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시절 어느 주말이었다.
짬이 찰 대로 찬 선임들은 아침점호가 끝나자 마자 생활관에 처박혔지만 일병인 나는 할 일이 태산이었다.
당장 밀린 빨래부터 시작해서 모포를 털고 일광건조 시킨 후 망가진 탄띠수리와 새로 진급한 부분대장의 인식표를 바꿔달아야 했다.
물론 이 외에도 내 개인적으로 해야할일은 넘쳐났지만 앞서 해야할일만 해도 오늘내로 끝낼수 있을까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이등병들이 들으면 코웃음 치겠지만 터치받지 않고 가만히 대기만 하는 이등병들이 부럽기만 하였다.
산더미 같이 쌓인 모포중 하나를 집어 털기 시작하자 넓은 족구장에 팡팡 소리와 함께 국방색 모포가 펄럭이며 휘날렸다.
갈색 런닝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몸에 늘어붙었지만 행여 모포가 떨어져 흙바닥에 뒹굴세라 손을 멈출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일병일을 한 후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겨우 한숨돌리고 족구장 벤치에 앉아있던중 체단실에서 나오던 분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분대장은 참 덩치가 컸다. 말도 별로 없고 몸이 온통 근육질인데다 눈빛도 날카로워 몸에 문신만 있으면 조폭이라 해도 믿을것 같았다.
의외로 터치를 안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대장은 가까이 걸어와 담배를 빼어물고 말했다.
"또치야."
"일병 홍xx"
"오늘 점심 뭐냐"
"일병 홍xx. 금일 점심식단에 대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금일 점심은 쌀밥, 코다리강정, 임연수어국, 깍두기, 맛김. 이상입니다."
재빠르게 대답했지만 분대장의 미간주름은 잡혀진채로 풀리질 않았다. 우리부대 취사병의 음식솜씨는 안좋은 쪽으로 유명한데다
메뉴까지 최악이었으니 그럴수밖에. 잠시 말이 없던 왕고는 분대선임 고상병을 불러 식사인솔을 시키고는다시금 체단실로 걸어갔다.
윗 선임 셋에게 마저 물어봤으나 셋다 패스한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결국 막둥이 셋과 나, 고상병 다섯명이 식당으로 이동했다.
고상병은 식당으로 인솔하는 길에 문득 말을 걸어왔다.
"또치야 우리 탄약고 근무 몇시냐?"
"둘네시 입니다."
"아 씨바. 더워 뒤지겠는데 맨날 둘네시냐. 오늘 뭐 재밌는 썰 준비한거 있어?"
"제가 아주 재미있는 최불암시리즈를 준비했는데 말입니다."
"넌 뒤졌다 씨발아."
맞선임인 고상병과 낄낄거리며 식당문을 들어섰다. 코다리강정 탄내가 코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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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나 신문을 보면 gop나 gp에서 철책선을 오르내리며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신성한 책임이 따르는 경계근무지만,
실질적으로 경계근무중 제일 힘든건 가지 않는 시간이다. 주로 시시껄렁한 게임이나 갖가지 이야기거리,
혹은 사고를 친 경우 따스한 교훈의 말이 오고가는 시간이지만 1분이 1시간처럼 지나가는 타임매직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고상병은 참 이상적인 맞선임이었다. 성격이 지랄맞긴 해도 싹싹한 성격과 나랑 같은 운동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 친해질수 있었다.
보통 맞선임과 맞후임이 사이가 좋지 않으면 군생활이 참 좋같다는데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상병과 나는 빙고와 오목을 하며 지루한 경계근무를 보내었다. 승부욕이 강한 그와 나는 삼삼이 인정이되느냐 되지 않느냐로
근무시간의 반을 소비하였다.
시간이 흘러 근무교대자가 오자 고상병은 수하 후 간단히 인수인계를 마쳤다. FM을 중시하는 선임이기에 인수인계에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흘렀다.
"이상입니다. 고생하십쇼. 또치야 가자."
"네 알겠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던 중 손에 감촉이 뭔가 이상하였다. 뭔가 계속 속이 울렁거리고 솜털이 쭈뼜 돋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평소와 달리 있을게 없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K-2 총열부분을 매만지고 문득 소름이 돋았다.
"고상병님."
"왬마?"
"...........저 가스마개가 없어졌습니다."
어찌 시간이 흘러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교대시간이 촉박하여 일단 근무교대를 한 후 당직부사관은 옆에서 인솔을 하며 걸어가는 내내 왜 그리 교대를 늦게 하냐고 내게 쌍욕을 퍼부었고, 나는 새하얘진 머릿속을흔들며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는 것 밖에.
쨍쨍한 햇볕이 내리쬐는 그 길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생활관에 도착 한 후 나는 환복도 하지 못한 채 탄약고로 뛰어갔다. 장맛비로 괴어있는 웅덩이를 계속 밟아 전투화가 눅진했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두다리가 녹진녹진 녹아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늘러붙는 기분이었다.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왜 그리 서럽게 보였을까.
근무교대가 두번 거쳐갈동안 내내 찾았지만, 결국 나는 가스마개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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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일병 홍xx."
"이 악물어"
정신이 아짤했다. 고개가 돌아가고 입에서는 피맛이 났지만 나는 숨도 쉬지 못했다. 당연하달까. 내 탓으로 엎드려 있는 선임들에게 무슨 면목이 있을까.
"고데기 일어나."
"상병 고xx."
고상병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믿고 맡겼더니 애들관리가 왜그러냐."
"죄송합니다."
"너도 악물어."
짜악소리가 났다. 나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제발 날 때려줘.
"고마해라. 아무리 그래도 아 들 줘패면 니 영창간데이."
평소 천사로 유명했던 임병장이 분대장을 만류했지만 얼음장같은 왕고의 표정은 여전이 서슬어려있었다.
"또치 넌 내일 아무것도 하지마. 담배도 피우지말고 물도 쳐먹지마. 연등실에서 전투화 광만낸다.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왠지모를 서러운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랐지만 나는 알겠다는 말 말고는 할수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는 죄책감과 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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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11시, 연등실에서 묵묵히 광을 돌리고 있던 중 분대장이 나를 찾았다. 그는 나에게 따라오라고 한 후 아무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분대장님"
"............."
"죄송합니다."
그는 들은건지 듣지 못한건지 담배만 피우며 계속해서 걸어갔고, 나는 묵묵히 따라갈수밖에 없었다.
체단실에 도착한후 문을열고 들어서자 상상도 하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펼쳐졌다.
군대 내부로 반입이 힘들어 행사때나 겨우 구경할수 있는 짜장면과 탕수육, 만두가 세팅이 되어 있었고, 분대원들이 모두 집합해 둥그렇게 앉아있었다.
낄낄거리며 웃고있던 그들은 분대장이 앉자 조용해졌다. 아무말 없이 서있던 내게 앉으라 한 후 담배를 비벼끄고는 말했다.
"먹자."
".........."
"어여 무라. 거하게 맞았으면 속이라도 든든하게 채워야제. 내가 이거 니 멕일라꼬 당직사관한테 쇼부보느라 바둑을 몇판을 뒀는지 아나?"
임병장은 낄낄 웃으며 내게 젓가락을 쥐어주었다. 막상 젓가락을 들긴 했지만 왕고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젓가락질을 하기 힘들었다.
"많이 아팠냐?"
문득 눈물이 울컥 치솟았다. 서러웠던 감정이 한번에 녹는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지만 입에서는 꺼억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질 않았다.
분대장은 나를 말없이 바라보다 어깨를 두들겨줬다.
"미안하다."
"또치야, 분대장님이 임마 가스마개 손망처리 본인걸로 하셨어. 재수없으면 말년휴가 짤릴지도 모르는데, 감사하다 그래."
"닥쳐. 그런얘기를 왜해 병신아."
"아 말도 못합니까?"
평소에 분대장과 자주 투닥거리던 투고가 끼어들었다. 나는 그저 이유모를 북받침에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저도 거하게 맞았으니까 저도 먹을 자격 있지 말입니다."
뺨이 아직도 발갛게 물든 고상병이 너스레를 떨며 젓가락을 뜯고는 만두를 낼름 입에 넣었다.
"니는 막내가 입도 안댔는데 먼저 쳐먹나?"
"짜장면 붑니다. 저 휴가 세달도 넘게 남아서 사제음식 당분간 구경도 못하는데, 야 또치! 너 빨리 니가 쳐먹어야 막내들도 쳐먹을거 아냐!"
분대장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고상병은 화살을 내게 돌렸고, 나는 눈물도 닦지 못한채 우격다짐으로 만두를 입에 쑤셔넣었다.
오늘 퇴근길에 문득 고량주와 짜장면을 먹었다. 같이 먹던 회사동료가 그와 겹쳐보이는건 술기운 때문이겠지.
그때 먹었던 짜장면은 내 인생 최고로 맛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전우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