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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4개월된 주부입니다.
어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어이없는 일을 당하여 글을 올립니다.
어제 오후 12시 40~1시경, 잠실~사당 방면 2호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약간 서 계실 정도) 노약자석에는 술취한 젊은 남자 1명 외에는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임신 4개월이면 한참 입덧중인 사람도 있고, 입덧이 끝났어도 어지럼증이 심하기도 하고 자궁이 커지면서 다리혈관을 압박해서 오래 서 있기 힘든 때입니다.
제가 지금 한참 그럴 시기입니다. 그래서 노약자석에 앉았습니다. 남편은 제 앞에 서 있었고, 몇정거장 지난 후에도 노약자석이 꽉 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50대 중후반으로 보임)께서 한소리 하셨습니다. 직접 말씀하신 게 아니라 궁시렁 거리는 투로 들으라는 듯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요지는 젊은 사람들이 어른이 와도 자리를 안 비키고 앉아있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저희 남편이 "아저씨, 이 사람 임산부에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대뜸 "내가 임산부인줄 알았나? 먼저 말을 해야지!" 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은 더이상 상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억울한걸 못참는 저는 조곤조곤 말씀드렸습니다. "아저씨, 제가 임신해서 어지럽고 서 있기가 힘들어서 앉았어요, 원래 초기임산부가 더 어지럽고 더 힘들어요"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또 "누군 임신 안하고 사나? 옛날에는 둘셋씩낳고 일하고 살았어!(논일, 밭일을 말하는 듯)" 이러셨습니다.
대화가 안되는 수준이었습니다. 남편이 어이없어서,
"그럼, 저희가 지나가는 어르신들께 일일이 '임산부에요, 임산부에요' 말씀드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아저씨는 "당연하지! 안 그러면 어떻게 알아!" 하셨습니다.
저는 지하철과 보건소에서 나눠주는 임산부 마크를 가방에 가지고 다닙니다. 지하철을 혼자 타는데 노약자석에 눈치보고 앉아야 하면 가끔 그 마크를 가방 밖으로 꺼내놓고 앉습니다. 하지만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 날은 남편도 함께였고, 노약자석도 자리가 남아도는 상태여서 마크를 안 꺼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마크를 꺼내놓고 있었다고 해도 이 아저씨는 그게 임산부 마크인지 못알아봤다고 말할게 뻔한 태도였습니다.
몇마디 더 주고받아 언성이 높아지고 사람들이 쳐다보고 저는 울음이 나왔습니다.
방배역쯤 되서 그냥 내리려고 일어서는데 아저씨가 또 한마디 하셨습니다. 자기도 안 앉았는데 젊은 사람이 앉아있었다는 겁니다. 어른들 앉으시라고 자기도 안 앉았는데 제가 앉아 있는게 보기 싫었다는 겁니다.
아니, 자리가 모자란 것도 아니었고, 임산부라 앉아 있었던 제가, 당신이 안 앉으신 이유까지 눈치보며 있어야 합니까? 안 앉으신 건 그 아저씨 자유잖아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저씨, 아저씨 따님이어도 이렇게 말씀하실 거에요?" 했더니,
아주 당당하게 "당연하지! 어른이 왔는데 일어나야지!" 이러십니다.
저희는 노약자석 바로 옆 출입구 앞에 서서 남편은 계속 저를 달래고 (흥분하면 아기한테 안 좋으니까요)
저는 너무 억울하고 어이 없어서 계속 울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임신한게 죄입니까? 노약자석은 '노'자와 '약'자가 함께 사용하는 곳이고, '약자'중에는 장애인, 아이, 임산부가 모두 포함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겉으로 티나지 않는 초기임산부를 배려해달라는 포스터도 곳곳에 붙어 있습니다. 왜 똑같은 세금내고 당당한 권리를 이용하는 데 다른 사람 눈치를 봐야 합니까?
아저씨는 저희가 있는 곳보다 바로 옆쪽 출입구쪽으로 가더니 저희와 같은 방배역에 내렸습니다. (저희를 따라 내린건지 원래 내리려던 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내린 직후에 사람들이 계단쪽으로 빠져나간 직후에 저희한테 오시더니 "미안합니다" 한마디 툭 던지고 지나가셨습니다.
정말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저씨 뒤에다 대고 소리쳤습니다. "아저씨, 그 말씀은 아까 열차 안에서 하셨어야죠. 창피 줄거 다 주시고 나서 왜 내린다음에 그러세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다시 뒤돌아서 삿대질하는 포스로 이러시더군요.
"이봐, 나도 존심이 있어. 아들딸 며느리도 있는 사람이야!" 하고는 다시 돌아서 씩씩하게 가버리셨어요..
마지막 말로 유추해보니... 분명 당신이 미안한 마음은 느끼고 계셨으나 열차 안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할거 같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저씨 딸이어도 그러시겠느냐는 질문에도 당당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임산부라고 먼저 말했어야 한다는 어이없는 논리를 폈던 것 같습니다.
그 아저씨가 차라리 열차 안에서 미안하다고 하셨으면 더 멋져 보였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바란다면 아예 처음부터 저희에게 차분한 말투로 "어른들이 계신데 젊은 사람이 비켜드리는 게 어떻겠나?" 하셨으면 저도 임산부라고 기분나쁘지 않게 이야기할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이게 옳은 대화법 아닌가요?) 왜 어른들은 대놓고 말을 못하고 궁시렁거리듯이 뒤에서 들으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까요? (심지어 맞은편 노약자석에 술취해 기대있는 젊은 사람에게는 한마디 못꺼냈으면서) 왜 임산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른공경 안하는 나쁜 X가 되어야 하냔 말입니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 안하시나요? 제가 임신한 걸 알고 나서 2~3달간 지하철을 타면서, 그것도 정말 힘들거나 일반석에 자리가 없을 경우에만 노약자석에 앉는데... 이런 비슷한 일을 벌써 몇번째 겪습니다.
저희 남편은 독거노인분들 집도 고쳐주고 무료로 영정사진도 찍어드리는 봉사를 오래 해 왔습니다. 어제 이 일 이후로 그러더군요. 자기도 어떻게 보면 노인복지에 일조한 사람인데 참 씁쓸하다고...
대체 노약자석의 정체가 뭡니까? '노'자의 기준은 뭔가요? 65세 이상?
이제 점점 고령화사회가 되어가고, 젊은 사람들의 생산력으로 함께 먹고 살아야 하는 세상인데, 노인들이 젊은 사람들을 대하시는 태도가 이렇게 부정적이기만 하시다면... 앞으로 사회 곳곳에서 갈등거리만 더 커지지 않을까요?
모든 어른들이 다 이러신 건 아니라는 거 압니다. 이렇게 시비걸기 좋아하는 분들은 유독 다른 곳에서 존경받지 못하거나 가진게 없는데 자존심이 쎄신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에 유교는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 근거와 방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존경받고 싶은 사람들이 독점해버린 노약자석을 어떻게 임산부, 장애인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부터 노약자석을 생각할때마다... 그 필요성과 효율성에 의구심을 가져왔습니다. 일반석에 앉아 있어도 어른이 오시면 일어나야 된다고 배웠는데... 지하철을 이용객 중에는, 젊지만 사회에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그 자리 수가 7:3이라는 것도 비효율적이지 않나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노약자석이 가지는 상징성, 그나마라도 있어야 젊은 사람들이 노인에게 자리양보하는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시한번 들여다 봅니다.
지하철에는 노약자석과 별도로 '임산부 지정석'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은 모릅니다.
버스에는 7:3보다 더 많은 비율로 노랑색 노약자석이 있고, 분홍색 임산부지정석도 1개 있습니다. 하지만 버스에서는 노약자석은 일반석보다 안전한 자리에 정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고, 무조건 비워놓기 보다는 일단 앉아 있다가 어른이 오시면 비켜드리는 풍조가 (지하철에서보다는)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유독 지하철에서의 '노약자석'에 대한 인식이, 존경받고 양보받고 싶은 어른들의 권위의식과 맞물려 그 본질을 훼손하고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산부에 대한 배려인식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서 그럴까요? 그럼 우리 사회가 좀 더 고령화되어 젊은 사람들의 비율이 적어지고, 젊은 사람들이 좀 더 힘들게 사는 모습이 보여지면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정책적으로,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저는 1~2개월 후면 눈에띄게 배가 불러올 테지만, 노약자석에 앉기 위해 뱃속 아이를 도구로 삼고 싶진 않습니다. 여전히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어른들은 있으실 테니까요.
어제 이 일을 겪고 나서 지금까지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임산부라 약도 못먹는데...
정말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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