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치매병원에 다녀오면서 떠오른 이 끔찍하고 잔혹한 이야기를 과연 이 공간에 그대로 풀어 놓느냐, 아니면 그냥 내 기억에서 강제로 지워버리고 넘어가느냐를 고민했다,
나는 이 공간을 사람이 살면서 겪어야할 희노애락의 과정을, 더우기 의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경험 할 수없는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이곳에 모두 풀어 놓음으로서, 미쳐 그까지는 생각이 미칠 여유가 없는 분들에게 또 다른 삶의 이면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하는 이야기들을 조금도 미화하거나, 덧붙이거나, 혹은 가공하지 않고, 가능하면 그 대로의 이야기를 적어왔던 만큼, 같은 관점에서 어떤 이야기가 끔찍하다거나, 혹은 그 이야기가 경악스럽다거나 하는 이유로 감추어 버린다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새로운 인위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이야기를 하려한다
왜냐하면 그저 하루의 일상에서 내가 의사로서 겪었던 일, 혹은 내가 삶속에서 특별하다는 기억이 남았던 일들을 기억이 나는 순서대로 자동기술하는 것이 이란의 성격인 이상, 내가 오늘 해야 할 이야기가 아무리 기억하기 싫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담아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정말 마음이 약한 분들은 오늘의 이야기를 읽지 말거나 아니면 정말 마음이 단단히 상할 각오를 하고 읽으셔야 할 것이다,
사설이 이정도로 길다는 것은 내가 오늘 해야할 이야기도 그만큼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는 뜻 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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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의 일이다,
응급실에서 외래로 연락이 왔다.
전화를 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진정이 안되고 떨고 있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충격적인 일인것이 분명했다. 전화를 건 응급실 간호사는 내게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마치 패닉 상태에 빠진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과장님... 빨리 응급실에 와 주세요,,빨리요,, 사람이.. DOA 인데요.. 검안이 필요해서요,,"
그녀는 내가 대체 무슨일이냐는 질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대개 응급실이나 중환자실, 혹은 수술실과 같은 특수분야 간호사를 몇년 하다보면 그야말로 산전 수전을 다 겪는다, 특히 그중에서도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은 일반인들이 상상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세상에서 일어 날 수 있는 모든 비극적인 일은 다 경험하게 되는 곳이다.
그 안에는 절절한 사연과, 비통한 죽음과, 극적인 회생, 그리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극단의 절망과 희망이 모두 교차하는 곳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곳에 들어온 환자는 모두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또 누군가의 아들 딸이고, 또 누군가의 형제자매요. 친구가 아닌가,, 그래서 응급실에,혹은 중환자실에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드는 환자들의 등에는 그 환자 자신의 아픔외에도, 각자 그 사람의 인연의 무게만큼이나 많은 걱정과,우려,기원들이 덧얹혀 있는 것이다,
그런 응급실에서 몇년을 근무한 간호사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 담당과장인 내게 육하원칙에 따른 상황을 전하지 못할 정도로 동요한다는 것은, 지금 응급실에 얼마나 엉청난 사건이 벌어져 있을지를 충분히 짐작케 하는 일이었다,
나는 전화를 던지다시피하고 일단 응급실로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내가 당도한 그곳에는 나로서도 그 충격을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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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에 사는 어떤 부부가 일찌기 혼자되신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할머니는 일찌기 남편을 사별하고, 외아들을 혼자서 키우셨지만, 여러가지 형편으로 아들의 경제적 여건도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도시 외곽의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할머니와 며느리는 밭 농사를 짓고, 아들은 트럭을 몰고 농수산물 시장에서 물건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을 때 고생을 많이 하신 할머니가 몇 년전부터 치매기운이 조금씩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나마 하루중에 스무시간 정도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시고, 저녁이나 밤무렵에 서너시간 정도만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치매증상을 드러내시곤 하셨다,
이들 부부 입장에서는 아무리 치매가 있으신 노인이라도, 차라리 24시간 완전 치매라면 며느리가 아예 곁에 붙어서 수발을 들겠지만, 대개는 멀쩡하시다가 한번씩 그러시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치매증상이 나타나시면 할머니방에 혼자 계시게하고 문을 잠가 두거나, 아니면 며느리가 곁을 지켰었는데. 그나마 대개 증상이 밤에 나타나셔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밤에는 밖에서 문을 얼어 잠궈두면, 혹시 문제가 생기시더라도 방을 더럽히는것 말고는 그래도 가출을 하시거나 위험한 일을 하시지는 않는데다가, 밤에는 아들도 집에 있어서 할머니가 설령 발작을 하셔도 감당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어쨌건 그 부부는 노모를 모시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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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며느리가 노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시장에 다녀왔다.
원래 시장을 갈일이 그리 잦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시장에 들러서 이것저것 사야했고 그럴때 며느리는 낮에는 멀쩡하신 노모에게 늦게얻은 아이를 맡기고 얼른 다녀오곤 했다.
할머니도 늦게 본 손주라 애지중지 하셨고 그들 부부에게도 아이는 그나마 유일한 행복이었다.
며느리가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서 장을 본 다음 두시간 정도 후에 집에 돌아오자, 아이를 보던 노모께서 장보고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반겼다.
"수고했다, 어서 배고픈데 밥먹자, 내가 너 오면 먹으려고 곰국을 끓여놨다 "
며느리는 곰국을 끓여 놨다는 할머니 말에 갸우뚱했다. 최근에 소뼈를 사다놓은 적도 없는데 노모께서 곰국을 끓이셨다길래 의아해 하면서, 부엌에 들어가보니 정말 솥에서는 김이 펄펄나면서 곰국을 끓이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며느리는 그 솥 뚜껑을 열어보고는 그자리에서 혼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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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가능하면 담담하게 이 끔찍한 일을 기록하려고 하고 있지만, 다시금 그 장면을 기억하는 내 심장이 부담스럽고, 손에는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 뜨거운 솥에는 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검안을 위해 응급실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생애에서 가장 끔찍하고 두번 다시 경험하기 싫은 장면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나는 나대로 피가 얼어버리는 충격속에서 응급실 시트에 올려진 형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진 아이의 몸을 진찰하고, 앞뒤로 살피면서 검안서를 기록해야 했고, 또 너무나 끔직한 장면에 차마 눈을 감아버리고 아예 집단패닉 상태에 빠져 스테이션에 모여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간호사들의 혼란도 같이 다독거려야 했다,
아이 엄마는 아예 실신해서 의식이 없었고, 할머니는 그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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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후 이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일이 이후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검찰에서 요청한 검안기록에는 직접사인 "심폐기능 정지", 선행사인 " 익사에 의한 호흡부전",간접사인 "전신화상"으로 기록을 남겼고, 내 도장을 찍었다.
아마 그일로 인해 입어야 할 남은 가족들의 고통은 끔찍 했을 것이다,
더구나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손자를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 할머니가 받을 고통은 어땠을까..아울러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평생을 겪어야 할 그 잔인하고 끔찍한 고통은 어떠할까.. 차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부디 가족해체만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이후의 일에대해서는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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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이글을 쓰면서 내가 지금 치매나 기타 노인질환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극단적인 가혹함이 이런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자신도 목적지를 잃어버렸다.
또 이 글을 쓰면서 떠올리게 된 그 참혹한 장면들을, 더 세밀하게 기억해내지 않기 위해서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내쳐 글을 적으면서도, 내가 이글을 올린것이 과연 잘한일인지 못한 일인지 조차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삶은 이렇게 대책없이 참혹하기도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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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mos realisas y sonemos lo imposible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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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흔히 볼테르의 말이라 오해받는 Evelyn Beatrice Hall의 저서 [The friends of Voltaire]에 등장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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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당도 아니고 여당도 아니다. 나는 정치와 관계없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봤다. 그러면서 그것이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인양 점잔을 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악을 악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선을 선이라고 격려하지 않겠다는 자들이다. 스스로는 황희 정승의 처신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얼핏 보면 공평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비판을 함으로써 입게 될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다. 이것이 결국 악을 조장하고 지금껏 선을 좌절시켜왔다. 지금까지 군사독재 체제하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이렇듯 비판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악한 자들을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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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이래로 600년동안에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꾸어보지 못했고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죽임을 당했고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을 했다.
600년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해야했어요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에 정의롭고 혈기넘치던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젠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 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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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에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의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해서 정복하여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by 리로이 존스 1968년, NY할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