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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umorbest_569372
    작성자 : FvChioni
    추천 : 47
    조회수 : 3903
    IP : 211.232.***.246
    댓글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11/22 21:47:25
    원글작성시간 : 2012/11/22 09:25:55
    http://todayhumor.com/?humorbest_569372 모바일
    꿈 중독에 걸렸던 이야기1 (이름 정리함)


    http://todayhumor.com/?humorbest_568677

    랄라푼젤님이 올리신 게시물 보기가 힘들어서 엑셀로 정리해봤습니다^^;; 



    과거형이고 이미 끝난 이야기다.

    꿈에 관한 이야기니이고 과거형이라 인증은 불가능한 게 많지만

    그냥.. 모쪼록 재미로 읽어줬으면 해.


    2년 전이었다.

    난 평소에도 루시드 드림을 잘 꾸는 편이었는데..

    아마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해.

    이래저래 힘든 일이 많았고, 그래서 그런지 유독 꿈을 많이 꿨던 것 같다.


    대부분은 별 의미 없는 개꿈이었지만

    딱 한번 정말 현실과 분간이 가지 않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섬이었다.

    무인도 같았는데, 작았지만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고

    여자가 두 명 남자가 한 명 있었어.


    그 세 사람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기억나.

    여자는 레이, 세이. 남자는 진.

    판소같은 이름이지만 뭐 어때. 꿈이잖아.

    레이랑 세이는 자매 같았다. 셋다 생긴건 한국스러웠는데..


    어쨌든, 세 사람은 꿈속에서 날 무척 반겼다.

    꿈에서도 나는 무척 의아해서 여긴 어디냐 물었던 것 같아.

    아마 답변은 이제 곧 만들어질 도시라고 했나. 섬 이름도 없다고.


    그러면서 내 이름을 묻더니, 섬 이름을 지어달래.

    난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어.

    한참 고민하다가 지은 이름은 스카이블루였다. 하늘색.

    바다랑 하늘 빛깔이 예뻤거든. 지금 생각하면 참 네이밍 센스 없다 싶지만.

    어쨌든 세 사람은 동의했고. 섬 이름은 스카이블루가 됐어.


    그렇게 섬 이름을 짓고 팻말을 세우고, 씨앗을 조금 뿌리다가

    끝난 것 같아. 그날 꿈은.

    난 이게 뭔 개꿈이냐 ㅋㅋㅋ 하면서 그냥 쿨하게 잊어버렸지.


    그런데 며칠 뒤에 같은 꿈을 꿨어.

    세 사람은 나를 반겼고. 섬 이름은 여전히 스카이블루였어.

    밭을 일구었는지, 밭이 생겨나 있었고 허술하긴 하지만 집도 있었어.

    난 신기해서 우와. 하고 있는데 진이 진짜 진지돋는 얼굴로 나한테 왔었다.


    아마 했던말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도시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도와달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섬이 꽤 맘에 들기도 했고 꿈치고 현실감이 너무 넘쳐서(바람 부는거, 날씨 변화까지 느껴질 정도) 그러마고 했다.


    그 뒤로 나는 꽤 자주자주 그 섬의 꿈을 꾸었다.

    레이, 세이, 진은 매번 그곳에 있었어.

    나는 섬에서 낚시를 하거나, 나뭇가지를 꺾거나, 허드렛일을 돕고... 뭐 그 정도였지. 그래도 꿈을 매번 꿀 때마다 보금자리가 발전되는 게 신기했어. 게임하는 기분이었거든.


    한번 꿈을 꿀 때, 최고 길면 3일. 보통은 반나절만에 깼어. (물론 꿈 속 시간 기준으로)

    하루하루 사는게 재밌어졌지. 솔직히 학교 학원 집 학교 학원 집이었는데 진짜 엄청난 활력소가 생긴 셈이니까.


    그렇게 한달쯤 지났었나. 스카이블루 섬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됐다.

    번듯한 나무집에 양 몇마리가 있고 밭도 있고. 물고기도 잡아다 훈제로 구워먹는 그런 곳이 된거야.

    하지만 세 사람은 별로 만족하지 않는 것 같았어.

    이유를 물어봤던 것 같아. 별로 기쁘지 않냐고.

    좋기는 한데, 사람이 나 말고는 한 명도 오질 않아서 그게 마음에 걸린다는 답을 들었던 것 같다.

    난 반쯤은 호기심에, 별 기대도 안하고 물어봤어. 나는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요 라고.


    아마.. 대답한 내용이 다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자기들은 그저 간절하게 원했을 뿐이라고. 힘든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는데 내가 왔다. 그래서 좋다. 그 정도로 들었던 것 같아.


    나는 아 그렇구나.하고 그냥 넘겼지

    사실 그때쯤 되어선 이미 내가 어떻게 그곳의 꿈을 계속 꾸는지

    어떻게 꿈이 계속 이어지는지 같은건 관심이 없었어

    아니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재밌었으니까.


    그때 현실의 시간은 여름방학이 될 쯤이었다.

    일단 세 사람과 나는 계속해서 섬을 개척했어. 이미 네 명이서 살기엔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더 올 사람을 대비한 거지.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다른 사람이 뚝 떨어졌어.

    진짜 말 그대로 뚝 떨어졌다.

    여느 날처럼 꿈을 꾸고 섬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해변 위로 뚝 떨어진 거야. 진짜 소설처럼.


    꿈이라 그런지 엄청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도 전혀 안 다쳤더라고.

    젊은 남자였어. 이름이. 아마 현수였던가 현서였던가;; 그랬을 거야.


    내가 그랬듯이 이 남자도 굉장히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레이, 세이, 진은 엄청 반갑게 남자를 맞이했어.


    난 그쯤 해서 이게 진짜 꿈인지 다른 세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됐지.

    무엇보다 이 현수라는 남자는 완벽하게 한국 사람 같았다.

    어디 사는지, 연락처는 무엇인지, 직업은 뭐인지는 물어보지도 못했지만.

    아, 자기 입으로 대학원생이라고 한 것만 들었다.


    세 사람은 무척 기뻐했어. 드디어 사람이 오기 시작했다면서.

    현수라는 남자를 극진히 대접한 세 사람은 나한테 했던 말을 비슷하게 했다

    이러이러한 곳을 만들고 있으니 조금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남자는 자기가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던 것 같다. 

    세 사람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조금만 도와주면 언제든지 이곳에 와서 쉬어도 된다고 했던것 같다.


    결국 현수도 그러겠다고 했어.

    그리고 네 명이서 여름 내내 거진 섬 전체를 개척한 것 같다.

    정말 작은 섬이였으니까.


    개척이라고 해봐야 집을 지어놓고 동물을 기를 수 있게 마당도 만들어 놓고.... 길도 터놓고.. 그 정도였던 거 같아.

    나는 그 꿈을 꾸기 전까지만 해도 매우 늦게 자는 타입이었는데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 해서는 10시가 되면 칼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꿈을 꾸고 싶었으니까.

    채팅도 온라인게임도 하지 않게 됐어.

    꿈이 더 재밌고 실감 넘쳤으니까.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일상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어.

    그냥 일찍, 좀 많이 자는 정도. 오히려 수면 부족이 해소되어서 낮에 더 쌩쌩해졌어. 꿈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걸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지만..

    어쨌든, 섬은 계속 개척되었고, 두 명의 사람이 더 떨어졌다.

    여자 둘이었다 이번엔.


    어려 보였어. 10대 초반? 초등학생으로 보였던 것 같아.

    이름은 지희, 연희. 내 친구랑 이름이 같은 아이가 하나 있어서 금방 기억했지. 귀엽게 생긴 애들이었어.

    난 유독 그 애들한테 눈이 가서 정말 잘 해줬던 것 같아. 얘기도 많이 하고 먹을 것도 많이 주고. 집에 자주 찾아가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자각한 건 그쯤부터였다.

    나는 그 애들한테 과일이나 꿀, 주먹밥 같은걸 주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아우 요 찹쌀떡 같은 녀석들~" 하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어.


    하루는 집 앞 슈퍼에서 같은 아파트 아주머니를 만났다.

    근데 아주머니 딸이 딱 지희, 연희같았어.

    귀여워서 사탕이나 하나 사주는데, 나도 모르게 꿈속의 버릇이 나왔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저 대사를 했어. 어투도 표정도 똑같이.

    참고로 꿈을 꾸기 전엔 없던 버릇이었어.


    그걸 깨달은 건 집에 돌아와서였다.

    꿈 속에서 생긴 버릇대로 현실에서도 고스란히 행동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


    하지만 되게 사소했기 때문에 뭐 아무려면 어때? 하고 넘어갔다.

    근데 이게 문제였지.

    꿈을 처음 꿀 때에는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내가 완전히 똑같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꿈속의 내가 현실의 나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거든.


    일단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버릇 같은 게 조금 변했다.

    현실에서는 다리를 떠는 버릇이 있지만 꿈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게 됐다던가..

    현실에서는 장애물이 나오면 돌아서 가지만 꿈 속에서는 뛰어넘는다거나.

    무엇보다, 현실보다 꿈 속에서는 몸이 훨씬 가벼웠고 민첩했다.

    이게 꿈에 중독된 결정적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해.


    난 섬 꿈을 꿀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은 자각해. 하지만 마음대로 깨기도 쉽지가 않고, 그렇다고 가위를 눌리는 것 같진 않거든.

    그리고 분명히 내 꿈일 텐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하늘을 날거나 없는 걸 창조한다던가 하는건 불가능했어. 어째서인지 꿈속의 나는 그걸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꿈 속에서는 가볍게 날듯이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고

    헤엄을 치고...그러는데

    현실로 돌아오면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둔하고.

    예를 들면 꿈에서는 좀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가뿐하고 멀쩡하게 착지했지만, 현실에서는 조금높은 계단에서 뛰어내리려 해도 무섭고, 뛰어내려도 발목이 아프거나 넘어지고... 그런 차이.


    물론 실제적으로 건강에 이상이 온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지.

    그만큼 꿈속에서의 내 몸상태는 환상적이었고

    물리법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 같아.

    꿈이니까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스카이블루 섬은 날로날로 활기차지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졌는데, 하나같이 행복해하고 있었어.

    서로가 도우면서 즐겁게 살고 있었어.

    낮이면 일을 하다가 한가롭게 낚시를 가기도 하고

    할 일이 없다 싶으면 다같이 모여서 밥도 먹고 생선도 굽고 새를 잡기도 하고...


    사방치기라던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고전적인 놀이도 했어.

    힘든 것도 걱정할 것도 없었다. 식량도 물도.. 모든 게 넘쳐났어.

    싸울 일도 없었고.

    공부에 지친 나에게 그곳은 마약 같은 낙원이었어.


    그쯤 해서 나는 학교에 지각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어.

    꿈을 꾸고 싶어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어.

    심한 날은 몸이 아프다면서 정규수업만 끝마치고 바로 집에 와서, 저녁도 안 먹고 바로 잠들어서 다음날 낮에서야 일어난 적도 있어. (물론 주말)

    시간으로 치면 12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을 잠만 잔거야.


    물론 섬의 꿈을 매일 꾸지는 못했어.

    자주 꾸면 이틀에 한번. 보통 일주일에 두세번 꼴.

    꿈을 꾸지 못한 날은 하루종일 우울했어.

    하지만 스카이블루 섬에 있을 땐 정말 좋았다. 


    그러다 사고가 났다.

    그렇게 잠을 많이 잤는데도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졸았던 날이었어.

    우리 교실은 3층에 있었는데, 건물 밖에서 누가 날 불렀다.

    난 졸음이 채 깨지 않은 채로 창문을 열고 날 부른 친구를 보았고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창문을 훌쩍 넘어갔다.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몸이 창밖을 넘어간 뒤였어.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높지 않은 높이인데다가 화단에 떨어져서 그랬는지

    목숨에 지장이 생길정도로 다치진 않았지만, 다리뼈에 금이 가고 말았어.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야 난 알 수 있었어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내가 또 꿈속의 버릇대로 행동했다는 걸.

    꿈속에서 나는 그렇게 훌쩍훌쩍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장애물을 넘어도

    전혀 다치질 않았었으니까.


    그쯤해서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근데 난 정신을 못 차리고 병원에서도 내내 잠만 잤어

    잠이 안 와도 어떻게든 잠들려고 누워 있었지.


    다리뼈는 금방 붙었지만

    학교로 돌아가니 나에 대해 온갖 소문이 퍼져 있었다.

    창문으로 뛰어내린 게 투신자살 시도였다느니

    친구 머리위로 떨어져서 같이 죽으려고 하는 거였다느니..

    정말 말도 안되는 억측이 난무했는데.. 다 해명할 능력도 없었을뿐더러

    나는 그쯤해선 이미 현실에 별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별 말도 하지 않고

    성격도 음침해져 버린 데다가 (만사에 의미를 두지 않았으니..)

    틈만 나면 잠을 자느라 연락도 잘 안 받고 하니까

    친구들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나는 꿈을 꾸는 것만 마냥 좋아서 잠을 잤지.


    이젠 수면이 충분한 걸 넘어가서 수면과다였지.

    항상 멍한 상태였고, 잘 움직이지도 먹지도 않고 잠만 자서

    체중이 줄었어. 물론 근육이 빠진 거라 체력은 훨씬 낮아졌고..

    성적은 말할 것도 없었지. 모의에서 확 떨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이 불러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나는 잠을 잤다. 현실이 비참해질수록 꿈의 내가 그리웠어.


    꿈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현실 생각이 잘 나질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곳에 온 사람들이 현실의 이야기를 이상할 정도로

    하지 않았던 것도, 나처럼 현실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져서, 섬이 비좁아질 지경이 되었다.


    레이와 세이, 진이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했던 것 같다.

    섬이 좁아졌으니, 새 땅을 찾아야 한다고. 물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땅을 찾는 방법이라는 게 정말 기괴했다.

    바닷속에 있는 여분의 섬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긴 스카이블루 섬이니까. 라는 생각 하나로 스스로 설득되었다.

    더욱 놀라웠던 건, 섬을 떠오르게 하는 방법이었다.


    물과 성질이 잘 맞는 사람이 간원을 하면 물과 소통하게 되어

    길을 낼 수 있고, 땅과 성질이 잘 맞는 사람이 간청하여 섬을 떠오르게

    한다는... 정말 지극히 판타지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현실감각이 제로에 가까웠기에...

    다들 너무나 쉬울 정도로 수긍했다.

    그리고 물길을 내는 사람으로, 내가 선택되었다.


    이 때문에 나는 현실 감각을 더욱 잃고 말았지.

    꿈과 현실이 너무나 비교되었기 때문에. 

    무언가 유용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선택되었고, 그로 인해

    기대를 받고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아는 사람은 이해할 거야.


    현실의 나는 그저 비루하고 찌질한 은따가 되어있었는데

    섬에서의 나는 땅을 띄울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로써 대접을 받았어

    여기서 차라리 내가 물길을 내는 데 실패했다면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겠지만... 

    너무나 어이없게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물길이 거짓말처럼 열렸다.

    물이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섬이 드러난 거지.


    이어서 땅을 띄우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

    거짓말처럼 섬이 우뚝 솟아올라 붙었다.

    그 때의 희열은 지금도 잊지 못해. 현실이 꿈이고, 사실 현실이

    스카이블루 섬의 내가 아닐까 했을 정도로 생생해.


    이어 다른 여러 능력자들이 간원했고

    며칠 만에 섬은 풀이 자라나고 울창해졌고, 또 며칠이 지나니 어디선가 새들까지 날아왔어.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기존의 스카이블루 섬과 완전히 똑같은 환경이 되어 있었지.

    그리고 우리는 새로 온 사람들과 함께 그 곳을 또다시 살기 좋게 꾸몄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간원의 능력이 있었어.

    누군가는 풀을 자라게 하고 누군가는 흙이 불어나게 했어.

    또 누군가는 짐승을 다룰 줄 알았고.. 그런 식이었지.

    두 번째 섬은 스카이그린이라고 이름이 붙었어. 녹색 숲이 예뻤거든.


    이쯤 해서 나는 엄마의 수면유도제에 손을 댔다.

    정말 하면 안 되는 짓인 줄 알았지만.. 꿈에 대한 갈망이 너무 심했어.

    어차피 잠은 어느 정도 자고 나면.. 그 다음부턴 졸리질 않앗으니까.

    주말만 되면 몰래 수면유도제를 먹고 거의 하루 종일 잠을 잤다.

    부모님은 맞벌이였기 때문에 내가 약에 손을 댄 걸 한참이나 몰랐어.


    꿈 속에서 나는 간원의 능력을 이용해 물을 가지고 노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어. 물을 가지고 꽃을 피우는 모습을 표현한다던가....

    정말 환상이었다. 현실에서는 꿈도 못 꿀 일들이 ... 그 섬에서는 진짜 현실 그 자체였어. 소설, 게임, 드라마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람들은 조금씩이긴 하지만 꾸준히 와서 더욱더 많아졌다.

    우리는 매일같이 고기와 생선, 밭에서 기른 야채를 먹고

    물에서 헤엄치고 새에게 말을 가르치고, 개를 훈련시키며

    그렇게 놀았다. 그러다가 필요성이 생기면 다시 다른 사람이 살 집을 만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음식도 맛이 있었어. 꿈이라 그랬겠지만.

    현실에선 밥맛조차 없을 지경.


    정말 내가원하는 낙원 그 자체가 그곳에 있었다.

    복슬복슬한 양들을 베고 한가로이 멍때리거나

    새 깃털을 만지작거리며 논다거나... 비가 오면 아무 걱정 없이 땅에 떨어지는 비를 구경하며 담소를 나눴다.

    꿈에서 지내는 기간이 차츰 늘어나서, 4일 5일.. 최장 7일까지 되었다.

    물론 수면유도제의 영향이었다.


    무엇보다 정말 그런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사고능력이 망가져 있었어.


    몸은 형편없이 망가져서 이젠 길 가다가 힘이 없어서

    픽 주저앉을 정도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어디 아프냐고 물어볼

    정도로 안색도 나빠졌고.. 엄마가 내 모습과 줄어든 약을 보고 날 의심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가 날 추궁했지만

    난 사실대로 말할 생각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점점 대담해져서 2~3일치 수면유도제를 한꺼번에 훔쳐다가 숨겨놓고 먹기도 했고.. 학교에서 감기약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수면유도제를 먹고

    오후 시간 내내 자기도 했어.


    결국 엄마가 일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약을 치워버렸다. 아마 내가 모르는 곳에 숨기셨던 것 같은데

    나는 꿈을 못 꾸게 되니 금단증상에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어.

    현실에서 깨어있는 1분 1초가, 몸이 무겁고, 나른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감이 너무 생생해서 짜증이 났어.


    게다가 이젠 몸이 너무 안 좋으니까

    제대로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잘 안 되었지.

    체력도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고..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지. 그 해 2학기 기말고사에서 나는 진짜

    평균점수가 수직으로 하락했다.


    내 성적표를 본 아빠는 크게 분노하셨고

    엄마는 나보고 병원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그 때 내가 한 말은 오로지 하나였다.

    요새 좀 피곤해서 그래. 많이 자면 괜찮을 거야. 불면증이라서 잠을 제대로 못 자.

    엄마는 그걸 그대로 믿으셨다..


    엄마는 몸에 좋다는 보약이나 영양 보충제 같은 걸 나에게 먹이셨다.

    그래도 별 차도는 없었지. 내가 잘 먹질 않았거든.

    잠을 너무 많이 잔다고 하면, 불면증이라 자도 자도 얕은잠이라 피곤해, 라는 식으로 변명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겨울 방학 때, 나는 좀 멀리 있는 마트에 일이 있어 다녀오다가

    쓰러졌어.


    정말 어지럽다가 갑자기 정신이 뚝 끊기고

    일어나니까 병원이더라. 드라마 같은 상황이 코앞에 있었지.

    원인은 큰 게 아니었어. 잘 먹지 않아서 생긴 영양실조였어.

    나는 그때 하루에 한끼도 잘 안 챙겨먹고 잠만 잤거든.

    며칠 동안 영양링거인가... 를 맞으면서 병원에 있던 것 같아.


    그 때 내 키가 160cm였는데, 몸무게가 38kg까지 빠졌다면 이해가 가려나.

    어쨌든 나는 병원에서 마음껏 잤다. 엄마가 오면 아직도 아프다는 식으로

    서둘러 돌려보내고 잠만 잤어.

    물론 꿈 속에서는 언제나 활발하고 능력있는 나로 살았고.


    벌써 5시가 넘었네.

    나 일단 저녁밥 좀 하고 올게. 이따 7~8시쯤에 다시 올게..ㅋ


    밥 먹고 설거지도 하고 여차저차 정리 다하고 왔다 ㅋ


    일단 병원에서 며칠 있다가 퇴원을 했어.

    하지만 내 정신은 여전히 꿈에만 가 있었지.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해야하나 꿈속의 남자랑 (위에 나 아들이라고 레스단 사람 있던데 나 여자다;) 그렇고 그런 관계가 시작됐으니까.

    정신이 나간 거지.


    꿈속의 남자는 호연이라는 이름이었다. 정호연. 이었던가, 그랬을 거다.

    남자치고 아담한 키에 둥글둥글하게 생겼고.

    새를 잘 길들이는 사람이었어. 나는 새를 무척 좋아했기에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가까워졌다.


    그 섬에는 일반적인 참새나 제비, 까치 같은 것도 있었지만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화려한 새들도 많았다.

    진은 그 새들은 이 섬에만 있는 종류라고 했어. 하긴 다른 동식물도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게 많긴 했다.

    나는 말을 잘 안듣는 새들을 그 사람에게 맡겨서 길들이면서 친해졌어. 얼마 안 가서 새를 양손에 하나씩 얹고 다정하게 얘기하는 사이가 됐지.


    꿈의 사람들이 그렇듯 현실의 얘기는 하나도 하질 않았다.

    아니, 사실 그 사람들이 진짜 현실의 사람인지 내 망상인지 알 수도 없었지.

    그저 섬의 얘기를 했다. 섬의 새, 최초의 3인(레이 제이 진), 능력에 관한 이야기 등등. 할 얘기는 많았다.


    위에 제이->세이;; 오타났다

    아무튼 우린 자연스럽게 스킨십도 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그 때의 계절은 한겨울이었지만, 섬은 언제나 따뜻했다.

    나와 꿈속의 그 남자처럼 사귀는 사이가 늘어나고도 있었고.


    꿈속의 나는 누구에게도 꿀릴 게 없었어.

    능력도 있었고, 인정도 받고 있었고, 사람들과 사이도 좋았으며

    집도 식량도 풍부했다. 멋진 남자친구까지 있었다.

    하루하루가 황홀했다. 깨어 있는 시간조차 꿈 속을 생각하며

    멍하니 보내는 날이 많아졌어. 꿈 생각에 현실이 괴로운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물론 그러는 동안 현실의 나는 계속 나락으로 뒹굴고 있었지.

    밥은 여전히 제대로 먹지도 않았고, 잠만 퍼질러자고,

    공부는 하지도 않았고 잘 씻지도 않아 꾀죄죄했지.

    하지만 꿈 속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4~5일 수준에서 절대 늘어나지 않았어. 섬에서도 하루종일 그사람과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부족함을 느꼈지.


    부족함은 곧 타는 것 같은 갈증이 되었어.

    나는 현실에서 항상 꿈 속의 정호연과 꿈 속의 섬을 그리워하면서

    1분조차 버티기 힘들어했어. 지옥이었지.

    그러던 나는 정말 무슨 생각이었는지

    인터넷으로 수면제를 대량 구하는 글을 여기저기에 뿌리고 다녔어.


    맹세코, 절대 죽으려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 때 현실의 나는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면

    사망할 수 있다는, 너무나 간단한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해져 있었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사리분별을 전혀 못하는 것처럼.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나는 몇 주 만에 수면제를 구할 수 있었어.


    잠만 자느라 쓰지도 않고 고스란히 모여 있던 용돈을 모아서

    정말 많은 웃돈을 준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지만.

    나는 그걸 아껴서 조금씩 먹어 자는 시간을 찔끔찔끔 늘려나갔어.

    행복했지만 깰 때마다 아쉬운건 어쩔 수가 없었지.


    그러다가 어느 날, 3일 연속으로 꿈을 꾸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어.

    사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지만.. 나는 미칠 지경이 되었지.

    꿈을 꾸고 싶어서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도 이상하게 꿈을 꿀 수가 없었어.

    히스테리를 부리던 나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남아있던 수면제를 미친 듯이 먹었다. 기절할 때까지 먹었던 것 같아.


    현실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섬의 일상을 즐기고 있었는데

    레이가 나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안에는 세이와 진도 있었어.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여기에 너무 오래 있는다면서 나를 나무랐다.

    나는 겁이 났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할 일은 다 한다 말했어.


    그런데 갑자기 진이 화를 냈어.

    화를 내는건 처음 봤기에 정말 깜짝 놀랐지.

    진은 내가 지금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몸이 너무 약해져서 꿈에 진입하기도 힘들어진 거라 말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이어서 진은 이 곳은 쉬다 가라고 만들어진 곳이지

    환락에 젖어 살으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는 식으로

    나를 무진장 혼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세이가 내 눈을 양손으로 감겼어.

    눈을 떴을땐 또 병원이었지.


    병원에선 가족들의 말을 토대로

    내가 자살시도를 했다고 판정했어.

    난 아니라고 말할 기력도 없어서 그냥 있었지.


    아까 위에서 38kg까지 빠졌다고 했었지.

    병원에 입원하고 위세척을 받고 이런저런 부가적인 치료까지

    받고 나서.. 퇴원한 내 몸무게는 34kg이었다.

    사람이 아니었지. 정말 뼈만 남아서 걸어다녔으니까.

    거식증 환자로 보일 정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꿈을 꾸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나는 건강을 조금이나마 챙겼고. 몸무게는 40kg까지 회복됐어.

    40킬로를 넘어가니까 다시 꿈을 꾸게 되더라고.

    섬에 다시 갔을 때, 날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진이였어.


    진은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이런 식이면 너를 추방할 수밖에 없다고.

    그게 가능한지조차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았지만, 어째선지 정말로 그럴 것 같았어. 그건 정말 두려웠기에 앞으로는 몸을 잘 챙기겠노라 했지.


    하지만 말뿐이었어. 한번 마약과 같은 꿈에 중독되어 버린 난

    혼자서는 절대 그 상태를 헤어나올 수가 없었어.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누가 믿어 주겠어?

    중독될 게 없어서 꿈에 중독된다고. 같은꿈을 꾸는데 항상 이어지고, 그것이 낙원이라는 걸. 그래서 중독될 수밖에 없다는 걸

    이런 이야기를 누가 믿어 주겠냐고.


    절망스러웠지. 그러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어.

    꿈을 꿀 수 있는 최소한의 건강 상태만 유지했어. 하루에 조금씩 한 끼만이라도 먹어서 38kg 미만으로는 절대 체중이 내려가지 않게 했어.

    그래봤자 꾀죄죄한 해골인 건 똑같았지만..

    스카이블루 섬에서의 연애와 생활은 그런 건 상관하지 않게 했다.


    나는 호연에게 내가 진에게서 들었던 말과

    며칠동안 섬에 못 왔던 이유를 말해주었어.

    호연은 슬프게, 자신도 어쩔땐 아주 꿈 속에서 살고 싶다고 그랬지.

    알 수 없는 유대감이 들었지.

    근데 그 유대감이 걱정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어.


    정호연이 그런 생각을 했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못해 중독자가 되었어.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를 게 없겠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지.

    공포가 엄습했어. 만약 이 사실을 진과 레이, 세이가 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모두를 추방해 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적어도 꿈 속에서의 나는 놀랍도록 이성적이었고

    꽤나 좋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어.

    섣불리 행동하는 건 오히려 진을 자극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런 말을 조금씩 해주기로 했어.

    진이 모두 쫓아내기 전에 적당히 자제하자고.


    그렇게 조금씩 말을 흘리면서 느낀건 내 염려가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스카이블루 쪽 사람들은 조금씩 의존/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었어.

    나처럼 심각한 사람은 그 때까진 없는 것 같았지만.. 모르지. 현실의 생각을 거의 하지 않게 되는 마법같은 섬의 특징상 말을 못 한 걸지도.

    스카이그린 쪽은 최근에 생긴 섬이라 그런지 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했던 것으로 기억해.


    나는 어떻게든 진, 레이, 세이를 속이기 위해 절제와 협조를 요구했어.

    사람들은 신기할 정도로 쉽게 동의했고.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았어. 일단 나조차도 수면시간을 조금 줄였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안 보이는 시간이 늘어나서 나는 잘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확실한 건 정말 현실 같았다는 거.


    하지만 문제가 있었어. 금단증상이었어.

    분명 섬의 꿈 자체는 몸에 이렇다 할 영향을 주지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정말 심각한 마약이었지. 잠을 자는 시간이 줄었으니, 자연히 현실에서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났는데 그걸 버티기가 힘들었어.

    공부를 해보려고도 했고 운동을 해보려고도 했는데.. 정말

    하루 종일 꿈 속의 생각 때문에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꿈 속의 지위, 능력, 건강, 재물... 모든 것이 현실보다 훨씬 우월했어.

    나는 수면제로 병원에 실려간 전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렇게는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버텼어.


    하지만 결국 2주를 채 넘기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한테 거짓말을 쳐서 수면유도제를 받아내어 먹고 잠이 들었어.

    그간 참고 참았던 것만큼 즐기고 있는데

    다시금 진이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었어.


    진은 나에게 벽력같이 화를 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세이는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라는 식으로 우울해했고.

    세 사람은 내가 중독 증세를 보일때부터 이런 현상을 예견했던 것 같았어.

    나와 같이 불려온 사람들은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전부 섬 꿈에 중독되어 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정호연도 있었어.


    아마 정호연이 진에게 말했던 것 같아.

    그렇게 중독이 문제라면, 차라리 현실에서 죽어서

    완전히 이곳의 주민이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섬뜩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갔다.

    하지만 이번엔 세 사람 모두가 정말, 무섭게 화를 냈다.

    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그 다음 레이가 한 말은 정말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기억한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낙원이 될 수 있는거라고.

    이곳이 현실이 된다면 낙원이 절대 성립될 수 없다고.

    지금은 어렴풋이 이해가 가지만, 그때에는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진은 우리 모두를 한 달 동안 추방시킨다고 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에 그저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비장한 표정으로 그 사람은

    그렇다면 자살을 해서라도 강제로 이곳의 주민이 되겠다고 했어.

    깜짝 놀랄만한 소리였지.

    하지만 죽으면 꿈을 꿀 수가 없잖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데, 이미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었지.


    진은 정말 화가 났는지 그 자리에서 우리를 전부 추방시켜버렸다.

    눈앞이 까매지고 일어났을 땐 내 방.

    그리고 정말로, 다른 꿈을 꿔도 섬 꿈은 절대로 꿀 수가 없었어 당분간은.


    그 한 달 동안의 생활은 정말이지 처참 그 자체였다.

    히스테리와 짜증을 부리고, 폭식과 거식을 반복했고

    수면제를 먹고 이틀 내내 잔 적도 있었다.

    해가 지나서 새 학기가 시작될 때가 다가왔지만 나는 여전히

    비쩍 마르고 지저분하고 신경질적이고 공부도 하지 않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정확히 한 달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스카이블루 섬은 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어.

    평소 같으면 마중이라도 나왔을 레이, 세이, 진이 아무도 없기에

    나는 세 사람의 집을 다 가봤어. 결국 레이의 집에서 세 사람을 만났지.


    세 사람의 앞에는 정호연이 있었어.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리가 채 돌아가기도 전에

    정호연이 나를 부둥켜안고 설명했다.

    그는 수면자살을 기도한 것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약물 과다복용인 것은

    확실했어. 진이 설명을 보충해줬지.

    그는 섬의 꿈으로 진입한 상태에서 몸이 죽었기에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고.


    처참해하는 세 사람과는 달리 정호연은 오히려 기쁜 얼굴이었다.

    나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면서, 낙원에서 살게 되었다면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 얼굴에 왠지 소름이 돋았던 것 같아.

    세이가 설명을 덧붙였어.

    그나마 정호연은 운이 좋아서 섬에 갇힌 거라고.

    나는 문득 생각나서 질문했어. 여기서 세 사람이 정호연을 추방하면 어떻게 되냐고.


    대답은 아마도, 자신들도 잘 모르는 사후세계로 가지 않을까 하는

    추측성이었던 걸로 기억해.

    세 사람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정호연을 추방하지 않기로 했어.

    대신 사망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비밀로 붙인다는 전제 하에.


    처음에는 기뻤어. 언제 들어가든 정호연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차츰차츰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어.

    다른 사람들은 현실에 있을때에는 섬에 없으니까 못 볼 때가 종종 있지만, 정호연은 언제 와도 보였으니까.


    사람들은 정호연을 추궁하기 시작했어. 어떻게 계속해서 있을 수 있냐고.

    중독자 아니냐고. 중독자라면 어떻게 진한테서 제재를 받지 않을 수 있냐고.

    정호연은 대답을 회피했고, 숨어 지내기 시작했어. 불쌍한 사람.


    그쯤 해서 정호연이 어떻게 섬에 계속 있는 건지

    눈치를 챈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어.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시간 문제긴 했지.

    그리고, 섬의 주민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어.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그 중에는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영원히 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 정말로 죽어버린 거겠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정호연처럼 낙원에 갇혀버린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어.

    이미 스카이블루 섬의 분위기는 가라앉기 시작했지.


    그쯤 해서, 사람이 더 많아져서 우리는 섬을 하나 더 만들었어.

    새로 만들어진 섬의 이름은 미스틱. 스카이그린과 정반대의 방향에 있는 섬이었어. 처음 떠오를 때 섬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신비롭다고 미스틱이란 이름을 붙였어.


    나는 스카이블루 사람들 몰래 정호연과 미스틱으로 건너갔어.

    그곳과 스카이그린은 아직 심각한 중독자들이 없었어.

    초기 증상을 미미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었지만, 다시 낙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어.


    스카이블루 주민들 또한 이쪽으로 종종 건너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어.

    물론 왕래하지 말라는 법 따위는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어.

    하지만 갇힌 자들과 중독자들, 그냥 낙원을 즐기는 건강한 자들 사이로 조금씩 미묘한 분위기가 생겨나는 게 내 눈에도 보였지.


    건강한 사람들은 중독자들도 갇힌 자들도 이해하지 못했어.

    중독자들은 갇힌 자들을 동경하면서 또한 건강한 자들도 동경했고.

    갇힌 자들은.... 글쎄. 초반에는 아주 만족하는 것 같았어.

    죽어서 영원히 오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간혹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천천히. 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섬에서의 사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었어.

    갇힌 자들은 처음처럼 낙원을 즐길 수가 없게 되었지.

    정호연도 그랬어. 그는 이제 맛을 느끼기 위해 먹는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먹어야 했고, 생존을 위해 집을 지어야 했지.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피곤해서 누워서 쉬어야만 했어.

    꿈 속의 세계라 그런지, 수면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건강한 사람들은 낙원을 여전히 즐겼어.

    맛으로 음식을 먹고, 꿈인 것을 알기에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발을 찧어가며 나무집을 짓고 조각을 하고 다치는 것을 감수하며 사냥을 하고 물 깊은 곳에 빠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했어.

    꿈에서 죽어도 현실에서 깨어나서 다음날에 다시 들어오면 됐으니까.


    결정적인 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새 학기가 시작된 직후였던 걸로 기억해.

    무슨 생각이었는지 레이가 사람들을 한데 모아서 많은 음식을 베풀었어.

    처음에는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맛있는 걸 먹으며 서투르게 풀피리도 불고, 화목하게 이야기했지.


    하지만 어떤 사람이 갇힌 사람들 중 한 명한테 이런 말을 했어.

    왜 요즘 들어서는 집에만 처박혀 있냐고. 낙원을 즐기라고.

    별로 기분나쁠 만한 어조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갇힌 자들 대부분이 순식간에 울컥했어.


    말싸움은 금방 난투극으로 번졌어.

    아마 갇힌 쪽에서는.. 그냥 노닥거리는 놈들이 생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마음을 알기나 하냐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한참을 싸웠지만, 애당초 갇힌 자들이 질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랑, 그렇지 않은 사람이니까.

    진과 레이, 세이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히 돌아갔다.


    다음날 진은 스카이블루를 봉쇄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어.

    정말 놀랐지. 근데 더 놀라운 건 세이의 다음 선언이었지.

    갇힌 자들을 스카이블루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스카이블루를 봉쇄하겠다고. 아무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다고.


    스카이블루를 봉쇄한다는 소리를 듣고 가장 무서웠던 건 바로 나였다.

    정호연을 만날 수 없게 되니까.

    진과 세이의 말대로라면 정호연도 스카이블루에 갇히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것이 최선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괴로운 건 어쩔 수가 없어서, 진에게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지만 어쩔 수 없다는 답만 받았다.


    그 후로 스카이블루와 다른 섬의 단절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나는 현실에서나 꿈 속에서나 걱정에 아무 일도 못했다.

    단절 작업은 일주일 가까이 이루어졌다.

    진은 나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나는 도무지 간원의 힘을 쓸 만큼 집중할 수가 없어서 거절했다. 대신 정호연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는 영영 못 보게 된다는 현실이 너무 냉혹했다.

    나는 그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두기 위해 미친 듯이 잠만 잤다.

    우리는 만나고, 헤어질 때가 될 때마다 부둥켜안고 울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현실에서조차 그의 생각에 눈물이 났다.


    일주일이 지나고, 진은 정호연을 강제로 데리고 사라졌다.

    나와 그는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울부짖었던 것 같았다.

    일어나고 나서도 정신없이 울다가 탈진한 나는

    그 후 사나흘간 심한 감기에 걸려 꿈을 꾸지 못했다.


    감기가 낫고 다시 꿈으로 진입했을 땐 봉쇄가 완전히 끝난 뒤였다.

    스카이블루 섬 주변으로 강한 회오리가 몰아치고, 그 주변으로 강한 해류가 흘러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 나한테 진은 잔인한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나오는 갇힌 자는 무조건 스카이블루로 강제로 데려간다고.

    스카이블루는 이제 낙원이 아니라 갇힌 자들의 다른 영역이 되는 거라고.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진은 다시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갇힌 자들은 이곳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낙원으로 즐길 수가 없다..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더불어 정호연을 하루빨리 잊으라는 말도 했었다.


    나도 진의 말에 머리로는 공감했다.

    애써 그를 잊으려고 다른 섬 주민과 어울리고 현실에도 충실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떠올라 나도 갇힌 자가 되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5월까지 그랬던 것 같다.


    미스틱의 해변가에 앉아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었다.

    다른 것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어깨에 새를 앉혀 둔 것을 보자마자 눈물이 났다. 새를 잘 길들이는 정호연의 능력이 생각나서였다.

    스카이블루를 낙원으로 즐길 때에는 훌륭한 놀이였지만, 생존을 위해 사는 지금 그에게 있어 새를 길들이는 능력이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며 그를 향한 걱정이 북받쳤던 것 같다.


    내가 갑자기 울자 그 남자는 날 위로했다.

    아마도 이렇게 좋은 곳에서 울 일이 뭐가 있냐는 식으로 말하며,

    새에게 묘기를 부리게 했다. 정호연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좋은 곳은 처음이라면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놀 수 있다고 했다. 순간 정호연의 모습과 겹쳐서 화가 났다.


    지금쯤 그 사람은 꿈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스카이블루 섬에서 버티고 있을 텐데.

    스카이블루 섬이 놀기에는 좋을 지 몰라도 살기에는 결코 좋지만은 않은 환경인데.

    근데 이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행복하다느니 좋은 곳이라느니 그런 말을 한다. 

    논리적으로는 화가 나는게 이상했지만, 분명히 나는 화가 엄청나게 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남자에게

    생존이 아니라 그냥 놀러오는거니까 좋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엄청 폭언을 퍼붓고 가버렸던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뒤로 섬 주민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열화가 솟구쳤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에서도 꿈 중독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미스틱 섬 해안가에 앉아 있으면 회오리에 감싸인 스카이블루 섬이

    아주 잘 보였다. 나는 정호연 대신 꿈 속에서 종일 스카이블루 섬 쪽을 보다가 깨곤 했다. 그도 이렇게 내 쪽을 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울다가 깨곤 했다.


    견디다 못한 나는 헤엄쳐서라도 스카이블루로 진입하려고 했다.

    어차피 현실의 몸이 살아있는 이상 꿈에서 죽어도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바람 때문에 아무리 헤엄쳐도 일정 거리 이상은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그저 물 속에서 머리만 내놓고 바람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살시도를 해볼 생각도 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무서웠다.

    게다가 사라졌던 주민들 중 돌아온 사람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고뇌하던 나는 생각을 바꿨다.

    갇힌 자가 되는 게 아니라 갇힌 자인 척을 하자고.


    하지만 그러자니 문제가 있었다

    갇힌 자는 단 하루도 섬에 없는 날이 없었다. 완전히 섬에서만 살기 때문에 하루종일 섬에 있었는데, 내가 그럴 수는 없었다.

    수면제를 먹어 계속 자는것도 생각해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시간 배율이 규칙적인 건 아니었지만 현실 시간보다 꿈 속의 시간이 더 빠른 것은 확실했으니까. 불과 몇 시간만 깨어나 있어도 꿈에서는 며칠이 지나가 버린다.


    그 문제를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할 수가 없어서 6월 중순까지 울며 고민만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대규모의 갇힌 자들이 한꺼번에 진에게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스틱 섬은 다른 섬보다 좀 더 넓고, 숲도 울창했는데

    그 때문에 장기간 들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숲의 자원들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소모되는 것을 본 진과 레이, 세이가 본격적으로 섬을 이잡듯 뒤져서 모두 찾아낸 것이었다.

    당연한 결과로 모두 스카이블루 섬 추방령이 내려졌다.


    50명이 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많은 숫자라면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과 바꿔치기로 들어가도 진이 눈치채지 못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운이 좋았는지 갇힌 자들 중에는 나와 체구가 비슷한 여자들이 꽤 있었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에게 접근해 바꿔치기를 제안했다.


    상대방은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옷을 바꿔입었다.

    나는 그 사람과 비슷하게 머리도 자르고 표정과 말씨도 연습하면서

    최대한 위장을 했다.

    추방하는 날은 꿈 속 시간으로 2주 뒤였는데, 나는 일부러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날을 샌 뒤 깊이 잠들었다. 계산이 맞아떨어져 적당한 타이밍에 미스틱에 들어올 수 있었다.


    추방령을 어떻게 실행하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무작정 그 사람을 빼돌리고 대신 줄을 섰다.

    잠시 후 진이 직접 추방을 실시했다. 바람을 태워 섬 안으로 날려보내는 무식하고도 별난 방법이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바람의 간원자를 찾아볼걸.. 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이 대놓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자기니까 되는 거라고. 다른 사람이 시도하는 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고.

    .. 어쨌든, 추방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한 사람씩 회오리 너머로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진은 이미 추려낸 사람들은 주의 깊게 체크하지 않았다.

    아마 자진해서 스카이블루 섬에 가려는 사람이 없을거라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랬는지, 진은 너무나도 쉽게 나를 스카이블루로 보내줬다.


    스카이블루는 얼핏 보기에는 그대로였다.

    처음에 진, 레이, 세이와 함께 개척했던 흔적들을 보고

    나는 한동안 그대로 목놓아 울었던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정호연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섬을 돌아다녔다.

    현실에서 최대한 기억을 살려내서 공책에 지도를 그리고

    꿈에서 깰 때마다 갔던 곳을 체크했다.

    집념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하며 메모하고 암기했다.

    주민과의 대화는 최대한 삼갔다. 혹여나 내가 갇힌 자가 아니라는 것을 들킬지도 몰랐으니까.


    같은 맥락으로 최대한 다른 주민의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것도 중요했다.

    50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유입된 탓에 원래 있던 거주민들은 나를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고, 덕분에 조금은 수월하게 찾아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쯤 지나서 나는 한 동굴에서 정호연을 찾아냈다.


    그는 살이 쑥 빠지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낡은 동굴에 풀을 깔고 서툰 솜씨로 만든 그릇들이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었던 풍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손에 생긴 굳은살과 흉터를 보니, 그가 나와는 달리 정말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만남은 역시나 통곡이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이나 울고 나서야 나는 자초지종을 말할 수 있었다.

    이어 정호연은 자신이 이곳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슬펐고, 또다시 화가 났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멋대로 생각하고 갇힌 자가 되었으면서, 최초의 갇힌 자였던 정호연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가 집을 놔두고 동굴에서 살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무엇을 먹고 살았느냐는 질문에 정호연은 매우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능력은 사용처가 바뀌어 있었다.

    무척이나 잔혹한 일이었지만, 그는 새를 길들인 뒤 살찌워서

    잡아먹어 가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실제로 그가 새를 잡아서 털을 뽑고 조리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아무 말 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먹먹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새에게 묘기를 부리게 하지도 않았고

    새와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새고기를 먹는 것을 보며 이제 어떻게 할 지 생각했다.


    거짓으로 진을 속여서 들어왔고, 게다가 원망받고 있는 정호연과

    친하기까지 하니 주민들에게 정체를 들켰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맞아 죽기만 한다면 두렵지 않겠지만,

    나나 정호연을 진이 완전히 이 세계에서 추방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 때까지도 현실보다 꿈이 좋았다.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현실과 달리, 섬으로 가면

    정호연이 있었다. 그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들어주었고

    언제든지 나를 안아주었다.

    바깥이 지옥일지언정 그 동굴 안만큼은 또다른 낙원이었다.


    나는 하루종일 햇볕도 들지 않는 동굴 안에서

    이런 저런 물건을 정리해주거나 그가 도구를 만드는 것을 돕고

    그 외의 시간에는 하루종일 서로 안고 얘기를 했다.

    비가 오면 비를 보며 얘기하였고

    나뭇가지로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비록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밝은 불을 피우지는 못하였지만 그 정도라도 행복했다.


    하지만 정호연은 이제 나와 다른 존재였다.

    바닥이 찬 동굴에서만 지내던 그는 어느 날 비를 쫄딱 맞고 오더니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의학에 관한 지식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그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나는 닥치는 대로 현실에서 의학 서적을 뒤져 보았지만, 전문용어 투성이라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매일 깨고, 다시 잠들 때마다 정호연의 상태는 눈에 띄게 안 좋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기 위해, 혹시나도 그가 내가 없는 사이 죽을까 봐 수면제를 상시로 들고 다니며 한두시간 정도의 텀을 두고 짤막하게 잠을 잤다.

    수면제에 내성이 생겨서 예전처럼 강한 효과가 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몸은 더욱 만신창이가 되어갔지만.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도무지 체력이 버티지 못할 임계점이 왔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날 섬으로 진입한 나는 오랜 시간 생각한 끝에, 추방당할 각오를 하고 섬 외곽으로 나섰다.


    외곽은 많이 변해 있었다. 사람들이 울타리도 세우고 다른 이런저런 장식품도 만들어 둔 탓이었다. 어망도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연인이 죽어간다며 빌었다.

    몇 사람이 나를 뿌리치고, 곧 한 사람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는 나더러 연인이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사실을 모두 실토하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적대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던가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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