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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62850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18
    조회수 : 6644
    IP : 115.88.***.168
    댓글 : 11개
    등록시간 : 2014/01/15 13:35:48
    http://todayhumor.com/?panic_62850 모바일
    [분노주의] 관동대지진후 벌어진 조선인대학살의 진실


    20130905140413815.jpg

    사진은 1923년 9월29일자 미야코신문. 2013.9.5 < < 독립기념관 > >


    20130906135106088.jpg

    사진은 학술회의에 앞서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것으로 관동대지진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보여주는 

    일본 사회주의 계열에서 발행한 잡지 '씨뿌리기 잡기種蒔き雑記'제1책 1924년 1월호에 게재된 '학살된 한국인의 시체더미'다. 

    2013.09.06.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20130901225006468.jpg



    사진과 기사: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0901164607453

    http://media.daum.net/foreign/japan/newsview?newsid=20130901203009293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905140413510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906135105312



    "조선인을 10명씩 묶어 세운 뒤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죽지 않은 사람은 선로 위에 늘어놓고 석유를 부어 태웠다."


    "9월3일 낮이었다. 다리 아래에 조선인 몇명을 묶어 끌고 와서 자경단원들이 일본도로 베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다. 임신해서 배가 크게 부른 여자도 찔러 죽였다. 

    내가 본 것으로는 30여명이 이렇게 죽었다."

    일본 시민단체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이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자행된 재일조선인 학살에 대한 증언을 모아 최근 발간한 자료집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지진 피해에 절망한 일본인들 사이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군과 경찰, 자경단에게 조선인 수천명이 학살되는 참극의 발단이 된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지 1일로 90년이 

    흘렀다. 

    그러나 당시 희생된 조선인 원혼들은 아직 안식을 찾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희생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고,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가리지 않았다. 

    우리 정부도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사죄를 일본에 요구한 적이 없다.

    일본 보수세력은 학살의 역사를 감추고 지우기에 오히려 바쁘다.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고교 일본사 부교재 '에도에서 도쿄로'에 실린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 

    대한 글에서 "대지진의 혼란 와중에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됐다"고 돼 있던 내용을, 2013년도판에서는 "비석

    에는 대지진 와중에 '조선인이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는 내용으로 바꿨다. 

    조선인이 왜, 어떻게 희생당한 것인지 모호하게 처리해버린 것이다.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중학생용 부교재 '요코하마 알기' 올해판에서, 간토대지진 때 '군대나 경찰 등이 

    조선인에 대한 박해와 학살을 자행하고 중국인을 살상했다'(2012년판)고 서술된 문장 가운데 군대와 경찰

    이 관여했다는 부분을 삭제하고, '학살'이라는 표현을 '살해'로 바꿨다.

    그러나 90주년을 맞은 올해엔 그때의 참극을 기억하고, 그런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커졌다. 

    요코하마와이엠시에이와 가나가와인권센터는 1일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모비가 있는 

    요코하마시 구보야마 묘지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학살의 역사를 기억에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취지다. 

    요코하마에서도 기록영화 상영회와 강연회가 열렸다. 

    하루 전인 31일에는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간토대지진 90주년 기념행사 실행위원회' 주최로 추도와 

    학술발표를 겸한 집회가 열렸다.

    동포사회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관장 강덕상)은 지난 31일부터 12월28일까지 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있는 자료관 

    기획전시실에서 '간토대지진으로부터 90년, 청산되지 않은 과거'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민단 중앙본부는 1일 오전 관동대지진 90주년 희생동포 추도식을 열었다. 

    도쿄총영사가 행사에 참석했으나, 올해는 이병기 주일대사가 직접 참석해 헌화했다.

    1923년 9월1일 도쿄와 요코하마 등 간토지방 일대를 강타한 간토대지진(규모 7.9)으로 10만5000명 

    이상이 희생됐다. 당시 일본 군과 경찰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뜨려 조선인 학살을 주도했다.


    20130901164607409.jpg



    (도쿄=연합뉴스) 간토대지진 90주년을 맞은 1일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에서 희생동포 추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3.9.1 < < 국제뉴스부 기사 참고 > > 

    < < 주 일본 대사관 제공 > >



    출처 : Daum루리웹
    작성자 : 고양이렌즈 님


    관동대지진 후에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

      - 6천 명의 조선인들이 살육당한 끔찍한 비극

         

      우리는 흔히 일제의 만행, 하면 명성황후의 피살이나 종군위안부 및 강제 징용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일제 36년 동안 우리 겨레에 저질러진 가장 큰 비극은 바로 1923년 9월 일본 관동 지역에서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이다.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 6,600명이 일본인 군경과 자경단의 손에 의해 끔찍하게 살육 당했다.

     

      이 전대미문의 학살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던 것일까?

     

     

      대지진 후에 퍼진 유언비어, 누가 퍼뜨렸을까?

     

     

      1923년 9월 1일, 일본의 수도인 도쿄와 외곽 도시인 요코하마 인근에 진도 7.9의 대규모 강진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건물들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졌고, 현대와 같은 지진에 견디는 내진 시스템도 없던 때여서 지진이 일어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더욱이 대지진의 여파로 화재까지 발생해 수천 가구의 집과 건물들이 불타고, 약 5만 명의 일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대지진이 벌어진 직후, 이상한 소문이 각지에서 퍼졌다. 조선인들이 대지진으로 도쿄 일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각지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고 폭탄을 던지며, 물건을 약탈하고 여성을 겁탈한다는 흉흉한 유언비어 등이었다.

     

      이 유언비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조선인에 대한 악성 유언비어가 아무런 제재나 의심도 받지 않고 일본 사회 전역에 급속도로 퍼졌다는 점이다.

     

      대지진과 동시에 도쿄 일대에는 계엄령이 떨어졌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계엄령은 지나치다.”라는 반발도 있었으나 가볍게 무시되었다. 그리고 일본 각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9월 1일, 입헌노동당의 총리인 야마구치 세이켄은 오후 4시 아자 헤이라쿠의 들판에서 약 1만 명의 피난민들을 향해 “조선인들이 밤에 일본인들을 습격하여 해를 끼치고 약탈을 하려고 한다.”는 연설을 남겼다.

     

      그리고 9월 2일, 오전 10시 이치가야 사관학교의 담벼락에는 “오후 1시에 불령선인(일제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조선인들)이 습격해올 것이다.”라는 벽보가 붙었다. 같은 날과 같은 시각, 스가모 부근에서는 정복 차림의 경관이 와서 “우물에 독을 넣은 자들이 있으니 주의하라.”고 외쳤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인 고토 후미오는 각 지방장관 앞으로 보낸 전문에는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령의 목적을 수행하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실렸다. 또한 도쿄 시내와 외부의 통신을 연결하는 송신소장 오모리 료조 대위는 “송신 전문과 피난자, 공용사와 경관 등으로부터 도쿄의 조선인 폭동을 알고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는 일기를 남겼다. 그는 호텐무라 자경단원 살인사건의 예심조사에서 “조선인이 폭탄을 던져 경시청과 미쓰코시 백화점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자신이 직접 발신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각지에 퍼진 유언비어들은 정부와 군부의 요인들과 민간의 유력 인사들이 나서서 부채질을 하듯이 퍼뜨렸던 것이다.

     

      일본 경찰과 군부, 민간인들에게 조선인들을 죽이라고 선동하다.

     

     

      9월 2일 정오, 계엄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계엄사령부는 나라시노 기병 15연대와 49, 50 연대, 근위사단과 제 1사단 등 군부대에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을 진압하라”는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를 시점으로 일본의 경찰과 군부대와 재향군인회 등지는 일본인들을 상대로 조선인에 대한 악의성 유언비어를 앞장서서 홍보하기에 이르렀다.

     

      한 예로 9월 1일 오후 7시경, 시아타마현 이루마초의 분서장과 경찰관들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인 11명이 폭탄과 흉기를 지닌 채 습격을 해왔다. 또한 80명의 조선인들이 역을 불태우고, 800명의 조선인들이 소방조와 격투 중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9월 3일 오후 10시, 이루마초의 분회장이 경찰서에 초 내의 각 단체 임원들을 모이게 하여 초 부근에는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엄벌에 처하고 주민들에게 흉기의 소지를 금하게 한다고 발표했다. 즉, 여태까지 해왔던 경고문들이 모두 유언비어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이 말을 듣자 주민들은 “1일 이후의 조선인 관련 소문들은 모두 분서장 자신과 경찰관들의 입에서 나왔는데, 그게 모두 유언비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경찰관들이 책임을 져라.”하고 크게 반발했다.

     

      또한 도미사카 경찰서 관내에서는 “사회주의자가 조선인과 제휴하여 폭탄을 사용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9월 2일 오후 5시에는 사이타마현 지방과장이 각 군의 사무소에 다음과 같은 전화로 연락했다. 

     

      “도쿄에서 일어난 지진에 편승해 불령선인들이 혹시 우리 현에 들어와 범죄와 해악을 끼칠 수 있으니, 당국자들은 재향군인회와 소방대와 청년단원들과 협력하여 경계에 임하고, 유사시에는 적절한 대비를 하라.”

     

      일본 각지의 분위기가 점점 조선인에 대한 적대적인 흐름으로 바뀌어가자, 조선인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고 죽이겠다는 움직임마저 포착되었다. 제대한 군인들의 모임인 재향군인회, 범죄자와 불량배와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자경단, 그리고 소총과 기관총으로 완전무장한 군인과 경찰들까지 가세해 범죄를 저지르는 조선인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왜 살육을 선동했을까. 

     

      조선인들이 지진의 혼란을 틈타 범죄를 저지르니 막아야 한다는 유언비어의 내용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덥썩 믿어버리고, 정부와 군대에 민간인들까지 나서서 조선인들을 박해하는 일본 사회의 모습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왜 하나같이 국가 위기 상황이 오자, 엉뚱하게 조선인들을 겨냥했을까?

     

      여기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서 발생한 일본인들의 조선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에게 최고의 위인이자 지식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평소에 “조선인은 개나 돼지보다 못하며, 더럽고 무능하고 게으른 천민들이다. 이런 거지들과 싸우게 되면 단 번에 몰살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조선인을 극도로 멸시하고 혐오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이러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관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의 일본에서는 “멸치가 물고기인가, 조선인이 인간인가?”하는 말까지 나돌았을 정도였다.

     

      또한, 관동대지진보다 4년 전에 일어난 1919년의 3.1 만세 운동 당시에 일본 언론들은 독립을 요구하는 조선인들의 시위에 대해서 “위험하고 불량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선량한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해, 일본 각지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을 키우는데 일조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백주 대낮에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일이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얼마 전,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2011년 11월 4일, 조선일보에서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인 1909년 11월 6일, 일본 도쿄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일본인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에게 암살당한 것에 분노하여 사흘 간 한국인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복수를 러시아 정부에 부탁했다.”고 한다.

     

      즉, 일본인들은 관동 대지진보다 24년 전에 이미 조선인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있었고, 학살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에 대한 복수와 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경멸감이 쌓여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니 처벌해야 한다는 유언비어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았을까?

     

      이와 다르게 보는 시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일부러 나서서 조선인 관련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918년 7월, 일본 전국에서는 쌀값이 1914년보다 4배나 폭등하는 바람에 생활고에 시달린 일본 민중들이 거리에서 쌀값을 내리라는 시위를 벌였는데, 무려 70만 명이 참가하여 300곳의 쌀 상점과 지주들을 습격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이에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쌀값 인하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하기도 했다.

     

      쌀값 인하 시위를 기억하고 있던 일본 정부로서는 행여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고 허탈감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이 뜻하지 않게 지진으로 생긴 울분을 정부에 돌리고 반 정부 폭동을 벌일 것을 두려워하여 고의적으로 일본인들의 분노를 건드려도 뒤탈이 없는 만만한 상대인 조선인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민관군이 하나가 된 조선인 사냥

     

     

      여하튼 이렇게 해서 일본의 민관군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 심지어 학살을 담당할 군대가 늦게 도착했던 요코하마에서는 죄수들에게 총기를 주고 석방시켜, 조선인을 살육하게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때, 조선인들을 죽이는 데 공을 세운 죄수들을 가리켜 죄수님이라고 부르는 현상도 있었다.

     

      다음은 살육에 가담했거나 지켜보았던 자들이 남긴 기록들을 모아 보았다.  

     

      9월 2일, 시부야에서 자경단원으로 있었던 하야시 히데오는 육군소장에게 “너희들은 일본도와 단도를 들고서 경계를 서다가 조선인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베어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같은 날, 요코하마의 부장판사였던 나가오카 구마오는 “경찰부장에게 조선인이 보이면 죽여도 문제가 없다는 통고문이 나왔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오사키의 우치다 료헤이는 “경찰과 헌병 등이 조선인 2천 명이 오사카에서 쳐들어오고 있으니, 시민들은 각자 무기를 가지고 경계하다가 죽여도 좋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판사의 부인인 오노 후사코는 “조선인 300명이 혼모쿠에 불을 지르려 왔으며, 낮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 대답하지 않으면 조선인으로 보고 죽여도 좋다는 전달을 받았다.”고 말했다.

     

      9월 7일, 사이타마현 구리하시에 살던 에구치 기요시는 “경찰서와 촌 사무소의 게시판에 불령선인들이 봉기했다,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상관없다는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라고 말했다.

     

      도쿄대 교수이자 법학박사인 우에스기 신키치는 “당시 경찰들은 시민들에게 불령선인의 검거에 적극 협조하고, 무기를 가지고 다니며 스스로 지키라고 말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조선인은 얼마든지 죽여도 괜찮다고 여기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 헌병에 민간인으로 구성된 자경단까지 가담한 조선인 학살극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이치카와의 고노다이에 있는 야전중포병 제 1연대는 가장 먼저 조선인 학살에 나선 부대였다. 이 부대를 이끈 이와나미 기요사다 소위는 9월 2일 오전 10시 반, 고마쓰가와로 69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조선인 노동자 200명을 죽였다. 철사줄로 목을 묶어 연못에 빠뜨리거나 여자들은 발을 잡아당겨 가랑이를 찢었다고 한다. 당시 제 1연대 제 6중대의 병사였던 구보노 시게지는 일기에서 “9월 2일, 이와나미 소위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조선인 200명을 죽였다.”라고 기록했다.

     

      같은 연대 제 3중대장으로 근무했던 엔도 사부로 대위는 “당시 병사들은 조선인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면 나라를 위하는 공을 세운 줄로 알고, 훈장을 받으리라는 기대도 했다.”라고 말했다.

     

      9월 2일 오전, 교도쿠에 파견된 나라시노 기병 제 15연대 소속 병사인 에츄우야 리이치는 그의 수기인 <관동대지진의 회상>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오후 2시, 가메이도에 도착하자 피난민들이 홍수처럼 넘쳐났다. 장교는 기차의 안팎을 조사하며 조선인들을 골라서 모두 열차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바로 칼날과 총검을 사용해 조선인들을 죽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일본인 피난민들은 원수 조선인을 모두 죽여라, 만세! 하면서 환호성을 터뜨렸다. 우리 연대는 그 날 저녁부터 밤중까지 피의 잔치를 벌이며 조선인 사냥을 시작했다.”

     

     

      엔도 사부로라는 사람은 친구인 군 장교 이시모토 도라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전한다.

     

     

      “조선인들이 모두 도쿄에서 도망쳐 온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부하들을 시켜서 에도가와 강으로 조선인들을 고기 몰듯이 몰아주면 그 때 당신이 부하들을 시켜서 그들을 죽여달라.”

     

      후쿠시마 젠타로는 9월 2일 정오, 이치카와의 논 바닥에서 고노다이의 기병대가 조선인들을 참혹하게 죽이는 광경을 보았다고 고백했다.

     

     

      “조선인 7명이 논바닥에서 뒤로 손에 묶인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알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자, 군인 한 명이 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러 머리를 때려 죽였다. 그러자 군중들 사이에서 ‘꼴 좋다’, ‘모두 때려 죽여 버려라’, ‘불령선인 놈들은 모두 죽어라’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0여 명의 군인들이 일제히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둘러 남은 조선인들도 죽여 버렸다.”

     

     

      가메이도에서는 고모리 시게타카 가메이도 경찰서장이 주동이 되어 군과 경찰이 합동으로 가메이도 경찰서로 끌려온 조선인 320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사오카 주조는 “스미다 구 강변에서 조선인을 10명씩 묶어놓고 군대가 기관총으로 쏘아 죽였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줄지어 눕혀 놓고서 석유를 끼얹어 태워 죽였다.”라고 술회했다.

     

      훗날 일본 정부와 언론은 마치 무지하고 폭력적인 민간인 자경단으로부터 엄격한 군율을 가진 군대와 경찰이 조선인들을 보호한 것처럼 꾸몄으나, 실상은 이처럼 군대와 경찰도 조선인 학살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재향군인과 불량배가 중심이 된 자경단은 마을 어귀마다 관문을 설치하고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려내는 수법으로 통행인마다 ‘주고엔 고주고센’ 또는 ‘파피푸페포’를 발음하도록 하여, 발음이 서툰 자는 모두 조선인으로 간주하고 죽였다.

     

      시노하라 교코란 사람은 “혼조의 오쿠라다리 곁에서 10명의 조선인들이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고 피를 흘리면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자경단들이 파피푸페포를 말해봐, 라고 시키고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스미다가와 강으로 피난을 갔던 와치 마시타카는 “2일 아침 8시경, 4명의 자경단들이 죽창을 들고 조선인 남자 한 명의 배를 찔러 죽였다. 그리고 한 중년 조선 여자의 손발을 잡아서 땅바닥에 누인 채, 트럭으로 치어 버렸다. 그녀가 미처 죽지 않자, 다시 트럭으로 깔아 죽였다.”라고 말했다.

     

      조선인 폭동설을 일본 전역에 타진한 오모리 료지 대위는 호쿠소 철도 부설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150명을 체포하여 살해를 명령했다. 한 자경단원은 오모리에게 직접,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죽여도 좋다.”라는 명령을 들었다고 한다.

     

      수상한 조선인으로 분류되어 경찰서로 끌려가 억류된 조선인들도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혼조와 요리이에서는 무기를 든 자경단들이 경찰서를 포위하자, 겁을 먹은 서장과 순사들이 도망쳐 버렸고, 경찰서 유치장에 있던 87명의 조선인들은 자경단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카와구치와 와라비와 도다에서 조선인 200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군마 형무소로 보내지던 도중, 구마하라와 진보하라에서 자경단들이 조선인들을 습격해 그 중 78명이 이송 도중에 살해당하는 일도 있었다.

     

      혼조 오쿠라다리 부근에서는 5명의 남자들이 조선인 한 명의 손과 발을 묶은 상태로 불 위에 올려놓고 산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또, 쓰키시마 3호지의 자경단에 잡힌 조선인 24명은 철사로 묶인 채로 갈고리에 찍혀서 피를 흘린 채로 바다에 던져지거나, 석탄 코크스 불 속에 산 채로 던져져 타 죽었다.

     

      가나가와현 야마토시에 살던 다카세 요시오란 사람은 “벌거벗은 채로 철사줄에 묶인 6명의 조선인 남자들이 자경단에 붙잡혀 산 채로 석탄불 속에 던져져 타 죽었다.”라고 <이 눈으로 본 조선인 학살>에서 증언했다.

     

     

     

      9월 2일 이후, 미친듯이 기승을 부렸던 조선인 학살은 9월 6일 계염사령부에서 “조선인을 폭력으로 대하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온 이후,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인에 대한 살해와 폭력은 계속되었다.

     

      4일 동안 일본 군경과 자경단에게 살해되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군대에 체포되어 군 부대의 막사나 연병장으로 끌려가 수감되었다. 군부대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두 손을 등 뒤로 묶인 채로 약 20일 동안이나 지냈으며, 만약 도망치려고 했다가는 모두 살해당했다. 군 부대로 끌려 온 조선인들은 범죄자나 전쟁 포로로 취급받은 것이다.

     

      나라시노 군부대의 막사에 수용되었던 3천 명의 조선인들 중 300명은 심한 타박상을 입거나 칼이나 죽창에 찔려 상처를 입었고, 그 중 죽은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가나가와현의 이라야마즈 수용소에 수감된 조선인들도 검거 과정에서 심하게 다친 부상자들이었다.

     

      데라시마 경찰서로 잡혀갔던 조인승 씨는 8명의 조선인들이 경찰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도망치려 했다가 순사가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과 경찰은 이렇게 막사나 연병장이나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가 도주를 시도해 죽인 조선인들을 모두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

     

      요코하마 시의 가잔마루에 수감된 조선인 노동자 800명은 갑판 위에서 비바람을 맞았고 마실 물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화장실에도 가지 못해 대소변을 앉은 자리에서 싸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 자경단이나 군경이 휘두른 칼이나 죽창에 찔린 상처나 철사로 손목을 심하게 묶여 깊게 파인 상처가 난 상태였다.

     

      사이타마 현의 경찰서에 수용된 401명의 조선인들도 부상이 심해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상당수가 죽어가기도 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유야무야 끝나버린 학살의 전말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인 학살의 동기가 된 조선인 관련 유언비어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실제로 일본군부가 편찬한 <계엄령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실려 있다.

     

     

      “대지진 직후, 피난민들이 몰려오는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워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고 오인하거나, 조선인 노동자들이 고용주의 인솔 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이라고 잘못 오해하는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 가 폭탄과 독약을 가졌다는 조선인을 조사해본 결과,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또한 사이타마현 이루마초 분회장이 재향군인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9월 3일 약 40명의 조선인들이 마을 부근의 산림에 모여 불을 피우거나 강가에서 등불로 신호를 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 출동했으나, 산림에 조선인이 모였다는 제보 자체가 사실 무근이었고, 등불신호란 한 어부가 등불을 킨 채로 메기를 잡고 있던 모습을 잘못 보았던 것이었다.

     

      이밖에도 냇가에서 쌀을 씻느라 뿌연 쌀뜨물이 흘러가거나 우물물을 정화하기 위해 명반을 넣었던 모습을 잘못 본 사람들이 조선인이 물에 독약을 풀었으니 마시지 말라, 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녔던 것이다.

     

      9월 10일 이후, 일본 정부는 각지에 내려진 계엄령을 해제하고 대지진으로 인한 건물들의 잔해와 아울러 죽어간 채로 방치된 조선인들의 시체를 치우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의 손에 의해 죽어간 동포들의 시체를 처리하는데 동원된 꼴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외에 자발적으로 노동 봉사를 한 것으로 선전되어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9월 17일부터 일본 정부는 무기를 가진 채 거리를 방황하는 자경단들을 일제 단속하여 그들을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더 이상 무장한 민간인이 공권력에 도전하는 상황을 허용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방침에 대해 자경단의 연합체인 관동자경동맹은 “애초에 조선인들이 범죄를 일삼으니 무기를 가지고 그들을 죽여도 좋다고 말한 것은 당국이었는데, 이제 그 잘못을 우리한테 돌리려 한다.”고 강력히 항의하고 반발했다. 자경단을 적극 지지했던 일본의 지방 마을들도 그런 자경단원들을 동정하면서 경찰에 체포된 자경단원들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운동까지 벌였다.

     

      1923년 10월 1일부터 1924년 2월까지 자경단원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중 검거된 전체 인원인 12건의 사례와 125명 중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고작 32명에 불과했고, 2명이 4년 형을 받은 것이 최고형이었다. 그나마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1924년 황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한 특별 사면으로 모두 풀려났다. 뿐만 아니라 1926년에는 오히려 자경단 단원들에게 서훈과 은상이 수여되어, 그들의 공적을 기리는 일까지 있었다.

     

      관동대지진 직후에 일어난 조선인 학살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죽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도쿄와 가나가와 및 관동 등지에서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끌려간 조선인들은 11,000명이며 행방불명으로 처리 된 조선인들은 9,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조선인 중 상당수가 죽임을 당한 채, 버려졌을 것이다.

     

     

      일본인 사회주의자들, 피해자라고는 하지만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대학살과 함께 항상 딸려 나오는 주제가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에 관한 것이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도 조선인으로 오해받거나, 혹은 사회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일본 당국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당국으로부터 검거된 시점은 9월 3일과 4일 이후부터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히라사와 게이시치나 야마기시 사네지, 스즈키 나오가즈, 가와사키 진이치, 요시무라 고지, 가와이 요시토라 등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자경단에 가입해 조선인을 경계하는 업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지진 당시, 반전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기독교인 인사인 우지무라 간조 조차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는 몽둥이를 들고 집 주변에서 경계를 섰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면서 그를 믿고 따랐던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도 9월 16일 헌병대위인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체포되어 도쿄헌병대 구내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자경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여동생의 집에 놀러갈 만큼 자유롭게 지냈다.

     

      그리고 일본 민중들은 사회주의자가 범죄를 일으킨다는 일본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지 않고, 정부를 비판했으며 군인이나 경찰에 검거되거나 피살당한 사회주의자들을 동정하였다. 조선인의 경우와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아울러 피살되거나 검거된 사회주의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정부를 상대로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을 강하게 요구하고 항의했다. 그 결과 오스기 사카에를 죽인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죽임을 당한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 다치바나 무네카즈 등의 유골은 유족들에게 모두 인도되었다.

     

      사회주의자도 피해자라고는 하지만, 10명의 사회주의자들과 9천 명이 넘는 조선인 피해자들과 두 집단을 둘러싸고 너무나 차이가 나는 처우를 본다면 과연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조선인들과 같은 선상에서 올려놓고 비교될 수 있을까?

     

     

      사건의 끝남과 여파

     

      조선인 대학살이 자행되던 이후, 일본 정부는 한 달 동안 일본의 조선인들이 조선을 방문하거나, 혹은 한반도의 조선인들이 일본을 방문하는 일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행여나 조선인 학살이 전해지면 분노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서였다.

     

      사건이 다소 잠잠해지자 조선 총독부에서는 조선인 학살을 시인하면서도 실제로 죽은 조선인은 고작 2명이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 발표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벌어진 학살극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관동대학살은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세간의 주목을 잘 받지 못하고 묻혀 버렸다. 아직도 사람들은 일제의 만행이라고 하면 명성황후 피살이나 강제징용이나 위안부만 떠올리지, 관동대학살은 잘 알지 못하고 관심을 두지 않으니 도무지 모를 일이다.

     

      한편 1967년 발간된 일본의 서적인 <인물왕래人物往來> 1월호에 따르면 관동대지진의 학살을 지켜본 주일 주재 미국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같이 무시무시한 대학살이 대낮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일본은 결코 문명국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도록 방관하는 일본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야만스러운 집단이다.”

     

      참고 자료: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저/김동수,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출처 : Daum루리웹

    작성자 : 이미르 님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community/327/read?articleId=19863154&bbsId=G005&itemId=145&page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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