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 우리반은 예체능과 유학준비하는 애들이 모인 반이었음.
그래서 자습 분위기도 항상 개판이었지.
수능 준비하는 애는 우리반에 절반밖에 안 됐으니까.
당시 내가 반장이었고 (고3 반장은 입시에 굉장히 중요함.)
나도 고3 땐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했던 터라 자습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했는데 진짜 애들 말을 안 듣더라.
그 때 우리반에 미친놈이 하나 있었음.
일본 유학 준비한다는 놈이었는데 한국애들 많이 가는 도시샤 같은 데도 아니고 들어가기가 서울대보다 어렵다는 도쿄대 준비하던 애였음.
근데 얘가 좀 정신적으로 미쳤어. 뭐라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항상 흐리멍텅한 눈으로 공부만 하다가 남들 입시에 대해 물어보고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애는 진짜 개무시하고 지나가고, 입 열 때마다 한심하다는 말만 하고 갔어. 당연히 공부 잘하는 애든 못하는 애든 걔를 매우 싫어했지.
걔가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여자애는 진짜 이뻤음. 학교 내에서도 유명했고) 나랑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음. 나랑은 그냥 인사만 하던 사이.
언젠가 그 여자애한테 러브레터를 A4용지 자그마치 네 장 가득 빽빽히 채워서 보냈다는데 그 여자애는 극혐이라고 했다고 함...
며칠 후에 그 여자애랑 학교 근처 서점에서 만났는데 그 여자애도 축덕이더라 ㅋㅋㅋㅋㅋ 로이스 팬이었음. 걔랑 좀 잘돼보고 싶었던 나는 축구 얘기를 하다가 그 때 한창 유행하던 로티번이라는 빵가게에서 로티번을 하나씩 물고 얘기하다가 헤어졌음.
그리고 독서실 갔다가 집에 가는데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느낌이 드는 거야.
대수롭지 않게 느끼고 집에 가던 중 꺼림칙한 기운에 뒤를 돌아봤는데 누가봐도 차 뒤에 사람이 숨어있는 게 보이더라.
그래서 바로 모퉁이를 돌아서 집까지 엄청 빨리 걸어갔음. 계속 뒤돌아보면서.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걍 난리가 났더라.
그 미친놈이 새벽에 칼이랑 노끈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더래.
난 반장이라 보통 학교에 15분 정도 일찍 가거든.
근데 학교 청소 아주머니가 그걸 발견하고 선생님들을 불러서 선생님들이 교무실에 앉혀놨더라.
진짜 등골에 소름이 쫙 올랐음.
청소 아주머니가 발견 못했으면 난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걔는 그날부로 말을 한마디도 안 했음.
담임이 걔가 뭔갈 써놓은 종이를 보여주더라. 교무실 가서도 한마디도 안 하고 글로 써서 말했다고 함.
거기에는 내가 그 미친놈의 인생을 망쳐놨다고 써 있었음.
자기 인생의 여자친구를 뺏어갔고, (사귀긴 커녕 극혐이랬는데..)
자기 입시에 매우 중요한 반장 자리도 뺐어갔으면서,
자기가 공부도 못하게 애들 떠드는 걸 조장하고 방관했다고 빽빽히 써 있더라.
내 인생 제일 소름돋았던 기억이었음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