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언급하자면 당시 일본은 전혀 해상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채 조선에 상륙했습니다.
조선의 수군은 경상도와 전라도 연해지역에 편성된 수군이 주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조선수군의 지휘권은 경상좌수사 박홍(朴泓)과 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이 부산진 앞바다에 쳐들어왔을 때, 관내인 동래에 본영을 둔 경상좌수군은 가장 먼저 적선을 요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달아남으로써 자멸하였습니다.(....)
거제에 본영을 둔 경상우수사 원균은 적선단과 마주쳐 싸웠으나 소수의 병력과 수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죠. 이와 같은 실정에서 경상우수군으로부터 인접해역인 전라좌수영에 급보가 전해진 것은 일본군이 침공한 지 이틀 후인 4월 15일었고, 그로부터 20일 후인 5월 4일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해역에 출전하기에 이릅니다.
경상좌수군이 자멸한 후 그 동안 거제해역을 지키고 있던 경상우수군은 1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등 소규모의 전과를 올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라좌수영에 거듭 원군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던 전라좌수군으로서는 경상우수군의 구원요청을 조속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출전은 지연되었고, 이로 인해 개전초부터 원균과 이순신 사이에 불화가 조성된 것도 사실입니다. 난중일기에서 해석되는것 처럼 원균 캐 잉여 개객끼가 아니었죠
이같은 상황에서 전라좌수영에는 경상우수군과 합세하여 일본수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이 내려왔고, 녹도만호 정운을 위시한 관내 수군지휘부 장수들 가운데서도 속히 출전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갔습니다. 따라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5월 3일 정운과의 면담 직후 영남해역에 출전할 것을 결심, 다음 날 5월 4일 전라좌수영의 출진을 결행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은 개전초 일본수군의 움직임에 대해서입니다. 전라좌수군이 거제도 해역에 출진하기 전, 즉 4월 14일부터 5월 4일에 이르는 약 20일간 경상도 해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4월 14일 부산진과 동래성을 일거에 함락시킨 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일본군의 깃를 보면, 이 기간에는 해상에서도 이미 전라도 해역까지 진격해 있어야 마땅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선, 그 사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거듭 구원을 청했던 경상우수사 원균의 통문부터 살펴보도로 하겠습니다.
"적선 5백여척이 부산 김해 양산 등 여러 곳에 배를 대 정박하고 제맘대로 육상에 올라 연해지역 각 고을과 수군진 병영 수영할 것 없이 거의 다 빼앗아 봉화불까지 끊어져버렸으니 지극히 통분합니다. 본도의 수군을 선발하여 적선을 추격함으로써 10여척을 불태워 없앴으나 나날이 적은 군세가 더욱 치성해져 중과부적으로 대적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본영(경상우수영) 또한 이미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두 도가 합세하여 적선을 공격하면 육상에 오른 적들이 뒷돌아보는 근심에 끌리게 될 것이니 귀도 전선을 남김없이 거느리고 당포 앞바다로 달려와야 마땅할 것입니다."
원균의 윗글은 임진년 4월 29일 전라좌수영에 당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일본군과 침공 직후 경상도 해역에서 보여준 침략군의 행동이 잘 반영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5백여척에 달하는 일본군 선박들이 부산 인근의 해안지역 각처에 정박해 있으면서 육상에 올라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대선단을 앞세운 일본군이 경상도 해안지역의 육상에서 침략행위를 자행하고 있었을 뿐, 전라도 해역으로 침공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부산 동래성을 함락시킨 후 20일이 넘도록 전라도 해역에 일본군이 출현하지 않았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경상우수군이 매우 열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좌수군이 출전할 때까지 그대로 군을 유지하고 있었던 배경도 아울러 이해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균의 통문내용 대로 개전초 영남해역의 일본군은 주로 육상작전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왜 일본수군이 개전 20일이 넘도록 전라도 해역에 침곡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입니다. 일본군의 이와 같은 행동이 처음부터 그들의 전략에서 온 작전이었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일본측의 연구결과에서 밝혀진 대로, 임진왜란 초 일본군에게는 해상전투에 대비한 수군 편성 그 자체가 없었다는 점과 관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임진왜란시 조선침략에 동원된 일본측의 수군장수들과 그들의 병력보유 현황을 보면,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 10여명의 장수 휘하에 9,200명(또는 9,450명)의 수군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편성된 것이 아니라 임진년 7월 이후부터 1593년초 사이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으므로, 개전초의 실정과는 전혀 무관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임진년 7월초 이전에 있어서 일본군에게는 편제상 해상전투에 대비한 수군병력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군장으로 잘 알려진 와키사카 야스하루(協坂安治) ·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 ·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이 모두 7월초(見乃梁海戰) 이전에는 육상군으로 종군했거나 아직 渡海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조선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해전에 대한 개념은 생각조차 못했을 뿐 아니라 조선수군에 대한 정보도 전혀 갖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군이 임진년 5,6월에 펼쳐진 제1,2차 해전에서 완패한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급조, 파견된 것이 바로 위의 수군조직이었던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전초 영남해역에 오고 가거나 해안지역에 정박해 있었던 일본군의 선박들은 해전을 목적으로 한 해상수군이 아니라 육상군을 수송하거나 군수물을 운송하는 수송선 또는 보급선의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임란초기에 있어서 일본수군이란 사전에 해상전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데다가 수송선의 기능을 지닌 선박에다, 육전에 익숙한 군사들만으로 편성된 군사조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일본은 이후 해전에서 계속 패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이 해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특히 개전초기) 이후에도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임진왜란 중 해전에서 그렇다할 성과를 얻을 수 없게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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