비리그나 SKY 가는거 아니잖아요. 정작 갔는데도 그놈에 취업준비할게 많잖아요.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들어갔는데 뭐 해볼려고 하니 명예퇴직 당했잖아요. 내 아이는 한평생 공부만 했는데 정작 퇴직금 몇푼하고 아내와 대학도 못들어간 자식만 남았잖아요. 내 손자도 이런 악순환에 반복되어 살아갈꺼잖아요. 국가나 공동체를 위해 희생해라고 하면서 정작 희생한 대가는 주질 않잖아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데 왜 자꾸 희생만 하라고 하고 글쓴이도 희생만 하라고 하죠?
국가와 공동체주의를 생각하기 전에 글쓴이가 국가와 공동체의 존재 이유에 대해 먼저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글 마무리 지어보겠습니다. 그런데 마무리 주제도 양이 많을 것 같아서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고통스럽겠군요.
글쓴이는 저에게 인터넷 같은 열린 공간에서 글을 쓸 때에는 겸손함이 깔려야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글쓴이님은 또 저에 대해서 비판을 하셨을 때도 생각없이 단어를 쓰셨습니다.
겸손함이란 단어가 뭘까요? 네 전 글쓴이의 글을 읽고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것이 없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글쓴이의 글의 문제는 독신주의 결혼주의가 아니었던거죠.
그러다보니 지적할 것이 한두개가 아니었고 글쓴이의 근원까지 다 지적해야 되었습니다.
물론 글쓴이의 글에 답글을 단 몇몇 분은 저보다 더 뛰어나신 분입니다.
저는 제 개인적인 필요로 미셀 푸코의 생명관리정치 이론과 조르조 아감벤의 정치철학 이론만 집중적으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철학의 다른 사조에 대해서 크게 알지는 못하고, 알더라도 푸코와 아감벤의 눈으로 바라본 내용을 이야기하죠.
그런데 다른 분들은 저보다 폭넓고 깊은 철학적 지혜를 가지고 계셔 오유 철학게시판에 몇개 글을 쓴 사람으로 이런 분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보다 더 지혜로우신 분이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은 이유는 짧고 간결하게 지적할 수 있는 능력도 있으시겠지만 사회인으로 많이 바쁘셔서 피곤해서 지적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군 전역 후 개인적으로 혼자 집에서 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그분들보다는 시간이 많아서 내가 정리해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제가 겸손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전 이 게시판 속에 저보다 더 뛰어난 분들 많이 봤고 감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의 글이, 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고 답글을 통해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시는 것을 보아 겸손함보다는 자극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못 생각할 수 있는데 의외로 말과 글은 기교가 아닙니다. 오늘 1박2일에서 정준영이 일제강점기 시절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했죠. 정준영은 한국 역사를 아예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 지난주 방송분에서도 일제침략을 돕던 사람이 쓰던 집이라고 하니 기분 나쁘다고 하는 등 모르긴 하지만 모르는데도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죠. 그러한 내용을 오늘 방송분에서 이야기해주는데 지식과 지혜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이긴 하나 듣기는 좋았습니다. 순간적인 감정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더라도 진심이 느껴졌거든요. 최소한 정준영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말과 글로 솔직하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자기 감정만 생각해서 허수아비 논증으로 말도 안되는 적들 몇개 허수아비 세워놓고(발정난 개1, 발정난 개2...) 난사해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난사의 여파가 마구 날아온거죠.
글쓴이는 겸손함이 없다고 저를 표현했는데, 겸손함도 배려의 일종이죠.
그런데 글쓴이는 인터넷 같은 열린 공간에 글을 쓸 때, 글을 읽을 사람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감정만 배설해버렸습니다. 논증은 커녕, 단어정리도 안하고, 인터넷 10초만 검색해도 나올 자료 검색도 안하며, 심지어는 자기가 쓸 글에 대해 기본적인 생각도 안했습니다.
글쓴이는 열린 공간에서 글을 쓰면서 읽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없습니다. 본인이 타인을 배려하지 않아놓고서는 남에게 배려를 묻는 것도 안타깝군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위의 매춘부와 av배우의 차이에 대한 글은 좋더군요. 글쓴이가 고민도 하고 정리도 하고 뭔가 찾아본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등 내용이 맞든 틀리든 인터넷 같은 열린 공간에 좋은 글을 쓰셨고 글을 쓰는 태도를 저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쓴이는 박경철씨의 글을 인용해서 저보고 자기만의 탑만 인정하고 타인의 탑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탑에 살면서 글쓴이의 탑을 보니 15층 쯤에 글쓴이가 살고 계신 것 같고 열심히 TV 보시면서 재미있게 노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상수도관이 터져서 물이 줄줄 새고 있네요. 심지어는 하수도관이 터져서 오물이 콸콸 나와 현관까지 오물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글쓴이가 치킨을 시켰는데 치킨배달하시는 분이 오물을 안 밟을려고 조심스럽게 걸어가네요.
그러다가 소리가 나 밖을 쳐다보니 글쓴이 탑의 엘리베이터가 오랜기간 고장났나 봅니다. 배달하시는 분이 욕하고 갑니다.
이런, 심지어는 무장강도 같은 사람이 글쓴이 탑으로 들어가네요. 글쓴이가 있는 15층으로 갈지 아니면 글쓴이의 짐들이 보관된 다른 층으로 갈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고민하다보니 무장강도 무리들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상황이 뻔히 보인다면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글쓴이는 우리나라에서 인정받는 지식인의 그럴듯한 명언 한줄 달랑 인용하고 절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해 짧은 말을 몰라 이렇게 길게 글쓴이에 대해서 구구절절 안좋은 말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제가 이 오유 게시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온갖 욕을 다 먹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글에 대해 기분나쁘다는 표현은 하셨지만 제대로 응대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글쓴이가 질문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신 것이고 그 선전포고에 진심껏 응했습니다. 말이 너무 길어서 문제지만요.
제가 적었던 글이 공격적인 느낌이 들 수 있다는 것 저도 압니다.
제 글은 글만 길지 별 내용은 없고 영양가도 없어 이 게시판 내에서 묻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가 절 평가한 것처럼 겸손함이 없어보여서 그런지 점점 반대수도 늘어가고 있죠. 이런 말하면 웃기겠지만 전 제가 쓰는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안좋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제가 욕을 먹어서 퇴출당할 수 있겠다는 각오는 되어있습니다. 자유란 것이 그런 것이니깐요. 제가 누린 자유에 대한 책임은 제가 져야죠. 제가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글에 감탄하면서 나도 그들처럼 해봐야지란 객기로 쓴 글이 많은 이들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면 뭐 절필해야죠. 아까 글쓴이의 답글에서 칸트가 언급되었는데 오히려 글쓴이가 절 글쓴이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글쓴이의 입장에 반대하고 그 논리의 허술함을 공격하고 있지만 글쓴이와 제가 사회에서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 글 속에서는 글쓴이를 버려선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저한테 겸손하지 않은 사람으로 끝내버렸죠. 저와 같이 긴 글로 반박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글쓴이는 이제 글을 쓰는 것을 배우는 입장이고 저도 지금 글쓰기를 배우고 있지만 글쓴이보다는 더 많은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해봤습니다. 글쓴이의 머릿속에는 저보다 훨씬 뛰어난 생각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것을 표현하는 것도 약간의 연습은 필요한 과정이라 잘 안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제 인생이야기를 하면 저도 글쓴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습니다. 고3때 다른 친구들이랑 모의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법에 대한 이야기였죠. 전 글쓴이보다 더 한 이야기를 다른 친구들에게 해버렸습니다. 법의 법적 안정성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정의가 피해를 받아도 된다라고 말했죠. 제 말을 풀어쓰면 법을 통해 사람이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제가 말해버린 것입니다. 토론이 저 때문에 멈춰버렸습니다. 왜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전 시험성적은 어느 정도 나왔는데(성적이 어느 정도 나오는 사람들의 토론이었습니다.) 상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친구들에 비해 제가 토론을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부족하고 없는 사람이 자존심만 생기잖아요. 그러다보니 제가 이미 뱉어버린 말을 뒤집을 수가 없다는 생각에 제가 제 함정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불 뻥뻥 차는 이야기 중 하나죠.
그리고 전 경남 부산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 때까지 부산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새누리당 텃밭이었죠. 생각이 없던 저는 성적이 어느 정도 나오니깐 당연히 정치권 진출하면 고향에 새누리당 공천받아서 국회의원하면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되지도 않을 환상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서울로 대학진학을 했고 신입생 OT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운동권이나 진보진영이 자기 홍보를 안한다 그러니 보수진영에게 항상 진다는 드립을 쳤습니다. 어떤 한 여학생이 저의 이야기에 기가 차 하면서 반박을 했는데, 그 여학생은 그 후 저를 아는 척 안하더군요. 대학을 다니면서는 제 생각이 이상했다는 느낌은 받았으나 정확하게 뭐가 문제인지는 몰랐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한창 운동권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그러다보니 제가 보고 듣고 배울 곳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몇몇 친구들하고는 말다툼을 좀 했죠. 그래도 어떤 친구는 저에게 “넌 착하고 창의성도 좋은데 생각이 없어. 그릇에 좋은 걸 채우면 될껀데 그릇이 텅텅 비었어.”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그러다 20대 중반 시간이 잠시 남아 서점에 갔는데 이전에 괜찮게 생겼던 과 여학생이 도서관에 들고 다녔던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생각나서 그것과 그냥 지나가다 보인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같이 사서 읽었습니다. 그러다보니 20여년을 산 제 인생이 잘 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난 단지 생존에 적응한 존재구나. 삶에 대한 고민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구나. 이때까지 했던 고민은 단지 개똥철학으로도 쓸 수 없었던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정작 푸코와 도킨스는 궁합이 안맞는 사람들인데 제가 그걸 읽고 깨달았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외입니다. 푸코를 중심으로 읽다가 좋은 스승님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와 책을 추천받고, 추천한 책을 읽다가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군대에 들어가니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던 병사들이 많아(병사들도 부사관은 고졸이란 생각에 자기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경우 많잖아요.) 당직 설 때마다 그 친구들이랑 끝장토론 자주하고, 만신창이 만들어버리고, 과자나 치킨 먹으면서 회포를 풀기도 했네요. 제 경험도 있고 몇백명의 20대 초반의 병사들을 만나다보니 그 시기가 되면 어떠한 편견에 사로잡히는지 등 몇가지 사례를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중2병의 연장선이죠. 자기 학벌이 높은거지 지식과 지혜가 높은게 아닌데 학벌가지고 토론하려는 일베1충 간결 같은 부류가 거의 대부분이고, 골수 일베1충도 종종 있었습니다. 한때 당직병이 20-50클럽가지고 옳다고 따지길래 제가 제 폰 던져주고 한시간 안에 20-50클럽 근거자료 하나라도 찾아봐라고 했죠. 한시간이나 주니 야동사이트 뒤지고 난리가 났던데 가만히 놔뒀다가 한시간 뒤 결국 조선일보에서만 통하는 자료라는 것을 알고 웃고 넘어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전 다른 사람들보다 좀 많이 늦었습니다. 남들은 진보와 보수를 구별할 줄 알았는데 정작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었죠. 그러나 남들보다 달랐던 점은 남들은 그걸 유행처럼 즐기고 버릴 때 전 계속 꾸준히 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여기서 말하긴 그렇지만, 위대한 업적은 아니지만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오~ 철학적, 정치학적 이론으로 술맛이 나네~ 란 소리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어렸을 때 나같은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대에서도 저의 과거와 똑같은 녀석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인터넷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줬으니깐요. 그 이야기 만드는 대표적인 원리가 제가 자주 썼던 억측이긴 하지만요.
전역하고 철학게시판을 눈팅하니 저보다 뛰어난 사람도 많았지만 과거의 저와 같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제가 했던 과오를 저지르고 있지만 최소한 내가 깨달았던 것보다 1분만 빨리 깨달아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깨닫기 싫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질문을 통해서 깨달음을 요청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공격적이긴 하지만 글 몇 개를 여기 적기도 했던거죠.
제 신세 한탄만 했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글쓴이의 상태가 많이 안좋은 상태이긴 하지만 저도 그 나이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나도 해봤다.’라는 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주 쓰는 말인데 그 분은 잘난 척의 의미, 불만이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해라는 입을 막는 의미, 그리고 젊은이들을 적자생존 속에 빠뜨리는 의미로 사용했고, 저는 부끄러움의 의미, 불만이 있는 사람에게 위로를 하는 의미, 적자생존에서 빠져나가거나 그 속에 있으면서도 좌절하지 마라는 의미로 쓰는 것 같습니다. 정작 근거는 없는데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병사들에게 잘 썼거든요. 그런데 증인도 없군요. 넘어갑시다. 지금 오유 사이트로 글쓰다가 양이 많아져 한글로 복사해서 쓰고 있는데 글쓴이는 이미 원문 글을 지우셨더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쓴이에게 남기는 글이니 계속 쓰고 제가 새롭게 글을 올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전 글쓴이가 제 긴 글을 어떻게든 반박하려다가(잘 쓴 글이 아니라 제 수준이 요모양 요꼴이라 반박할 구석은 많습니다.) 또 다른 함정에 빠질까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제가 법이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다고 했던, 진보진영에 대해 헛소리를 했던 그런 흑역사처럼 말이죠. 처음에 글을 쓸 때 글쓴이가 저에 대한 반박글을 준비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냥 그것을 가정하고 글을 쓰겠습니다. 글쓴이에게 지금 제 글에 대한 반박보다 다른 분의 글에 대한 반박보다 더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고민입니다. 세상에 가장 위험한 말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정작 당연한 것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이 없죠. 위험한 내용이 그렇게 당연한 듯이 전파되면 우리는 가랑비 옷 젖는 듯이 당할 수 밖에 없고 우리 삶 속에 그런 경우도 쉽게 찾을 수 있죠. 대표적으로 신자유주의 담론이잖아요. 전 글쓴이와 다르게 예시 하나는 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좋다고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우리나라도 신자유주의화 되었는데 신자유주의화는 사실 자연주의화죠. 적자생존. 강자는 마음껏 잡아먹을 수 있고 약자는 마음껏 도망갈 수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죠. 이 이상한 것이 자유란 단어 속에서 세탁이 되어서 그 의미가 변형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말하지만 그것이 자유가 아닐 수 있는거죠.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라는 책을 보면 몇 페이지 안 읽었는데 이런 이상한 자유로만 도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카시즘을 통해 잘린 공무원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에 다시 취업 못해 굶어죽을껀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장사해서 먹고 살 수 있지 않냐 자본주의 자유주의 만세 란 구절은 부당하게 잘린 것은 아무 말도 없이 그 사람의 노력을 자유주의의 노력으로 그냥 가져가 버리는 어이없는 경우죠. 그런데 서울대 법대 나오고 판사까지 한다는 사람이 번역해서 위대한 책이라고 극찬을 하니 이건 프리드먼이나 번역자나 한숨 밖에 안나오더군요. 학력이 지식과 지혜를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근거를 얻은 것입니다. 노벨상이 그렇게 위대한 상은 아니라는 근거도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적지만 글쓴이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상당수의 것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변호인에서 나온 명언 “국가는 국민이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죠. 그러나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우는 내용은 국가주의와 공동체주의,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껀데 정작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입니다. 결혼도 국가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보니 민법적으로 여러 가지 혜택을 주고 있죠. 위자료 청구권, 재산분할 청구권을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혼인신고만 안한 사실혼도 이와 유사한 민법적 보호수단이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도 권장해서 이런 수단을 준 것이지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죠. 글쓴이도 하면 좋을껀데와 해야 한다에 대해 혼동이 온 것이고 그 혼동의 근거는 글쓴이가 살면서 고민이란 것을 별로 안했다는 것이죠.
오히려 전 저 또는 다른 분에 대한 반박글보다 잠시 이 주제에 대해 놓고 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생이신 것 같은데 내일부터 개강이죠? 개강하고 친구들 만나고 술도 좀 먹고, 쉬면서 하루에 1초 정도만 고민해보시면 우리 뇌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곳이라 쉰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의 정리는 어느 정도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제 글이 기분 나쁘시겠지만 받아들일 부분도 있을 수 있죠. 사실 저와 글쓴이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므로 저에 대해서 증오의 감정을 품으셔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이 녀석 말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겠다.’ 이런 생각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거죠. 일본 극우주의자가 만든 힐링만화 ‘호텔퀸시’에서 보면 ‘삶에 대한 원동력 중 증오도 가능하다. 증오를 통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면, 잃는 것에 대해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것도 좋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적는데 이런 식의 대사가 있었습니다. 네, 이렇게 살아가셔도 좋습니다. 어느 순간 좋은 논리가 생각나셔서 글을 적으면 그때까지 제가 공격적인 어투로 구설수에 올라 퇴출되지만 않는다면 저 뿐만 아니라 저보다 뛰어나신 다른 분들이 또 글을 적겠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글쓴이는 지금 대학교에서 잘 나가시는 분 같은데 글쓴이의 글과 생각만 봤을 때는 안타까운 수준입니다. 그러나 그 안타까운 모습이 제 과거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도와주고도 싶었습니다. 만날 수도 없는 분이고, 뭐 만나고 싶지도 않으시겠고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인 성심성의껏 글쓴이의 글과 생각을 분석하고 발가벗겨버렸습니다. 부끄러움은 한 때지만 성숙은 영원하다는 생각이었죠. 친구들이랑 즐겁게 놀고, 즐겁게 연애하고 즐겁게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루에 1초 정도는 고민해주시기 바랍니다. 1초란 말이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뇌는 신비로워서 1초만 고민해도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몇시간 고민보다 1초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뵙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