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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게 다야? 확신해?”
디애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준석을 다그쳤다.
“이 판국에 와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어. 그나저나 너는 누구야?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준석은 디애나에게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입에서 흐르는 피는 아직 채 멎지 않았지만 상태가 지속되다보니 어느 정도 말하는 건 익숙해진 터였다. 발음이 비교적 또렷했다. 다시 망치가 날아들지 않을까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그저 가만히 서서 노려볼 뿐이었다.
“네가 죽인 여자의 언니.”
“언니라고?”
“배다른.”
준석은 그제서야 상황이 깔끔하게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인도네시아는 법적으로 무슬림에 한해 일부다처제가 허용됐다. 지금 젊은 세대는 그것이 제도상 가능하다고 해도 의식의 변화로 인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과 지금 그녀의 아버지 세대 정도만 넘어가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선 자매라고 해도 얼굴이 이렇게 판이하게 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디애나는 호텔 방 구석에 놔둔 커다란 검은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핑크색 노트 한 권을 집어들더니 준석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노트는 딱 소리를 내며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너는 네 스스로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버렸어.”
준석은 떨어진 노트 윗부분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그것은 일기였다. 경찰 조사 시 그녀의 방에선 특별한 게 발견된 게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저런 것이 있을지 몰랐다.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물었지. 너 사람이 왜 암에 걸리면 죽는지 알아?”
“무슨 소리야?”
“치료를 제 시간에 받지 못하기 때문이야. 초반에 발견해서 방사선 치료를 하거나 절개를 한다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인데도, 검진을 늦게 하거나 돈이 없거나 혹은 건강 관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이미 아! 암이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는 전이가 될 만큼 돼서 손도 쓸 수 없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지. 나에겐 네가 암덩어리로 보여. 인도네시아의 암!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제거하는 게 맞을 거 같아서.
나도 너를 처음부터 이렇게 해보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야. 멀리서 지켜보고 또 지켜봤지. 대체 어떤 새끼인지 궁금했거든. 덕분에 너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 너 지난 주에 사람도 하나 쳤지?”
준석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걸?”
“그 피해자가 어떻게 됐는지가 먼저 궁금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너는 궁금하지 않은 거 같지만 사실 그 분 잘 살아있어. 지금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 가해자를 신고해야 하지 않냐고 길길이 날뛰는 걸 입막음한다고 고생했어. 내가 왜 그를 입막음했냐고? 네가 인도네시아 감옥에서 편히 지내는 꼴이 보기 싫었으니까.”
준석이 클럽에서 그녀를 본 그 날, 이미 디애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보고 다가오려고 했을 때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헷갈렸다. 도대체 자신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준석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자신도 모르게 그를 뒤쫓았다. 그녀는 이미 그의 집이 위치한 곳도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평판, 자주 가는 곳, 좋아하는 것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준석의 차가 시골길에 접어들었을 때 사람을 들이박는 걸 목격했다. 그녀의 차는 눈에 띄지 않게 떨어져서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는 눈치채듯 못한 듯 바로 차로 올라타 줄행랑을 놓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려 피해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차에 치일 때의 충격 때문인지 심장이 뛰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긴급히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머리를 젖히고 코를 막은 뒤 입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다시 흉부압박,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컥컥, 다행히도 다시 피해자가 숨을 내뱉고 괴로운 듯 몸을 뒤척거렸다. 그녀는 재빨리 피해자를 자신의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다행히 피해자의 상태는 밤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치곤 비교적 멀쩡했다. 다리에 골절 정도를 제외하곤 비교적 가벼운 타박상, 심정지 또한 평소 가지고 있던 심장질환 때문인 듯했다. 준석을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설득했다. 자신은 그의 친구이고 고의가 아닌 이상 피차 어렵게 갈 거 없지 않냐고 이야기했다. 비교적 거액의 돈을 위로금으로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이미 준석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그 사고는 실수였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술을 마시고 운전하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염두에 뒀어야지. 그리고 그런 일 때문에 도망을 친 순간 네 인성의 밑바닥을 봤다.”
준석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자! 이제 이거 읽어봐야겠지, 일기장. 네가 못 읽을 거 같으니까 내가 읽어줄게. 그 사건과 관련된 일이 있던 순간부터 읽으면 되겠지.
그 날은 오빠가 찾아온 날이었다. 나는 아이의 태교를 위해 모짜르트 교향곡25번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미카는 그 날 수업이 없는 날이었고 집에 앉아서 모짜르트 교향곡을 들으며 한국에서 나온 태교용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아이를 혼자서라도 반드시 낳아 키울 생각이었고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고 굳은 다짐을 백 번은 넘게 했다. 낡은 CD플레이어 기계가 갑자기 이상을 일으킨 듯 지지직 잡음이 섞여 들려와 그녀가 기계를 손으로 톡톡 치던 그 때, 준석이 문을 박차듯 열고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방은 굉장히 좁았다. 침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스펀지에 천을 입힌 잠을 자기 위한 공간 이외에는 그녀의 신발, 가방, 책 등을 제대로 수납할 공간조차 없어 물건들은 공간 좁은 구석구석에 쌓여져있었다.
그녀가 아끼는 태교용 책과 CD플레이어는 그녀가 잠자는 공간 바로 위에 놓여져있었기에 준석의 눈에 바로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준석이 그 물건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뭐긴 뭐야. 태교용 책. 그리고 저건 음악을 듣기 위해서 샀어. 내가 알다시피 스마트폰이 없잖아.”
“애기 지우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그건 오빠만의 생각이었겠지. 나는 분명히 이야기했어. 애기 낳을 거라고. 이 애기는 오빠의 애기이기 이전에 내 아이고 내 모든 것이야. 아무도 건드릴 수 없어.”
그들이 임신 후 다투기 시작한 이후로 미카는 준석을 오빠라 불렀다. 준석은 순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CD플레이어를 집어들어 바닥으로 내던지고 태교용 책을 양손으로 갈기갈기 찢었다. 지우라고 했잖아, 지우라고 했잖아! 미카는 그저 양손으로 귀를 막고 가만히 서있었다.
한참을 소리를 지르던 준석이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자 미카는 이제서야 귀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이제 다 했어? 그럼 나가. 애기한테 안 좋아.”
“나는 분명 지우라고 경고했어. 그리고 그게 너한테도 좋을 거라고, 수십번, 수백번 이야기했는데 왜 너는 씨발 븅신처럼 말을 못 알아듣니. 애 지우는 비용도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대체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나 오빠한테 바라는 거 하나 없어. 그냥 내 인생에서 사라져주면 돼. 나랑 결혼 안 해도 되고, 애기를 낳고 나서 양육비 같은 것도 하나도 안 줘도 돼. 어차피 오빠도 책임이니 애기의 행복이니 뭐니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냥 두려운 거잖아? 나나 애기가 오빠 인생에 발목 잡을까봐, 그렇지? 만약 애기를 지우고 싶다면 그 전에 나를 죽여. 이 배를 찌르고 죽이란 말야! ”
미카는 준석을 지지 않고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앉아서 다시 찢어져 나간 책을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준석은 지갑에서 돈을 몇 장 꺼내더니 그녀의 얼굴 위로 집어던졌다. X발년! 이걸로 다시 사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그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 날 밤 준석은 민성이 운영하는 노래방에 놀러왔다. 맥주를 마시며 그는 민성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큰 일이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정말 힘들다. 참 피임 한 번 실패했다고 이런 일까지 생기다니·····.”
“그러게 말이다.”
“혹시 그냥 애기 낳게 내버려두고 그냥 연락처도 바꾸고 아예 모르는 척 지내면 어떨까?”
준석은 맥주를 한 잔 마시며 짐짓 민성에게 물었다. 민성은 아무 말없이 준석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고 고개를 슬그머니 저으며 말했다.
“걔네 집 찢어지게 가난하다며. 너 여기 세계 잘 모르지? 우리 가게에도 애 있는 엄마들 많다. 아빠가 바람나 도망간 집구석이나 이혼한 집구석, 그리고 결혼도 아직 못해본 집구석. 다 여기로 모인다. 그럼 걔 집도 가난하고 얼굴은 그나마 반반한데 애 낳고 나면 어떻게 할까. 이제 돈이 모자라지? 똑같애. 그럼 걔도 여기로 오게 돼있어. 나중에 S03번 미카, 뭐 이쯤으로 불릴 거라고 그리고 밤마다 한국인 아저씨들 오면 가슴이랑 다리랑 주물럭 주물럭 거릴 거고. 가끔 2차도 뛸 거고. 그런 환경에서 애가 자라게 될 텐데······.”
“그럼 어떡하지 진짜?”
준석은 한숨을 내뱉더니 민성에게 갑자기 소리쳤다.
“아, 골치 아픈 생각은 내일 하고 오늘은 놀려고 온 만큼 놀자. 여기 끝내주는 애들 많다며? 애들 재밌게 잘해주냐?”
“그럼 인도네시아 한국 노래방 중에선 우리 집이 서비스도 최고지, 얘, 애들 불러와라. 콘테스트다.”
민성이 손짓을 하자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마담이 밖으로 나가더니 어린 여자애들을 데리고 왔다. 그들이 앉은 방은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한 소파가 세 개 정도나 들어가있는 큰 방이었는데 여자들이 들어오자 방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능숙한 한국어 발음으로 허리를 숙이며 다 같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 풍족한 느낌에 준석은 미소 지으며 여자들에게 여기저기 손짓을 했다.
사흘 뒤, 준석은 그녀에게 폰으로 블랙베리 메세지를 보냈다. 스마트폰이 아닌 블렉베리 전용 폰으로였다. 생각이 바뀌었어,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자. XX앞에서.
미카는 그 자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준석은 미소지으며 그녀를 차 옆자리에 태웠다. 하지만 미카는 준석의 차에서 이상한 느낌을 느꼈다. 뒤에서 뜨거운 숨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전해져오고 있었다. 뒷자리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지만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에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이지마, 그리고 닥치고 있어. 어느새 그녀의 목에는 칼끝이 겨눠져있었다.
“뭘 하려고 하는 거야, 오빠.”
“병원 갈 거야. 너도 나중에는 이 결정에 만족하게 될 거라고.”
“미친 새끼.”
목끝에 겨눠진 칼 때문인지 혹은 사람에 대한 큰 배신감 때문인지 그녀는 가만히 있었고 끝내 중절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지 일주일 후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맸다. 사체는 그녀와 같은 건물 안에 사는 다른 방의 친구에 의해 발견됐고 수사는 간단하게 자살로 종결되었다. 준석은 남자친구이자 사건 관계자로 조사를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의 방에서는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녀는 죽기 직전에 어느 누구에게도 인사말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랬는 줄 알았는데 사실상 유서와 다름없는 죽기 직전까지 써왔던 일기장이 지금 드러난 것이었다. 그녀의 일기장 마지막에는 준석을 원망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단지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큰 상실감과 슬픔만이 있었다. 일기장의 끝자락을 다 읽고 덮으며 디애나는 준석의 따귀를 힘껏 후려갈겼다.
“쓰레기 새끼.”
“그래, 나를 욕해. 괜찮아. 난 쓰레기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봐. 이미 지나간 일이야. 여긴 사성급 호텔이야. 이미 엘레베이터를 타고 우리가 올라가던 모습, 나와 함께였던 모습, 여기 다 기록돼있어.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살해당하면, 너는 어떻게 될 거 같아? 감옥에 끌려갈 거야. 그리고 미카가 그걸 안다면 얼마나 또 슬퍼할까. 네 분노는 이해하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이해한다고 하지마. 그리고 네 더러운 입에서 내 동생 이름을 팔지도 마. 그리고 이제쯤 되면 눈치챘을 때도 됐을 텐데, 너 참 둔감하구나? 내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네가 만들어낸 피해자를 진정시키고 네 정보등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 같아? 나 인도네시아 로열 패밀리야. 씨발아. 네가 그렇게 무시하고 짓눌렀던 내 동생과 나! 너 조코위 도도와 함께 경쟁했던 프라보오 대통령 후보는 알지? 그 후보 오른팔이 우리 아빠야. 몰랐지? 그래, 알았으면 그런 짓은 안 했겠지. 너같은 거 죽이는 건 내 손에선 일도 아니야. 너 오늘 여기서 죽어도 내가 감옥에 들어갈 거 같아? 너같은 약쟁이는 길에서 총살시켜도 아무런 말도 못할 걸? 그리고 나는 아침에 독일로 떠날 계획이기도 하구. 하! 말이 길었고, 그럼 여기서 그만 끝내자. 판결은 사형!”
준석에게 성큼성큼 다가선 그녀는 그의 고추를 움켜쥐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물건을 주물럭대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석은 흥분은 커녕 하지마, 하지마 비명만 내지를 뿐이었다. 그녀의 다른 한 손에는 가위가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추가 이내 하늘을 지탱할 기세로 치솟자 그녀는 재빠르게 가위로 그것을 자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잘리지가 않아 그녀는 여러번 비틀며 잘랐고 그는 그때마다 눈을 까뒤집으며 괴로워했다.
그것이 다 잘려나갈 때쯤 그녀의 이마에는 피가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준석은 비명을 너무 지른 나머지 목소리마저 다 나가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디애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말 안 했지? 나 독일에서 무슨 일 하고 있는지, 나는 의사야. 그리고 그건 이런 걸 할 수 있게 해주지.”
그녀는 가방에서 주사바늘을 꺼냈다. 그 주사엔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준석은 안 돼! 안 돼 새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 순간 방이 들썩거릴 만큼 큰 소리로 전화음이 들렸다. 준석의 전화였다. 그녀는 빠르게 다가가 폰을 잡았다. 폰에는 전화와 함께 아까 함께 술을 잠시 마셨던 준석의 친구 민성의 사진이 들어가있었다.
“하! 쓰레기에게도 쓰레기 친구는 있구나. 전화 받아.”
준석은 의문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전화를 받아서 딱 다섯 마디만 말해. 그리고 네가 죽기 전까지 그가 너를 구하러 온다면 너는 생존, 콜?”
디애나는 준석에게 전화기를 켜서 건네며 그의 가슴을 한 차례 손으로 훑더니 단박에 가슴에 칼을 꽂았다. 준석은 뿌우 다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입에서는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나올 뿐이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민성은 왜 그래, 준석아, 왜 그래!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이내 디애나가 핸드폰을 다시 가져와 바닥에 힘껏 집어던졌다.
“자, 이제 끝이야. 너 같은 쓰레기에게도 소중한 가족과 소중한 사람이 있겠지. 내가 그녀를 구할 기회가 있었듯, 그들에게도 너를 구할 기회 정도는 줘야겠지. 만약 죽으면, 미카에게 가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라.”
그녀는 준석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기를 왼쪽으로 켜니 따뜻한 물이 뺨 위로 쏟아졌다. 그녀는 얼굴과 몸에 난 피를 물과 비누로 씻어내리며 미카를 처음 만난 순간을 생각했다.
처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직 10살 초등학교를 다니던 꼬마였다. 그녀는 8살,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녀의 행색은 지나치게 남루해보였다. 티셔츠는 목이 늘어난 것은 물론,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고 원래 분홍색이어야 했을 옷은 시커멓게 때가 껴있었다. 그리고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나를 언니라 부르고 우리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라고 시켰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병적으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날 이후로는 깨끗하게 샤워를 해서 몸에서 악취가 안 나게 되었지만 항상 지독한 악취가 나는 더러운 배에서 나온 악마같은 계집이라며 놀렸다. 나에게는 저런 년과 어울리면 안 된다고 따끔히 경고했다. 아버지가 함께 있을 때도 티나게 괴롭히는 편이었는데, 없을 때는 더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엄마의 모진 말과 밥상에 위치할 때도 바닥에서 먹게 하는 둥의 처우에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당시 우리집은 집 뒤쪽에 별채가 또 있었는데 그녀는 거기 혼자 기거했다. 엄마가 얼굴 보기 역하니까 최대한 먼곳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게 반영된 탓인 듯했다. 나는 어떤 편이었냐면 방관자였다. 하지만 가끔은 그렇게 욕을 듣고도 방실방실 웃기만 하던 그녀가 신기해서 그 방을 넘본 적도 있었다.
그녀의 방안에는 에어컨도 없었고, 선풍기 한 대와 티비 한 대만이 달랑 놓여져있었다. 엄마랑 마주치지 않는 순간은 그녀는 온종일 티비를 보고 있었다. 티비에선 알 수 없는 언어가 들려오고 있었다. 뒤늦게 알았는데 그것은 한국 드라마였다. 가끔은 그 티비 말소리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도 울 줄 알았던 것이다. 다만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는 운 적이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게 된 건 그녀의 성적표가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보고 나서였다. 중학교로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국제학교로 진학했고 그녀는 일반 무슬림계 학교로 진학했다. 나는 그 무렵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 날 성적이 떨어져 낙담하고 있었는데 버려진 성적표를 보고 아, 이거다! 하고 기회를 잡은 느낌이었다. 나를 향해 올지도 모를 비난을 돌릴 비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주워올린 성적표는 웬 걸? 전과목 A가 찍혀있었다.
나는 당장 성적표를 주워들고 찾아가 그녀에게 따졌다. 왜 성적표를 숨기려 했니, 성적도 잘 나왔잖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 엄마는 내가 멍청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부터 그녀는 집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엄마는 오히려 역겨운 얼굴 안 봐도 좋으니 잘 됐다며 콧방귀를 꼈다. 가끔 아버지가 그런 엄마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한 걸 보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힘의 역학 관계가 둘 사이에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녀는 항상 밤 늦은 시간 남들이 잘 때쯤 되서야 들어왔다. 손에는 가끔 책을 들고왔다. Tata bahasa korea, tata bahasa englis 등 외국어 관련 서적이었다. 그리고 그걸 가져온 날이면 방에는 밤새 불이 켜져있었다. 나도 가끔 엄마 몰래 그녀의 옆에서 공부를 하곤 했지만 그녀의 학구열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녀가 대학교 들어갈 무렵, 집에서 독립하겠다고 이야기 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가 혼자서 해온 일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그녀는 자카르타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방으로 독립을 했고 나는 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
그녀가 독립을 하고 내가 해외로 유학을 간 후에도 우리는 가끔 연락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부분도 왠지 있는 것 같아 용돈을 챙겨주려고 했지만 언제나 마다했다. 남자친구가 생긴 것은 알고 있었다. 잘 사귀길 진심으로 바랐고 그 날 그녀에게 얘기하지 않고 그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수준에서 돈을 송금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그녀에게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한지 일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당시 막 취직을 해 바빠하던 시간이라 그냥 어물쩡넘어갔다.
그녀의 부고 소식을 들은 건 인도네시아 휴가차 넘어와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서 당시 자취방에서 들고 있던 물건들을 보았고 그 사이에 일기장이 있었다. 아버지! 왜 이걸 경찰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엄마! 엄마는 대체 왜! 엄마는 그깟 년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고 아버지는 침을 한 번 삼키더니 근본도 모르는 천박한 남자와 어울린 소문이 나면 안 된다고 너도 입 조심하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다지 친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죽음이 제 3자로서 보기에도 너무 비참하고 불쌍했다. 거기에 감정을 대입하면 너무 슬퍼졌다.
그리고 그 날부터 나는 독일 병원에 장기 휴가를 내고 일기장에 적힌 남자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디애나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을 때도 준석은 여전히 숨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상태는 좋지 않았다. 숨소리가 심하게 거칠어져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칼날이 허파를 찌른 모양이었다. 피가 이미 온몸을 적셨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디애나가 옷을 챙겨입고 나가는 걸 보았지만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택시를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가씨?”
“공항으로 가요. 아, 담배 한 대 펴도 되죠?”
그녀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며 미카와 나눴던 블랙베리 메신저를 읽었다. 그 중 한 구절이 눈에 다시 들어왔다.
- 나 한국 남자친구 생겼어, 언니.
- 그러니? 축하한다. 데이트하려면 돈 필요할 텐데, 언니가 부쳐줄게.
- 아니, 아니 됐어. 남자친구가 내 상황을 잘 이해해서 큰 돈이 없어도 돼.
- 그래? 남자는 괜찮고?
- 응,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날 사랑해주는 남자야.
“등신같은 년.”
“네, 아가씨?”
“아니에요, 어서 가주세요.”
택시는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아침 햇살을 가르며 앞으로 달렸다.
fin
epilogue
준석의 눈앞에는 미카가 있었다. 그녀는 배가 양옆으로 갈라진 채 죽은 아기를 품고 있었다. 죽을 때 그랬던 것처럼 혀를 턱 밑까지 빼문 그녀는 그 혀로 아기를 쓰다듬으며 조금씩 준석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준석은 아무 말 못한 채 그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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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입니다. 사실 이 글은 베오베를 목표로 재미에 초점을 맞추고 썼는데 근처도 가지 못했습니다.ㅋㅋㅋ...
하지만 행복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재밌다고 댓글 달아주시고 좋아해주셨으니까요.
계속 달리는 댓글들에 더 좋은 글을 내놓아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도 느꼈습니다.
이제 이 글은 제 손을 떠났습니다. 그 후에 디애나가 어떻게 될지 준석이 죽을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제 글에서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저도 즐거웠습니다.
이 글 때문에 혹시라도 오해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조만간에 집필 후기 및 자카르타와 인도네시아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올려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