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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선전 제례 매해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수로왕릉에서 열리는 제례의식이다.(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 11호) | | | |
수로왕릉에 대한 제사는 수로왕릉이 조성된 199년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뤄져왔다. 물론 중간 중간 사정에 따라 제사가 끊긴 적도 있지만, 가야 이후 왕조들인 신라나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계속 왕릉으로서 관리되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김해 김씨 같은 유력한 가문들이 자기 조상을 숭앙하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로왕릉의 관리와 제사에 대해서는 다른 유적들에 비해서도 여러 사정들이 있었다. 특히 가야의 멸망 이후에 이 수로왕릉에 위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막기 위한 후손들 노력 때문일까? 수로왕릉에 대해서는 다른 무덤들에 비해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진다. 특히 <가락국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여러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개중에는 귀신 이야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럼 한번 <가락국기>의 가야괴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로왕 영정에서 피눈물이 쏟아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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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로왕 영정 현재 숭정각에 봉안되어 있는 영정의 모습. | | | |
<가락국기>에 의하면 신라 말기 잡간(匝干 : 잡찬) 벼슬에 있던 충지(忠至)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의 부하로 아간(阿干 : 아찬) 벼슬에 있던 영규(英規)라는 자가 있었다. 충지는 힘으로 금관성, 즉 김해를 빼앗고 스스로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영규는 그러한 충지의 힘을 믿고 수로왕릉의 제향(祭享)을 뺏어 멋대로 제사를 올렸다. 단오날에 제사를 올리던 중 사당 대들보가 이유 없이 무너져, 영규가 그 자리에서 깔려 죽게 되었다.
이를 들은 충지는 한탄하며 수로왕의 진영(眞影 : 영정)을 그려 모시게 되었다. 3자에 이르는 비단에 진영을 그려 벽 위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경건히 받들었는데, 사흘도 되지 않아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것도 거의 한 말이나 되는 많은 양의 피로. 충지는 너무나도 깜짝 놀라 진영을 불살랐다. 그리고 수로왕의 직계손으로 알려진 규림(圭林)을 불렀다.
"어제도 불상사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날 수 있는가? 이는 정녕 묘의 위령이 내가 화상을 그려 공양함이 불손하다고 크게 노하신 것 같다. 영규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매우 괴이히 생각되고 두려워서, 화상을 불살라버렸으니 반드시 신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손이니 그 전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합당하겠다."
이어 규림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인 간원경(間元卿)이 뒤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다. 그러던 어느 해 단오날, 죽은 영규의 아들인 준필(俊必)이 갑자기 수로왕릉의 사당에 와서 간원경이 차려놓은 제물을 치워버리고 자기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제사 도중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수로왕릉을 지키는 귀신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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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선전 수로왕과 허왕후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698년에 건립되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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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안전 1989년에 신축된 건물로 금관가야 2대 도왕부터 9대 숙왕까지 암금들과 왕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 | |
수로왕릉이라고 역시 도굴과 강탈의 위험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수로왕릉에 수많은 금과 옥이 있다고 하여 이를 훔쳐가려는 도적들이 있었다. 도적들이 수로왕릉에 들어서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활에 살을 먹인 용사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도적들을 향하여 화살을 겨누더니 순식간에 일고여덟 명을 맞혀 죽였다. 이를 본 도적들은 혼비백산하였다.
그러나 도적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지난번보다 더 준비하여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갔다. 이번엔 그 용사가 없었지만 대신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났다. 크기는 30자가 넘고 눈빛은 번개 같았다고 하는데, 순식간에 여덟아홉 명을 물어 죽였다고 한다. 기록에서는 이들이 수로왕을 지키는 신물(神物)이라고 전한다.
고려 성종 10년(991년) 김해부의 양전사(量田使)로 있던 조문선(趙文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양전사는 당시 토지 측량을 맡은 관원인데, 그는 수로왕의 능묘를 조사하면서 그 능묘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많아 백성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처음엔 허락하지 않았으나 집요한 요청에 결국 설득되어 수로왕의 묘역을 줄이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문선은 즉시 행동에 옮겼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조문선은 어느 날 몹시 피곤함을 느껴 잠에 들게 되었다. 바로 꿈을 꾸게 되었는데 일고여덟 명의 귀신들이 밧줄과 칼을 잡고 조문선에게 말했다.
"너에게는 큰 죄악이 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
악몽을 꾼 조문선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병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한 상태로 밤에 도망쳤는데, 관문을 지나서 그만 죽게 되었다고 한다.
수로왕의 저주?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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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삼국유사> 내에 수록된 <가락국기>에서는 수로왕릉에 관련된 여러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국보 제 306호) | | | |
이러한 소위 가야괴담을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유명한 '투탕카멘의 저주'가 생각난다. 사실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봉상왕 5년(296년)에 고구려를 침입한 모용외가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도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굴을 하던 도중 갑작스레 병사들이 사망하고 음악소리가 흘러나오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퇴각한 일이 있다.
또한 신라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유례 이사금 14년(297년)에 이서고국(伊西古國)이 신라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던 일이 있었다. 신라군은 이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퇴각하게 되는데 갑자기 대나무 잎을 머리에 꽂은 병사들이 신라군에 합세하여 이서고국의 병사들을 무찌르게 된다. 적군을 없앤 뒤 그들을 보니 수만개의 대나무 잎이 미추 이사금의 무덤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돌아가신 임금께서 군사를 보내 자신들을 도왔다고 생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하나같이 그에 따른 목적성을 지닌다. 바로 왕릉에 대한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과 이를 어기면 철저한 응징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또한 소위 가야괴담을 보면 수로왕의 직계후손, 즉 김해 김씨가 주로 제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또한 제사를 행하는 세력의 정통성을 말한다. 특히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김해를 장악한 충지마저도 이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세력들 또한 수로왕릉과 토착세력을 무시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수로왕릉 또한 도굴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기록인 <지봉유설>과 <미수기언>, 그리고 <임하필기>에 보면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의하여 도굴되었다고 나온다. 물론 순장된 2구의 미녀 시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이한 일이 발생하긴 하지만 훼손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동안 수로왕을 지키던 귀신들이 이땐 힘을 못 쓴 셈인가? 왠지 모르게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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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권씨종가문적 죽소 권별 선생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동잡록>과 <죽소일기>로 구성되어 있다.(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70호) | | | |
앞서 본 내용들엔 수로왕릉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어 자칫 오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수로왕릉 덕분에 죄에서 방면된 사례 또한 있다.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죽소(竹所) 권별(權鼈) 선생의 <해동잡록>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정희량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정희량(鄭希良)은 그가 모시던 연산군에게 경연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이로 인하여 큰 미움을 받게 된다. 결국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해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귀양 도중 어머니를 여의게 되어 자신의 비애와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하여 수로왕릉을 찾는다. 수로왕릉을 찾은 그는 글을 지어 하소연하였는데, 그날 저녁 꿈에서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정희량에게 나타나 "너는 장차 방면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 그대로 그 해 겨울, 정희량은 방면되게 된다. 이처럼 수로왕릉은 자신이 미워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주기만 하는 무서운 존재가 아닌, 자신을 받들거나 찾아오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로왕에 대한 제례는 아직도 이어진다.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 11호인 '숭선전 제례(崇善殿祭禮)'가 그것인데, 해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열린다. 이러한 제례가 아직도 이어진다는 것은 수로왕을 받들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야괴담 또한 그러한 후손들의 노력이 설화로 만들어져 후세에 전해진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출처 : 이글루스 - 희망지기(희망과 꿈을......... 그대들에게)
작성자 : 제니스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