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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83506
    작성자 : 비키라짐보
    추천 : 15
    조회수 : 4692
    IP : 211.253.***.34
    댓글 : 8개
    등록시간 : 2015/10/01 13:58:27
    http://todayhumor.com/?panic_83506 모바일
    [단편] '우리는 형제다'
    옵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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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gle_co_kr_20151001_090817.jpg

    '우리는 형제였다'




    "자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의 선택을 확인하겠습니다. 사인은 하셨지만 지금이라도 원하신다면

     여길 나가 현재의 인생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청연씨! 

     정말로 모든걸 내 던지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이건 당신에게 드리는 최후의 기회입니다."



    [미안했다. 청연아 그동안 나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하아... 우리 솔이가 보고싶네... 안녕 청연아 큭!]

    [형! 형!!]



    그 순간 문득 떠올라 내 머리속의 사고체계를 온통 헝클어놓고, 

    진득한 감정으로 체득되어 기어코 참았던 애달픔까지 토해내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날... 형과 나누었던 우리의 마지막 통화였다.

    짧은 통화속에 녹아든 슬픈 형제애의 잔상을 왜 그때의 난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무리 빠른 후회도 결국 늦는 법

    뒤늦은 후회가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던 내 심장을 옥죄어온다.

    무겁다. 늦은 만큼 후회는 내 두 어깨 위에서 제 몹집을 불려왔나보다. 

    후회는 애달픔으로 애달픔은 묵직한 책임감으로 나를 떠민다.



    "할 겁니다. 형이 내게 그랬던 것 처럼..."


    이 선택이 나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형이 감내했던 거라면, 나도 참고 그 무게를 나누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눈을 감았다.

    옛 기억의 향수가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후덥지근한 여름, 엄마의 손길, 아버지의 음성, 그리고 퀴퀴한 형의 땀냄새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제 곧 제법 긴 여행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마음의 준비는 다 끝났다.

    헌데 문득 집에 있을 아내와 딸 은서가 떠올랐다.

    이제사 형이 왜 마지막 순간 그런말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보, 그리고 은서야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꼭 다시 찾아갈께... 당신과 우리 은서가 지금 너무 보고싶네..."


    google_co_kr_20151001_133601.jpg
    (내용과 무관한 뻘 사진 투척)


    <3년 전>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신경이 곤두서고, 좋지 않은 기분이 든다.

    이 미묘한 감정은 단순히 찝찝한 성향만을 체득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날 선 공격성을 동반하고 있었다.

    마치 좋아하던 장난감도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칠게 내팽개치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그러할까?

    그렇게 난 억지로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벌써 세번째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

    그 일상적인 짜증스러움이 나를 자극해 왔다. 

    심정적으로만 본다면 단번에 내 던져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온 힘을 다해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대표님 채권단에서 계속 독촉이 옵니다. 다음주까지 막지 못하면 최종부도처리 할 수도 있다고..."

    "알아! 누가 몰라! 지금 돈이 안돌잖아 돈이! 기다려 내가 무슨 수를 쓰던 다음주까진 돈 마련해 볼테니까!"

    "예 사장님"



    답답한 심정에 열불이 나, 괜시리 죄 없는 직원에게 짜증을 퍼부었다.

    뒤늦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지만, 직원은 이미 대표실 밖으로 나간 뒤였다.

    갈 곳 잃은 미안함은 허망하게 흩어지고, 직원의 말로 인해 되살아난 걱정과 근심이 망령처럼 그것을 주워 먹는다.

    최종 부도시한은 7일...

    성공한 IT기업 대표, 코스닥 상장, 외국 IT회사와의 전략적 제휴

    지난 7년간 나의 행보는 화려했다. 

    과연 이 성장의 끝에 브레이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회사는 커 나갔고,

    누가봐도 명확한 성공의 문턱에 있었다.

    대기업의 공격적 진출, 경쟁회사의 합병을 통한 몸집 불리기, 업계의 치킨게임 시작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던 나의 회사는 경쟁사가 흘른 말도 안되는 악성 루머와

    그것을 부채질한 부도덕한 언론사의 악의적 보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될 정도로 귀한 몸값을 자랑하던 회사의 주식은 연일 하한가를 기록했고,

    급기야 계속된 매출 부진으로 인해 투자사들이 떠나버렸다.

    시장은 최대의 활황세였지만, 지독한 치킨게임의 여파로 매출대비 회사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회사를 키우고, 회사를 알렸으며, 세간의 화제를 불러 모았던 공격적인 마케팅은 더 이상 효자가 아니었다.

    되려 회계장부엔 마케팅 비용의 고정지출이란 이름의 악재로 남았을 뿐이었다.

    대출, 연이은 대출, 그 외에 다른 돌파구는 없었다. 

    그리고 최종적인 대출 연장 거부 통보를 받은 어젯밤부터 회사는 극도의 위기상황에 달했다.

    매출 600억에 코스닥 시장을 호령하던 황제주로 불리던 회사가 

    이제는 고작 주말에 돌아올 어음 10억을 막지 못해 전전긍긍...

    심지어 부도가 나기 일보 직전이다.

    회사가 잘 나갈때는 돈 처럼 보이지도 않던 10억이 이제 내 목을 죄어 온다.

    집과 차, 그리고 가지고 있던 유동성 자산을 팔면 4억정돈 충당할 수 있을 듯 보였지만

    남은 6억이 문제였다.

    [특집기사-개천에서 난 용, 가난한 공장 노동자의 아들이 대한민국 최고 IT기업의 CEO가 되기까지]

    이젠 한 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진 과거의 인터뷰 기사가 벽에 매달려 날 조롱한다.

    이럴때 개천에서 난 용이 아니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좋은 배경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있는 집 자식들에게야 6억은 돈도 아니지 않은가?

    성실하지만 자식들에게 물려줄 무엇도 가지지 못한 나의 아버지

    심각한 진폐증에 다리까지 저는 장애인 형

    선하고 가정적이지만 단 돈 몇 천만원조차 융통할 여력이 없는 아내와 처가식구들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그 모든 것들이 괜시리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그깟 돈이 뭐길래 내게 이런 절망감을 안기는가!

    죄없는 가족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것에 대한 죄의식이 뒤섞여

    날 지옥 한 가운데에 홀로 서 있게 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가 올 곳이래봐야 채권자 또는 채무자일거란 생각에 이틀 전 형과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아무 전화도 받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때마침 휘몰아친 극도의 원망과 죄의식이 회오리치지 않았다면 아마 난 

    그 전화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화가 났다. 상대방이 누구든 뭐든 그걸 퍼붓고 싶었다.

    그래서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갚는다구 갚아! 우리 LS 네트웍스 그깟돈 몇 억에 쓰러질 회사 아냐!! 돈 준다고!!"



    격앙된 목소리가 토해졌다.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 울릴만큼 커다란 분노가 폭발했다.

    막혀있던 둑이 터지듯 거칠어진 분노가 방류된다. 

    물론 쏟아낸 만큼 화는 수그러들고 이성적 후회가 고개를 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고요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침묵이 되려 반가웠고, 

    사과를 할 생각이 없기에 머리속엔 빨리 전화를 끊어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헌데 바로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나보다 더 미안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저기... 보험금 수령 관련해서 연락... 드... 드렸는...데요?"



    이해 못할 이야기였다. 

    나는 보험을 믿지 않았다. 보험을 드느니 그 돈으로 적금을 드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갑자기 전화를 해 보험이라니... 조금 생뚱맞은 기분이 들었다.



    "잘 못 거신거 같네요. 전 보험 든 거 없습니다."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한 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니... 저... 저기 이청연씨 아니세요?"

    "맞는데요. 보험은 들지도 않고, 든 적도 없습니다."

    "아... 아니요 보험권유가 아니고 보험금 수령관련 연락 드린거구요... 어디보자 음... 

    명의는 이청우씨로 되어 있네요. 수령인만 형제이신 이청연씨로 되어있구요 이청연씨 본인 아니신가요?"



    조금 당황스러웠다. 

    보험, 그것도 형의 보험이라니, 그리고 왜 보험금 수령인 나로 되어 있을까?

    내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머뭇거리자, 수화기 너머의 보험회사 직원이 단 한마디로 나를 속물로 만들었다.



    "총 수령액 8억 2천만원입니다. 서류 몇 가지 준비하셔야 하구요"

    "네? 파... 팔억?"

    "네 8억 2천만원 맞으시구요. 서류 확인 몇 가지하고 몇 가지 조사만 끝나면 아마 일주일에서 열흘 뒤면 수령이 가능하실겁니다."



    나는 지금 이것이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당황해 있었다. 

    내게 당장 필요한 돈은 6억 남짓... 헌데 8억 2천만원이 내 수중에 들어온다.

    그 돈이면 집을 팔지 않아도 될 것이고, 딸 은서가 이사 문제로 전학을 갈 필요도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내게도 위급한 상황에 이런 큰 돈이 생길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형이 든 보험이 과연 무엇이길래 수령액이 8억 2천만원이나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새도 없을 만큼...



    "사망보험금은 일반 보험과 달라서 처리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 불법적인 부분이 없는지에 대한 조사가 들어가거든요"

    "지금 뭐라고 하셨죠?"

    "아 네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조사구요. 별로 염려는 안하셔도 됩니다."

    "아니 그 전에!"

    "아! 예... 형제분이신 이청우씨의 사망보험금..."

    "젠장!!!"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에 IT 업계의 떠오르는 총아, 

    나를 수식하는 수많은 미사여구를 헛되게 만들만큼 그 말은 충격적인 말이었다.




    "혀... 형의 사... 사망보험금!!"

    "아... 이런 모르셨나보군요! 형님이시던 이청우씨가 이틀 전 자정무렵에 ㅇㅇ동 인근 고가에서 떨어져

     실족사 하셨습니다."

    "이틀... 이틀전!!! 젠장!"



    보험회사 직원의 말에 나도 모르게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쿵하는 소리에 놀라 직원 하나가 사무실로 달려 들어왔지만, 나의 당황한 표정을 보곤 조용히 돌아 나갔다.



    "이틀 전... 이틀 전... 흑..."



    회사가 악화일로에 빠져 최악의 상황에 치닫고 있었던 이틀 전의 그 밤...

    술을 마셔도 도무지 취하는 것 같지 않던 그 밤에 갑작스레 걸려온 형의 전화

    그리곤 실의에 빠진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곤 제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형

    문득 형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미안했다. 청연아 그동안 나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하아... 우리 솔이가 보고싶네... 안녕 청연아 큭!]



    안그래도 답답하던 차에, 알 수 없는 말들로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든 형과의 통화

    왜 난 다시 전화해 무슨일이라도 있는 거냐고 묻지 못 했을까?

    때 늦은 후회가 나의 죄책감을 더 강하게 부채질했다.



    "마음의 정리가 되시면, ㅇㅇ생명 생명보험처리계로 방문하셔서 서류 접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지 보험회사 직원은 익숙한 멘트를 남긴 후 전화를 끊었다.

    허나 나의 슬픔은 회사의 부도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기적 안도감과 뒤섞여 혼탁했다.

    기쁨과 슬픔이 번잡스럽게 교차하는 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하나뿐인 형의 죽음 앞에서 안도감이라니... 쓰레기 같은 새끼..."



    자조섞인 비난과 자학이 나를 향한다. 

    그 비난과 자학이 면죄부가 되어줄리 없겠지만, 그게 최소한의 도리이고 형에 대한 미안함의 발현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죄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나 자신에 대한 이기적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때 즈음,

    직원 하나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똑똑]

    "대표님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누가 찾아와도 없다고 하라고 했잖아!"

    "저... 그... 그게..."



    가시돋힌 나의 질책에 문 앞에 선 직원의 표정이 약간 어색해졌다. 

    그것은 마치 나의 지시를 어길 수 밖에 없는 어떤 이유라도 있는 듯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이청연 대표님... 강남서 박종환 경삽니다. 그 저... 긴밀하게 상의 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불편한 표정의 직원 뒤로 속알머리 없는 민대머리에 낡은 골프점퍼를 입은 한 사내가 비집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 역시 나의 가시돋힌 표정에 겸언쩍었는지, 품 안에서 경찰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멋 적은 미소를 짓는다.



    "무슨 일 이시죠? 제가 아는 한 저와 제 회사는 어떠한 불법적인 일도 한 적이 없습니다만!"

    "아! 뭐 생각하시는 그런 부분은 아닙니다. 이청연 대표님 본인 맞으시죠? 이틀 전 사망한 이청우씨의 동생...

    사망하신 형님과 관련해서... 뭐랄까? 좀 상의드릴 부분이 있어서 왔습니다. 일단 좀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그는 나의 허락도 없이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지만, 수년간 사업을 하면서 느낀 나의 감은 그 미소 이면에서 일렁이는 악취를 포착했다.



    "형의 사망소식은 저도 방금 전에 들었고, 형과 마지막으로 만난건 일주일도 넘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선 실족사라고 하던데... 저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하하하 제가 뭐 이청연 대표님을 어쩌겠다거나 해서 온 건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래도 뭐 좀 민감한 부분을 얘기해야 할지 모르는데... 자! 일단 안죠 네?"



    그가 입을 여니 한층 더 심한 악취가 풍겨졌다. 나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시체를 파먹는 하이에나 같은 자들이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번뜩이는 그의 눈 빛과 한껏 차 있는 자신감으로 보아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했다.



    "차 좀 내와요."

    "네"



    차를 달라는 핑계로 직원을 내보내자 자신을 박경사라 소개한 그는 사무실 소파를 마치 제 집 안방 마냥 걸터 앉아 주위를 돌아봤다.



    "이야... 상장에 상패, 감사패... 저 같은 일개 경찰이 앉아있자니 주늑이 들 정도네요 하하하"

    "용건이 뭡니까?"



    지저분한 악취가 너무 심해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난 그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역시 요즘 분들은 빨라, 효율적이라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이틀 전에 사망하신 이청연씨의 형 이청우씨 얘깁니다."

    "저도 말씀드렸다시피 형의 사망은 저도 조금 전 알게 됐고, 보험사 직원 말로는 실족사라고 하던데, 제가 뭐 더 나눌 얘기가 있을까요?"

    "네 그렇죠. 사고사 육교 위에서 떨어지셨죠. 마침 지나가던 대형 화물 트럭 두대가 연이어 형님을 덮치고, 안타깝게도 아주 처참했어요.
     
     제가 사건 현장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잘 알고 있죠."

    "그래서요?"

    "형님 이청우씨가 ㅇㅇ생명을 통해 드신 사망보험금 8억 2천만원... 그런데 말입니다? 이청우씨가 사고사가 아니라면 그 돈은 한 푼도 지급이 안된다는 것 혹시 알고 계십니까?"



    박경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바로 그거였다. 

    처음 내가 그에게서 느낀 악취의 근원...

    시체의 썩은 고기를 뜯어먹고 사는 하이에나의 눈 빛이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역겨움과 혐오감을 억지로 누르고 나서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래서요? 지금 우리 형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란 말입니까?"

    "명백히도요. 제가 그 밤에 마침 그 곳을 지나고 있었으니까요!"

    "제게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뭡니까?"

    "아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큰 회사를 하시는 분이라면... 저도 하는 일이 일이다보니 
      
     직접적으로 어찌하자는 말을 꺼내긴 좀 어렵네요. 헤헤 통상 이쪽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1/3 정도는 후사를 한다고 하더군요."


    구역질 나는 악취가 휘몰아 쳤다. 

    이 짐승같은 인간은 지금 형의 죽음을 미끼로 나에게 협잡을 말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죄책감과 자괴감이 뒤늦게 탈출구를 얻기라도 한 듯 성가시게 날뛰었다.

    격한 분노, 그것은 금새 증오로 변했다. 

    허나 쓸데 없이 현실적인 나의 이기심이 억지로 증오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며 말했다.



    "내가 그 쪽의 말을 어떻게 믿죠? 내 형의 죽음을 미끼로 돈을 갈취하려는 협잡꾼을..."

    "워워... 진정하세요! 이래뵈도 민중의 지팡이 경찰 아닙니까!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고, 

     이렇게 심증도 있고! 저도 신문 봅니다. 요즘 회사 사정이 말이 아니라고 하던데...

     서로 좋은게 좋은거라고 윈윈 합시다."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작은 수첩을 하나 꺼내어 조용히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다행히 아시는 물건인가보네요?"



    그가 내민 것은 낡디 낡은 형의 수첩이었다. 수첩이라기 보다는 일기장이라고 해야 옳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형이 습관처럼 쓰며 들고 다니던 것이기에 나는 대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형의 수첩인데..."

    "그리고 형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품이기도 하죠."



    형의 유품이라는 그의 말을 들어서인지 수첩 한 귀퉁이를 적신 검붉은 얼룩이 나의 두 눈을 사로 잡았다.

    단순히 시선을 끈 것이 아니라 갑작스레 터진 눈물과 함께 울컥하는 감정까지 새어나왔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부득이하게 증거자료 확인 차원에서 좀 읽어 보았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졌음을 토로하는 동생과 그로 인해 고뇌하는 형... 아름다운 형제애에 감탄했죠.

     거기까진 아름다운 휴먼 스토리였는데, 이후 작심하신 듯 보험회사에 가서 자신의 형편에 

     맞지도 않는 고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하신 것도 적어 놓으셔서 좀 안타깝더군요.

     고인께서는 꽤 꼼꼼하신 성격이셨나보죠? 잘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이틀전인 8월 ㅇㅇ일을 디데이로 삼으시고, 그 곳 육교를 사전 답사차 방문하신 후 

     고인께서 안도하시는 내용까지 적혀 있더군요. 흐흐 이 내용을 보험사에서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젠장! 이 빌어먹을 자식!!"

    "워! 워... 진정 진정! 왜 이러십니까 비지니스 하시는 분이! 흐흐흐 흥분하지 마세요

     요즘 회사가 많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저도 대표님 도와드릴려고 찾아온 은인한테 이러면 됩니까?

     자살을 계획한 사전 증거, 수첩에 적힌 고인의 심경적 변화 내용...

     거기다 현장을 목격한 경찰이라는 공신력있는 증인까지 나타난다면! 

     어때요? 보험사로선 충분히 보험금 수령 거부 대상이 될만한 사안이죠.
     
     이청연씨! 당신 형님은 말야! 당신 회사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이 되서 목숨까지 내던졌는데

     당신이 형님 유지를 받들어야 되지 않겠어!"



    그는 점차로 언성이 높아지더니 마지막엔 숫제 호통을 치며 말했다.

    분노한 나의 손은 책상위에 놓여진 대표이사 명패를 들어 그의 머리통을 박살내고자 했지만,

    진절머리쳐지도록 현실적인 나의 이기심이 차가운 에어콘 바람처럼 심장을 얼려버렸다.



    [형은 이미 죽었어! 어쩌자는거야! 회사가 부도나면 나나 아내, 그리고 딸 은서까지 
     
     길 바닥에 나앉고 말아! 나 하나만 바라보며 사셨던 부모님은 어쩌고!

     형의 죽음까지 헛되게 만들 생각이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수첩은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어차피 사본을 따로 준비해 두었으니까요.

     걱정은 마십시오. 저 경찰입니다. 연금 받아먹야 되서 허튼짓은 안 합니다.

     입금 하시면, 사본은 지울꺼고, 그 날 그 사거리 육교 아래에서 본 것도 다 잊어버릴 겁니다.

     계좌번호 여기 남겨 놓을테니까 부디 현명한 판단 하시기 바랍니다."


    제 목의 옷깃을 죄던 손이 풀리자, 박경사는 이제야 살만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띄운채 주저리 주저리 

    떠들며 제 명함 뒤에 계좌번호를 적어 놓고는 나가버렸다.

    그렇게 그가 나가자 내 두 다리도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소파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형... 나의 형 이청우...

    그는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나에게 많은 숙제를 남겨주었다.

    사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하던 형이었건만, 그 마지막조차 순탄치만은 않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은 형의 죽음을 놓고 협잡꾼과 거래를 해야만 하는 지금의 내 상황과 맞물려

    지독한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빌어먹을 자식! 그래봤자 2살 더 많은 게 다면서, 왜 이렇게 나를 이렇게 비겁한 놈으로 만드니!!"



    상처입은 푸념이 목표를 잃고 허공에서 사라진다.

    형과 함께 했던, 나의... 그리고 우리 가족의 낡은 기억이 남루한 흑백사진속의 풍경처럼 머리속에 떠올랐다.

    형... 나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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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기억속의 형은 언제나 무섭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공장 노동자인 아버지와 시장에서 자판을 벌여 겨우 우리 네식구를 먹여살리던 어머니...

    두 분 모두 생계를 꾸리는 것이 최대의 미덕이던 시절에 나와 형을 굶기지 않고, 또 학교에 보내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또 일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형은 마치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내게 집착하고 나를 몰아세웠다.



    "야 이청연 너 공부 안하고 어디갔었어! 엄마 아빠 오시기 전까지 학교에서 배운 것 예습 복습 다 해 놓으라고 했잖아!"

    "형! 나 옆집 철이랑 같이 잠깐만 개울가에서 놀고와서 하면 안될까? 응? 미꾸라지도 잡고, 개구리도 잡고 싶어"

    "시끄러워! 내가 누누히 말했지? 니가 우리집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당장 책 가져와! 다 읽고 복습할때까지 나갈 생각 하지 말고!"


    형은 독재자였다. 겨우 두살일지언정 유년시절의 2년이란 차이는 엄청나서 나의 치기 어린 도발은 늘 형의 완력에 굴복해야 했다.

    겨우 10살 짜리 어린아이에게 밤 늦은시간까지의 예습과 복습이라니! 

    빌딩숲이 들어선 지금이야 일상적인 이야기지만

    당시의 시대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국민학교 저학년, 그것도 시골에 사는 꼬마가 하루 12시간 이상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절대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다.



    "오늘까지 교과서 80페이지에서 120페이지까지 다 요약하고 나한테 검사 받어 알았어?"

    "으앙... 그걸 언제 다 해... 형 나 열장만하면 안돼?"

    "야! 이청연! 너 또 형 한테 혼나볼래! 너 그 따위로 해서 성공할 수 있겠어? 
     
     이래선 임마! 좋은 대학도 못 가고, 실패한 인생이 된다고!"

    "흐허헝... 형아 때리지마 내가 잘 못했어! 할께 한다고..."

    "널 때리는 형 마음은 어떻겠냐! 좀 잘해 응? 청연아! 형도 다 너 잘되라고 이러는거야!

     두고봐! 나중에 너 크게 성공하고 나면 형한테 고마워할껄? 이게 다 니가 쓰레기같은

     인생을 살까봐 그러는거야! 이 자식아!"



    그런 형의 압제를 견디지 못한 나는 툭하면 울고, 형을 피했지만 형은 어김없이 날 찾아내

    혼내고 또 타일렀다. 

    형은 마치 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국민학교 학생부터, 철없는 중학교를 지나,

    경기도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할때까지... 형의 압제는 지칠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물론 꼭 그 결과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1등, 또 1등, 중학교 수석입학, 전국 최고 명문이라는 사립 고등학교의 수석 장학생!

    사람들은 모두 개천에서 난 용, 초라한 시골 동네에서 태어난 수재라고 입을 모았다

    학내 수석, 전국 모의고사 상위 0.001%이내의 우수한 학생, 서울대 입학은 따논 당상이라는 말이 오갔다.

    형에게 나는 자랑이었고, 자부심이었기에 난 그런 형을 실망시켜선 안됐다.

    허나 그 이면엔 형의 무자비하다시피 했던 폭력과 억압이라는 근간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난 형을 싫어하게 됐다.

    형은 내게 폭군이었고, 괴로움이었으며, 나를 숨막히게 하는 부담감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 때 흉폭한 괴수가 우리집과 온 세상을 뒤 흔들었다.

    IMF

    아버지가 십여년도 넘게 다니시던 공장이 문을 닫았다. 커다란 회사들이 온통 문을 닫는 시기라

    나이 많고, 병든 아버지의 재취업은 요원했다.

    시장에 나가시던 어머니도 쫓겨났다. 시장현대화 사업이란 미명하에 자기 땅 한평 없는 노점상들을

    구청에서 모두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허리가 안 좋아 온종일 방에 누운 아버지, 

    그리고 산에서 캐온 나물을 다음어 시장에 내어 끼니라도 해결해 보려 필사적인 어머니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눈물 흘리던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허나 가장 절실했던건 형의 거취였다.



    "까짓꺼 학교 더 다녀 뭐하겠습니까? 어차피 2년 뒤면 우리 청연이 대학도 가야되고

     막말로 지금 제 성적에, 우리집 형편에... 제가 대학가는건 사치고 오만입니다."

    "청우야 그래도 그렇지..."

    "괜찮아요! 뭐 죽으라는 법 있겠어요? 공부야 나중에라도 형편 나아지면 할 수 있는거고

     청연이가 이제 우리집 대들본데, 한 놈이라도 난 놈 하나 있으면 그거라도 밀어줘야지요!"



    나만큼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성적이 좋았던 형이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었다.

    알고보니 학교를 그만두기 몇 달전부터 진학반이 아닌 취업반을 자청해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렇게 형의 학창시절은 고3 여름을 기점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어느 대학에 진학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바로 그 시기에

    형은 진득한 기름 냄새 가득한 타이어 공장에 입사해야만 했다.



    "에고 청연아! 형이 샤워를 한다고 했는데도 기름냄새가 너무 많이 나지? 미안타! 너 공부하는데 방해되구로"

    "형! 그 회사 꼭 다녀야겠어? 나야말로 대학 천천히 가도 돼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지 형!"

    "시끄러 임마! 난 공부 체질이 아냐! 너만 성공하면 돼, 그럼 나 고생하는 것도 다 보상받는거야!"

    "형!"

    "너 간만에 형한테 혼나 볼래! 형이 바빠서 신경 못 쓴다고 공부 소홀히 하기만 해! 가만 안둘테니까! 콜록! 콜록!"



    형은 그렇게 매쾌한 석유냄새와 잦은 기침을 유발하는 분진속에서 일하면서도 나의 성공에 집착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IMF라는 초유의 악마가 한국땅을 지배하는 동안에도 난 큰 어려움 없이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약값, 엄마의 식탁, 우리집의 생활비, 내 학비까지 오롯이 형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 몫을 하기 위해 형은 심각한 진폐증 증세를 얻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형은 돈을 벌기 위해 다니던 타이어 공장내에서도 모두가 꺼려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분진과 유독성 물질 때문에 형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그만두었던 일이었다.

    그만둔 이들 또한 별 다른 이유없이 암이나 다른 질병 걸려 시름시름 앓는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헌데도 형은 꿎꿎하게 그 일을 도맡아서 해냈다. 

    단지 수당이 쎄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로...

    결국 형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그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OCR고지서를 들고 은행에 가 대학등록금을 입금하고 온 날의 형은 활짝 웃고 있었다.

    하지만 피섞인 가래와 자지러질 것 같은 기침소리는 더 심해졌다.

    결국 형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장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세상의 인식은 척박했고, 형은 그 흔한 산재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공장을 나와야 했다.

    그래도 형의 얼굴은 밝았다.

    망가진 건강의 댓가로 공장은 넉넉한 퇴직금을 주었고, 

    형은 그 돈으로 병든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내 남은 대학 등록금을 댈 수 있어 만족한다고 했다.

    내가 형을 싫어하게 된 건 그 즈음부터였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몰랐다. 형이 내게 지운 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의 기대라는 엄청난 짐은 나를 성공이란 이름의 부담감 속에 가둬두기에 충분했다.

    나 자신을 매몰시킨 압박감은 꿈많던 나를 성공이란 목표만을 바라보며 사는 냉정한 기계로 만들었다.

    입학 후 빨리 군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성공을 위한 토대라며 형을 설득해 곧바로 입대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 형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2년 2개월... 군대란 도피처는 영원하지 못했기에, 나는 결국 다시 형의 기대감속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 형은 더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타이어 공장에서 받은 위로금조의 보상금을 다 쓰고 나자 형은 

    내가 군대에 간 사이 '청연이를 위해 돈이 필요할지 모른다'며 목재 공장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형처럼 운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운반중이던 목재가 굴러 떨어지며 형을 덥쳤다. 

    내가 제대하던 날 형은 다리를 절면서 웃었다.



    "왔구나 우리집 대들보! 넌 걱정말고 대학공부만 해! 형 돈 많아! 하하하"



    평생 다리를 절게 된 댓가로 형은 또 돈을 벌어왔고, 당연히 그 돈은 몽땅 나의 하숙비며 생활비로 들어갔다.

    형의 폐를 갉아먹고, 형의 다리를 잘라 다니는 대학

    난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늘 죄인과 같은 심정이었고, 나를 보며 웃는 형의 미소는 미소가 아니라

    극도의 부담감이 되어 날 괴롭혔다.

    죽도록 공부, 또 공부했다. 난 그 것만이 형이 내게 지운 빚을 변제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3학년때 일치감치 창업벤처를 시작하고, 각종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때마다 나의 시상대 가장 가까운 곳엔 다리를 절뚝이는 한 남자가 박수를 치고 또 눈물을 흘렸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에 휴학계를 내고 본격적으로 벤처회사를 창업한 것도

    형에게서 달아나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었다.

    잠도 자지 않고, 그 흔한 20대의 유희조차 누리지 않은 채 나는 일과 성공에 몰두했다.

    그 와중에도 형은 어디서 무엇을 내어주고 받아왔는지 돈 뭉텅이를 들고와 내 회사 운영자금을 댔다.

    나는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형이 나를 위해 어딘가에서 희생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풍성하던 형의 머리칼이 뭉텅 뭉텅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난 아무말 하지 않았다. 이것이 형이 사는 방식이었고, 형은 그 가치관을 바꿀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직 성공 그 하나만으로 형에게 대답해야 했다.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벤처에 매달린지 불과 3년만에 나는 해외 유수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며 당당히 21세기를 선도하는 유망 벤처인이 되었다.

    코스닥 상장!

    대한민국의 돈이란 돈은 다 그곳에 있었다.

    나의 회사는 상장되자마자 엄청난 가격으로 주식을 팔아 제꼈고, 순식간에 나는 젊은 거부의 대열에 올랐다.

    결혼도 그 즈음에 했다. 

    아내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처음 벤처를 시작할때부터 내 곁에서 함께 일을 했던 학교 동기였다.

    [널 보면 늘 무언가에 쫓기며 사는 사람 같아, 니가 가진 짐 내가 좀 나눠가지고 싶어... 니가 좀 편해졌으면 좋겠다.]

    난 아직도 "왜 나와 결혼했냐"라는 아내의 질문에 언제인가 아내가 내게 해줬던 그 말을 돌려준다.

    그랬다. 아내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서울대 출신 며느리에 부모님은 물론 형도 만족해했다.

    성공과 함께 딸도 태어났다. 

    아내와 나를 반씩 빼 닮은 너무도 예쁜 딸...

    딸은 오로지 성공의 외길만을 보고 달려온 나에게 최고의 보물이었다.

    그래서일까? 형은 내 딸을 끔찍히도 아꼈다. 어떨땐 그렇게도 집착하던 나보다 내 딸을 더 사랑하는 듯 했다.

    물론 어린 딸의 면전에서 누우런 가래를 뱉어내고, 연신 기침을 해대는 형을 아내로선 꽤 못 마땅해하는 것 같았지만,

    형의 진심을 알기에 아내도 분란을 일으키진 않았다.

    되려 형과 아내가 틀어진 것은 딸 은서의 이름을 지을 때였다.



    "솔이... 솔이라고 해 예쁘잖아 이 솔! 응? 솔아! 솔아 너 참 예쁘구나! 내 딸하자 솔아 응?"

    "아주버님 죄송하지만 이름 이미 지었어요. 은서예요 은서"

    "안돼! 안돼! 안돼!!!"


    느닷없는 형의 고함소리에 가족들 모두 놀라고, 어린 은서 역시 울기 시작했다.

    허나 형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우는 아이를 억지로 끌어 안았다.

    놀란 딸 은서가 자지러질 듯 울어댔지만 형은 자신에게로 다가온 아내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이솔! 이솔! 솔이라고 지어! 얘는 솔이야! 이솔이라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형의 모습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형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사색이 된 아내, 당황한 부모님,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대는 나의 소중한 딸...

    태어나서 처음으로 난 형의 멱살을 잡고 집 밖으로 끌어냈다.



    "미안해... 미안해... 난... 소... 솔이란 이름이 예쁜것 같아서..."

    "그만해 형! 내 어린시절, 내 인생 모두 형이 하고 싶은대로 했잖아! 적어도 딸 이름은 내가 지을꺼야!"

    "그... 그게... 소...솔이가..."

    "그만해! 형... 한동안 내 집에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내가 많이 놀란 것 같아. 오늘은 그만 가줘"



    고개를 푹 숙인 형은 극도로 낙담한 표정이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형 본인 스스로도 한동안 울며 식음을 전폐했다고 했다.

    하지만 난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외려 내 삶을 조여오던 형이란 짐을 밀어냈다는 생각에 해방감이 들 정도였다.

    물론 딸의 이름도 형이 말한 '이솔'이란 이름이 나쁘진 않았지만 

    '이솔'도 괜찮다는 아내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가 고집을 부려 '이은서'로 정했다.



    "소... 솔이는 잘 있어?"

    "형 바빠서 지금은 형이랑 통화 못할 것 같아. 그리고 솔이가 아니라 은서래두!"

    "그... 그래 미안해... 나중에 안 바쁠때 전화 줘 솔이 사진도 좀 보내주구"

    "몰라 바쁘니까 끊을께"



    형은 그 난리가 있고나서도 줄 곧 은서를 솔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전에 형이 타이어 공장에 다닐 때 쫓아다니던 대학생 아가씨가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사귀긴 했는데, 집안 형편도 어렵고 형의 몸도 안 좋아져 결국 안 좋게 헤어졌다고 했다.

    형은 그 일에 대해 절대 말하려고 들지 않아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그 여자의 이름이 아마 '이솔'이 아니었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었다.



    어쨌든 형의 소원대로 나는 결국 성공을 했고, 그 보답으로 형과 부모님이 함께 살 수 있는 고급 아파틀 사드렸다.

    그것이 날 위해 평생을 바친 부모님과 형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난 그렇게 조금씩 갚아나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렇게 내 성공이 명확해지자 내가 빛나는 만큼 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알콜 중독...

    그렇게도 성실하던 형이 왜 알콜중독이 되었을까하고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난 알것도 같았다.

    형이 살아온 삶과 인생의 최대 목표는 날 성공시키는 것이었고, 

    보란듯이 난 성공했다.

    그 말은 즉 나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형의 삶이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뜻이었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배는 표류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형은 바람조차 불지 않는 적막한 대해 한 가운데에서 천천히 말라붙어 갔다.

    멀쩡한 날보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날이 더 많았고, 술에 취해 부린 난동으로 경찰서에 붙들리는 날이 늘어만 갔다.

    형이 그나마 멀쩡한 정신으로 가족을 대하는 날은 명절... 특히 내 딸 은서를 볼 수 있는 날 정도에 불과했다.


    "솔아 솔아 이쁘기도 하지... 아빠야 솔아 응?"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멀쩡한 정신은 아니었다.

    아내는 늘 알콜중독자 아주버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척 하며, 그 핑계로 형과 딸 은서를 떼어놓으려 애썼다.

    아내는 이제 형을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했다.


    "여보 아주버님이 우리 은서 옆에 못 오게 하면 안돼? 난 걱정돼 죽겠어! 혹시나 아주버님이..."

    "쓸데 없는 소릴... 우리 은서를 저렇게 이뻐하는데..."

    "당신 몰라서 그래! 알콜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데... 봐! 아직도 우리 은서를 보고 솔이라고 하잖아!"



    형은 여전히 은서를 솔이라고 불렀다. 이젠 부모님도 포기했는지 형에게 잔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형의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져, 알콜중독자를 치료하는 전문 병원에라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논이 공론화되어 갈 때즈음...

    명확한 성공의 전리품이었던 나의 회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무분별한 진출로 인한 레드오션, 회사를 뒤흔드는 각종 루머와 악의적인 기사...

    신기한건, 내 성공이 흔들리고, 그 사실을 형이 알게되면서부터 형이 달라졌다는 거였다.

    형은 그렇게 말해도 끊지 못하던 술을 끊었다. 피켓을 들고 내 회사에 대한 악의적 보도를 자행한 언론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얼굴은 초쵀했지만 눈빛은 전에 없이 맑아졌다. 아내조차 놀랄 정도였다.

    내 빛이 밝아 질수록 쇄약해지던 형의 빛이 내 빛이 흔들리자 어둠을 벗어나 불타오르기 시작한 거였다.

    난 확신했다. 

    형과 나의 관계는 거꾸로 세워진 모래시계와 같다고...

    형 삶의 모래는 계속해서 아래쪽에 있는 나를 향해 내려온다. 

    오로지 나의 성공을 위해...

    그래서 내 삶의 모래가 가득찰 수록 형은 피폐해지고 공허해질 수 밖에 없었다.

    허나 나의 성공으로 내 삶의 모래가 가득차 그 모래시계가 거꾸로 세워지면,

    내 인생의 모래는 형에게로 쏟아지고, 내 삶이 비워지는 만큼 형의 삶은 채워지고야 마는 것이다.

    나의 부질없는 망상인지는 몰라도, 현실은 바로 그랬다.

    형은 다리를 절뚝이고,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도 누구보다 맹렬히 맞서 싸웠다.

    그러나 난 불편했다. 다시금 형의 기대라는 극심한 부담감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또 형이 주는 그 무한한 베품이 얼마나 큰 빚으로 남아 내 목을 옥죄어 오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날 밤...

    주 거래 은행의 대출 연장승인이 거부된 바로 그 날...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내게 형은 전화를 했다.




    "청연아 형이야"



    술에 취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단박에 형임을 알 수 있었지만,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봐도 명확한 성공의 길에 서 있던 난 이제 반대로 명백한 추락이 예고된 절벽위에 서 있었다.

    지금의 형은 그 누구보다도 불타오르는 빛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난 그 빛이 반갑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그 동안 널 너무 많이 힘들게 했지? 힘내! 임마 형이 있잖아"



    울먹이는 형의 목소리... 날 위하고 응원하는 저 목소리... 하지만 난 그게 너무 싫었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날 대하는 형의 끝없는 사랑이 불편했다.



    "형 또 술 마셨지! 왜 울고 난리야! 술 좀 작작 마셔! 응!!"



    짜증섞인 목소리, 절벽에 내몰린 내 성공을 나의 파멸을 향한 분노가 형에게로 쏟아졌다.



    "형 언제 정신 차릴꺼야! 응!! 1인 시위 그딴것도 다 집어치워! 누가 알아주기나 해! 부모님이나 돌보라고!!"

    "청연아...  청연아...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다 잘될꺼야!"

    "시끄러! 형이 백날 그런소리 해봤자 아무 도움 안된다고!"

    "비록 회사는 어려워도, 넌 예쁘고 착한 아내도 있고, 세상 누구보다도 예쁜 딸이 있잖아! 그거면 된거야! 

     내가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어! 사실 그거면 되는데 말야!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행복한 네 가족이 있고

     그거면 되잖아 그치? 넌 성공한거야! 넌 성공했다고!"



    울먹이는 형의 목소리... 난 형이 정말로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을 통달한 듯 날 위로하려는 형의 말투가 역겨웠다.




    "형이 뭘 알아! 머리는 다 빠지고, 진폐증 환자에 알콜중독, 거기다 다리까지 저는 사람이 

     제 몸 하나 못 추스리는 주제에 뭘 안다고 그래!

     형이 성공이 뭔지나 알아! 그런 어줍잖은 충고나 할 요량이면 전화 끊어!"



    내 입으로 내뱉고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언제나 물과 같다.

    한번 쏟아버리면 주워담을 수 없다. 알량한 자존심이 그 흔한 사과조차 머뭇거리게 만든다.



    "행복해라... 청연아 넌 행복해라! 형이 다 짊어질꺼야!"

    "어디야 도대체!!"



    "미안했다. 청연아 그동안 나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하아... 우리 솔이가 보고싶네... 안녕 청연아 큭!"

    "형! 형!!"



    제멋대로인 형은 그렇게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사과도, 전화도 하지 않았다. 

    형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내 성공이 무너져가는 순간을 형에게 위로받고 싶지 않았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온 독한 말들이 형의 가슴을 후벼팠더라도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바로 그 이틀전이었다.





    "젠장... 거지같은 새끼... 누가 날 위해 죽어달라고 했냐고... 큭... 흑흑..."


    갑작스레 눈물이 쏟아졌다. 꽤 오랜만에 흘려보는 눈물이었다.

    기뻐도 슬퍼도 오직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느라 감정에 치우칠시간조차 모자랐던 내가 울고 있었다.

    형의 죽음은 내게 억압과 부담감에서의 해방이라는 카타르시스를 줄 거라 믿었는데,

    막상 나의 가장 절대적인 숭배자가 떠난 빈자리엔 공허한 슬픔만이 남아 나를 괴롭게 했다.



    "크흐흑... 빌어먹을... 죽긴 왜 죽어! 잘 살아서 내가 성공하는 모습,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지 흑흑"


    [털썩]


    형의 죽음으로 오열하던 순간, 그 역설적인 몸부림에 무언가가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형의 일기가 적혀있던 수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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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붉은 선혈과 손때로 너덜너덜해진 낡은 업무수첩이 형 대신 남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어떤 종류의 호기심이었을까? 아니 호기심이라기 보단 책임감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몰랐다.

    30여년에 걸친 형의 삶과 인생, 그리고 형의 생각들...

    한때나마 형을 미워했다는 이유만으로 난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부질없이 가 버린 형의 삶과 인생을 적어도 나 한 사람만큼은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형이 내게 지워준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했다.

    난 그렇게 형이 남긴 수첩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 처럼...







    [198X년 X월 X일]

    이 곳으로 돌아온 나는 비로소 오랜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이것이 현실인 아닌지를 가늠중이다.

    삶이란 거친 챗바퀴를 돌고 돌다보니 남은 기억의 잔상들은 희미하고, 그저 꿈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만이 남는다

    허나 기억속에 남은 작은 단서들을 모으고 모아 철저하게 검증하고나서야 약간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돌아보면 난 참 준비성 없는 사람이었다. 너무 갑작스레 주어진 기회라 최소한의 대비도 하지 못한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나

    그래도 후회는 남는다. 이럴줄 알았다면 그 흔한 로도 복권, 아니 주택복권 당첨번호라도 하나 알아 둘 것을...

    허나 이 곳으로 돌아오기 전 그 노인이 말한 것 처럼 세상에 큰 물의를 일으키거나 

    현격한 변화를 가져올만한 짓을 하면, 테잎이 열화되어 녹아버린다는 경고를 헛으로 들을 순 없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에 충실하면 된다.




    죽은 형의 일기장을 본다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나는 다시 한 번 일기장 머리부분의 날짜를 확인해야했다. 

    198X년... 이게 누군가 꾸며낸 소설이 아니라면 이 글을 썼을 당시 형의 나이는 불과 10살 남짓...

    누가봐도 저런 단어, 저런 어휘는 초등학생이 일기에 쓸법한 단어가 아니다.

    만일 내가 형의 필체를 잘 알고 있지 않았다면 난 곧바로 이 수첩을 덮어버린 후

    그 빌어먹을 박경사란 작자에게 전화를 해 호통을 쳤을 것이다.

    허나... 이건 분명 형의 필체가 맞았다.

    그렇게 난 의아한 마음을 억누르며 수첩의 다음 장을 펼쳤다.





    [199X년 X월 X일]
     
    공부를 등한시 하는 청연이를 많이 혼냈다.

    답답한 마음에 매를 때린 것이 끝내 미안할 뿐이다. 

    허나 너를 바른길로 인도하고 너를 성공시키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란걸, 너도 언젠간 알아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미안하다.
     


    [199X년 X월 X일]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솔이가 보고싶다. 솔아...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의 의아함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딸 은서를 형이 솔이라고 부르는 것이 형의 헤어진 여자친구 이름일꺼란 추측을 했었는데

    놀랍게도 형은 그보다 한참 전부터 솔이란 이름을 쓰고, 또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수첩의 종이 재질과 씌여진 상태는 문외한이 내가 보기에도 최소 10여년은 

    족히 넘어보였다.

    도대체 형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걸까? 

    참을 수 없는 궁금증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난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계속 페이지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199X년 X월 X일]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를 체념시키는 일은 어린 나에겐 버거운 일이다.

    그 어떤것도 설명할 수 없기에 내 마음은 더 답답할 뿐이다.

    시장의 자판을 그만두고 엄마가 새로 시작하신 일은 역시나 백화점 청소였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엄마의 기일 정도는 정확히 알고 있다.

    아니 잊을 수 없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엄마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울부짖어야 했던 그 날을 내가 어떻게 잊을까?

    노인의 경고 탓에 난 아무도 구하지 못 할테지만, 내 운명이 어찌되더라도

    단 한 사람...

    어머니만은 구하고 싶다.

    신이여... 이기적인 나를 용서하소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1995년 6월 29일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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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뉴스를 통해 생중계된 그 처참한 광경은 어린 나에게도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고,

    그 기억을 좀더 굳건히 붙들어 놓은 뿌리는 바로 [하마터면 엄마가 저기서 계속 일할 뻔 했잖니]라는

    엄마의 넋두리였다.



    [니 형이 백화점 청소 다니는 엄마 창피하다고 몇날 며칠을 목놓아 우는 통에 그만 뒀는데 지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니 형이 백화점 청소 다니는 엄마 창피하다고 몇날 며칠을 목놓아 우는 통에 그만 뒀는데 지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니 형이 백화점 청소 다니는 엄마 창피하다고 몇날 며칠을 목놓아 우는 통에 그만 뒀는데 지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형은 어떻게 그 일이 있기도 전에 삼풍 백화점의 붕괴를 알 수 있었을까?

    일기의 날짜 정도 고쳐쓰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 나중에 고친 것일까?

    그러기엔 아무리 눈씻고 찾아봐도 고쳐 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199X년 X월 X일]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있고, 나라가 떠들썩하다.

    사람들은 지금 순간만을 본다. 허나 더 무서운 것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들은 알까?

    지겹도록 들었던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트렸다는 말

    너도나도 애국자가 되어 모여든 금모으기, 아나바다운동

    이제 곧 시작이다.

    IMF... 


    어서 빨리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할 준비를 해야 한다.

    담임선생님은 극렬히 반대하시지만, 오늘 식구들 몰래 진학반에서 취업반으로 배정신청을 했다.

    뭐든 빨리 기술을 배워두어야 한다. 청연이가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가정형편때문이었다.

    내가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중 그 누구도 예상 못했던 IMF를 형은 금융실명제 시점에서 예견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돌출행동이라 믿었던 고등학교 중퇴와 취업 역시 형의 일기는 순간의 충동이 아닌

    치밀한 준비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당혹스럽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일기의 내용을 나는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나는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새 머리속을 가득 채운 채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 형의 일기 때문이었다.

    형이 무슨 노스트라다무스같은 예언자라도 됐단 말인가?

    아니면 어떤 초능력을 지닌 그런 사람?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내가 아는 형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바보같이 타이어 공장에서 일하다 진폐증을 진단 받고, 목재공장에서 일하다 다리를 다쳐 절룩이는

    조약돌처럼 작고 보잘 것없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수만가지 공상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억측, 과대망상, 조작, 중2병 말기의 환타지... 다양한 단어들로 형의 일기를 폄하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거칠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지만 이후 수 페이지 가량은 의미없이 [솔이]라고 빽빽하게 씌여져 있거나

    아니면 부모님의 건강문제, 또는 내 학교 성적등에 대한 고민이 몇 줄 정도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다만 이 시점부터 씌여진 일들은 실제 내가 알고 있는 기억들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버지의 맹장수술 일자라던가, 아니면 내가 형 몰래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골절을 입은 것 등이었다.

    실제로 아버지의 맹장수술 당시, 형은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아버지를 억지로 끌고 병원에 데려갔다.

    허나 그때도 지금도 내 생각은 형의 과도한 건강 염려증이 낳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다.

    게다가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할 거라 걱정이 된다는 식의 내용이 두번 정도 보였는데,

    실제로 어머니는 내가 아는 한 단 한번도 교통사고를 당한적이 없었다.




    [200X년 X월 X일]

    소연이가 떠나갔다. 내 마음속의 소연이는 착하고 좋은 아내였지만, 

    지금의 소연이에게 난 그저 공장에서 일하는 지저분한 폐병장이에 불과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소연이의 눈빛에서 자신을 붙잡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졌지만

    난 소연이를 붙잡을 수 없었다. 

    결혼생활 내내, 그때 미국에 갔더라면... 좀 더 자신의 꿈을 실현 시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란 말을

    자주 되뇌이던 소연이였다. 내가 어찌 너를 잡을까?

    당장 노회하신 부모님과 동생 청연이를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 험한 운명의 짐을 이렇게 착하고 예쁜 소연이에게 지워줄 순 없었다.

    솔이는 그냥 내 가슴속에 묻을 것이다.

    소연이는 솔이의 존재조차 모르니, 나처럼 가슴아프진 않겠지

    그것으로 족하다. 

    슬픔도 원망도 모두 내가 짊어지고 간다. 

    부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하길...





    [200X년 X월 X일]

    눈이 온다. 눈 사람을 만들었다.

    솔이에게 만들어 준 것과 똑같이 생긴 눈 사람이다.

    하지만 솔이는 없다.

    술을 마시면... 조금은 잊혀질까?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난 비로소 형의 전 여자친구가 소연이란 여자임을 알게 되었다.

    허나 그럴수록 자꾸만 등장하는 [이솔]이란 이름이 과연 무엇인지 더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내 딸 은서, 그리고 형이 못내 그리워하는 이름 [이솔]

    과연 이 둘 사이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확실한 건, 형이 이즈음부터 솔이란 이름을 거론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200X년 X월 X일]

    단순히 내 몸에 들러붙은 진폐증이란 악령이 더 두터워졌다고 믿었는데,

    보건관리공단의 정기검사에서 받은 진단서엔 폐암이란 두 글자만이 적혀 있다.

    길어야 2년, 아니면 3년, 하지만 후회는 없다.

    청연이는 남 보란듯 성공해 대한민국 최고의 CEO가 됐고, 

    내 기억대로면 일치감치 돌아가셨을 부모님도 여전히 살아 계신다.

    나는 내 할 몫을 다 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한번만... 딱 한번만 더 돌아간다면...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후회를 해 본다.

    201X년 X월 X일 새벽 두시, 인천의 홍예문 모퉁이 그 작은 가게...

    그곳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조금은 더 행복한 결말을 얻어낼 수 있을텐데...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이미 돌아가셔야 했을 부모님을 살려낸 내 과오탓인지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거란 확신이 없다.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는데...





    201X년 X월 X일
     
    내게 더 이상 희망은 없다. 몸이 더 이상 예전같지 않다.
     
    보험회사에 들렀다. 그 동안 모아온 돈으로 들어둔 생명보험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는 엄마 앞으로 하나는 아버지 앞으로 하나는 청연이 앞으로...

    내가 가고 없더라도 그 세 사람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201x년 X월 x일 새벽 두시 인천 홍예문 모퉁이의 그 가게로 돌아가 뭔가 어긋난 이 인생을
     
    또 다시 바꾸고 싶다는 내 소망은 한낱 부질없는 욕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둘러야 한다. 의사는 내가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바꿀 수 없다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맞다.

    두려워하지 말자

    청연이의 회사가 몹시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보탬이 되고 사그라드는 것 뿐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솔이를 보고 싶다는 것 뿐이다.

    솔아, 이솔, 내 솔아...




    형의 수첩속 일기는 그 것이 마지막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어댔다.

    폐암 말기, 형의 운명은 자살시도 이전에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형은 그 높은 고가에서 뛰어내리고, 또 거대한 트럭에 치여 형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떠났다.

    참을 수 없을만큼 혹독했던 형의 진심에 어느새 내 두 뺨은 눈물로 젖어갔다.

    누구보다도 가족을 아끼고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던 형,

    그리고 그런 형을 원망하며 형에게서 멀어지고자 했던 이기적인 나

    돌이켜 보면 난 성공도, 사랑도 아무것도 형에게 주지 못한 채 그저 받기만 했을 뿐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먹먹해진 가슴으로 그렇게 난 밤새 술을 퍼 마시곤 점심 나절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위태롭던 회사도 급박하던 어음결재도 형의 보험금으로 급한 불을 끄자 언제그랬냐는 듯 잘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내 머리속엔 자꾸만 형의 일기에서 본 한구절이 떠올랐다.




    [201X년 X월 X일 새벽 두시, 인천의 홍예문 모퉁이 그 작은 가게...]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왜 형은 그토록 솔이라는 이름과 그 시간 그 장소에 집착했던 것일까?

    잊어보려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의문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마치 그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숙명이기라도 한 듯 말이다.

    어느새 내 휴대폰의 달력엔 그 날짜가 표시되었고, 그렇게 숨죽이며 형이 숨겨둔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시간이 흘렀다.

    3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휴대폰 알림 메시지가 바로 오늘이 그 날이라는 것을 알린다.

    정확히 2시간 뒤면 형의 일기장에 적힌 그 시간이 찾아온다.

    자정무렵의 나는 마치 무언가 홀리기라도 한 듯 차를 몰고 인천으로 향했다.

    사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년 이맘때에도 인천의 그 장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낡고 오래된 돌로 된 터널, 홍예문이라 이름 붙여진 그 장소엔 아쉽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형이 말한 작은 가게도 지나는 이도 하나 없는 공원 근처의 외진 길일 뿐이었다.

    그리고 1년만에 도착한 그 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는 없어보였다.

    인근의 관공서에서 설치한 듯한 작은 조명 몇개가 보이긴 했지만,

    일제시대때 만들어졌다는 돌로 된 터널과 그 앞의 좁다란 길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똑딱 똑딱, 초침이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간다. 형이 말했던 바로 그 시간 새벽 2시를 향해서...



    "결국... 그냥 형의 망상일 뿐이었을까?"



    아쉬움과 미처 해결되지 못한 의문의 잔상이 뒤섞여 복잡한 심경을 전한다.

    긴 한숨과 함께 돌아선 난 조용히 가지고 있던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바로 그때 였다.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냥 흘러가는 바람과는 무언가 다른 서늘함이었다.

    그리고 놀라 고개를 돌린 내 두 눈에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렸다.

    분명... 몇 분전까지만해도 돌벽 밖에 보이지 않던 곳에 마치 거짓말처럼 작은 간판과 창문이 있었고

    그 사이로 말로 형용하기 힘든 푸르른 빛이 새어나왔다.



    [201X년 X월 X일 새벽 두시, 인천의 홍예문 모퉁이 그 작은 가게...]



    형의 일기는 망상이 아니었다.

    마술처럼 그곳은 정확히 그 장소에 존재했다. 

    천천히 다가간 내 눈에 들어온 그 가게는 흡사 이제는 사라져버린 예전의 비디오가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저장매체의 발달로 사라져버렸지만 십수년전만해도 동네마다 비디오가게 하나씩은 꼭 있었다.



    [비디오 샵. 人生]



    간판엔 그렇게 적혀있었다. 마치 어렸을적 TV에서 본 환상극장, 기묘한 이야기 같은 픽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이름이었다.

    허나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형의 일기는 진실이었고, 나는 그 진실속에 숨겨진 의문을 풀어야 할 의무가 이썽ㅆ다.



    "아... 아무도 안계십니까?"



    내부는 고요했다. 그 좁아 보이는 입구 안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 설치된 진열대마다 

    들어본적도 없는 비디오테잎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반갑습니다. 모처럼의 손님이네요. 놀라지 마세요 귀신같은건 아니니까"



    놀랍게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괴이한 노인이 비디오 진열대 뒤쪽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턱을 지나 가슴께까지 내려온 하얀 수염, 온통 백발로 성성한 머리...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여긴 뭐죠? 도대체 뭐하는 뎁니까?"

    "진정하세요. 이곳은 그저 누군가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장소일 뿐입니다."

    "인생을 돌아봐! 뭘 어떻게 돌아본다는 거죠? 우리 형은 어떻게 된겁니까!"



    나의 날 선 질문 공세에 노인은 조금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제 늙은 몸뚱이를 뚜벅뚜벅 끌고와 입구 한쪽에 마련된 책상위에 앉은 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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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이 급하시네요. 그렇죠 시간은 소중한거죠. 다른건 차차 알게 되실거고... 형이라고 했나요?

     형님분의 이름이 뭐죠?"

    "이청우, 이청우를 아십니까?"

    "잠시만요. 내가 나이를 먹어 가물가물하다오 하지만 장부는 틀림없이 적어두지 기다리슈"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책상 한켠에서 장부처럼 보이는 굵은 노트를 꺼내어 들었다.

    한장 한장 넘기는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 있네요. 이청우. 201X년 X월 X일 새벽 두시... 왔다 가신것 맞습니다."

    "무슨 소리하는거야 우리 형은 3년전에 죽었다구!"

    "그렇습니까? 이 시간엔 그렇군요. 하지만 시간은 상대적인 겁니다. 마치 운명처럼..."

    "무... 무슨 말입니까 그게!"

    "형님분은 분명히 왔다 가셨습니다. 저는 분명히 형님의 요청대로 테잎을 거꾸로 감아드렸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구요!"

    "백번 설명 드리는 것보단 한 번 보시는게 낫겠죠. 강수야! 손님 모셔가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진열장 한쪽을 바라보며 강수라는 이름을 불러댔다.

    그러자 몇 분 지나지 않아. 40대 정도 되어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어슬렁 거리며 나타났다.



    "늦게 얻은 제 아들입니다. 따라가시면 잘 도와드릴겁니다."



    중년의 사내는 나를 보며 꾸벅 목례를 하더니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가자 긴 복도가 나오고 그 끝엔 커다란 방이 하나 나왔다.

    방의 벽 한쪽을 완전히 차지한 커다란 대형 스크린 그리고 그 앞에 작은 의자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앉아 계시면, 폐기예정인 형님 이청우씨 분량을 틀어 드리겠습니다. 즐겁게 감상하십시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고 방 밖으로 나갔고, 난 홀로 방에 남겨졌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의문이 들려던 찰나...

    방의 불이 꺼지며 영사기를 통해 커다란 화면이 내 눈앞에 송출됐다.



    "뭐! 뭐지!!"


    낯익은 그리고 반가운... 허나 조금은 이질적인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나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너무 젊었다. 아이를 안고서 너무도 기뻐하는 모습은 앳되지만 분명 내 어머니가 맞는데,

    뭐랄까? 마치 내가 태어나기 전... 내가 알던 어머니보다 더 오래 전의 어머니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부둥켜 안고 기뻐하는 사람은... 바로... 나의 형인듯 했다.

    아니 나의 형이었다.

    영상은 그 시점에서 빨리 감기를 선택이라도 한 듯 재빨리 흘러지나갔다.

    그리고 곧 갓 태어나 쭈굴쭈굴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얼굴이 보였다.

    바로 나...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나를 형은 바라보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나를 바라보며 형은... 웃고 있었다. 너무 기쁜듯이...

    테잎은 계속 빠르게 흘러지나갔다.

    형과 나는 성장했고, 부모님은 세월에 지쳐 점차 늙어가시며 내가 기억하는 모습으로 변모해 가셨다.

    영상 속 형은 장남으로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반면 나는 개울가에서 놀고, 곧잘 사고도 치곤 하는 개구쟁이였다.

    게다가 실제와 다르게 형은 내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고, 내 성공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아니 죽도록 공부에 매달려야 했던 나처럼 형이 온 힘을 다해 공부에 열중했다.

    형은 나를 향해 [내가 이 집의 대들보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성공할꺼야! 청연아 그때까지 조금만 참자!]라고 말했다.

    내가 친구를 만나고, 여자애들과 시시덕거릴 때도 형은 줄창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했다.

    그리고 곧 얼마 안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삼풍백화점 붕괴... 형의 눈에 다 쓰러진 건물 더미를 부여잡고 오열하는 내가 보였다.

    형은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어렸던 난... 그때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시작된 IMF는 나의 탈선을 더욱 더 부추겼다. 난 누군가를 때리고, 돈을 빼앗고, 싸움질을 하고 다녔다.

    나로서는 말도 안되는 망상같은 일들이 화면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형은 대학에 갔고, 반대로 내가 사고를 친 후 퇴학을 당해 공장에 취직한다.

    현실과는 정반대의 일들이었다.


    [대한민국 최고 IT기업의 CEO인 내가 공장노동자가 되고, 공장 노동자였던 형이 잘나가는 대기업 직원이라니]


    무언가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 화면속에서 벌어졌다.

    아버지는 울고, 형이 애달파한다. 화면속의 난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 손이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

    멀쩡한 내 손엔 마네킹 같은 의수가 끼워졌고, 분노한 형의 항의는 묵살된 채 난 그렇게 산재처리조차 받지 못한 채

    공장에서 쫓겨났다.

    그 즈음 형은 결혼을 했다. 

    얼굴은 낯설지만 이름은 본 기억이 있었다. [장소연] 형은 미국 유학을 떠나려던 형수를 붙잡아 결혼에 이른다.

    허나 행복한 결혼식장의 훼방꾼은 바로 나였다. 

    알콜중독... 술에 취한 나는 축복받아야 할 결혼식장에서 깽판을 놓았다.

    낯뜨거웟다. 잘 나가고 성공일로에 선 형과 공장에서 일하다 장애인이 된 나를 비교하고 

    헌신적인 형에게 폭언을 내뱉었다. 

    형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 아파했다.

    마치 내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 자신의 책임인양 고뇌했다.

    그 즈음 난 교도소에 갔다. 술에 취해 누군가를 폭행했는데 술병이 깨지며 상대방이 실명한 것이 원인이었다.

    형은 큰 돈을 들여 합의를 했지만 특수폭행죄가 추가되며 결국 난 구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맘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형의 손을 부여잡고, 동생인 나를 보살펴 줄 것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셨다.

    아버지도 폐인이 된 내가 걱정되셨는지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편한 표정을 짓지 못 하셨다.

    교도소를 나온 나는 형이 소개해준 장애인 사업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허나 무엇이 불만인지 나는 계속 술을 마셨고, 형은 그런 내 모습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홀로 눈물을 훔쳤다.

    화면이 지나가고 형수가 딸을 낳았다.

    아주 예쁜 아이였다. 형은 그 아이를 너무도 사랑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형은...

    그 아이의 이름을...

    [솔이] 라고 지었다.

    아이를 데려와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솔이야! 이솔! 자 봐 너무 예쁘지 네 조카야 청연아!"



    허나 예쁜 조카를 데려와 내게 안겨주는 형을 향해 난 그렇게 대꾸했다.



    "좋겠수다. 아버지 엄마 다 달라붙어서 형 하나 성공시키고, 나는 찬 밥이고... 

     형은 대기업 직원에, 이쁜 형수에 딸까지 낳아 잘 기르는데...

     난 이게 뭐야! 쓰레기 같은 인생! 됐수! 난 술이나 한잔해야겠수!"



    인간 말종, 아이가 울고 있었다. 형이 내민 간난 아기를 내팽개치듯 내던지고 집 밖으로 나가는 나

    자지러질 듯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소리 높여 들려왔다.

    형수의 원망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형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뱉은 거라곤


    "미안하다 청연아... 이게 다 나 혼자 잘살자고 너한테 신경써주지 못한 내 책임이야 다 내책임이야 흑흑"


    같은 푸념이 전부였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난 또다시 교도소에 들락거렸다.

    형은 그때마다 큰 돈을 들여 합의를 보고 두부를 사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세번째 교도소 출감 후...

    난... 술에 취한 새벽, 밤길 도로위를 걷다 때마침 과속으로 그 길을 달리던 차에 치여 죽고 만다.

    그게 불과 서른 중반의 일이었다.

    내게 남은 가족은 오직 형 하나 뿐이었기에,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한 사람도 형 하나뿐이었다.

    아... 하나 더...

    얼굴조차 낯 선 한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뭐가 슬픈지도 모를 나이의 그 아이가 제 아버지가 우니 따라 울고 있었다.

    형의 딸 이솔이었다.

    나의 장례가 끝나고, 술에 흠뻑 취한 형... 

    형이 낯익은 골목 어귀를 걷는다.

    이제야 나는 그게 언제쯤이고 그곳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201X년 X월 X일 새벽 두시, 인천의 홍예문 모퉁이 그 작은 가게...]



    형이 그 길을 걷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오고, 묘한 가게 앞에서 

    형은 마치 무언가 홀린 듯 주저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긴 대화, 그리고 반신반의하는 표정의 형...

    그들이 내민 낡은 장부...

    형은 나처럼 영상을 본 후 그 장부에 사인을 한다.

    그리고...

    영상은 그게 다 였다.




    "끝났습니다. 나오시죠"



    중년 사내의 가래 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형이 왜 그랬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이해못할 일들의 원인이 바로 나였다는 걸...

    그제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다 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노인이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다 나때문이었어... 다... 모든게 다 나 때문이라고!!!"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이 엄습했다. 나 자신을 향한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흩어졌던 퍼즐 조각은 모두 맞춰졌고, 완성된 그림은 오직 절망과 한숨 그리고 후회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노인이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낡고 두터운 장부

    영상에서 본 바로 그 것이었다. 

    형이 사인을 했던 바로 그 장부였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사인을 하면! 나도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형처럼?"

    "역시 백번 설명 드리는 것보다 한번 보시는게 낫네요."

    "여기 사인만 하면! 형의 인생! 나 때문에 망가지고 부서진 형의 그 인생! 원래대로 되돌아 가는 겁니까!"

    "그건 모르죠... 이청연씨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형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를때보다는 알고 있는 쪽이 문제를 푸는데 수월한 법이죠"

    "펜! 펜 내놔!"

    "성격이 참 급한건 똑같네요. 역시 형제... 강수야! 198X년 X월생 이청연!
     
     테잎 감아들려라 재녹화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내가 사인을 마치자 노인은 급히 장부를 닫더니 제 아들을 불렀다.

    나를 바라보는 그와 그 아들의 표정이 왠지 몸서리 칠 만큼 음흉해 보였지만,

    지금의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빼앗은 것들, 내가 빚진 것들을 어서 빨리 되갚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것만이 날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형에 대한 보상이었다.

    사실 애초부터 내 것은 없었으니까...

    난 그저 형이 만들어준 형의 희생위에 거짓된 내 것을 끄집어 놓았을 뿐이었다.



    "누우시죠. 곧 시작될 겁니다. 편안하게 누워계세요 흐흐흐"



    강수라 불린 중년의 사내는 날 작은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형의 영상처럼... 이제 곧 나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비록 그로 인해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해도 후회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너무 사랑하고, 나를 너무도 아껴준 단 한 사람...

    형을 위해선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의 선택을 확인하겠습니다. 사인은 하셨지만 지금이라도 원하신다면

     여길 나가 현재의 인생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청연씨! 

     정말로 모든걸 내 던지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이건 당신에게 드리는 최후의 기회입니다."



    [미안했다. 청연아 그동안 나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하아... 우리 솔이가 보고싶네... 안녕 청연아 큭!]

    [형! 형!!]



    그 순간 문득 떠올라 내 머리속의 사고체계를 온통 헝클어놓고, 

    진득한 감정으로 체득되어 기어코 참았던 애달픔까지 토해내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날... 그 날 형과 나누었던 우리의 마지막 통화였다.

    짧은 통화속에 녹아든 슬픈 형제애의 잔상을 왜 그때의 난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무리 빠른 후회도 결국 늦는 법

    뒤늦은 후회가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던 내 심장을 옥죄어온다.

    무겁다. 늦은 만큼 후회는 내 두 어깨 위에서 제 몹집을 불려왔나보다. 

    후회는 애달픔으로 애달픔은 묵직한 책임감으로 나를 떠민다.



    "할 겁니다. 형이 내게 그랬던 것 처럼..."


    이 선택이 나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형이 감내했던 거라면, 

    나도 참고 그 무게를 나누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눈을 감았다. 옛 기억의 향수가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후덥지근한 여름, 엄마의 손길, 아버지의 음성, 그리고 퀴퀴한 형의 땀냄새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제 곧 제법 긴 여행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마음의 준비는 다 끝났다.

    헌데 문득 집에 있을 아내와 딸 은서가 떠올랐다.

    이제사 형이 왜 마지막 순간 그런말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보, 그리고 은서야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꼭 다시 찾아갈께... 당신과 우리 은서가 지금 너무 보고싶네..."

    "은서야 아빠가 많이 사랑해"




    끝.













    추가 ep.1 [수수료]



    "아버지... 그 이청연이란 친구... 과연 행복을 찾을까요?"



    강수란 이름의 중년 사내가 노곤히 잠든 청연을 보며 제 아버지에게 말하자

    노인은 짜증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투덜대며 대답했다.



    "테잎을 감아줬으니 우린 더 이상 신경 쓸 일도, 그럴 필요도 없어! 넌 딱 한가지만 알면돼!"

    "그게 뭔데요?"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

    "그러니까 그게 뭐냐구요?"

    "난 저 사람하고 달라, 나는 다를꺼야 하는 믿음"

    "그게 왜요?"

    "누군가 실패했다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거지, 삶이든 타인의 인생이든, 무언가를 바꾸는건 어려워...

     모래시계와 같지... 뒤집어 놓으면 분명히 바뀌어... 허나 모래의 총량은 똑같지 같은 양의 모래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느냐만 달라질 뿐이야 크크크크"




    노인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리고는 이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제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멍하니 있을 시간 있으면, 가서 방금 되돌아간 이청연의 인생중 앞부분만 놔두고, 지금시점부터 최종구간까지

     남은 부분이나 잘라서 가져와! 형 이청우의 것도!!"

    "어! 방금 다시 시작했는데, 그걸 잘라내면 어떻게 해요? 그거 잘라내면 죽잖아요"


    사내가 의아한 듯 묻자 노인은 잠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낀 채 바라보다 이내 마지못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동생 이청연이 떠나면서 모래시계가 제 궤도를 가진 채 돌아가기 시작했어... 

     형 이청우가 시작했고, 이청우가 그것을 반복시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청연이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결국 그는 실패할꺼야. 그럼 형인 이청우가 다시 우리를 찾아오겠지

     아니 우리가 그를 찾아가겠지... 그는 분명 다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할 거고...

     그는 또 다시 실패할 거야, 그럼 마치 모래시계를 뒤집은 듯 시간은 다시 돌아가고,

     동생 이청연이 방금 전 처럼 다시 찾아오겠지! 즉! 두 사람의 미래는 지금 시점을 기준으로 

     모두 없는 거나 마찬가지란 얘기지 알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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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 어렵네요. 그러니까 이청연이 한 일을 형 이청우도 하고, 그럼 이청연이 다시오고,

     그럼 이청우가 다시 온다 그거죠? 아... 내가 말하고 나니 더 복잡하네..."

    "시끄럽고 냉큼 그 두 형제의 뒷 구간 테잎이나 잘라와! 필요도 없는 것을 남겨두면 뭐해!

     이 늙은이 수명이나 늘려야지 크크크크 인생의 섭리를 어겼다간 누구라도 탈이 나게 마련이야

     하지만 이건 예외지, 명백히 불필요해진 타인의 인생을 빼앗는 것! 그건 문제가 생기지 않아

     이청우, 이청연 두 형제의 인생은 이것으로 끝없이 절망을 반복한다. 

     남은 것은 그것을 중개한 수수료로써 내가 소유할 것이고..."

    "오래 사시겠네요... 아버지... 아무도 모르겠죠? 아버지가 나보다 백살도 넘게 많다는거?"

    "걱정마! 너도 나 처럼 오래 살게 될게야! 네 애미처럼 날 버리고 떠나지만 않는다면!"

    "충성! 충성하겠습니다 아버지!"



    추가 ep.1 - 끝- 











    추가 ep.2 [이은서 혹은 이솔]



    테잎 편집 작업을 하던 중년의 사내가 무언가 잘 맞지 않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언가 궁금해진 듯 제 아비인 노인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저기! 아버지! 제가 이 일을 처음 해봐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뭔가 수량이 안 맞는데요?

     도대체 뭐가 틀린거죠? 이청우, 이청연 두 형제 인생의 남은 부분은 분명히 잘라냈는데

     그래도 테잎이 많이 남아요.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요. 이청우 이청연 형제의 것들 

     다 합친것 보다도 더 많이요. 왜 그런거죠?"


    사내의 질문에 노인은 잠시 고개를 끄떡거리며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곧 제 아들의 귀를 잡아 당기며 말했다.


    "아야야 아파요 아버지!"

    "잘 들어! 자신을 낳아준 제 아비의 인생이 모래시계처럼 반복된다면... 그 자식은 어떻게 될까?"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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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쳥연의 딸 이은서, 이청우의 딸 이솔... 누가 반복되든,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결국 하나...

     그럼 누가 되든 필요한 테잎은 결국 하나란 뜻이지..."

    "아... 그래서... 한명 분량이 통째로..."

    "그래... 조금도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영혼과 그 인생의 남은 삶이 고스란히 남는다."

    "와... 완전히 남는 장사네요!"

    "전에도 말했지만 우린 그냥 누군가의 대리인일 뿐이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그저

     누군가의 불필요해진 삶의 일부분이지, 거기에서 파생되어 얻는 순수한 영혼은

     우리의 고용인에게 지급될꺼야. 그게 사실상 우리의 책무이기도 하지...

     내가 전에도 얘기했었지? 바로 그 검은 옷의 사내..."

    "그... 거... 검은 옷의 사내"

    "그래 검은 옷의 그 사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니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해온 지고의 고용인...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오래전 부터 그런 순수한 영혼들을

     갈망해왔지 너도 곧 만나게 될꺼야"

    "으... 이런말 하면 안되지만, 우리 정말 나쁘네요. 애들도 불쌍하고..."

    "훗... 나쁘다라... 누가 나쁜걸까? 나쁜이는 없어! 우리의 고용인도 그래왔지만

     아무도 강요한 적은 없어, 선택은 본인의 몫이고,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할 뿐이야

     그 과정에서 흘린 남은 삶과 순수한 영혼을 그저 주울뿐... 쓸데 없는 생각은 마라
     
     불필요한 감상은 판단을 흐린다. 정의란 결국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가 정의다"


    노인의 쭈굴쭈굴한 얼굴 위로 비열한 눈빛이 번득인다.

    아들은 노인의 표정을 보곤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아버지의 첫번째 일은 뭐였어요? 저야 이 일이 처음이지만..."



    아들이 묻자 노인은 무언가 옛 기억이 떠오르는 지 눈을 감고 몇 번을 희죽거리다

    대답대신 슬며시 낡은 장부의 첫 페이지를 펼쳐 내민다.


    "어디보자... 사인이 있네요. 첫 페이지니까 이게 처음이겠구나... 보자...보자...
     
     너무 휘갈겨써서 아무리 봐도 잘 못 알아보겠는데 음...

     첫 번째로 되돌아간 사람은 음... 박... 중간은 모르겠고... 마지막은 휘? 희? 

     너무 막 흘려쓰셨네... 그럼 이 양반하고 함께 맞물려 되돌아가신 분은

     음... 강인가? 김인가? 이 뭐야 글씨가 도대체... 이름만 겨우 알아보겠네...

     재규..."



    추가  ep. 2 [이은서 혹은 이솔] - 끝-

     





    이제 진짜 끝입니다.

    택배도 사절이고, 본문의 내용은 온전한 픽션으로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상의 의해 창조한 인물들로

    실존하는 특정 인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

    p.s 추가 ep.3과 ep.4는 그냥 재미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ep.3과 ep.4는 꼬리말에 있긔)

        본래 의도는 추가 ep2까지가 원작의 내용입니다.

        제 닉네임을 누르시면 제가 그 동안 쓴 다른 글들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출처
    본 글은 제가 예전에 쓴 ‘그게 나의 인생이었다’의 2015년판 개정작으로 기존 원작과 내용은 동일하지만

    구성이나 세부적 사항을 거의 대부분 바꿔서 다시 써 본 것입니다.
    비키라짐보의 꼬릿말입니다





    추가 ep.3 [택배왔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고 왔습니다. 여기가 바로 그 곳인가요?"

    "뉴스에서 봤습니다. 언제가 됐든 결국 오실 줄 알았죠. 대부분의 최후가 그러하듯..."

    "저의 바라는 바는 돌아가야 할 시점이 바로 그때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저의 에너지를 분산시큰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네?"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어려움도 있고, 그렇지만 사람은 그런 것을 극복해 나가는 열정이

     어디에서 생기느냐면 이런 보람 '자라가, 지역이 발전해 가는 한 걸음을 내딛었구나' 그런데서

     어떤일이 있어도 참 기쁘게 힘을 갖고..."

    "됐습니다. 사인이나 하시죠."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시끄럽습니다."



    60대로 보이는 노년의 여성은 노인의 윽박지름에 결국 사인을 한 후 조용히 방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 후 누군가 점포의 문을 두드렸다.


    "택배왔습니다."




    추가 ep.3 [택배왔습니다] -끝-










    추가 ep.4 [능력자]


    "문 좀 열어보시오"


    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조금 전 왔다 간 새벽의 택배기사가 아닌가 하여 조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다가

    이내 가게 바깥쪽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글이 있어서 그걸 보고 찾아왔습니다. 제 조상님들이 덕을 좀 봤다더군요."

    "죄송합니다. 조금 아까 수상한 택배가 찾아와서 조금 신경이 곤두섰나봅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이해합니다. 이 사회에도 나쁜 사람이 많죠. 뭔가 일을 하려면, 이 사람이 그런사람인가 아닌가

     구분하는 능력도, 그리고 그런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상대한테 기분 나쁘지 않게 설득해서

     나쁘게 먹었던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도 다 사업가의 능력이고, 요령입니다.

     뭐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방법이 없습니다. 하하하"



    노인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굵은 목소리의 사내가 오기 전 찾아온 60대의 노년 여성과 관련이 있는 듯 보였다.

    허나 그게 누구이든 노인은 찾아오는 고객을 차별하지 않았다.


    "사인하시죠"

    "그럽시다. 참 그전에 하나 물읍시다."

    "어떤?"

    "내가 이거 사인하고 돌아가면, 날 엿먹인 그 망할 년을 족칠 수 있는 겁니까?"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크크크 하지만... 아무것도 모를때보다야 이미 한 번 겪어 

    잘 알고 있는 쪽이 문제를 푸는데 수월한 법이죠"

    "흐흐흐 일리 있는 말이오. 제 애비 후광 믿고 까부는 고 년만 족칠 수 있으면 되오

     개 같은 년, 넌 나를 너무 우습게 봤어! 흐흐흐흐"



    사내는 재빨리 사인을 한 후 노인의 아들을 따라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60대 노년의 여성이 들어 갔던 바로 그 방이었다.

    작은 방의 문이 닫히자 그제서야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꽤나 더럽고 구역질나는 싸움이 시작되겠구만... 그것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런 크크크크"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노인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졌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택배 왔습니다]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만큼 크게...


    추가 ep.4 [능력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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