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잿빛이 되어버렸다.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버렸다.
잿빛의 세상에서 모든것은 다닥다닥 모여있다.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잿빛 키보드를 두드리고, 잿빛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잿빛 사람들은 잿빛네모에 갇혀 살아간다.
빗물마저 잿빛이고
하늘마저 잿빛이며
별들마저 잿빛이다.
세상만이 잿빛이 아니고,
시간마저 잿빛에 갇혀있다.
더이상 별은 반짝이지 않는다.
더이상 달은 우리를 비추지 않는다.
더이상 세상은 풀내음으로 가득하지도 않고
더이상 귀뚜라미의 연주를 들을 수 없다.
오로지 잿빛만이 있고, 오로지 타르 덩어리 같은 끈적함만이 있을뿐이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더이상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저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비웃으며
등뒤로는 비수를 들고 있다.
더이상 사람들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침식됬고
헌신과 열정이 담긴 사랑은 부식되으며.
세상은 육체만의 에로스에 잠식되어 아름다움을 잊어버렸다.
이세상에서의 인간은 더이상 안식처도, 의지할 기둥도 아닌
그저 때론 발판이고, 때론 악세사리이며 결국 물질일 뿐이다.
물질 속에 묻혀 물질에 이용되는,
그런 물질일 뿐이다.
더이상 결의에 찬 눈동자는 볼 수없고
잿빛의 흐리멍덩한 눈알만이 굴러다닐뿐이다.
미래를 꿈꾸지 않으며,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고
오로지 현재의 일상의 굴레속에서 휩쓸려있다.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으며
생과 사만이 그곳에 남아 있다.
인간은 인간을 실격했다.
그게 잿빛 세상이다.
그리고 나는 낙담했다.
잿빛과 물질의 세계를 만들어 낸것은 결국 그들이다.
나는 인간의 발전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들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다.
과거를 돌아보며 지혜를 쌓아올리고
현재를 살아가며 관계를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며 현실을 개척하는 모습을.
나의 희망은 이렇게 깨져버렸다.
내가 만들었던 푸르고 아름다운 별은 어디에 가버린것일까.
그리고 더이상 되돌릴 수 없다.
그들은 나조차 잊어버렸다.
신념도 철학도 없는
물질에 눈이, 생각이 멀은 사람은
신이라는 존재를 잊어버렸다.
나는 잊혀진 왕으로써, 폐위된 왕으로써 세상을 계속 바라봐야만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그저 바라봐야만 한다.
이런 지옥도를.
아. 인간은 잔혹하다.
이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이런 세상을 포기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그 푸르렀던 세계를 바라보았다.
이젠 무채색의 구일 뿐이지만.
타닥 소리와 함께
세상이 빨갛게 변했다.
이윽고 세상은 사라졌다.
내 손의 붉은 눈알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잿빛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