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을 깎다가 손가락이 다쳤다.
나는 메론을 깎고 있었는데, 한손에 메론 조각을 들고 밑 껍질을 벗겨내려 칼을 훅!하고 긋는 순간
엄지손가락까지 칼날이 들어왔다. 그것은 순간이었다.
억! 소리와 함께 연두색 메론은 붉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엄지손가락 사이는 움푹패여 살갖이 들려 평소 볼 수 없었던 내 뽀얀 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내 피부가 이토록 고왔다니. 이래서 다들 박피를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박피를 칼로 하진 않겠지.
붉은 메론은 꼭 붉은 혀처럼 내 눈앞에 낼름거리며 메롱메롱이라 외치는 듯 했다.
개깩끼.....
마데카솔을 찾아보았다.
순간 아차싶었다.
어린시절 마데카솔을 잘못발라 배에 새살이 솔솔 돋아난 그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내 몸매를 24-34-24로 만들어준 마데카솔....얘도 개깩끼....
후시딘을 찾았다.
후시딘의 앙상한 몸통을 부여잡고 마지막 응가나오듯 억지로 짜내어 손가락위에 발랐다.
피와 후시딘이 섞여 분홍빛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난 색채의 마술사 샤갈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미술의 꿈을 접은지 오래... 난 한숨을 내쉬며 대일밴드를 찾았다.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한 대일밴드가 그토록 그리운 봄이었다.
밖에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손가락의 분홍빛이 점점 짙어질수록 내 눈가도 촉촉해졌다.
대일밴드 포장을 대충 찢어 그의 몸에 붙어있는 반쪼가리 흰 옷을 벗겨냈다.
대일밴드는 부끄러운듯 몸을 움츠리며 말아올렸다.
훗...이런 순수한 영혼같으니.
난 대일밴드의 살갗을 내 손가락에 붙였다.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강력히 원했기에 그의 부끄러운 몸짓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엄지손톱위로 그의 몸통을 둘러 꾹 눌렀다.
그리고 남은 나머지 반쪽 흰 옷...
엄지손가락에서 펄럭이는 나머지 그 옷을 벗겨내자 대일밴드는 적극적으로 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처음엔 부끄러워하더니만. 후훗.. 내숭덩어리 그이였다.
그렇게 내 엄지손가락을 휘두른 대일밴드는 그제야 마음이 평온해졌는지
내 살에 찰싹붙어 떨어질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설거지를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입고, 여기저기 청소도하고, 짐을 챙기고나니
어느새 엄지손가락 끝 쪽이 검게 변해 찐뜩하게 늘어져있었다.
떼어내려했지만 쉽게 떨어지지않았다.
드디어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한것이다.
난 그의 집착이 심해질수록 그를 떼어내려애썼다.
우리 이만 헤어져.
난 이렇게 끈적거리게 달라붙는 것 따윈 질색이라구.
하지만 대일밴드는 필사적이었다.
결국 대일밴드는 내 손가락에서 떨어져나갔지만, 그의 잔재는 여전히 손가락에 거뭇하게 붙어있었다.
난 검지손가락으로 쓱쓱 밀어 나머지 잔재마저 없애려애썼다.
하지만 끈적임은 그를 쉽사리 떼어놓지 않았고, 비누로 몇 번 씻어낸후에야 말끔히 떨어져나갔다.
난 또다시 새로운 대일밴드를 꺼냈다.
그 역시 부끄러워했지만, 곧 내 손가락을 휘두르며 그 안정감에 행복해했다.
이 대일밴드도 곧 나를 떠나겠지.
그리고 내 손가락의 틈이 곱게 붙어 상처가 아물때쯤 난 더 이상 대일밴드를 찾지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아프고 이기적인 사랑이란 말인가.
인생은 이렇듯 때때로 필요에 의해 찾고, 이기적으로 변한다.
나도 어쩔수없는 여잔가봐. 미안해. 대일밴드야.
우리 다음 피 볼때 다시 만나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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