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집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전화를 놓은 집이었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벽에 붙어 있던, 반질반질하게 닦은
참나무 전화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전화통옆에는 반작반짝 빛나는 수화기가 걸려 있었다.
전화 번호까지 생각나는데, 우리집은 105번이었다.
나는 키가 너무 작아 전화기에 손이 닿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거기 대고 말을 할 때면 홀린 듯이 귀를 기울이곤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나를 안아 올려
출장중인 아버지와 얘기하도록 해 주었다.
정말, 요술 같은 일이었다!
이윽고 나는 이 멋진 기계속 어딘가에
놀라운 인물이 살고 있음을 알 게 되었다.
이름은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인 그 여자는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었다. 누구네 전화번호라도
어머니가 묻기만 하면 척척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어쩌다 밥을 안 줘 우리 집 시계가 멎기라도 하면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는 즉시 정환한 시간을 알려주곤 했다.
내가 이 전화기 속의 요정과 처음 얘기를 해 본 것은,
어느날 어머니가 이웃집에 가셨을 때였다.
지하실에 있는 작업대 앞에서 놀다가
그만 망치로 손가락을 찧고 말았다. 너무너무 아팠지만
집 안에는 나를 달래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울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쿡쿡 쑤시는 손가락을 입으로 빨며
집 안을 헤매다가 어느덧 층계 옆에 이르렀다.
전화기다!
나는 얼른 응접실로 달려가 발받침 의자를 끌어왔다.
그 위에 올라가서 수화기를 들고는 귀에 갖다 댔다.
그리고 머리 바로 위에 있는 송화기를 대고 말했다.
「 안내를 부탁합니다. 」
한 두 번 짤깍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작지만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 안냅니다. 」
「 손가락을 다쳤어. 잉 .....」
'안내를 부탁합니다' 가 물었다.
「 나밖에 아무도 없는 걸. 잉 ..... 」
「 피가 나요? 」
「 아냐. 망치로 때렸는데 막 아파요 」
「 냉장고를 열 수 있어요? 」
나는 열 수 있다고 했다.
「 그럼 얼음을 조금 꺼내서 손가락에 대고 있어요.
금방 아픔이 가실거예요. 얼음을 꺼낼 때 조심해야 해요. 」
이렇게 가르쳐 준 뒤, 그 사람은 상냥하게 덧 붙였다.
「 자, 이제 그만 울어요. 금방 나을 테니까 」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는 무슨 일이든 모르는게 있으면
'안내를 부탁합니다'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지리 공부를 하다가 전화를 걸면, 그녀는
필라델피아가 어디 있으며 오리노코 강은 어디로 흐르는지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설명만 들어도 멋있어서, 나는 이담에
커서는 꼭 이 강에 가 봐야겠다고 마음 먹을 정도였다.
그녀는 또 내 산수 숙제를 도와 주었고,
내가 공원에서 잡은 다람쥐에게 과일이나 땅콩을 먹이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우리들이 애지중지 하던 카나리아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즉시 '안내를 부탁합니다' 를 불러
이 슬픈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 뒤 어른들이 흔히 아이들을 달랠 때
하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하며 온가족에게 기쁨을 선사하던 새가
어떻게 한낱 깃털 뭉치로 변해 새장바닥에서 숨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조용히 말했다.
「 폴, 죽어서도 노래 부를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
왠지 나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또 전화기에 매달렸다.
「 안냅니다. 」
이제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 픽스라는 말을 어떻게 쓰죠? 」
내가 물었다.
「 무언가를 고친다는 뜻 말이죠? 에프 아이 엑스예요. 」
바로 그때 언제나 나를 골려 주기 좋아하던 누나가
층계에서 나를 향해 뛰어내리며, '왁'하고 소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 수화기를 쥔 채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바람에 수화기는 뿌리째 전화통에서 뽑히고 말았다.
우리는 둘 다 겁에 질렸다. '안내를 부탁합니다' 의 음성이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수화기 코드를
뽑아내어 혹시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았나 걱정되었다.
얼마후 한 남자가 현관에 나타났다.
「 난 전화 수리공이야. 저 아래서 일하고 있는데
교환수가 부르더니 이 집 전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가 보라고 하더라 무슨 일 있었니? 」
나는 그에게 조금 전의 일을 이야기 했다.
「 아, 뭐 그런건 짬깐이면 고칠 수 있어 」
그는 내게서 수화기를 받아 들고는 전화통을 열었다.
얽히고 설킨 전선과 코일이 드러났다.
그는 끊어진 전화코드를 잡고 조그만 드러아버로 잠시
만지작 거리더니, 이윽고 수화기를 한 두 번 두드린 뒤
전화에 대고 말했다.
「 여어, 나 피터야. 105번전화는 이제 괜찮아.
누나가 겁주는 바람에 애가 놀라서 수화기 코드를 뽑았더군 」
그는 수화기를 걸고는 빙그레 웃으며
내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이 모든 일들은
북서 지방 태평양 연안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 내가 아홉 살이 되자, 우리는 대륙을 가로질러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그 때 나는 수화기 속의 내 가정교사를
얼마나 그리워 했는지..... 물론 새로 이사 온 집에도 전화기는
있었다. 그러나 '안내를 부탁합니다' 는 어디까지나 두고온
고향의 낡은 나무 상자 속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응접실의 작은 테이블에 놓인
번쩍번쩍 빛나는 새 전화기는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십대로 접어들면서도, 어린 시절
그 사람과 나눈 대화의 추억은 결코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간혹 어려운 문제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그 옛날
'안내를 부탁합니다' 에게 물어 올바른 해답을 얻었을 때
안도감이 생각나 나는 그녀와 헤어졌음을 못내 아쉬워 했다.
이제는 나도 알 것 같았다. - 얼굴도 모르는 꼬마 소년에게
자기의 귀중한 시간을 내준 그녀는 얼마나 참을성 있고 친절하며이해심이 깊었던 사람인가!
몇 년 뒤, 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서부의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공중전화로 누나와 이야기를 나우었다. 누나는 이제 결혼하여
그 곳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무얼 말하는지도 분명히 모르면서,
어느덧 나는 고향 마을의 전화국을 말하고 있었다.
「 '안내를 부탁합니다' 」
흡사 기적과도 같이
너무도 귀에 익은 저 가깝고도 또렷한 음성이 들려 왔다.
「 안냅니다. 」
애당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 저, '픽스' 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주시겠어요? 」
오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 아마 지금쯤은 ...... 」
'안내를 부탁합니다'는 말했다.
「 ....... 손가락이 나았겠지요? 」
「 정말 아직도 계시는군요. 하지만 모르실 걸요.
그 오랜 세월동안 당신이 제게 얼마나 귀중한 분이었는지.... 」
「 당신이야말로 」
그녀는 대답했다.
「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알고 있나요?
나는 평생 아이를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늘 당신의 전화를 기다리곤 했답니다. 우습죠? 이런 얘기 」
결코 우습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가를 말하고
1학기가 끝나고 다시 누나를 만나러 올 때
전화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 부디 그렇게 해줘요. 그냥 샐리라고 불러요. 」
「 안녕히 계세요, 샐리 」
'안내를 부탁합니다' 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 혹시 다람쥐를 만나면 과일과 땅콩을 먹으라고 말해주겠어
요. 」
「 그렇게 해요. 」
그녀는 말했다.
「 그리고 머지 않아 오리노코 강에 가봐야겠지요! 그럼 잘가요. 」
석달 뒤, 나는 다시 시애틀 공항에 내려 전화를 걸었다.
「 안냅니다. 」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샐리를 바꿔달라고 했다.
「 친구분이신가요? 」
「 그렇습니다. 」
「 그러시다면 유감이지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샐리씨는 병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잠깐씩만 일하셨습니다.
그 분은 한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내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그녀는 물었다.
「 짬깐 폴 빌라드 씨가 아닌가요? 」
「 그렇습니다. 」
「 그러시다면 샐리씨가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편지지에 적어 놓으셨지요. 」
나는 물었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 여기 있군요 읽어 드리겠습니다.
- 그에게 말해 줘요.
죽어서도 노래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있다고.
그는 내 말뜻을 이해할 거예요.... 」
『폴 빌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