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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북원과 연계하여 요동을 점거하고 명을 견제한다는 시나리오는 고려말의 안습한 국력과 당시 국제 정세를 미루어 볼 때 거의 현실성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1. 고려말의 안습한 상황..
공민왕 말기에서 우왕 대에 이르는 고려말의 참상은 사일런트 힐이나 라쿤 시티에서 생존하는게 차라리 더 나을 정도로 개막장의 극치를 달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에 쓴 글을 링크합니다.
심지어 요동이 명에 속하게 된 것도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공민왕 시절 요동을 관리하던 '요양행성'이 원나라를 버리고 고려로 귀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지만, 요동 일대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고려가 모른척하는 바람에 명에 귀순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2. 당시 북원과 명의 전쟁
1372년 서달의 군대가 북원을 공격하자 북원은 수도 '카라코룸'까지 밀렸다가 죽을 힘을 다한 항전 끝에 간신히 물리칩니다. 하지만 8년후인 1380년 남옥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가 북원황제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원의 제후와 관리 수천명을 포함한 1만의 포로를 잡아오기까지합니다.
게다가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고작 1개월 전에 몽골고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냐면, 남옥이 이끄는 15만명의 명군이 북원의 중심지 쿨룬 부이르 지역을 급습해서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의 군대를 탈탈 털어버립니다...
이 후 북원 황제인 토구스 테무르가 부하장수에게 살해당하고, 주변 제후들이 힘을 잃은 황제의 영향력을 벗어나 따로 놀기 시작하면서 북원의 영향력은 거의 없어지다시피하게 됩니다.
결국 이 정보를 여진족 루트로 접한 이성계가 국제 정세와 힘의 역학관계를 정확히 읽어냅니다.
당시 이성계는 나가추 군과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 칸의 말로를 예측하여, 우왕의 요동정벌 계획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였다.
- 보르지기다이 에르데니 바타르 [팍스 몽골리카와 고려]
이런 정세를 읽지 못하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을 정벌하러 떠났다면, 아마 베트남에 '안남성'이 세워지듯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는게 아닌 명의 행정기구 '삼한성'의 설치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3. 요동을 정벌한 이후의 뒷감당은 가능했는가?
백보 양보해서 이성계는 천하의 명장이므로 당시 욱일승천하던 명도 때려부수고 요동을 지켜냈다고 칩시다... 땅은 그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능사가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약용 선생의 견해를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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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에 와서 마천령(摩天嶺) 이북으로 천 리나 개척하여 육진(六鎭)을 바둑돌처럼 설치했고, 밖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수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논하는 사람은 이를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女眞)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鮮卑)와 거란(契丹)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敵)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蒙古)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써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 서로 화친한다면 사신(使臣)의 접대에 드는 비용과 병정(兵丁)을 징발하여 부역시키는 일 때문에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된다면 사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므로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종과 세조 때에는 명 나라가 이미 북경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사람들이 기내(畿內)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진실로 차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아직 오랑캐들에게 소속되었더라도 세종과 세조께서는 이를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척박하여 아무런 이익도 거둘 수 없는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적국을 증가시키는 일은 영명(英明)한 임금은 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한나라와 당 나라 때에도 오히려 주나라와 진나라의 옛일을 살펴 관중(關中)에 도읍을 정한 뒤에 위력으로 천하를 제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것은 동경(東京 낙양(洛陽))과 서경(西京 관중(關中))의 우열일 뿐이었다.
명 나라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지만 강성한 몽고와 여진을 멀리서는 제어할 수가 없음을 알았으므로, 마침내
대명부(大名府 북경(北京))에 귀속시켰다. 그 뒤 중국을 통치한 임금들이 이를 변경하지 않았고, 대명부(大名府)는 끝내 중국의 수도(首都)가 되었다. 이러니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세(地勢)는 북으로는 두 강<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다>을 경계로 삼고 나머지 삼면(三面)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국경의 형세가 그대로 자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으므로 요동을 얻는 것이 도리어 군더더기를 붙이는 격이 된다. 이러니 유감으로 여길 게 뭐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성하여 하루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어 한 걸음이라도 중원(中原)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차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서쪽으로 요동을 획득하고 동쪽으로 여진을 평정, 북쪽으로는 국경을 넓혀 위로 흑룡강(黑龍江)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오른쪽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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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가 부유하고 강성하여 대륙으로 치고 나가 천하를 다투고자 한다면 요동을 차지해야겠지만, 형세가 그렇지 못하면 요동을 차지하는 것은 오히려 나라의 힘을 고갈시킬 뿐 이로움이 없다." 입니다.
결론짓자면,
1. 당시 고려는 요동을 점거할 만한 능력도, 점거 후에 유지할 만한 능력도 없으며,
2. 북원은 이미 명에게 철저히 발려서 연계 자체가 의미없는 상황이었고,
3. 심지어 요동을 점거했다한들 명과 천하를 겨룰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런 이득이 없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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