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음모론, 특히 김어준 씨 발 음모론을 신봉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음모론이 생기는 원인과 그 순기능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음모론은 일반적으로 집단 간 정보의 불균형에서 생겨나며, 음모론의 제기와 해결에서 그 정보의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2 대션 (그리고 다른 모든 종류의 투/개표)을 예로 들자면 개표가 일어나는 방식은 일반적 대중이 쉽게 알 수 없기에 정보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음모론이 제기되게 됩니다. 물론 그런 음모론을 곧이들이 믿는건 지양해야겠지만, 개표과정의 불투명성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 더 플랜에서 제기한 확실한 사실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먼저 개표의 결과가 개표 시간보다 먼저 알려졌다는 점. 그리고 더 큰 논란이 되는 두 번째 사실인 K=1.5 입니다. (한 후보의 미분류 표가 다른 분류표보다 1.5 배 더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 물론 어느 정도 이상한 점이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제가 방송사와 선관위가 어떻게 정보 교환을 하는 지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평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방송관계자도 선관위원도 아니니까요.
3. 그럼 더 큰 논점인 K=1.5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보자면, 이는 개표에 확실한 시스템적 오류 (systematic error)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개표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이 할 수 있는 일반적인 가정은 "각 후보의 분류표의 득표율과 미 분류표의 득표율은 서로 수렴하여야 한다" 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해지는 K=1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죠. 이 가정이 올바르다면 K=1.5는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물론 저는 과학도기 때문에 이럴 때 정확한 통계적 시험과 그 p value를 알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통계학적 분석이 없더라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다.)
4. 여기서 더 나아가 더 플랜은 이 시스템적 오류 K=1.5가 특정 정치 세력에 의한 개표 조작에 의해서 발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1) 개표 조작이 가능하며, 2) 개표 조작을 실제로 행하여 얻어진 실험 값이 2012년과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다 라는 두 가지 사실을 제공합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과학 논문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sufficiency argument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현상에 대해 한 가지 모델을 제시하며 이 모델이 실험값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모델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입니다. 2012년 대선의 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시스템적 오류가 개표 조작에 의해 일어났다는 이 모델은 실제 값을 설명하기에 충분 (sufficient)하며 더 플랜 제작진이 행한 실험이 이를 입증합니다.
5. 하지만 어떠한 현상을 설명하는 모델은 한 가지보다 더 많을 수 있습니다. 2012년 개표에서 일어난 시스템적 오류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이는 인위적인 개표 조작뿐만 아니라 개표기/투표 용지 자체의 기계적/프로그램적 불완전함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각 후보를 선호하는 계층과의 상관관계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여러 주장, 혹은 모델, 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6. 그렇다면 어떤 주장이 사실임을 (혹은 사실에 가장 가까움을 알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과학도라면 이럴 때 각 모델이 예측하는 다른 가설들을 검증함으로서 한 주장/모델의 타당성을 입증합니다. 2012년 개표를 설명하려 하는 여러 모델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으며, 마땅히 검증이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이는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7. 이렇게 하나를 뺀 다른 모델들을 모두 배제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엔 이가 불가능합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설명 자체는 대게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사실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모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는 개인의 선입견과 가치관에 따라서 일어나게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실들을 두고 김어준씨는 2012년 대선은 조작되었다! 라는 결론을 내게 되고, 과학도인 저로서는 이 모델에 대한 검증과 다른 모델에 대한 반증이 현 시점에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결론을 유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보신 여러분도 각자의 결론을 가지고 계시곘죠, 그것이 김어준씨의 결론과 가깝던지, 아니면 정보 부족으로 확실한 결론을 보류한 저와 가깝던지. 물론 음모론에 기반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나 더 플랜은 이 결론을 도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적인 영화니까요. (이런 정치적 의도가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는가 하는 도덕적 문제는 제가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도 아니지만요.)
5. 그래서 더 플랜이라는 영화를 두고 내릴 수 있는 가장 회의론적, 가장 최소한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즉 이성적으로 도출해 낼 수있는 가장 엄격한 (parsimonious) 한 해석은 무엇일까요? 이는 제가 3번 문단에서 요약한 사실인 "2012년 개표에는 시스템적 오류가 존재한다" 입니다. 개인에 따라 신봉하는 시스템적 오류를 설명하는 모델이 다를 수도, 혹은 여러 개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적 오류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모두에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선거가 공정해야 한다고 믿는 이상) 개표 시스템에 오류가 존재하며, 이는 같은 개표 시스템을 사용하면 재발될 수 있다 라는 결론도 가장한 엄격한 잣대로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그냥 개인적 잡설: 또한, 이런 음모론이 존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개표 과정에 대한 정보의 불균형, 즉 개표 과정의 불투명성이 있음을 반증합니다. 개표 방법에서 일어난 시스템적 오류에 대한 검증이 없이 같은 개표 시스템을 또 사용하고, 또 개표 방법에 대한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이 음모론과 불균형은 해소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불신과 불화를 야기할 수 있으며 제대로 된 정부에서는 지양해여야 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가장 빠르고 간편한 해법은 수개표가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