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대선 후보 토론에서 사회자는 듀카키스에게 "당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고 듀카키스는 이에 "사형제로 범죄의 발생이 감소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 경우에도 사형제를 반대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걸려들었다! 그러자 부시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격해 치명타를 가했다.[13]
이후 듀카키스의 러닝메이트인 로이드 벤슨[14]이 공화당의 젊은 부통령 후보 댄 퀘일[15]과 후보 토론회에서 만났는데, 댄 퀘일이 잭 케네디를 운운하자 "당신이 현대판 잭 캐네디[16]라고? 내가 잭 케네디를 보좌했고, 내가 잭 케네디를 잘 알아요. 내가 바로 그 잭 케네디의 친구였소. 퀘일 의원, 당신은 잭 케네디가 아니오!(Senator, You're No Jack Kennedy.)" # 2분 15초 부터라고 일갈하면서 분위기를 잠깐 반전시켰지만 오래가지 못했다.[17][18]
이런 전방위적인 네커티브 전법은 이번에도 리 애트워터(lee Atwater)에 의해 이루어졌다.자세한 내용
첫 광고는 탱크 광고였다. # 영상 듀카키스가 자신도 국방에 대한 이해가 못지않다는 이미지 메이킹으로(그는 주한미군으로 복무했다.) 탱크를 직접 탑승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진의 어색함 때문에 의도와 달리 바보같은 이미지로 둔갑해버린 것. 그러게 왜 안 해도 되는 걸 했어. 애트워트는 탱크를 우왕좌왕 움직이며 뭔가 바보같이 웃고만 있는 듀카키스의 영상을 띄워놓고, 그가 모든 국방정책에 대해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모든 군비정책의 나열에 불과했고, 듀카키스는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문제는, 듀카키스는 대중들이 곧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국민들은 반박을 안 하니 저것이 사실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9]
이런 네거티브는 계속되었다. 부시는 듀카키스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매사추세츠 주에서 거부하였다고 광고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 몇몇 교사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것에 대해 주의회에서 "거부하는 선생들을 잡아 가두자."라는 법을 만들자 듀카키스가 연방에 "이게 합법인가요?"라고 물어보고 연방에서 "그건 위법이에요"라고 해 그 법률에 거부권을 행사하였던 것 뿐이다.
게다가 듀카키스의 아내가 성조기를 태웠다는 밑도끝도 없는 루머를 퍼트리는데, 여기에 듀카키스의 아내는 듀카키스와 다르게 나올 때마다 아니라고 격렬히 주장하였고 이것이 오히려 대중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하지만 가장 악랄한 사건은 바로 윌리 호튼 광고이다. 매사추세츠 주에서 살인죄로 복역 중이던 흑인 범죄인 윌리 호튼이 죄수 주말 석방제도를 통해 잠시 휴가를 나와 커플을 습격해 여자를 강간한 사건인데, 이걸로 부시는 듀카키스를 골로 보내버렸다. 광고는 아래에 있으니 참조. 듀카키스가 주지사로 있을 때는 오히려 범죄율도 떨어졌고 살인사건의 비율은 전국 최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사건만 기억해 그의 이미지는 미친듯이 떨어졌고 결국 부시는 대선을 이기게 된다. 이 광고는 인종차별주의적으로 만든 것이어서 사람들에게 뻔한 반감을 살 수 있었으나 리 애트워터는 민간기업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송하게 하였다. 이걸 아직도 민간기업이 했다고 믿으며 "선동 ㄴㄴ"라는 말이 본문에 적혀있다는 것이 깨알 같다. 같은 컨셉으로, 죄수들이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다시 나오는(...) "회전문Revolving Door" 광고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탱크 광고와 같이 "미국은 그런 위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America can't afford that risk)"라는 모토의 광고였다.
실제로 죄수 주말 휴가제도는 부시의 정당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가장 먼저 서명하여 만든 것이고 그 당시 다른 주에서는 죄수가 주말 휴가제도를 이용해 임산부를 성폭행한 후 살해한 사건도 있었고 헬리콥터를 탈취한 후 추락한 사건도 있었지만 듀카키스는 네거티브는 할 수 없다며 자신이 잘한 점만을 꿋꿋이 내보냈고[20]결국 패배한다.
정리하면, 부시 측의 교활하고 용의주도한 전략과 듀카키스 측의 지나치게 강직하고 원칙주의적인 태도가 결국 부시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 있게 했던 것.[21] 하지만 네거티브의 여파로 투표율은 빌 클린턴의 재선 대선이었던 1996년의 49%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낮은 50.2%에 그쳤다.
선거의 최대 공신인 리 애트워터는 이 공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권력의 단맛은 짧았으니, 애트워터는 부시 취임 1년만인 1990년 3월 갑자기 쓰러졌고 2년 후 뇌종양으로 죽으면서 자신의 모든 악행을 다 말하고 죽는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재선 패배.
듀카키스는 이후 정계를 은퇴했으며, 여든살이 된 현재까지 UCLA의 경영학(리더십) 교수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특히 2009년에 미국의 UCLA 대학에서 신입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강의 시작 전에 신입생들의 박수갈채가 멈추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만약 부시와의 선거전에서 그 토론회 때 대답을 잘 했더라면 부시가 대통령이 되지도 않았을테고, 또한 그의 아들 놈이 지금 이렇게 미국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지 못 했겠지요. 다시 한 번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신입생들은 환호하며 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