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미술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들 아시는 작품일 겁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1991년 작품 -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이라는 기괴한 이름의 작품입니다.
상어는 살아 있는 평생동안 움직입니다.
혹시... 상어 지느러미.
즉 샥스핀을 얻기 위해서 상어를 잡아 지느러미만 잘라낸 후 몸통은 그냥 바다에 던저버리는
다큐 영상 보신 기억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잔혹한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지느러미가 잘린 상어는 무력하게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상어는 부레가 없고, 부피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 전체적으로 몸의 밀도가 물의 밀도보다 높기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헤엄을 치지 않으면 끝없이 바닷속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상어는 평생동안 끊임없이..
살기 위해 헤엄을 쳐야만 하죠.
심지어 잠이 들어 있을 때도 운동을 담당하는 뇌의 한 부분만이 깨어 있어서..
잠을 자는 동안에도 지느러미 운동을 합니다.
상어의 경우 죽은 직후부터 몸의 부패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는데다가..
몸 전체가 연골로 이루어져 있고..
또 죽는 순간 바닷속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에
온전한 사체를 구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사치의 의뢰에 따라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매우 어렵게 온전한 형태의 타이거 상어 사체를 구하게 됩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이 타이거 상어의 사체를 이렇게 꾸몄습니다.
강철로 된 수조에 포르말린 용액을 채워넣고..
거기에 타이거 상어의 사체를 띄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상어의 뱃속에는 모터를 장착하여
계속해서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이도록 만들었죠.
제작을 의뢰했던 사치는 데미안 허스트에게 이 작품을 5만 파운드..
시가 약 1억원에 삽니다.
그 당시의 한 신문은 '감자칩도 끼워 주지 않는 5만 파운드짜리 생선' (피쉬 앤 칩스를 빗댄 듯)
이라고 조롱을 퍼부었죠.
그리고 15년 후 이 작품이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는..
무려 120억원에 팔렸습니다.
15년만에 120배나 가격이 뛴 것이지요.
사실 이 가격에는 거품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포르말린속 상어가 그 세월동안 약간 부패해 버렸거든요.
데미안 허스트의 원래 의도대로라면 상어의 사체는 완전해야만 그 가치가 있습니다.
이 작품의 기괴한 제목 -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봅시다.
우리 인간은..
과연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까요?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살아있는 인간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살아있는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물리적 불가해의 영역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형이하학적 개념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마도 영원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 인간은..
포르말린 용액속에 담겨서 부패하지 않으며
살아 있을 때 처럼 끊임없이 지느러미 운동을 하는 상어의 온전한 사체와
살아있는 상어의 차이를 구분 지을 수 있을 까요?
살아있는 인간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해성.
좀더 적나라하게 까놓고 말하면 '
'인간들이 살아있는 동안 눈 돌리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죽음의 물리적 필연성' 의 벽이 존재하고 있는데 말이죠
죽음이라는 것이 가져다 주는 심리적 공포는..
인간의 마음속에 심리적 벽 이상의 것.
'물리적 이해불가능성' 이라는 벽을 만들게 되는 듯 합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과는 다른 것들.
특히 '삶' 이라는 것과는 매우 이질적인 '죽음' 이라는 것에 대해
단순한 심리적 저항감을 넘어 물리적인 이해 불가능성이라는 벽을 쌓은 인간에게 있어..
하물며 자신도 아닌 '타인의 죽음' 이라는 것은 언제까지고 이해불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게 되겠지요.
더욱이 그것이 같은 동족도 아닌..
상어와 같이 전혀 다른 생물의 죽음이라는 형태라서야 뭐..
인간이 그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고..
언젠가 자신에게도 다가올 스스로의 육체적 붕괴,
그 죽음의 물리적 필연성을 깨닫게 되는 일은 매우 요원해 보입니다.
그래서 위에 언급된 샥스핀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인간은 이토록 잔인한가 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이든 상어든, 오리든
살아있는 존재,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다가오는 것이며
자기 자신도 그러한 죽음의 물리적 필연성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까요.
이영도씨의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는
보통 사람은 자신을 확인 받고자 하는데 죽으면 그걸 못하게 되니
죽음은 가장 강력한 자기 부정이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죠.
죽음이라는 것은
삶이라는 종이에 쓰여지는 글이 긴 문장이든, 짧은 문장이든, 웃긴 문장이든, 슬픈 문장이든, 가벼운 문장이든, 장엄한 문장이든 간에 상관없이
어떠한 글의 끝에도 반드시 찾아오는 마침표와 같은 것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는 한
삶이라는 종이에 쓰여지는 글들은 한없이 길어지거나 속절없이 짧거나, 실없이 길거나, 가누지 못하게 슬프거나,
지나치게 가볍거나, 지나치게 무겁거나..
혹은 지나치게 잔인해 지겠죠.
덧- 여러가지 면에서 위의 작품은 곱씹어 볼만한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위 작품에 대한 제 개인의 해석적 견해이고 절대적인 정답이 아님을 밝힙니다.
10 여년 전 대학 다닐때 예술 교양 수업으로 데미안 허스트를 배우면서
그냥 혼자 생각해 본 거에요.
교수님이 정답이 뭐다 라고 알려주신게 아니라, 학생들에게 각자 한번쯤 생각해 보라고 하셨던걸..
제 나름대로 혼자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이라..
다른 분들은 달리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