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가는 한강으로 삐라 나왔다는 얘기랑...
몰타에서 북한 3명 탈북해서 한국 왔다는 얘기랑...
주구장창이네요.
게다가 댓글보니 전부 좌파 종북몰이네요.
다시 댓글부대 활동하는 시점인가봅니다.
만약 저 글이 팩트라면...
엄청난 훈련을 받은 북한 간첩이 뱃지 200여개를 버릴데가 없어서 정말 잘보이는 호텔 화단에 뿌리고 도망갔나보네요.
저 같으면 깜장비닐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려도 확인 안될것 같은데... 제가 회사에서 마케팅 홍보담당이라 저희회사 뱃지를 제작하거든요.
200개 해봐야 포장지 포함 두주먹정도 밖에 안되요.
그걸 ㅋㅋㅋ 버린다고 ㅋㅋ 사람 많이 다니는 영종도 호텔 화단에 뿌리고 도망갔다는건 그 뱃지를 보라는 의도로 밖에 안보이네요.
정원이가 일을 디게 허술하게 하는듯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요? ㅋㅋ
만약 당신이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러니까 예를 한번 들어볼께...
흠... 당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원래는 무척이나 부자셨어... 그런데 자신의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버린거야. 분노하시고 터질듯한 가슴을 추스리지 못해 직접 자신의 가계를 들고서 의병을 일으키시고 군자금을 대시고 직접 게릴라전을 하면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셨다.
물런 멋지겠지... 떳떳할꺼고... 그렇죠?
그 여파로 잘나가던 가세는 국가를 위해 다 써버렸고 자신의 부인과 함께 도망다니다 부인은 수차례 경찰서가서 폭행에 고문당하고 아이들은 돈이 없어 배우기는 커녕 밥조차 제때 연명하기 힘든 생활을 했다면...??
당신은 정말 떵떵거리며 그리고 지금 죽은 이후에도 정말 잘~ 살고 있는 친일파의 자손이 되렵니까? 아니면 배울때 못배우고 먹을때 못먹어 아주 낮은 삶을 사는 그런 독립군의 자손이 되렵니까?
갑자기 이런게 자신의 문제로 닥쳐 왔다면... 만약 독립군을 선택한 할아버지께 "정말 밑바닥 인생을 펼치고 있는 자손들의 모습을 보세요. 할아버지께서 괜한일 하셨어요. 이게 독립군 자손의 실상입니다!"라고 얘기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독립된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라고 얘기할래요?
사실... 잘모르겠네요.
저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저런일을 하셨다네요.
독립군의 자손이란게 저였더군요. ^^
어짜피 되돌릴수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 뭐가요? 친일파로 떵떵거리며 살수 있는 기회를 돌리고 싶냐구요? 아뇨~~!
우리나라가 해방되지 못할께 아니잖냐는 말입니다. 물런 할아버지 같으신분이 계셨기에 말이죠.
사실 많이 부끄럽습니다.
역사학을 배우는 손자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니 말이죠.
물런 친가나 외가나 다 반씩 피를 물려 받았으니 같게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죠... ^^
할아버지... 전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아주 좋은 세상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서 선물하셨으니까요... 
잘살께요. 
그리고 떳떳하게... 독립군의 자손의 이름에 걸맞는... 떳떳한 손자가 되겠습니다.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 2004. 8월 29일 늦은 11시... 외고손 순찬올림 -
권석도(權錫燾) - 1880. 9. 9~1946. 4. 6 
경남 함양 - 의병 
서훈내역 - 독립장(86) 
공적내역 - 경남 함양(咸陽) 사람이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크게 분노하여 김동신(金東臣) 의병진에 참가하였다가 고광순(高光洵) 의병진과 합류하였다. 1907년 10월 11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朴仁煥) 의병진과 합류하였으며, 박인환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1908년에는 하동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동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피체되었다. 하동주재소에 구금 중 그는 1908년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다가 일경의 추격을 받아 흉부에 총상을 입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1909년 3월 그는 다시 이학로(李學魯) 의병장과 합세하여 진주 서면 동양곡(東陽谷)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하순 박매지(朴每之)·이학로 등 수명과 함께 진주시 산기동(山岐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수비대와 마주쳐 피신하였다. 그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09년 10월 10일 진주에서 다시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징역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모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소위 일황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 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그는 1918년 2월 일경으로부터 다시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피체되었으나, 10여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그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일경의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일경의 소위 요시찰인 감시가 극심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포항·울진 등 낯선 고장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10. 2. 19 대구공소원)
·판결문(1918. 12. 12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진주경찰서장 정보보고(1908. 6. 30, 7. 9, 1909. 10. 11∼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