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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중국의 관계에서 조선이 중국의 비재를 받아왔다는 일반적인 견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물론 수백년 전에 조선의 왕은 중국의 황제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종속 관계에서도 종주국의 권한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독자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이완된 예속 관계마저도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중략) 조선은 타이와 마찬가지로 자주적인 독립 국가이며 (중략) 누구보다도 조선 사람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조청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중화의 질서가 서양인들이 아는 식민지랑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겠죠. 그래도 아예 없다는 식으로 서술된 게 좀 특이하군요.
"자초지종을 모르는 불행한 주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 제독이 무방비 도시를 파괴하여 어떤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중략)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그것은 대단히 분별없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외국인들에 대해 전혀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무차별로 살상하여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병인양요를 두고 한 것입니다. 프랑스군의 약탈과 살상을 꼬집고 있죠.
"조선 사람들의 품행은 이웃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좋다. 그들은 대체로 개방적이며 정직하다. 하층민이라 하더라도 성실하고 낙천적이기 때문에 우호적이고 쾌활한 대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매우 정직하고 신뢰가 깊기 때문에 일단 상대방이 호의를 베풀기만 하면 설사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처럼 그의 말을 단번에 믿어버린다. 나는 곳곳에서 받은 우정어린 대접을 진심으로 찬탄하고 있다."
"절도 있고 민활한 걸음걸이를 보면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들처럼 동작이 유연하고 활달해 보이며 일본인들에 비해 체구가 크고 건장하다. (중략) 조선 사람들의 우수한 자질과 온화한 인성을 감안한다면 내 소견으로는 만약 양국의 국민성을 비교할 경우에 결국 조선 사람들의 손을 들어줘야 마땅하다."
"(남녀는 철저히 격리되며 시골은 좀 낫지만 상류 계층은 훨씬 철저히 격리된다. 때문에 거의 하루종일 처소를 떠날 수 없다) 성문이 닫히면 모든 남자들의 발이 묶이고 여인들의 재충전과 산책을 위해 그들에게 거리를 양보한다. 엄격한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남자는 엄벌에 처해진다."
그래도 그는 조선의 여자가 매력적이라 짐작하고 한 소작인의 집에서 살짝 마주치면서 확신합니다.
"그들은 중국인들처럼 식기를 직접 입에 대고 음식물을 되도록 빨리 식봉으로 끌어넣는 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음식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식사하는 모습이 중국보다는 훨씬 우아하고 아름답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조선 사람들은 틈만 나면 술자리를 만들며 매우 무절제하다."
자기들이 내놓은 샴페인 네 병이랑 체리 브랜디 네 병을 네 명이 반시간만에 비웠다고 합니다. (...) 그것도 문정하러 온 관리가요. 그 밖에 춤과 음악을 참 좋아하는데 그의 눈에 영 아니었나 봅니다. 바이올린을 들려주니 좋아했다는군요.
"이미 언급한대로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정직하고 착하며, 살인이나 강도오 같은 중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드물다. (중략)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도 집들은 늘 열려 있고 문에는 자물쇠조차 채워져 있지 않으며 절도는 신뢰를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웃나라들보다도 훨씬 엄한 처벌을 받는다."
이 내용의 소제목이 '도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 외에 조선의 현 상황을 질타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조선 정부 비판이 나오죠.
"더욱 놀라운 것은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조그마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면 쉽게 부유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민들을 고무시켜 자원을 개발하려는 추진력이 결핍된 조선 정부의 무관심 탓에 조선의 가장 우수하고 풍부한 자원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산업 기술과 기량은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에 비해 훨씬 못 미친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억압적인 정치 체제에 기인한다. (중략) 조선 사람들은 결코 창의성이나 기량이 부족하지 않으며 능숙한 중국과 일본의 기술자들처럼 되기 위해서는 단지 약간의 교육과 격려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억압적 정치 체제의 통치를 겪고 인접 국가들과의 교역이 전면적으로 단절되면서 조선에서 산업 정신이 무너진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그러면서 고장난 시계를 맡겼더니 시계 처음 보는 사람이 정확하게 분해, 재조립해서 돌려줬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조선 정부를 깔 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입니다. 조선에 대한 조사도 상당히 한 게 보이구요. 가령 조선의 신화를 설명하는데 고구려 건국 신화가 나옵니다. 0_0a 조선에 대한 애정이 참 큰 거 같아요. 나중에 동아시아에 대한 책을 썼는데 1장이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조선인 모양이더군요.
"우리에게 그 나라는 여전히 과감하게 생명의 포기를 무릅쓰지 않고서는 외국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금단의 땅(forbidden land)으로 남아 있다."
조선으로 진입하기 하루 전 쓴 거 같습니다. 그는 세 차례나 조선에 왔다 갔고,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갑니다. 개인이 한 것임에도 국가 단위로 한 것들과 비슷하게 다뤄지죠. 그에 대한 조선의 평입니다.
"방금 남연군방의 차지 중사가 아뢴 바를 들으니, 덕산의 묘지에 서양놈들이 침입하여 사초(잔디)를 훼손한 변고가 있기까지 했다고 하니 아주 놀랍고 황송한 일이다." (고종 5년, 1868년 4월 21일)
...
('-' ) ( '-') =(-_-=) (=-_-)= ~(-_-~)) ((~-_-)~
네, 그가 바로 오페르트입니다. orz
조선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던 그, 프랑스군의 만행에 분개했던 그가 조선을 뒤흔든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죠.
오페르트 도굴 사건, 오페르트 굴총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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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일의 상인으로 1866년에 이미 2차례 온 적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으면서 금단의 나라 조선에 호기심을 느꼈닥 하죠. 2월과 6월에 각각 와서 개방을 요구했지만 전부 실패합니다. 특히 2번째에는 충청도로 갔던 1차와는 달리 한강을 목표로 강화도까지 갔지만 역시 실패합니다. 공통적으로 문정한 관리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주민들과도 친해졌지만 역시 문은 못 열겠다 하더라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한강을 거슬러가려 했지만 연료가 얼마 안 남아 회항하게 됐죠.
여기서 그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있었으니 천주교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리델 신부의 편지를 보여줬고 박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죠. 그야 개신교도였지만 분개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대원군에 대한 증오가 아주 강하게 기록됩니다.
"선교사들과 조선의 신도들에 대한 박해는 뚜렷한 이유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불거진 일이었다. 더구나 이 사태는 종교 문제와 관련이 전혀 없거나 혹은 종교적으로 별로 혐의를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현정부에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희생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은 불만과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대원군 일파가 불평분자들을 아예 싹부터 잘라버려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68년, 스타니슬라 페롱 신부가 찾아옵니다. 병인박해 때 탈출에 성공한 이였죠. 여기서 놀라운 제안을 받게 되죠.
"당신은 나의 계획에 처음에는 매우 놀라고 비정상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나의 계획을 숙고해 본다면 현재로서는 그것만이 우리가 설정한 목표, 즉 대원군이 조선의 개방 요구에 동의하도록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나의 소신에 동조하게 될 것입니다."
꽤나 기나긴 말이 이어집니다. 이게 유일한 방법이고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도 조선에서 선교할 수 있게 되리라는 말들이었죠. 그리고 대원군 개인 말고는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방법이라는 거였습니다.
바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 유품으로 대원군을 협박, 조선의 문을 열고 천주교 박해를 막는다는 계획이었죠. 그 자신만의 생각은 아니었나 봅니다. 같이 탈출했던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머리를 싸맨 끝에 내린 결론이었죠.
"이 대화로 인해 내가 전율을 느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중략) 나도 또한 평범한 방식으로는 조선을 개방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방안을 준비해 오고 있었다. (중략) 나는 그 계획에 착수하는 것은 모험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거두게 될 수확은 확실히 매우 클 것이ㅏ는 점을 마음속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이 계획이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겠지만 나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그 전보다 훨씬 더 낙관적인 시각으로 이 일을 조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오페르트의 3차 방한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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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동원된 건 배수량 천톤 가량의 차이나호, 그와 페롱, 조선인 천주교도, 미국인 탐험가 젠킨스(오페르트는 J씨라고만 적고 있습니다. 그가 비용을 댔죠)가 탑니다. 여기에 유럽인 항해사 10명 가량, 마닐라인 25명, 중국인 100여명이 탔죠. 아산만에 도착한 후 작은 기선 크레타호로 갈아탔고 조선인들의 안내로 목적지로 향합니다. 목표는 덕산군.
중간에 덕산 군수 이종신이 막아섰지만 러시아군이라고 둘러대며 (1, 2차 때는 영국이라고 했구요) 밀어붙입니다. 살짝 겁을 주니 이종신은 쫄았고 페롱 신부가 조선인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고 설득했다고 하죠. 그러자 이종신은 지름길을 알려줬다고 하는데 (...);; 그가 올린 보고에는 관청에 들이닥쳐 파괴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오페르트 일행이 그런 시간이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_-; 과장된 거겠죠.
지나가다가 조선인들에게 연장을 빌리고 그들이 설마 설마 하는 사이에 굴총이 시작됩니다. 그는 조선인들의 저항은 없었다고 했지만 장계에는 군민들이 다 나서서 맞섰지만 총으로 위협하면서 (사람이 죽었다는 건 안 나옵니다) 계속했죠. 하지만 다섯시간 동안 고생해서 파들어갔는데 최악의 난관을 만나고 맙니다. 단단한 석회였죠.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것이었고, 그것까지 팔 도구는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더 있을만한 여유도 없었구요.
공충(충청) 감사 민치상은 뒤늦게 병력을 보냈지만 오페르트 일행은 이미 돌아간 뒤였습니다. 시간은 한참 늦었지만 인명피해 없이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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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는 이런 과정을 소개하면서 꽤나 자기에게 유리한 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만난 조선인들이 대원군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 쓰고 있죠. 관리들까지 술쳐먹고 대원군 욕했다고 하니 (...) 돌아오는 길에도 실패한 것에 조선인들이 안타까워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실일진 몰라도 화폐(당백전) 때문에 대원군이 욕 먹는다는 부분은 사실일 겁니다만, 정말 가는 길마다 다 좋아해줬을지는 의문이죠.
돌아오는 길에도 그렇습니다. 그는 포기 안 하고 영종도에 도착했 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여기서 갑작스레 조선군의 총격을 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마닐라인 한 명이 소를 훔쳤는데 (물론 사과 및 대가를 지불하며 엄벌에 처할 거라 약속했고) 그 때문에 조선인들이 화난 거라는 투로 적고 있습니다. 영종첨사 신효철의 장계에는 이들이 성 밖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고 하고 있죠. 마닐라인 두 명의 시체를 효수했구요.
그 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랬죠.
"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본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과도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군사와 백성들이 어찌 석회를 부술 기계가 없었겠습니까? 절대로 먼 데 사람의 힘이 모자라서 그만두었으리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귀국의 안위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만약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대관 1명을 보내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미혹에 빠져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나흘이 지나면 먼 데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니,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효철은 이런 답을 보냅니다.
"우리나라 대원군 각하는 지극히 공경스럽고 존엄한 위치에 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래서 도로 돌려보낸다. 귀국과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몇 달 뒤에 설사 전선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 대원군 합하가 국정을 확고하게 잡고 있는 데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 국의 배에 대해서는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라."
대원군에게 보내진 않았다고 하지만 실록에 적혀 있는 걸로 보아 대원군이 보긴 한 모양입니다.
이 때 오페르트는 자기를 수군 제독이라 자칭하는데 답장을 기다리다 오지 않으니 무력시위를 했다가 반격당한 게 아닐까 합니다만...
이렇게 그는 돌아갔고, 조선은 청에 이를 정식으로 따집니다. 유교로 보면 당연하겠지만 서양의 시각으로 봐도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건 좋게 봐 줄 수 없는 것이죠 -_-; 프로이센 배였기에 프로이센 영사에 이게 알려졌는데, 이 때는 아직 독일이 통일되기 전으로 그는 함부르크인이었습니다. 거기다 페롱과 젠킨스가 전부 프로이센 사람이 아니며 선주 묄러와 선원들은 몰랐다는 걸로 맞섰죠.
함부르크 영사는 그 사실을 시인해 오페르트는 본국에서 실형을 받았고, 젠킨스 역시 미국영사가 기소합니다.(이 결과는 모르겠네요) 페롱 역시 본국으로 보내졌죠. 1870년에 인도로 간 걸 봐 큰 벌은 받지 않았지만 조선으로 다시는 오지 못 합니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그에 대한 게 적혀 있지 않군요 (...)
+) 북한에서는 젠킨스가 미국인이라는 걸 들어 반미로 이용해 먹습니다 (...)
자... 뭐라고 해야 될까요? 그들로서는 최선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최대한 다치지 않는 방법이었으니까요. 거기다 병인박해는 정말 혹독했고, 그걸 단번에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굴총은 대원군은 물론 조선인들 전체를 분노하게 하기 충분했죠. 서양인들은 남의 무덤 파는 금수만도 못한 놈들로 각인됐구요. 천주교도는 그들을 이끌었고 함께 한 정말 금수만도 못한 놈들이 돼 버렸습니다. -_-;
+) 그리고 조선에서는 이를 모방한 범죄가 일어납니다. 위험은 적으니까요 -_-;;;;
조선을 참 좋아했던 그, 대원군을 증오했고 조선을 위해 일을 벌였던 그,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그는 다시는 조선에 오지 못 합니다.
"이로써 이 독특한 나라로의 나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해는 막을 내렸다. 오늘날까지 수줍음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 땅은 모든 서구인들에게 여전히 [금단의 땅]으로 남아 있다."
그의 책 금단의 나라 조선과 그가 벌인 일을 보면 참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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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1898년에 그는 동아시아에 대한 책을 쓰는데 1장이 조선의 과거와 미래입니다. 거기서 이렇게 쓰고 있죠.
"러시아 정부는 청일전쟁으로 인해 양국이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약해질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듯하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일체의 영향력을 상실한 중국의 경우 러시아의 기대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서울 궁전의 내란은 러시아의 이러한 은밀한 계획을 더욱 부채질했으니 상당히 무지몽매했던 왕비가 살해된 이후 나약해질대로 나약해진 조선의 국왕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최근 정세를 감안하면 조선이 머지 않은 장래에 평화를 되찾고 발전을 하리라는 기대는 요원하기만 하다. (중략) 머지 않아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혈안이 되어 경쟁하는 러시아와 일본간의 피로 점철된 전쟁의 첫 싸움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일본으로서는 지금까지 확보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을 양보하고 싶은 의도가 추호도 없다. 일본이 군사력을 회복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리나 강인한 일본사람의 기질을 고려하면 그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러시아의 조선 간섭에 대응할 것이 확실한데 두 국가가 군사력으로 대치될 경우 조선에 가까이 위치한 일본이 훨씬 유리하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려는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유럽인으로서는 드물게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열강의 각축전이 우선적으로 조선에서 진행될 것이므로 수많은 시련을 감수해 온 조선 민족이 또 다시 희생의 제물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의 장에 낀 먹장의 구름이 소나기로 내린 후에, 그리고 자신의 무기력과 부실한 경제의 어두움에서 깨어날 때에야 조선은 평화와 발전의 길을 갈 수 있으리라."
조선은 그 고비를 넘기지 못 했구요. 넘기기엔 너무 컸겠습니다만...
쯥...
출처 : http://pgr21.com/?b=8&n=4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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