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베의 군대 새끼염소 이야기를 보고 제대한 지 이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 군 생활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지금도 가끔 군대 악몽을 꾸는데 나이 40 되어 재입대하는 꿈이다. 매년 나이를 먹어도 업데이트되는 걸 보면 내가 군대를 참 싫어했던 것 같다.)
입대 전 요리라고는 라면과 고향에서 가끔 쇠죽을 쒀 본 적밖에 없는 나는 본부중대에서 며칠간 방황을 하다 아이러니하게 취사병이 되었다.
원래 보직은 자랑스러운 2111 보급인데, 심지어 그 당시 윈도우 95와 아래한글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인재였는데 말이다.
내 사수는 말년 병장 김 병장 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글로벌한 동남아 음식을 먹어볼 수 있겠다며 좋아했지만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에
실망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김 병장은 부사수였던 나를 끔찍이 아꼈고 제대하던 날 그가 가장 아끼던 자신의 군번이 적혀 있던 대형
자루 삽을 주며 "앞으로 열심히 밥 뒤집어라~" 라는 덕담을 선물했다.
취사장에 왔을 때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동물원도 아닌데 참 동물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취사장 안의 작은 내무반에는 국방무늬의 나라 잘 지키게
생긴 거북이가 있었고, 도둑고양이라 부르기도 산고양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고양이 무리가 항상 취사장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물론 어느 부대나 그러듯이 우리는 그 고양이 무리를 짬타이거라 불렀다.) 그리고 나의 사수 김 병장은 취미도 독특해서 어디서 잡은 뱀 한 마리를
짬 스네이크라 부르며 언젠가 이 자식이 용이 될 거라며 애지중지 키웠다. 덕분에 나는 짬이 날 때마다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고 김 병장은 "내가
없더라도 네가 잘 키워서 꼭 용을 만들 거라.." 하는 유언 아니 제대언을 남기고 떠났다. 물론 김 병장이 제대하던 그 날 나는 그 빌어먹을 뱀 새끼를
세상을 향해 방사했다. 마음 같아서는 삽자루로 한대 내려 찍은 뒤 제대 아니 방사하고 싶었지만, 김 병장과의 의리를 생각해 참았다.
내가 일병이 되기 전 부대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말년을 즐기던 영감님 같던 연대장님에서 젊고 의욕적인 그동안 사단 작전과에서 상황판과
씨름하던 분이 연대장으로 부임하셨다. 말 그대로 부대는 빡세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취사장까지 연대장님의 손길과 발길이 뻗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연대장님이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취사장에 오셨다.
"사단장님께서 특별히 우리 연대에 하사하신 진돗개이니 전우처럼 취사장에서 잘 키우길 바란다!"
성격 더럽던 취사반장도 세상의 모든 귀찮음을 양어깨에 지고 사는 최 병장도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고향에서 개를 키워봤다는
이유만으로 (사실 그 진돗개는 취사장 막내였던 내게 '너는 내 운명' 이었다.)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성격 더러운 취사반장은 나를 볼 때마다
개*끼 잘 크고 있냐며 갈구기 시작했다. 난 그 개의 삼시 세끼와 건강상태를 신경 써야 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개 줄을 잡고 산책과
운동을 시켜야 했다. 가장 기분이 더러웠을 때는 설사한 개똥을 보고 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면서 취사반장이 개똥 옆에서 원산폭격을 시켰을
때였다. 피우지도 않던 담배까지 피우며 '내가 개똥이나 살피려 군대 입대했나' 하며 한탄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담배를 피우게 된 계기가 개
때문이네.. 이런 개 같은..
결국 나는 군견 병으로 근무 중인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개를 잘 키워서 내가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는지 SOS 편지를 보냈다.
친구의 답장은 간단했다.
여자 친구라 생각하고 잘 먹이고, 잘 놀아줘. 그럼 그 개가 휴가증으로 보답한다. 아.. 너 여자친구 없어서 모르겠구나..
추신 : 이름 하나 지어주고..
취사장 한쪽 울타리 안에서 나를 보고 좋아하며 꼬리 치는 녀석을 바라보며 그동안 녀석을 귀찮아하고 애정없이 밥만 줬던 내 자신을 아주
조금은 후회했다. 그리고 녀석의 이름을 4박 5일 포상휴가를 갖다 주라는 의미로 사박이 라고 지어줬다. 그 후 사박이는 내가 주는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어주고(물론 항상 건강한 변을 생산해줘서 군생활이 조금 편해지기는 했다.) 이산 저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운동시켜줬다.
내가 상병이 되었을 무렵 사박이도 강아지 티를 벗고 어느 정도 개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을 때 정기 휴가를 떠나면서 사박이와의 짧은 이별을
했다. 휴가를 나가서도 새벽 4시만 되면 벌떡 일어나 "충성 근무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주방으로 향하는 군대병에 걸린 나는 다른 전우들보다
사박이가 잘 있을까 걱정됐다. "사박이 녀석 나 없으면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사박이 운동은 제때 시켜줘야 하는데.."
내가 부대로 복귀했을 때 나를 가장 반겨준 건 동기도 그리고 영화잡지를 사오라고 했던 고참도 아닌 격렬하게 꼬리를 흔들고 낑낑거리며 울타리
밖으로 나오려는 사박이였다. 나도 사실 그런 사박이가 가장 반가웠다. 내가 이렇게 개를 좋아했던 놈이었나..
내가 드디어 내 군번이 새겨진 삽자루 하나 들고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왕고가 되었을 때도 사박이는 내 담당이었다. 맞후임은 내게
"이제 그만 사박이를 막내한테 양보하시죠.." 했지만 이미 나는 사박이에게 너무 많은 애정을 준 상태였다. 말년이 되니 이등병 때부터 생긴
주부습진도 없어지고 책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으며 여유 있게 사박이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제대가 며칠 남지 않은 날 군견병 친구가 내게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진돗개는 주인에 대한 충성이 높아서 너무 애정을 주면 안 돼. 네가
떠난 다음에도 너를 잊지 못할 수도 있거든.." 그 충고를 들었을 때는 '사박이는 내 주인이 아니야 상관이지 병신아..' 하며 무시했는데
내가 휴가를 갔을 때마다 식음을 전폐하고 다른 사람을 보면 짖고 (특히 내가 싫어하던 취사반장을 보면 물려고 했다. 기특한 놈..) 울타리에 매달려
낑낑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대를 앞두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 사수는 제대를 앞두고 내게 이름 모를 뱀 한 마리를 줬고 나는 내 부사수에게 사박이를 인수인계했다. (물론 총보다 더 소중했던 전쟁이 터지면
총과 함께 들고 나갈 내 군번이 새긴 자랑스런 자루 삽도 인수인계 해줬다.)
제대를 하루 앞둔 전날 사박이가 좋아하던 임연수어로 개밥을 만들어 주면서 나 없어도 잘 지내라고 인사했다.
참 신기한 게 이 자식도 뭔가를 느꼈는지 그날따라 조용하고 차분했다.
제대 후 '휴가 나와서 찾아오면 술 사줄게' 라는 상투적인 멘트를 실천한 개념 없는 부사수에게 사박이가 한동안 나를 그리워했지만
그 후 잘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다.
지금도 사박이가 발정 났을 때 빗자루를 휘두르며 짬견들을 쫓았던 기억과 사박이에 끌려다니며 매일같이 행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직 살아있을까.. 나이가 들었지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