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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엔,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 가지고 오셨더랬다.
잠든 나를 깨워, 아빠는 그림을 그려 달라 말했다.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아빠의 단어들은 취해 비틀거렸다.
그림을 그려 줘, 여기 크레파스가 있어.
무얼 그리죠?
무엇이든. 네가 그리고 싶은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담 아기코끼리를 그려줘.
그릴 수 없어요.
크레파스 병정을 그려줘.
그릴 수 없어요.
나를 그려줘.
그릴 수 없어요. 아빠. 난 아무것도 못 그려요. 아빠도 아시잖아요.
아니, 그릴 수 있어.
아빠는 잡아 챈 내 손 위로 크레파스를 올려 주었다. 그러나 바닥 뿐인 오른 손은 끝내 크레파스를 쥐지 못했다.
또르르, 굴러 떨어진 크레파스를 아빠는 밟아 짓뭉갰다. 붉게 부수어진 크레파스 조각들이 아빠의 뒤꿈치 굳은 살 속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다른 색을 쥐어봐.
색은 상관 없어요.
그렇담 뭐가 문제지?
난 쥘 수 없는 걸요.
쥐지 않아도 그릴 수 있어.
어떻게요?
마음으로 그리지.
네?
마음 말야. 여기, 가슴에 있는 거.
내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아빠는 초록색 크레파스를 꺼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우적우적, 크레파스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마음을 푸르게 칠하는 거라고, 이렇게 마음으로 그리면 된다고, 아빠는 말했다.
주황을, 노랑을, 파랑을, 색들을 집어 삼키는 아빠의 입가가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다. 그렇게 입안 가득크레파스를 우물대던 아빠는 목이 메인다며, 가슴을 쳤다.
나도 크레파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더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고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기 코끼리를, 크레파스 병정을, 그리고 아빠를, 그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선은 삐뚤어지고 엉키어 제멋대로 휘청였다. 고인 침이 떨어져 내려 색이 번졌다.
질겅, 하고 크레파스를 씹어 보았지만 이빨 사이에 눌러 붙는 느낌이 찐득거릴 뿐, 삼켜지지 않았다. 마음을 칠 할 수 없었다.
나는 기어이 왼손을 쓰지 않았지만 왜냐고 아빠는 끝내 묻지 않았다. 언젠가 왼쪽 손가락마저 필요하게 될지 모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아빠는 기어이 스물네색을 모두 씹어 삼켰다. 먹기를 마친 아빠의 트림에서 크레파스 냄새가 짙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은 색들은 아빠의 마음에 과연 어떤 그림을 그려놓았을까? 부수어진 크레파스를 쓸어 담아 방을 나서는 아빠의 등이 좁았다.
나는 좁은 어깨너머로 차마 물을 수 없던 물음을 물었다.
손가락으로 충분한거지?
주억거리는 고개는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엄마는, 충분하지 않았던거야?
주억거림을 멈춘 고개는 숙여져 그림과 마주했다.
입으로 삐뚤빼뚤 그려진, 그림일수 없는 그림을 보며, 내가 마지막 사생대회에서 일등을 했던 그 날처럼, 아빠는 탄식하듯 말했다.
잘, 그렸네. 마침내 돌아본 아빠의 입이 차마, 웃고 있었다.
그날, 밤새 꿈나라엔 코 없는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조각난 크레파스 병정들이 밀납처럼 녹아내렸다.
나는 엄지만 남은 오른손을 치켜들어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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