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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내용을 나누어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언론 장악 시대를 맞아 진정한 언론은 어떤 뉴스를 생산해야 하며, 저널리즘 정신은 어떤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입니다.
좀 많이 길지만 저널리즘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요약본이라 나름 재미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반응이 좋으면 4편 정도 나올 것 같은데 계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널리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위와 같은 질문에 동유럽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시민정신, 민주주의, 공동체를 위해 존재했다고 한다. 정부에 의해 억제돼있던 그들은 자유롭게 정보에 접근함으로써 새로운 제도, 정부를 구성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이 저널리즘이 존재하는 이유인지에 대해 미국의 경우를 보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러의 맥스웰 킹은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스스로를 설명하도록 내버려둔다.”라는 말로 저널리즘의 목적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었거나 축소돼 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의 발달로 저널리즘의 얼굴은 많이 바뀌었지만, 뉴스가 시민들의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기능은 변함없이 유지돼왔다.
저널리즘의 1차 목적은 시민들이 자유롭고, 그들 스스로 자치를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일관되게 유지돼왔다. 자본주의와 저널리즘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위협받던 저널리즘의 양상은 기업중심적 사회구조로 진행되면서 상업주의와 기업홍보 활동으로 말미암아, 독립적인 지위가 위태로울 수 있다.
저널리즘을 정의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저널리즘을 정의하면 그 영역을 제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를 곡해한 것이다. 아니, 곡해가 아니라 수정헌법 제1조의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사실은 상업적 충동의 산물이다.
물론 기자들도 그것을 정의하는 데는 불편해 한다. 하지만, 목적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기능이 저널리즘’이라는 데 근본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구체적으로 공공적 정보제공의 임무에 대한 강한 의무감을 나타냈다.
기자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언론사 자체적으로 사시, 윤리강령에 그 생각들을 공유했다. 이는 저널리즘 영역 밖에 있는 비언론인들도 이해하는 부분이다.
# 알고자 하는 본능
인류는 역사와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일관성 있게 비슷한 뉴스를 교환해왔다. 즉, 사람은 뉴스에 대한 관심이 내재되 있고, 이를 알고 싶어하는 본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뉴스는 외부세계와 인물, 쟁점, 현상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려주는 커뮤니케이션 작업의 일부분이다. 과거 지배자들은 뉴스를 이용해 사회를 결속 시켰다. 때로 독재자로 하여금 공동의 위협을 설정하고 이에 대항해 시민의 결속을 강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회는 민주적일수록, 많은 뉴스와 정보를 갖는 경향이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경우 시장 안에 존재했던 구전 저널리즘의 의존했고, 로마에서는 원로원과 정치, 사회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기록해 공공장소에 게시했다. 그러나 유럽이 권위적, 봉건적으로 변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써 뉴스는 사라졌다.
# 저널리즘의 탄생
중세 이후, 뉴스는 노래와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지고, 뉴스는 커피하우스와 선술집 같은 장소에서 교환되었다. 이는 신문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이 나타나면서 자유발언,자유언론의 이론이 만들어지게 된다. 당시 영국의 보통법은 ‘진실이 클수록 명예훼손도 크다’라고 하여 정부에 대한 비판을 범죄행위로 봤다. 영국의 케이토라는 필명의 기자는 진실은 명예훼손에 대한 방어가 되야한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이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진실을 통해 거대한 권력의 비리를 폭로하는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미국 연방헌법에 내재되었다.
황색 저널리즘이 판을 치던 시대에도, 타블로이드가 유행하던 시대에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과 민주주의를 진흥하는 일은 핵심적 가치였다. 돌이켜보면, 뉴스는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었다. 앞으로 민주적 공동체와 뉴스를 분리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 전자시대의 자유언론
이제 어떤 정보를 알아야 하고 어떤 것은 알면 안 되는가를 결정하는 게이트 키퍼로서 언론의 개념은 저널리즘의 역할을 규정하지 못한다. 인터넷과 블로그에 사실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은 시민들을 뉴스를 소비하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능동적으로 다양한 요소를 조합해 자신들의 저널리즘을 만들어내는 참여자로 전환시키고 있다.
또,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자들이 저널리즘의 민주적 공공봉사 개념을 잘 충족시키는 기능으로서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 즉, 이제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명확한 결론을 찾는 힘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과거 시민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게이트 키퍼가 아닌 어떤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 확인하고 정리해 시민들이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중재자’가 돼야 한다.
시민들은 직접 뉴스를 전달하는 전문가들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 뉴스 수용자들은 기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며 뉴스 감시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수용자와의 대화는 기사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뺄 수 없는 요소다. 이런 접촉은 400년전 커피하우스에서 생겨난 초기 저널리즘의 상황과 비슷하다. 즉, 디지털 시대에도 저널리즘의 기능은 그대로라는 얘기다.
# 기자의 민주주의 이론
시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해져갔다. 언론이 시민들이 스스로 자치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급하는 것은 환상일지 모른다. 미국의 저명한 기자인 리프먼은 ‘여론’이라는 저서에서 시민들이 외부세계를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디어는 왜곡되고 불완전한 사실을 전달하는 약점이 민주주의 근본적 결함이라고 했다. 하지만, 철학자 듀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목적이 공공의 과제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일이 아니라 시민들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라며 리프먼의 의견을 반박했다. 이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고 마무리 되지 않았다. 기자들이 어떤 뉴스를 다루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의제설정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실제로 기자들은 결정하는 과정을 매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행동 뒤에는 민주주의 이론이 자리잡고 있다.
여러 비평가들은 리프먼 식 관점이 오늘날 기자들의 일하는 방식을 지배한다고 한다. 신문과 TV뉴스가 엘리트층이나 일부 인구 집단만을 겨냥해, 대부분의 시민들은 무시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시민의 이름으로 저널리즘을 발전시켰지만, 시민은 수용자 이외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추상적 존재로 돼버렸다.
시민매체의 등장과 소비자 권익 강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시민들은 스스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언론을 위한 민주주의 이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 공중연동이론
모든 사람은 무언가에는 관심이 있거나 아니면 전문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단순히 무지하거나 모든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시민들과 기자들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는 것이 시민들이 뉴스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공중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공중연동이론이다.
모든 쟁점에는 크게 세 가지 차원의 공중의 참여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개입된 공중(해당 쟁점과 개인적 이해가 있고, 그 쟁점을 잘 알고 있다.), 관심을 갖고 있는 공중(쟁점에 직접적 역할은 없으나, 쟁점에 의해 영향을 받고 반응을 보인다.), 관심이 없는 공중(해당 쟁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이다. 연동적인 공중이론을 받아들이면 우리 모두는 쟁점의 성격과 종류에 따라 언제나 이 세 가지 공중 가운데 한 곳에 속하게 된다.
이 세 그룹은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논쟁이 적극적인 이익집단 사이의 언쟁이 과열되지 않도록 작용한다. 이런 공중의 혼합체는 개인된 공중만 있는 상태보다는 한층 현명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언론은 지극히 수동적인 공중에게 진실을 전달해야하는 어려운 책임을 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임무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공중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진실을 시간을 두고 정리해 갈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일이다.
좀 더 다원적인 연동적 공중에 대한 생각은 가능한 최대의 공동체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옛날 신문의 요구가 오늘날에도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언론은 쟁점을 다루면서 이름 붙이기, 스테레오 타입화를 시도함으로써 극단적인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해왔다. 이는 시민들의 소외와 관련된 문제이다. 저널리즘의 책임은 시민들간 이해를 증진시켜 복합적으로 연동된 공중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타협이 가능하도록 하는 일이다. 또, 공중연동이론은 저널리즘의 틈새 마케팅 개념에도 영향을 미친다. 틈새시장들은 임의의 범주로는 규정하기가 힘든데, 해당 집단의 사람들을 소외시킬 가능성이 크다.
# 새로운 시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시민의 책임이라는 생각과 거리가 먼 시장을 토대로 한 저널리즘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세 개의 힘들이 시민 형성과 밀착된 저널리즘을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첫째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성격이다. 인터넷은 정치적 공동체보다 이익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많다. 공동체로부터 저널리즘을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둘째는 거대기업화이다. 언론자유는 독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는 저널리즘을 다른 사업목적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용하는 하부 조직으로 언론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세 번째는 세계화이다. 커뮤니케이션 회사들이 국경없는 회사가 돼가면서 시민이나 공동체 형성은 무의해졌다. 뉴스 판단을 흥미를 끌만한 사건 위주로 다룬다. 또 강력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저널리즘은 21세기에도 과거에 확립됐던 그 목적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시장을 토대로 한 저널리즘 환경에서 시민들은 언론사가 사회의 권력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신뢰할 수 있는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진실 :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혼란스러운 원칙>
첫번째 원칙 : 저널리즘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에 대한 것이다.
■ 베트남 전쟁 당시 로버트 맥나라마 국방장관의 기자회견(전황이 좋다)과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시점에 펜타곤 문서를 통해 나타난 사실(전황이 안 좋았다)이 다름.
당시 언론은 맥나라마의 기자회견을 정확히 보도했지만, 맥나라마가 알고 있던 진실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 시민과 언론을 위한 퓨 연구소와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의 조사에서 기자들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답했다. 이는 정파적 성향의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대안적 주간지 웨스트워드의 편집장 피터 겔훈 “우리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객관적일 수 없으나, 정확성을 추구할 수 있다.”)
정보가 진실하기를 바라는 것은 기본적,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욕구-> 진실성은 사실상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안정감은 알아야 생기는 것이고, 이것은 뉴스의 본질.
■ 문자 이전 사회의 기자들은 사회의 필요 때문에 사건을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기억해 내기를 요구 받았다.
->생사와 관련된 경우가 많았다. 다른 부족의 공격할 것인지에 대해 정확한 소식 필요.
과거 억압적 사회에서는 진실성, 정확성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정의를 가볍게 여겼다.
-e. g. 중세의 수도승은 진실에 계층을 나눔. 우주의 운명을 전하는 메시지->도덕적 진실->교훈적 진실->있는 그대로의 진실; 가장 덜 중요함.
->이는 현대 정치 공작원들이나 정치권력이 공중을 상대로 그들의 이미지를 강화하는데도 똑같이 활용된다.(통제의 수단)
민주주의 이론의 탄생과 함께, 진실되고 정확함은 초기 저널리즘의 보급에서도 강력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 식민지 저널리즘 사실과 수필의 이상한 조화. 사실에 소문을 조합해서 팔아먹음. 정치에 대한 글은 덜 정확했다. 그리고 이런 글에는 정보보다 의견이 많았다. 당시, 제임스 캘린더라는 최악의 스캔들 장사꾼은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성적관계에 관한 비화를 폭로.
19세기 정치적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흥밋거리 얘기, 스캔들, 저명인사 숭배 등의 기사로 대중독자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쉬운 언어를 사용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1830년대 ‘뉴욕 선’ 지가 정당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임.
19세기 말에는 선정적 보도를 앞세운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조지프 퓰리처의 ‘황색 저널리즘’ 시대로 불림. 그렇지만, 그들이 전달하는 소식은 믿을 수 있는 내용임을 강조했고 실제로 신뢰할 만한 사실들이었다.
(허스트의 저널지는 스스로 뉴욕 시에서 가장 진실한 신문임을 주장, 퓰리처의 월드 지는 ‘정확성, 정확성, 정확성’을 모토로 운영됨. 1913년 퓰리처는 월드지에 정확성과 공정성을 위한 부서를 만들어 독자들이 읽는 기사를 더 신뢰하도록 했음.)
1984년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지에 카산드라 테이트는 과거 ‘월드 지’의 난파선 보도에서 나타나는 보도현상을 지적했다. 현실감을 만들어내려고 장식물을 만들어 넣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e. g. 난파사고를 당할 때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생존했다는 사실, 난파선에 고양이가 생존했던 것이 주목받으면서, 경쟁적으로 고양이가 없었는데도 고양이를 집어넣음.
20세기 초 기자들은 정확성과 진실은 항상 동일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e. g. 월터 리프먼은 1920년 ‘자유와 뉴스’라는 저서에서 진실과 뉴스를 바꿔가며 썼으나 1922년 ‘여론’에서는 뉴스와 진실은 같은 것이 아니다. 뉴스의 기능은 한 사건에 대해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라고 썼다.
■ 기자가 진실에 대해 의무감을 가진다는 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토론을 한다면 노력은 진흙탕에 빠지기 마련. 이유는
(1) 대화자체가 현실 세계에 바탕을 두지 않기 때문.
(2) 기자들이 스스로 그들이 말하는 진실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명백한 이해를 가져본 적이 없다. 게다가 대다수 뉴스 전문가들이 저널리즘 교육의 가치를 낮게 평가해왔다.
-e. g. “언론은 사회의 ‘거울’이다.” 보도국장 협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바틀릿
“저널리즘은 그날의 열정의 반영이다.” 톰 브로코
-> 기자들을 선택자나 편집자가 아닌 그 날 일을 수동적으로 기록하는 사람으로 만듬.
기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언론이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됐다. 즉 언론의 객관성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는 기자들이 제대로 설명을 못한 이유와 시민들이 객관성에 갖고 있는 이해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 시민들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 진실을 추구한다고 믿는 것은 자명하다.
저널리즘의 진실
■ 단순한 정확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저널리즘은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것은 ‘기능적 진실’이다. 절대적이거나 철학적 의미의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수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편집 국장이었던 빌 켈러 “우리는 독자들이 스스로 그나 그녀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최대한의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야하고 그것이 최종임무”
단순한 정확성은 그 자체로 왜곡이 될 수 있다.
e. g. 맥락을 제공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인종에 관한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소수인종에 대한 잘못된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시키는 기사
단순한 정확성은 독자들도 기대하지 않는다. 잭 풀러는 ‘뉴스 가치’에서 진실을 확인하려면 두 가지 시험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나는 일치, 다른 하나는 일체성이다. 이들은 사실들을 올바르게 수집하는 일과 수집된 사실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확성은 모든 것이 건설되는 든든한 토대로써 중요하다. 맥락이나 해석, 논쟁, 그 밖의 모든 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정확한 사실을 토대로 가능해짐. 토대가 잘못되면, 다른 모든 것에 결함이 생긴다.
■ 저널리즘의 진실은 하나의 과정 혹은 이해를 향한 계속되는 여행으로 이해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1보는 새로운 사건이나 추세에 대한 신호를 제시한다. 현재 상황에서는 타당하지만 계속 조사를 통해 변할 수도 있는 대상이다. 2보에서 기사의 취재원이 처음의 실수를 수정하거나 부족한 요소를 보완하기도 한다. 그리고 3보로 연결되고 보다 복합적인 기사는 사설이 따르고 의견 면에 관련 기고가 실린다.
e. g. 1997년 브루클린의 아이티 이민자 애브너 루이마의 사례는 간단한 경범기사에서 경찰의 가혹행위라는 사건으로 전개되고, 뉴욕시장이 딩킨스(흑인)에서 줄리아니(백인)라고 바뀌었다는 경찰의 발언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가혹행위라는 점이 부각되고, 범죄 감소율이 경찰의 가혹행위 증가와 관련 있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가 등장함.
->진실은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현상이지만, 시간을 경과해 진행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저널리즘은 진실에 다가간다.
■ 진실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역사가인 고든 우드는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대해 “역사기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역사가들은 그들의 해석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진실이 관찰될 수 있고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현실 생활에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떤 사안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라고 말했다.
뉴스에서 일한 사람이나 공직에서 일한 사람들은 대체로 같은 말을 한다. 어떤 사안의 초기, 정확성이 어려울 때, 정확성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중의 태도가 형성되는 시점이기 때문이고, 어떤 정보가 제공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카터 행정부 시절 국무성 공보담당 차관보를 역임한 호딩 카터는 “3일 정도 시간을 심각한 도전이 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정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안의 맥락을 규정하고 그 사안에 대한 공중의 인식도 통제할 수 있다.”라고 정부가 공중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라고 말했다.
->이를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가 있었을 때로 돌려보면, 정부가 초기 반응이 없어 사안의 맥락을 규정하는데 실패했고, 뉴스의 방향을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끌어 오는데는 수 주일이 걸렸음.
■ 여러 해에 걸쳐, 일부 기자들은 진실성을 대체하는 개념을 제안해왔다. 그것은 공정성과 균형성이다. 공성성은 추상적이고 진실보다 주관적이다. 균형성 또한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한 기사를 양쪽에 공정하게 균형을 맞추는 일은 양측이 동등한 무게를 갖지 않는다면 진실에 대해 공정하지 않은 행동이다. 균형성은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왜곡이 되어버린다.
여러 가지 힘들은 기자들의 진실을 추구하는데 방해를 하고 있다. 지속적 흐름의 ‘뉴미디어 문화’에서 정보의 조각들의 단계적 흐름으로 취재원들은 기자들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언론이 갖고 있던 게이트키퍼 가능을 무너트리고 있다. ‘혼합적 미디어 문화’라고 부르는 새로운 특징들이 진실의 가닥을 잡던 저널리즘의 고전적 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 기자들은 최신의 정보를 방송하거나 웹에 올려서 노출, 기사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시간이 부족해짐. 주장의 저널리즘을 만들어 내고 사실 확인의 저널리즘을 압도하게 됨.
■ ‘긍정의 저널리즘’은 수용자의 선입관을 그대로 긍정하고 칭찬하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는 프로그램을 통해 무작위로 정보를 모으는 ‘집합의 저널리즘’라는 모델이 등장했다. 특징은 소문과 사실, 추정을 사용자가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진실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전국매체나 지역매체를 불문한 기자들의 70%와 인터넷 기자들의 60%는 ‘사건을 이해관계를 떠나 공정하게 보도하는’ 전문적 방법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1/4 가량은 회의론자들이다. 그래서 진지한 매체들이 뉴미디어 문화에 대응하는 접근법은 독자들이 정보 과잉 상태를 헤쳐나갈 수 있고, 뉴스의 의미를 잘 뉴스에 맥락과 해석을 더 많이 가미하는 것이다.
->수용자들이 걸러지지 않은 정보를 잘 헤쳐나가리라는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점(20세기보다 21세기의 뉴스공급처가 늘었지만, 수용자들이 뉴스를 소비하는 시간까지 늘어난 것은 아니다.)과 진실을 원하는 본능은 과거 시기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반박된다.
■ 진실을 발견하는 일은 과거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정보가 많아지면, 지식은 얻기 힘든 것이 된다. 정보를 처리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고 이는 집중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진실이 속옷을 입기도 전에, 거짓말은 지구의 저편까지 간다” 는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기술의 발달은 진실과 거짓을 똑같이 빠르게 전달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수용자에게는 매력적일 수 있다. 그렇게 얻어진 지식은 더 깊고 고급스럽고 더욱 전문화 된 것이다. 또한, 정파적 저널리즘, 긍정의 저널리즘의 다른 매력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고르고, 판단하지 않고 질서를 획득하는 일이다.
저널리즘의 우선은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므로 더 많은 해석은 불협화음과 진실을 애매한 수준에서 방황하게 할 수 있다. 언론은 해석을 추가하기 전에 자료를 종합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 저널리즘의 책임이 중요해진 것이다.
시민들은 정보를 자신들이 시간을 들여서 추려내는 것보다 무엇이 진실이고 중요한 일인지를 얘기해줄 정보 제공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기자의 중추적 사명은 사실 확인과 종합하는 일이다. (제록스 연구소의 존 실리 브라운 “의미 부여자”)
■ 진실의 필요성은 축소되는 게 아니라 더 중요해졌다. 21세기에는 넘치는 정보 속에 거짓의 가능성도 확장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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