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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30대 후반 아재 오징어입니다. 저는 2014년부터 오유를 하기 시작하였고, 나름 오징어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이번 일련의 메갈 사태를 보면서 여러 가지로 고민들이 들었습니다. 바쁜 삶 속에서 그러한 사건들을 회피할 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 너무 회피하기보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덤덤하게 적어보자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진보는 어떤 원칙들에 입각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저의 백그라운드를 소개하면 저는 90년대 후반 학번으로 한 대학에서 단과대 학생회장을 했고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라는 학생운동조직에서 활동한 소위 ‘꼴 운동권’이었습니다.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라는 조직은 90년대 초, NL(민족주의)과 PD(사회주의)의 패러다임을 넘어서고, 교육, 환경, 여성, 문화 등 부문운동을 강조하며, 의회민주주의 내에서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조직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대학에서는 NL(자주, 애청 등), 좌파I(연대회의), 좌파II(전학협), 그리고 21세기가 4대 학생운동조직이었습니다. 저희는 민족모순을 전민봉기로 해결하려던 NL이나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했던 좌파들과 다르게, 의회제도를 인정하고 노동자·민중에 근간한 진보정당의 건설을 주장했고 시민사회의 성장을 위해 참여연대 등의 시민운동의 탄생과 성장에 긍정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에 따라 혁명을 주장하는 여타 운동권들에게 끊임없이 ‘개량주의자’라는 조롱을 받았습니다만, 다른 운동권들과 다르게 대학의 개혁을 다루는 ‘대학개혁운동’을 강조하는 등의 활동이 학생들의 공감을 샀던 조직이었습니다. 21세기는 워낙 제도정치 안에서의 진보권력을 강조하다보니, 학생사회 내에서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의 탄생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아시다시피 NL이 패권을 장악한 민주노동당이 분당 등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현재 선후배들은 (아직까지도) 정의당을 많이 지지하지만, 더민주나 노동당을 지지하기도 하고, 다양한 정치적 지향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오유에도 21세기 출신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참고로 학생운동권으로 살다 뒤늦게 공부에 마음을 붙이고 유학을 다녀와 현재는 한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일주일에 한번 고통 받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심리상담가로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진보는, 급진적 혁명보다 ‘끊임없는 점진적 혁신을 통한 사회변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제는 너무나 식상하게 들리는 원칙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학생운동을 할 때 이러한 주장은 다른 조직의 활동가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 해체한 통진당 세력을 포함한 소위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급진적 혁명을 과거에 꿈꿨었고 지금도 그들 중 일부는 무의식적으로라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어적 강령의 형태를 띠고 형상화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도덕적 정서 같은 것이 충분히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현재 사실 메갈 그 자체거나, 혹은 메갈은 아니지만 메갈을 지지하거나, 혹은 최소한 묵인하는 여성주의자들에게도 이러한 급진성이 많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빨리 절대선의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은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조급함은 수단과 과정을 악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목표점인 ‘절대선’이 부각될수록, 수단과 과정에서의 ‘절대악’조차 ‘표면상 악이지만 절대선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선’이 된다고 주장됩니다. 그리고 ‘절대선‘이 강조될수록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 앞에서 비판적, 성찰적 능력이 상실되는 것처럼,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능력들을 상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의 진보는 1. 절대선을 상정한다 2. 절대선에 빨리 도달하는 것이 절대선이 된다. 3. 따라서 모든 급진적 수단들은 절대선이 된다라는 일련의 논리에 반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은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는 ’잠재적 선‘으로 상정되어야 하며, 잠재적 선이기에 조심스럽게 천천히 살피며 걸어가야 하며, 잠재적 선에 도달하더라도 그 새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은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에, 잠재적 선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들이 그 선을 자신의 존재로 ’체화‘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목표는 저 멀리 있는 목표점이기도 하지만, 걸어가는 이 길도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동양에서 진리가 과정/길(道)인 것처럼, 김민기가 ’봉우리‘라는 노래에서 도달할 봉우리보다 그 가는 길에서의 ’여기‘가 오히려 봉우리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진보는 ‘나르시즘’에 빠져서는 안 되며 자기성찰을 근본에 삼아야 합니다.
진보는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을 가져야 하지만, 인간이 선하다는 ‘나르시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완성적 진리’가 이미 되었거나 될 수 있다는 나르시즘에 있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반성할 수 있는 ‘성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진보들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성찰성’을 잃고 절대선의 위치에서 악을 저지르는 행위를 종종 봤습니다. 사회주의는 정치적 숙청과 매우 가까웠고 한국의 진보운동도 1997년 한총련 프락치 살해 사건처럼 부끄러운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에 크게 실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 이렇게 ‘선’을 체화하지 못하면서 입진보를 외치는 진보진영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담론화 시킨 것은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2000년에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을 출판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저는 NL 같은 곳에서의 권위적 조직문화가 얼마나 보수적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임지현 한양대 교수도 그러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누는 술자리에서 당시 저희 대학 총학생회장이었던 선배는 객관적 악이 명백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진보의 보수성>을 제기하는 담론은 아직 뿌리도 내리지 못한 진보의 성장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 있다고 요지의 이야기를 했고 저는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제는 보수고 진보이건 간에 그 모든 보수성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진보운동에서는 간디나 마틴루터 킹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경제적 문제의식과 일상의 삶이 분리될 수 없고 우리는 진보를 자신의 삶과 거시적 제도 모두에서 이루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많은 악들을 저지르는 메갈의 행동들은 진보가 될 수 없습니다. 똥을 비추는 거울에게는 자신 앞에 놓인 똥만 보이겠지만, 그 거울은 스스로가 분명 똥을 품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사실 거울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일베처럼 자신들의 똥을 배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울은 허구요, 실체는 똥인 것입니다.
◎ 진보는 조직의 입장보다 양심의 진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저는 2000년 단과대 학생회장으로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경쟁하는 세력들이 존재할 때 인간의 양심은 얼마나 무력해지는지를 많이 목도했습니다. 특정 조직에 소속된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자신의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말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울 때가 많았습니다. 발달심리적으로 도덕성 발달 수준이 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이건 좀 아니다’ 싶을텐데 (물론 인간은 자기기만도 뛰어나 무의식적 양심의 외침에도, 의식 수준에서는 조직의 입장을 자신의 생각으로 수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운동권의 '의식화' 개념의 한계이기도 하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봤을 때 정치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꼈습니다. 아마 현실 정치에서도 이러한 현상들이 만연할 것입니다. 차근히 들여다보면 메갈이 얼마나 그릇되는지 알 수 있을텐데도, 진보결집더하기를 끌어안으면서 4자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의당 지도부와 당원들이 자신의 양심을 속였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진보는 이제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설령 그것이 당장의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 진보의 패러다임은 항상 재고되어야 하며 여성주의도 이에 예외는 아닙니다.
구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와 90년대 중반 북한의 체제위기와 집단기아 상황에서 NL과 PD의 주체사상과 사회주의의 절대가치는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운동권 선배들은 구소련 붕괴이후 정말 멘붕 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회에는 단일한 문제와 단일한 해답이 있다는 모더니즘적 시대가 가고 90년대 다양한 사회모순에 대항하는 환경, 문화, 여성 등 다양한 부문운동이 대학사회에서 꽃피기 시작합니다. 여성주의도 그 중 하나로 당시 학내 여성주의의 담론은 좌파진영에서는 절대적 진리에 가까운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학기에도 여러 차례 도서관이나 학생회관에 성폭력 가해 학생이 자신의 성폭력 사실을 묘사하고 반성하는 대자보가 실명으로 붙었고 학내의 여러 학생 매체에서 여성주의 담론은 풍성하게 꽃피고 있었으며 각 학과에서도 여성주의 학회나 모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운동권에서 여성주의에 비판적 관점을 제기하거나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 운동권 선배가 제 엉덩이를 쎄게 때린 적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본인이 듣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제가 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는 그것이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아프기도 아팠지만, 제가 만약 그 여선배의 엉덩이를 때렸다면 성추행으로 난리가 났을텐데, 그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 역차별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가부장제적 마초’라고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러한 불쾌함은 종종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여러 문제 중에 하나의 문제가 도드라지게 인식되고, 그에 대항하는 절대적 선으로 자신을 상정하게 될 때 사람은 무서워질 수 있습니다. 그 때의 분위기가 저는 현재의 정의당과 같은 진보정당과 한경오와 같은 진보언론들에도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여성주의에 조금이라도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굉장히 금기시 될 수 있습니다. 동료들에게 ‘나는 꼴보수 마초요’로 라고 선언해버리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성주의를 포함한 그 어떤 진보의 사상도 절대화 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진보진영은 자본주의에 비판적 관점을 쏟아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진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비판은 진보진영의 사회비판의 단골메뉴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진보정당과 진보언론의 비판 중 많은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었고 저도 그때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호주의 무역이 꼭 진보의 입장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분배 정책은 진보의 트레이드마크로 불려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혁신적 사고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상을 ‘절대적 문제나 문제 해결 방법’으로 하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 상황에 맞게 재평가하고 수정하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 진보는 자존감을 사회비판에서 획득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자존감 생성 시스템의 붕괴>라는 관점에서 한국사회의 문제를 한국사회의 핵심문제 중 하나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관계와 심리를 주로 연구하는 학자로서 저는 한국인들의 자존감이 상당히 낮은 수준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존감이 낮을 때 우리는 사회비교를 하게 되는데 사회비교 중 특히 하향비교를 많이 하게 됩니다. 즉,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등한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야 합니다. 진보진영은 현재의 부패한 보수를 비판할 때 너무 기분이 후련하고 기뻐지면 안 됩니다. 나아가 진보진영은 어떤 특정한 집단을 ‘혐오할 때’도 너무 기분이 좋아지면 안 됩니다. 우리의 비판은 냉철하거나 혹은 할 수 있다면 상대의 존재에 대한 따스함을 머금고 있어야 합니다. 자존감과 정체성은 다른 방법으로 찾는 것이지 상대를 비난하면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남을 비난할 때 자부심이 생기면, 그 우월감은 오만으로 이어지고 이는 상대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어 오히려 그들의 삶의 갱신을 막고 폭력의 악순환을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절대선의 위치에 놓고 자신마저 악을 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끄적거리면서 저는 진보와 관련하여 <진보의 내용과 형식의, 중단 없는 혁신>을 말하고 싶습니다. 기존의 것이 절대화 될 필요는 없습니다. 정의당이어야 하는 것도 노조에 근거한 노동자 정당이어야 할 필요도 꼭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어떤 모양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북유럽식 사민주의 정당도 좋습니다만, 그것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당, 민주당, 심상정,문재인, 한경오, 시사인 등 특정한 조직이나 사람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내용과 형식을 혁신해나갈 것이고 그 변화 자체가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의 마음은 많이 무겁습니다. 대학교에서의 학생들의 얼굴들은 지쳐 보이고, 상담장면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은 참담합니다. 일베와 메갈은 정신병리 수준으로 치달아 있고, 똥을 똥이다라고 말하지 못하거나, 아예 인식하지 못하는 진보진영의 모습은 저의 마음을 쓰라리게 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오유 다른 분들도 마음 아프시기도 하고, 고민도 많으시죠? 그래도 이번 일이 우리 모두 더욱더 아름다운 한 걸음. 아름다운 진보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끔 2000년에 한 달동네 철거촌에서, 철거촌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사람 좋던 철거민 아주머니 뒤에 엎여 쌔근쌔근 웃고 있던 ‘한울이’라는 갓난아기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때 이 아이의 천진한 웃음을 지켜주고 싶다...라는 마음을 먹었더랬는데...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지켜주는 것이 너무 어려움을 요즘 많이 느낍니다. 스스로의 부족함도 많이 느끼구요. 사람들의 웃음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진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관념적 진보를 넘어서요.
쓰고 나니, 정말 별로 재미없는 글이네요 ㅠㅠ
긴 글 읽어주신 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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