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청춘을 빼앗겼던 강기훈씨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다. 이로써 24년간의 진실 공방은 끝났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라느니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느니 하는 말로 이 사건을 정리할 수 없다. 국가권력에 희생된 강기훈씨의 인생을 되돌릴 수도 없고, 이 끔찍한 국가권력의 만행이 재발되지 않도록 할 방안 역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서대필 사건은 의사의 오진처럼 사람의 한계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집행한 음모이며 조작극이다. 어제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말 한 마디 남겼을 뿐이다. 한 인간을 파멸시킨 사법부의 범죄행위에 사과의 말은 없었다. “미안하다고 한 번 말해주면 안 되나?”라는 강기훈씨의 작은 소망은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누명은 벗었지만 파괴된 영혼은 치유되지 않았다.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강경대 학생 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민주세력의 항쟁 국면에서 정세의 반전을 위해 검찰이 소설을 쓰고 사법부가 추인한 범죄행위이다. 민주세력은 자살하겠다는 친구의 유서를 대신 써주는 집단으로 매도되어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시인 이산하는 한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등단 이후 지금까지 수백편의 시를 썼지만, 아직 공안검찰의 이 엽기적 상상력을 능가하는 시를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유서대필 사건을 상상하고 소설을 써낸 검사들은 모두 승승장구했다. 사건을 총괄 지휘했을 당시 법무부장관 김기춘은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퇴임했다. 수사검사 9명 중 강신욱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거쳐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다. 수사검사 곽상도는 박근혜 정부 첫 민정수석을 지낸 후 현재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이다. 곽상도는 2007년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가 나오자,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금 와서 유서 대필이 아니라는 것은 난센스”라며 강하게 항의한 바 있다.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2심 재판장 임대화는 특허법원장으로 퇴임했다. 대법원 주심을 맡았던 박만호는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같은 재판부의 윤영철은 제3대 헌법재판소장을 지냈다. 이렇게 범죄행위 가담자들이 모두 출세의 길을 달렸으며, 단 한 번도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한 바 없다.
한 번 범한 잘못 때문에 평생 처벌의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이 더 가혹한 형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공소시효가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번 유서대필 사건을 기획하고 조작한 범죄자들은 심적 형벌은커녕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반성한 바도 없다. 이런 자들에게 공소시효는 그 취지에 어긋나며 사회정의에 반한다. 국가 권력 기관의 범죄적 행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폐지해 반드시 처벌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서대필과 같은 조작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서울시공무원 간첩 조작사건, 이석기 내란음모 조작사건도 유서대필 사건과 다를 바 없는 국가기관의 범죄행위이며, 세월호법 시행령을 쓰레기로 만든 것도 진실을 은폐할 목적의 범죄행위이다. 유서대필 사건은 24년 전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이번 기회에 언론과 지식인들의 행태도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 유서대필 사건 당시 검찰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읊어대던 언론 또한 자기반성이 없다.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선동해댄 박홍 신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던 시인 김지하 역시 반성 한 마디 없다. 유서대필 사건은 대법원 판결로 끝난 것이 아니다.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정의를 세울 때 비로소 종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