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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곡성에 대한 9가지 감상
1. 감독은 왜 곡성을 배경으로 하였을까
곡성을 고립된 공간으로 묘사하였다. 영화상에서 보여지는 인물들 중에서 곡성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인물이 유일하게 황정민인데, 곡성을 왕래하는 것은 길게 늘어진 텅빈 도로를 따라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일종의 단계적인 과정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곡성과 외부 세상사이에 거리감이 생긴다. 따라서, 전형적인 한정된 공간으로 설정되며, 사건과 인물관계의 범위가 곡성이라는 작은 마을로 단순해진다. 영화상에 등장하는 곡성경찰서나 곡성병원과 같은 공간은 일종의 연극의 무대와 같이 단일감을 준다. 또한 중간중간에 곡성을 둘러싼 산들과 배경들을 보여주어 관객들에게 고립감을 환기시키며 분위기를 조성한다.
2. 곡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곽도원만이 해결할 수 있다.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에 시달리지만, 현실적인 강력한 지원책이 없다. 경찰특공대나 수사관 같은 곡성 밖의 외부지원인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취재기자들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오로지 곡성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신문기사만이 날뿐이다. 병원에서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환자가 계속 발생해도 무관심하며, 카톨릭 신부마저도 이 피투성이 난동극에 관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인공인 곽도원 말고는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다. 이로 인해서 곽도원 혼자만이 거대한 무엇인가와 싸울 뿐이며, 관객들은 곽도원의 시선에서 이 모든 것을 체험하는 전형적인 장르영화적 설정이 살아난다.
3. 2시간 3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흥미를 유지하기 위해서 편집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곽도원이 악몽을 꾸는 장면과 현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사건 흐름도 이해하기 쉽도록 큼직하게 풀어나간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교차편집이 크게 두번 사용되었는데, 첫번째는 쿠니무라 준과 황정민이 굿을 하는 장면이고, 두번째는 천우희와 황정민이 만날때, 동시에 양이삼이 쿠니무라 준을 찾으러 동굴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 모두 아주 효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였는데, 첫번째 굿장면에서는 관객에게 편가르기를 할 수 있는 중의적인 정보를 제공하였고, 두번째 장면에서는 이 영화의 마지막 갈등에 관한 정보를 주면서 아주 효과적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4. 왜 영화의 결말과 해석에 대하여 의견이 나뉘는가
곡성의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마지막에 똑 같은 구절이 쿠니무라 준의 입에서 나온다. 또한 마지막에 닭이 세 번 우는 베드로까지 많은 기독교적인 모티브가 나온다. 영화상으로는 절대적으로 혼란의 여지가 없지만, 문제의 발단은 아마 나홍진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부린 객기 때문이라고 본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나홍진 감독은 쿠니무라 준의 캐릭터를 예루살렘에서의 초창기 예수로 볼 수도 있다고 하였고, 이로 인해 단순히 양이삼을 농락하기 위하여 쿠니무라 준이 흉내낸 못박힌 자국에 대하여 억지스러운 새로운 해석이 덮어졌다. 바로 영화상에서 악마로 나오는 쿠니무라 준이 예수이며 황정민은 그를 따르는 제자라는 새로운 관점의 해석이다. 작품의 창작자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할말이 없으나, 이것은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감독만이 알 길이라고 생각하나, 이러한 감독의 영화외적으로 사후고찰적인 해석은 상당히 억지스러운 해석이며,자기 작품에 대한 욕심에서 나온 교만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홍진 감독이 그러한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생각보다 쉽게 정리될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도입부에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과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예수를 부정하는 베드로의 모티브는 단지 영화의 살을 찌우기 위한 미사여구일뿐이지 영화의 중심내용을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개인적으로 곡성의 진정한 맥거핀은 독버섯이 아니라 누가복음 24장 37절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결말에 대한 해석은 대부분의 관객들이 느낀것처럼 악마가 나오는 전형적인 오컬트 영화에서 주인공인 곽도원과 악마인 쿠니무라 준과 그의 시종인 황정민의 대결이며, 선한 조력자인 천우희가 곽도원을 돕는다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며, 자연스럽지 않을까
5. 황정민과 천우희에 대한 정보노출이 지극히 부자연스럽다.
쿠니무라 준에 대한 정보는 관객들에게 지나칠 정도록 많이 제공된다. 낚시바늘에 미끼를 끼우는장면부터 시작하여 영화가 끝날때까지 관객들은 끊임없이 쿠니무라 준의 거동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황정민과 천우희에 대한 정보노출이 매우 부자연스럽다. 아마 마지막까지 관객들로 하여금 선악구분에 대하여 혼란을 주기 위하여, 속된말로 누가 누구편인지 헷갈리게 만들기 위하여 많은 장치를 해두었지만, 그로 인해 영화를 가볍게 감상하던 관객들은 피로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이 영화를 끌고가는 힘은 바로 악마의 주술의 힘이다. 쿠니무라 준이 가진 주술적인 힘은 영화상에 보여지는 이국적인 소품들과 여러 장면을 통해 쉽게 이해되나, 문제는 이 주술적인 힘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와 토속신앙까지 섞여있는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쿠니무라 준의 힘과 천우희가 지닌 토속신앙적인 힘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카톨릭 부사제인 양이삼의 존재로 인하여 기독교적인 힘까지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삼자대립은 기존의 오컬트 영화에서는 보기힘든 신선한 설정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관객들로 하여금 어느 장단에 맞춰서 영화에 몰입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쿠니무라 준이 양이삼과 대립하는 구도는 평소에 헐리웃 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기독교적인 선과 악의 대립이여서 관객들이 관습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우나, 쿠니무라 준이 천우희와 대립하는 구도에 대해서는 매우 불친절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영화상에서 두캐릭터 사이의 직접적인 갈등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쿠니무라 준이 차에 떨어지는 장면과 그것을 지켜보는 천우희를 통해 두 캐릭터간에 있었던 일을 관객들에게 암시할 뿐이다. 물론 두 캐릭터는 말이 통하지도 않는다. 거기에다가 가장 적절한 시기에 나타나서 이 모든 혼란의 단서가 될 수 있는 황정민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소품을 활용하여 정보를 줄 뿐, 직접적인 캐릭터간의 연결선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곡성의 오컬트적인 가장 큰 특징인 초자연적인 힘의 근원에 대해서 통일성이 없어지고, 여기에 또 한번 관객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는 와중에 독버섯까지 합쳐지면서, 잡탕이 되어버린다. 독버섯은 초반부의 불쏘시개 정도로만 끝났으면 좋았으려만, 끝까지 정보를 주어서 관객들을 공략한다. 이로 인해 선악구분에 따른 결말 두가지에 독버섯에 의해 모든 것이 환각이었다는 결말까지 추가되어 버린다. 이렇게 다양한 결말에 대하여 다양한 장치를 해놓은 것이 영화를 곱씹어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굳이 독버섯까지는 곁가지를 치지 않았어도 좋았을려만.
6. 결말이 왜 하필 새드엔딩인가
영화를 지배하는 힘은 초자연적인 힘인데, 그것에 비해서 결말에 너무 많은 인물들이 남아버린다. 초자연적인 인물의 설정은 영화가 끝나고 나면, 영화 밖에서는 소멸해버린다. 장르적인 쾌감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는 더 갈무리를 지었어야 한다. 쿠니무라 준, 황정민, 곽도원, 천우희 4명이 다 남아버린다. 이러한 중성적인 결말은 안전한 장점이 있지만, 서사의 종결에 부자연스러움을 준다. 따라서 이왕 이렇게 끝낼 것이라면, 곽도원의 가족이 다 살아있어도 크게 바뀔것은 없다고 본다. 어차피 곡성 특유의 삼자대립 구조상 어느 한쪽이 독식하기는 힘들것이고, 다만 이야기를 매듭짓는데 있어서 창작의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곽도원의 가족이 모두 살아있는 상태 혹은 적어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정도까지는 허용되어도 갈등선이 계속 유지된다면, 똑같이 중립적으로 끝날수 있었을 텐데.
7. 외지인을 일본인으로 설정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다.
외지인이 일본인이다 보니, 외지인과 인물간의 정보교환이 쉽게 되지 않으며, 통역을 빌미로 하여한국의 시골마을에 카톨릭 부사제 양이삼이라는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끌어 들일 수 있었고, 마지막에 쿠니무라 준에 대한 정체를 밝히는 데까지 재활용된다. 마지막 절정에서 관객들은 곽도원의 시선으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를 알아야 한다. 곽도원의 몸이 하나인 이상, 곽도원이 선과 악을 동시에 만나지 않는다면, 시간차가 생기게 되고, 이는 감독이 의도한 피아식별의 장치에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흥미를 떨어트릴 수 있다. 따라서 양이삼 캐릭터를 잘 사용하여 관객들에게 교차편집으로 곽도원이 천우희로부터 얻는 정보와 동시에 쿠니무라 준에게 얻는 정보를 노출함으로서 마지막까지 팽팽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8. 결정적인 장면들
-쿠니무라 준이 절벽에서 떨어진 후에 고통을 참으며 스스로 입을 막는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동정심과 나약함을 느끼게 하여 그가 선한 캐릭터라고 착각할 수 있게 만드는 최고의 미끼이다. 시장에서 닭을 사면서 값을 흥정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황정민이 등장하는 타이밍이 좋았다.
-처음 산속의 쿠니무라 준의 집을 찾아갔을 때, 결정적인 순간에 맹견이 곽도원과 양이삼을 공격하여, 동료형사가 본 것들을 관객만이 볼 수 있었고,곽도원에게 정보교환이 쉽게 되지 않아서 시간을 조금 더 끌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는 다는 설정은 실제로 한국에서 청산가리를 먹이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던 사건이 생각나서 섬뜩하다. 한국정서와는 이질적인 양머리와 부두의식을 연상케하는 소품들보다도 카메라와 사진을 이용한 것이 아주 영리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카메라는 마지막에 상당한 역할을 하는데, 쿠니무라 준이 악마로 변하는 장면에서 어색함을 달래주고, 제일 중요한 황정민의 정체를 단번에 알려주며, 황정민과 쿠니무라 준과의 연결고리도 설명해준다.
-딸이 경찰서에 방문한 뒤 떠나면서 문앞에 남긴 머리핀 때문에 비오는 날 본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고, 딸에게 학용품을 사주면서 강가에서 쉴 때는 반대편에 일본인이 낚시를 하고 있으며, 죽은 줄 알았던 쿠니무라 준을 도로 밖으로 내던질때는 천우희가 지켜보고 있다. 이처럼 곡성은 장면장면 마다 낭비없이 알차게 집어넣은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9. 잡설- 곡성의 결말이 2가지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 차라리 이렇게 했었으면,
일단 쿠니무라 준이 절벽에서 떨어져서 다친 이후로 나오는 차에 떨어지는 장면과 동굴장면을 통째로 날려버려야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곽도원의 시선으로 천우희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들이 가진 물건을 천우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황정민이 곽도원에게 주는 정보이다. 따라서 오히려 양이삼이 동굴을 찾아갔을 때 그 안에 천우희가 있어야 하며, 그 물건들을 가지고 천우희가 주술적인 의식을 하는 것을 목격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영화상에서도 천우희에 대한 정보의 불친절함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리고 반대로 마을에서는 쿠니무라 준이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로 처참한 몰골로 곽도원을 만나야 한다. 곽도원이 덤벼들자 쿠니무라 준이 못박힌 자국을 보여주면서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해야 하며, 이와 동시에 곽도원의 딸이 고통스럽게 괴성을 지르는데 그것이 천우희가 주술행위로 치료를 해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저주를 내려서 그런것이지 헷갈리도록 편집한다. 이렇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쿠니무라 준이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말리는 것이냐 인데, 영화내용과 동일하게 ‘들어가면 다 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곽도원이 왜 나에게 그러냐고 묻는다면, 영화내용처럼 애매하게 ‘당신 딸의 애비의 원죄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 보다, 그전에 쿠니무라 준이 곽도원에게 산속에서 말한 것처럼 ‘말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곽도원은 고민을 하게 된다.그 이후에 닭이 세 번째로 우는 것까지 들려주고, 곽도원이 집에 들어가서 죽은 아내와 장모를 확인하는 장면은 다 날려서, 곽도원이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에 대한 정보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 후 바로 넘어가서 황정민이 곽도원의 집에 들어와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끝난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결말이 바뀌는 것의 장점은 카톨릭 부사제인 양이삼이 천우희의 주술을 목격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카톨릭의 반대급부인 악마쪽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고, 결말에 가족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중립적인 결말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백한 맹점은 캐릭터 설정에 있는데, 쿠니무라 준이 일본인이어서 무조건 양이삼과 만나야만 대화가 통하기 때문에,양이삼이 쿠니무라 준을 만나지 않는 이상, 다른 캐릭터와 쿠니무라 준 사이에는 의사소통의 한계가 있다. 따라서 외지인을 일본인으로 설정한 것이 이러한 상상에 제약을 주지 않았을까, 박춘배에게 살점이 물어뜯긴 양이삼만이 쿠니무라 준과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서, 양이삼의 삼촌이 살인을 저지르게 설정하여 동굴로 찾아가게 만든 것 같다.
출처 |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p=1&b=bullpen2&id=5052089&select=title&query=&user=&rep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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