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장의 별명 ‘빨간 수첩’…시민과 오랫동안 이야기하면서 빠짐없이 메모
마주앉아 업무보고, 부하직원에게 “박원순입니다”라고 명함을 건네며 인사
국장급 공무원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이런 소탈하고 격의없는 시장은 처음”
» 영등포 쪽방촌 방문은 지난달 27일 저녁. 박원순 시장 오른손에 보면 주황색에 가까운 빨간수첩이 보인다(위). 일일 환경미화원에 나선 박원순 서울시장이 환경미화원 2일 아침 환경미화원들과 간담회 중에 평소 가지고 다니던 ‘빨간 수첩’에 미화원들의 이야기를 꼼꼼히 적고 있다.
요즘 서울시 공무원들 사이에선 박원순 시장의 ‘빨간 수첩’이 화제다. 박 시장은 지난 2일 새벽 관악구 신림동에서 함께 청소한 환경미화원들에게 “얘기를 듣고 싶으니 무슨 얘기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박 시장은 가지고 다니던 표지가 빨간 수첩에 미화원들의 얘기를 꼼꼼히 적어내려갔다.
박 시장은 취임 첫날인 지난달 27일 저녁 영등포 쪽방촌에서도 시민들의 이야기를 1시간 남짓 들으면서도 빨간 수첩을 꺼내 빠짐없이 메모했다. 이전 시장들이 현장에서 시민들을 만나더라도 5~10분가량 대화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실무자한테 하라”고 말한 뒤 자리를 뜨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취임 뒤 박 시장이 현장을 찾을 때는 늘 ‘빨간 수첩’를 챙겨 보고 들은 내용을 직접 메모하자, 서울시 공무원들 사이에선 박 시장이 “빨간 수첩”이란 별명으로 통한다고 한다. 박 시장은 2000년대 초반 한 다이어리 광고 모델을 했을 만큼 수첩에 관심이 많다. 그는 외국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서점이나 문구점에 들러 좋은 수첩이 있으면 사오는 등 메모광으로 알려져 있다.
박 시장의 수직적인 공무원사회 문화의 격식을 깬 파격 행보도 화제다. 전임 오세훈 시장은 간부들이 보고를 하러 집무실에 오면 테이블 상단 상석에 앉아 보고를 받았고, 보고하는 간부는 서서 보고했다고 한다. 한 서울시 공무원은 “오 전 시장이 앉으라고 하지 않으니 마음대로 앉을 순 없고 서서 보고했는데, 50대 초반인 오 전 시장보다 나이가 많았던 간부들은 ‘초등학생이 선생님께 이야기하듯 서서 보고해야 돼 자존심 상한다’는 불만이 있었다”고 전했다.
박 시장은 보고하는 간부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한 뒤 테이블 맞은편에서 얼굴을 마주보면서 보고받는다. 지난 1일 시 과장급 공무원은 시장실에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가, 박 시장이 “처음 보니 인사를 하자”며 명함을 건네줘서 시장과 명함을 교환한 공무원으로 화제가 됐다. 시장이 처음 보는 부하 직원들에게 “박원순입니다”라고 명함을 건네는 것은 공무원 사회에선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저녁엔 박 시장이 피자와 통닭을 들고 예고없이 예산과 사무실을 격려차 찾았다. 내년 서울시 예산안을 오는 11일까지 내야 하므로 예산과 직원들이 야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한 직원이 자녀와 통화하고 있다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했다. 박 시장은 “그럴 필요 없다”며 전화를 바꿔서 “나 원순이 아저씬데, 나 때문에 엄마가 야근해 늦게 집에 가게 돼 미안하다”고 아이와 통화했다고 한다. 희망제작소 시절 상근자들은 박 시장을 ‘원순씨’라고 불렀다. 자신이 그렇게 원하기도 해서 희망제작소 사람들은 ‘원순씨’를 공식 호칭처럼 썼다.
박 시장은 지난 2일 오전 취임 이후 첫 11월 정례간부회의를 마치고 회의실 뒷자리에 배석한 사업소 간부들을 찾아가 일일이 악수를 했다. 간부회의 때면 실·국장과 본부장이 앞자리에 앉아 시장에게 보고하고, 사업소 간부들은 뒷자리에서 시장 발언 메모를 하곤 해 회의에 참석해도 시장 얼굴을 직접 마주볼 기회가 드물었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20년 넘게 시청에 근무했지만, 박 시장 같은 소탈하고 격의없는 모습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권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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