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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88117
    작성자 : 사보기획자
    추천 : 11
    조회수 : 888
    IP : 121.186.***.252
    댓글 : 3개
    등록시간 : 2016/05/28 07:13:01
    http://todayhumor.com/?panic_88117 모바일
    [짧은] 밤이 깊었네
    '밀지 마! 개같은 것들이. 내가 먼저 찍었어. 건들지 마. 비켜. 내가 먼저 눈 마주쳤어.비로소 이번엔 나야.'

    그녀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눈을 어슴프레 뜬 채 가위에 눌려버린 '산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옳지. 자 이제 날 보고, 제발 깨지 마, 꼼지락거리지말라고! 야! 이 개같은 년아! 이 시팔년이! 움직이지 마! 아아아악!! 이 개같은 년! 너도 죽어!'

    죽음을 겪고 나면 때와 장소는 애매한 개념이다. 하지만 '언젠가' 살아있었던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분명 죽었다. 그건 확실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망자처럼 외로움과 슬픔, 고통과 공포의 임계치가 넘은 육신에 생명의 불빛이 사그라지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혹 자살자라면, 산사람 누구나 따끈한 욕조와 깊게 날을 박아 넣을 수 있는 잘 갈린 회칼, 그리고 동맥을 찾을 만큼의 찌를 힘만 있으면 누구든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변할 수 있는 법이다. 이어폰 끼고 건넜다는 이유만으로 덤프트럭의 경적을 못 듣고 고깃덩이와 뼈조각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암투병을 겪으며 수개월 동안 차라리 죽음을 꿈꾸었을 지도 모른다. 뒷골목에서 튀어나온 예리한 칼날에 피투성이가 되었는지도.

    아무튼 어느순간 그녀는 살아있음을 탈출했다.
    다만 그녀가 몰랐던 것이 있었을 뿐.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로 가위에 눌려 정신만이 머릿속에서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 분명한 '산 사람'에게 그녀는 착찹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어차피 산사람과 죽은 사람은 말을 나눌 수가 없지. 넌 내가 무섭겠지? 이 시팔년, 넌 유독 살아있는 냄새가 너무 강해. 어쩌겠니. 나도 며칠이나 있을 지 몰라. 어차피 나머지는 나도 알 바 아니잖아?'

    그녀는 고개(라는 것이 있다는 듯이)를 돌려 뒤를 보았다. 새카만 밤. 거무튀튀하고 묵직해 보이는 밤. 살아있을 땐 그녀도 몰랐던 밤의 정체.
    단순히 어둠 뿐이라면 인간은 밤을 딱히 두려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이런 아비규환을 모르면서도 아는 것... 그걸 공포라고 부른다는 걸.

    그리고 그녀는 이윽고 '산 사람'의 눈으로 빨려들어갔다. 



    ----------------------------------------------------------------------------------------------------------



    "오빠, 정말 미치겠어. 한동안 안그러더니 또 시작이야. 그러니까 좀 와주라, 응?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

    은영은 몇 달 만에 겪는 가위에 짜증이 치밀어올랐지만
    같이 자자는 말에 남자친구가 수화기에 달짝지근하게 흘려넣어주는 달콤하고 응큼한 말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재수없는 귀신년. 죽었으면 곱게 저승이나 갈 것이지. 

    "응 오빵, 빨리 와야 해. 응."

    가위에 눌려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은영의 몸은 다시 잠을 불러들였다. '오빠 나 자고 있으면 깨워 비밀번호 알지?' 

    은영은 카톡 메시지를 남기고 다시 잠이 들었다.



    ----------------------------------------------------------------------------------------------------------



    때와 장소는 애매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언젠가' 살아있었던 은영은 '어떤 방식으로' 분명 죽었다. 그건 확실했다.
    다만 은영이 몰랐던 것은 하나다. 
    밤은 어둠이 아니다. 밤은 이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최초의 박테리아가 탄생한 수십억 년 전 이래로
    창생사멸한 수천조 수백만경 이루 셀 수 없을 영혼의 군집이다. 
    낮동안 영혼은 산 것들의 기운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어둠이 깔릴 때, 산 것들의 움직임이 사그러들 때.

    밤이 깊을 때, 영혼은 범람한다.
    영혼은 영원하다. 그리고 계속해서 탄생한다.

    '은영'은, 아니 이젠 '은영이라고 불리웠던' 존재는 '은영의 방'에 들어찬 어둠 속에 수백만겹으로 둘러쌓인 수억가지 종족의 영혼들이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주파수를 다 메워버릴 만큼 너무나도 많은 영혼의 소리는 그들의 소리를 모든 주파수에 고르게 전개시켜버렸고, 무가 되어버렸다. 간단하게 말해, 그들은 소리도 지를 수 없이 그저 '공간'이 되어야 했다. 

    지금 누워있는 '은영'은 다시 가위를 시작한 것이 틀림없었다.
    "으...으" 괴로운 듯, 가위를 깨기 위해 꼼지락 거리기 시작하는 은영을 보면서
    '은영이었던 존재'는 가위에 눌릴 때 꼼지락거리는 행동이 왜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위에 눌린 자는 영혼과 접촉이 가능하다.
    '은영'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아주 작은 공간 속에 들어찬 수백만 영혼들이 밀려나가며 
    산 사람이었다면 수백G로 가해져오는 압력을 느껴야했다.

    '은영이었던 존재'는 문득 알 수 있었다.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유일하게 이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이 '은영'이었을 때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음을.

    그리고 자신이 처음부터 은영이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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