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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쓸데없이 깁니다.
하지만 영양가도 없고, 엉성하고, 바람만 가득차있는 풍선이나 다를바 없으니, 아주 재빠르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밑으로 쭉내려가면 (여기서부터입니다.) 라고 쓴 대목이 있습니다. 거기랑 맨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리고 댓글.
사실 이 글이 좀 엉성해 보이기도 할 것인데,
약간 일부로 그렇게 쓴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제가 개념어를 많이 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개념어를 많이 넣어야 깔끔하고 일목요연한 글이 되는데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개념어를 안쓴다는 말은 직관에 해당되는 언어를 더 쓰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말이 길어지고 지저분해지는거죠. 왜 그러한지는 계속 읽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접근법은 나름대로의 근거와 이론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여기다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 아주 깔끔한 표현으로 한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굉장히 길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초스피드로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어쩌면 너무 엉성해서 이게 글인가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다음은 심리학 갤러리에서 뽑아온 글입니다. (기준 = 아무거나 좀 긴거)
타자의 글을 가지고, 언어를 어떻게 취급하고, 어떻게 분석하는지, 제 나름의 접근법을 써보겠습니다.
[제목 :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보거나 객관적인 자기 모습을 봐야하는 상황이 오면
미치게 힘들다.
화가 나지.
그동안 내가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서 자책하고 후회하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상대에게 미안하고.
올 해 들어
반면교사를 할 일이 굉장히 많았는데,
이런 일을 겪을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기분 정말 더럽다.
내가 ㅄ이긴 ㅄ이구나.
반면교사 덕분에
올해들어 고쳐진 게 꽤 많긴 한데 힘들지 많이.
역시..
나와 비슷한 상대방을 보거나
내가 겪었던 비슷한 상황을 누군가가 재현하고 있는 상황을 보는 것 만큼
인지도식을 바꾸는 데 효과적인 게 없는 것 같다.]
일단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정독해서 읽지 않았습니다. 한자한자 읽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차근차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전제가 뭐고 결론이 뭔지도 보지 않았습니다. 용어가 뭔지도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뭘 봤을까요?
저는 오브제를 봤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상대가 쓴 언어를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건 실제 오브제를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브제가 엮이는 과정 하나하나를 시뮬레이션 그리듯 보려고 했습니다.
글은 다음과 같이 분석됩니다.
실제 오브제 = 자기 자신, 자기 자신과 비슷한 사람
몸(인지)
(이는 곧 설명하겠습니다. 왜 관계 및 동사 같은 것들이 인지에 포함되는지, 저는 오브제만 세계이고 나머지는 인간의 '개입'이라고 봅니다.)
관계
상황 = 자기와 자기비슷한 사람이 마주친 상황
느낌 및 내적 상황 = 화남, 지난 날 회상, 후회, 상대에 대한 회상, 미안함. 더러움. 자책. (죽고싶을정도로 창피한 기분까지 갔을 듯)
깨달음 = 나의 인지도식을 바꾸는데는, 반면교사가 좋은 것 같다.
글이 쉬워서인지 금방 분석이 됩니다.
근데 저는 실제로 위 글을 볼 때,
오브제와 제 인지가 두 공간으로 나눠서 섞이는 것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봤습니다.
가령 '자신과 자신과 비슷한 사람'은 오브제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머지 모두는 '오브제에 기생'하는 것입니다. (오브제 위에서만 성립되는)
저는 다른 것은 다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즉, 오브제가 언급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그의 초점이 잡히지 않았을 뿐이지, 오브제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순간 망각되었을 뿐)
마찬가지로 오브제가 언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감정표현'이 계속 나온다 해도, 그것은 오브제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나는 그것을 본 다음) 더러워. 죽고싶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괄호를 발화에서 생략한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오브제가 없느냐?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패턴화가 됩니다.
그리고 차라리 패턴화시키는 게 낫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성가시기 때문이죠.
여러분 장난 한번 쳐보실래요?
지금 제가 '그리고 이는 패턴화가 됩니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 어떤 문장이 생략되어있을까요?
그걸 찾는 방식은 오브제부터 찾으면 됩니다. (실제 오브제 입니다. 언어 아니어도 찾을 수 있는)
그것은 '저'입니다.
'나'라는 오브제가 있고, '나'라는 오브제가 지금 저런 말을 짓껄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를 문장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즉) 이는 패턴화가 됩니다 (라고 생각해본다)
보시면 알겠지만 ()괄호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저는 단순하게 "이는 패턴화가 됩니다"라고 말했지만, 여기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라는 문장이 생략되어있고,
사실 이는 더 분명하게 표시하면 (내가 보고 나름대로 느끼고 생각해보았을 때, 이를 이렇게 생각해본다)라는 문장이 생략되어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저 생략된 것을 다 밝히는 게 좋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것이 자연스런 인지과정이기 때문이죠.
그러면 우리는 '생략된 것이 무엇인가?'정도만 찾아놓은다음, 코기토로서 참조점만 만들어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생략하더라도, '아 이게 생략되었겠지?'하고 자각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급적, 언어 전체를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다 읽지 않아도, 오브제만 찾아내도 나머지는 대강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너무 세밀하게 디테일하게 '사고의 조직'을 짜버린 사람의 글이라면, 어쩔 수 없이 좀 집중해서 읽어야겠지만,
만일 그가 어떤 식으로 '가공'할지를 대강 알게 된다면, 또 역시 길게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 재료-가공 으로 보는 게 편합니다. 기분까지 포함한)
또 하나의 글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역시 심리학갤러리에서 가져왔습니다.
[제목 : 작가의 필력은 '대화체를 얼마나 매끄럽고 유려하게 연결하느냐'에 따라서 갈림
대부분의 작가들은 대화체를 사용할 때에 있어서 그들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심상을 표현하고자 노력하는데, 내면세계의 표현을 외화시킨다는건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것을 현실으로 만들어낸다는걸 의미함.
작가 자신의 정신세계가 불안정하면 불안정할 수록, 이러한 내면세계는 왜곡되어 표현되기 마련인데, 이것이 단순한 묘사에 그치는 경우라면 외부와의 침단으로 일어나는 왜곡 현상은 최소한으로 줄어들 수 있으며, 그러한 왜곡된 세계가 독자에게 있어서는 어느 정도 매력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이 또한 부정적 현실이라 묘사할 수는 없음.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왜곡되는 세계가 문제가 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일임.
대표적인 경우가 대화체를 사용하는 경우인데, 작가의 내면 심리가 불안정하면 불안정할 수록 그 자체는 기괴하게 왜곡되고,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괴기스럽고 기묘한 단락 단락 화제의 누락이 나타나는, 말 그대로 '이상한' 스토리가 나타나게 되어버림.
등장인물이 펼치는 대화가 일반인의 무엇과 괴리되어 있다, 즉 이 소설의 대화는 인간을 등장인물로써 차용하지 않는다... 라는것은 곧 작가 자신이 정신병자라는 사실을 반증하는것이나 다름 없음.
아무리 괴기스러운 세계를 묘사한다 할지라도 인간과 인간과의, 즉 생명체와 생명체와의 대립 구도나 소통 방식은 그 대상이 인간인 이상 인간의 이해 범위를 초월해서는 안되는 법인데, 글쓴이가 인간의 가치 체계와 유리된 그 무엇도 아닌 존재라면,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독자들과도 유리된 괴기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음...
이들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기에 문학이라 불릴수 없으며,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없기에 소통의 도구 또한 되지 못함...
결국 그 자신의 망상의 아집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곧 그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라는것과 마찬가지이기에 그들 자신은 매우 큰 고통에서 번민하게 됨.]
이 글은 좀 복잡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글도 오브제를 취급하면 됩니다.
근데, 이 글에서 오브제를 취급할때 다음의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1. 작가
2. 작품
3. 내적세계
즉, 이것이 제시되어있는 오브제들입니다.
그래서 작가가 작품세계를 만드는데 내적세계가 투영된다, 라는 것이, 이 발화자가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하나 따라가면, 대개 그런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실제로 어떻게 읽으셨나요? 이 발화자의 의도가 뭔지, 진짜 실제로 현실은 뭔지, 를 생각하며 읽으셨습니까?
그게 맞다는 보장은 어딨습니까?
저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읽었습니다.
이 글은 좀 못 쓴 글입니다. 왜냐하면 오브제가 명시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죠.
즉 발화자는 지금 자신이 '어떤 오브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전혀 언급없이, 어떤 특정한 작품을 말하고 있는데, (아마 그가 보고 자극받았던)
안타까운 것은, 그 작가가 도대체 '어떤작가'를 일컫는지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 답답해집니다. 첫째로 오브제로 두는 작가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모호해집니다.) 둘째로 발화자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이 글을 이해했다고 말해선 안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전혀 엉뚱한 이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면, 여러분들은 이 발화자가 발화하는 것에서, 여러분들이 멋대로 '혹시 그거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정하여,
여러분들의 '기억에 있는 오브제'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기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 글을 해석했다기 보단, 여러분의 기억을 해석했다고 보는 게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 자체가 어떤 오브제를 겨냥하는지 명시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 글은 독해를 할 수 없는 글입니다. (발화자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도 전혀 추리해볼 수 없기 때문이죠. 기껏해야 추측인데 그건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또한 독해를 해서는 안되는 글입니다. 무조건 '기억을 해석'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죠. (해당 오브제가 아닌)
그러니 해석은 정확히 별다른 제시가 없으면 '오브제-해석'으로 이뤄지는 게 정석입니다.
이 글은 정말 못쓴 글입니다.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남겨두면 도대체 독자는 뭘 읽어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는 기껏해야 자기 감정의 스트립쇼 밖에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만 보일 뿐이지 무엇에 반응했는지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의 반응을 궁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정밀하게 의도를 분석해야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 이 경우 우리에게 오브제는 '발화자'밖에 없습니다. 그 발화자가 언급하는 '작가'가 어떤 오브제인지 분명히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죠
(이 때 오브제는 언어에서 제시되는 명사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 내에서 진짜로 참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싸이나 김장훈 처럼)
그리고 잠깐 언급하자면, 이 글에는 오브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발화자'입니다. 발화자 역시 오브제 입니다. 이제 '발화자(오브제)가 어떤 작가(오브제)를 염두에 두면서,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 '기준과 범위'가 있다면, 그 발화자가 그 작가를 염두에 둔 만큼, 그 발화자의 세계관 만큼만 범위가 한정지어 집니다.
가령, 위에 '반면교사'를 했던 발화자가 이 '작가'의 작품을 보면 뭐라고 할까요?
억지로 대입시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아 이 작품은 나의 과거를 비춘다. 더럽고 병신같은 ...." 대략 이렇게 되겠죠?
하지만 이로 인해, '발화자(발화 내에서 작가 및 작품을 해석하는)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결국 '발화자의 수준'에 따라서도, 발화의 범위 및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자의 글을 인용하면, 나도 타자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지금 제가 타자의 발화를 분석하듯이, 저 역시 여러분들에겐 '타자'일테니, 저도 분석해보세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엔 증권 찌라시를 봅시다.
[제목 : 코스닥, 상승 출발 후 하락 반전…2p↓]
상승 출발한 코스닥 지수가 곧바로 하락 전환했다.
26일 오전 9시 20분 현재 코스닥 지수는 전날보다 2.00포인트(0.39%) 내린 516.25를 기록하고 있다.
전날 뉴욕 증시는 미국 경제지표가 양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이 임박했다는 루머가 떠돌면서 소폭 상승에 그쳤다. 유럽 증시는 영국의 국내총생산(GDP)이 반등했으나 미국 기업들의 실적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서 혼조세로 마감했다.
IBK투자증권은 글로벌 경제지표가 바닥을 통과해 소폭 개선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기업 실적에 대한 부담이 긍정적 요인을 상쇄하면서 등락을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 초반 외국인 투자자들이 전날에 이어 매도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외국인과 기관은 각각 34억원, 7억원을 순매도하고 있다. 개인 투자자는 47억원을 순매수하고 있다.
이날 코스닥 시장에서는 장 초반 외국인 투자자들이 전날에 이어 매도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외국인과 기관은 각각 34억원, 7억원을 순매도하고 있다. 개인 투자자는 47억원을 순매수하고 있다.
업종별로 건설, 운송, 종이·목재, 일반전기전자, 정보기기 등이 강세다. 디지털컨텐츠, 반도체, 통신서비스, IT, 제조 등은 약세를 보이고 있다.
시가총액 상위 종목에서는 에스엠, GS홈쇼핑,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안랩, 메디포스트 등이 상승세다. 셀트리온, CJ오쇼핑, 서울반도체, 다음, SK브로드밴드, 젬백스 등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역시 이것도
발화자 (오브제)
발화자가 오브제로 삼은 것 (이는 상상력을 넣어도 됩니다)
= 코스닥, 뉴욕증시, 미국, 유럽, 국내, IBK투자증권, 개인투자자, 외국인 투자자, 업종별(이하 생략)
결국 이 오브제에 대한 해석이 뭘까요? 거의 공간적 수직관계에 해당합니다. (어쩌면 제가 요점 뽑는것은 거의 드래그 수준입니다.)
코스닥이 전날 보다 하강했고,
뉴욕증시는 소폭상승 (경제지표 양호 했으나, 루머가 돌면서) (물론 이것때문에만 그랬냐만은)
유럽증시는 영국이 반등했으나, 미국 기업 탓에 혼조세 마감
IBK투자증권는 등락을 이룰 것이라고 전망 (이유는 위에 있음)
이하 생략,
그리고 이를 '사실'로 파악하는 것은 안될 말입니다.
왜?
이는 발화자가 오브제를 각각 취급한 방식으로만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걸로 금융이 보이시나요? 아닐 겁니다.
단지 어떤 발화자가 오브제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만, 각각의 오브제들을 분류한 것으로 알아볼 수 있게 정리되었을 뿐입니다.
즉 이 발화자는 '코스닥, 뉴욕증시, 유럽증시, IBK투자증권,'의 움직임을 봤고, 그 다음 투자자의 움직임을 봤을 뿐이고, 그것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이것 역시 '오브제에 대한 해석'이라는 얘기죠.
실제로 여기에는 환유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IBK투자증권이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입니까?
아니라는 거죠. IBK투자증권이라는 회사를 대표하는 것이죠.
만약 제가 IBK투자증권에 전화를 걸면 누가 받을까요? 거기 직원이 받겠죠? 저는 이렇게 말할겁니다.
나: "거기가 IBK투자증권 인가요?"
직원 : "네 그렇습니다."
나 : "아니 그쪽 이름이 IBK투자증권 이에요? ㅋㅋ"
직원 : " 아 저는 상담원 ㅇㅇㅇ 이구요. 여기 회사가 IBK투자증권이죠."
나 : "아니 근데 아까 제가 IBK투자증권이냐고 했을 땐, 네 그렇다면서요."
직원 : "아 그건 여기가 그렇다는 거죠."
나 : "아니 그러면 거기 이름이 IBK투자증권이에요? 거기 공간 아니에요? 터 위에 건물 지었잖아요? 그 건물 시멘트로 만든거 아니에요.
대략,
물론 진짜 저렇게 전화하면 답답한 사람이 되겠죠.
하지만 IBK투자증권라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고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이를 생각해본적이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분석해봅시다.
역시 증권 찌라시입니다.
[제목 : "요즘 대세 '싸이' 덕에 '돈' 좀 벌고 싶다면"]
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농심 블랙신컵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후후 딱 4회 불고 삼성 지펠냉장고에서 꺼낸 김치와 함께 먹는다. 전국 어디서나 빵빵 터지는 LG유플러스의 LTE폰으로 친구와 약속을 잡고 LG패션 남성복 질스튜어트뉴욕을 걸친다. 오늘밤은 놀부보쌈에서 하이트진로 참이슬을. 물론 숙취를 위해서 CJ제일제당의 컨디션도 잊지 말아야지'
요즘 TV를 켜면 온통 싸이다. 음악이나 예능방송을 넘어 광고에 이어 뉴스까지 경계를 뛰어넘고 있다. '동양인 최초' 영국음반 차트 1위에 이어 미국 빌보드차트 1위가 기대되는 만큼 손짓 발짓 하나 관심의 대상이다.
주식시장에서도 지난달부터 싸이 열풍이 불고 있다. 싸이의 아버지가 대주주로 있는 코스닥업체 디아이는 한달 가량 상한가 행진을 기록했다. 공교육 테마주로 꼽히던 이스타코는 미디어사업이 주목받으며 '싸이테마주'로 이름을 바꾸고 주가가 2배나 올랐다.
그의 소속사인 와이지엔터테인먼트를 시작으로 '한류'를 이끌 엔터테인먼트주에 대해 새롭게 재평가를 해야한다는 분석도 등장했다. 싸이로 인해 늘어난 시가총액이 1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열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 16일 디아이, 이스타코는 하루새 주가가 곧두박질했다. 와이지도 2일 10만6900원에서 7만5000원까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싸이효과' 상승분을 대부분 반납했다.
실체가 없는 '싸이효과'에 집중하기보다 기업의 실적과 향후 사업전망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싸이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기업은 일단 마케팅 측면에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신라면블랙으로 올초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빈축을 샀던 농심은 싸이를 모델로 제품 이미지 변신을 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재빨리 오브제를 찾읍시다.
발화자
싸이
와이지, 디아이, 씨제이,
농심, 삼성 지펠, 엘지 폰, 질스튜어트뉴욕, 놀부보쌈, 하이트진로-참이슬, 컨디션
오브제에 기생하는 관계를 엮어서 한방에 처리해봅시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이 기사를 더 잘쓸 것 같습니다.
요점
싸이가 광고에 한창이다 (농심, ~~~~~ 컨디션)
주식시장에도 수직상승 (디아이 ~ 이스타코)
와이지 재평가 ~~~ 1조 ~~~
그러나
싸이효과 내려간듯?
폭락
깨달음
실체 없는 싸이효과보다는 기업의 실적과 향후 전망을 봐야되지 않겠나.
아마 더 빨리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싸이를 잡고, 나머지는 다 건물이니 건너뛰고, 주식시장도 건너뛰고,
싸이를 활동으로 봅니다. 마치 머리속에 스냅샷 5장을 동시에 투척하듯 광고 찍는 싸이를 그린 다음,
건물-주식시장이 수직장승하는 것을 그립니다.
그리고 곧 싸이-주식 폭락하고,
곧바로 깨달음의 모드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이 어디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는 발화자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발화자의 머릿속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리 공적인것처럼 가장해도)
즉, 이는 발화자가 싸이와 싸이와 관계된 기업, 주식시장, 등의 오브제를 보면서, 나름의 관계를,
오브제-몸
(외부) (내부)
이런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름의 자기 기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한자한자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 글도 마찬가집니다. 그냥 건너뛰세요. 오브제만 보세요. 그리고 오브제에 어떤 식의 관계가 가능할지만 추측해보세요. 그것만 해도 될겁니다.
(어쩌면 제가 제약하는 것을 넘어서, 더 풍성한 세계를 참조하는 게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제가 쓴 글은 딱 제가 본 만큼만 나오니까요.)
이번엔 진짜 마지막 글입니다.
어려운 걸로 가봅시다.
(어렵다고 써놓았긴 했는데 막상 어렵진 않습니다. 차라리 다른 이유로 어렵습니다. 오브제를 보지 못했다는 것)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저는 전혀 미술에 대해서 모르며, 현대미술은 더더욱 모릅니다.)
[[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4) 탈회화적 추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81802015&code=960202
“워홀의 팝아트에 맞서라” 60년대 추상주의의 ‘차가운 진화’
“추상표현주의는 특정한 예술 스타일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다른 예술 스타일들처럼 거기에도 상승기가 있었고 몰락기가 있었다. 중요성을 갖는 예술을 생산한 후, 그것은 화파가 되고 화법이 되더니 결국 매너리즘에 빠져 버렸다. 추상표현주의의 리더들은 많은 모방자를 끌어 모았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리고 그 리더들 중 몇몇은 자신을 모방하게까지 되었다. 회화적 추상은 유행이 되었다가 이제는 한물 가 버렸다.”
■ 두 개의 대안
이것이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묘사하는 1960년대 초반 미국 미술계의 상황이다. 정체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추상표현주의를 대체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사실 1960년대에는 이미 그 대안이 존재했다. 바로 앤디 워홀의 팝아트다. 하지만 팝아트는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거기에는 먼로가 있고 엘비스가 있고 재클린이 있으며 캠벨 수프 깡통과 브릴로 세제 박스가 있다. 하지만 그린버그는 팝아트를 “또 다른 유행”으로 폄하한다.
그린버그는 왜 팝아트를 못마땅하게 여겼을까? 이유가 있다. 모더니즘의 강령에 따르면 현대회화는 자연의 재현을 포기하고 회화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팝아트는 명백히 재현의 예술이다. 거기에는 구상이, 말하자면 대중에게 친숙한 스타와 상품들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린버그와 같은 모더니스트의 눈에는 이처럼 구상이 다시 등장한 것이 진화의 순서를 거슬러 ‘모던 이전’(premodern)으로 돌아가는 퇴행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의 대안 역시 추상예술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린버그는 1964년 뉴욕에서 ‘탈(脫)회화적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조직한다. 이 전시회에는 프랭크 스텔라, 모리스 루이스, 케네스 놀랜드, 헬렌 프랑켄탈러, 엘스워스 켈리 등 당시 미국과 캐나다에서 막 떠오르는 추상 화가들이 참여했다. 그린버그는 이들의 작품이야말로 팝아트와 달리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라 주장했다.]
너무 기니까 여기까지만 뽑아보겠습니다.
오브제를 뽑아봅시다.
발화자 (진중권)
발화자가 오브제로 취급한 것
추상표현주의 취급되는 예술작품들(및 화가들), 워홀(팝아트) 그린버그(비평가)
관계
추상표현주의가 상승점을 찍었다가 매너리즘에 빠져 몰락했다는 것 (오브제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머리속에 오브제부터 떠올려야 합니다.)
그린버그는 워홀 및 팝아트를 폄하했고 추상표현주의를 대체할 것을 찾으려 했다는 점, 전시회를 조직함
쩝.
이것만으론 충분치 않군요. 아예 원문을 갖다붙입니다.
■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같은 추상이라도 이들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잭슨 폴록이나 드 쿠닝의 추상이 뜨겁다면 새로운 추상은 무엇보다도 차갑다. 이 차이를 그린버그는 ‘선적인’(linear) 것과 ‘회화적인’(malerisch) 것의 대조로 설명한다. 미술사가 뵐플린은 이 개념 쌍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회화의 차이를 특징지은 바 있다. 즉 르네상스 회화는 선적이어서 윤곽이 뚜렷한 반면, 바로크 회화는 색채의 효과를 위해 윤곽의 명료함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선적’ 회화는 윤곽선이 끊어지지 않아 경계가 뚜렷하며 색채 또한 채도가 높아 명료하다. 반면 ‘회화적’인 작품은 거친 붓질 속에 윤곽선이 흐르다 끊기며 색채 역시 채도가 낮아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폴록과 드 쿠닝의 추상표현주의가 ‘회화적’(painterly)이라면 그 뒤를 잇는 새로운 추상, 즉 ‘탈회화적’(post-painterly) 추상은 경계가 뚜렷하고 색채가 명료한 ‘선적’ 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작위의 환영효과라 할까? 사실 폴록의 화면에는 여전히 공간감(우주공간?)이 느껴진다. 회화 이후의 추상은 이 최소한의 환영마저 없애려고 기하학적 규칙성을 도입한다. 이 결과 ‘그림’보다는 차라리 ‘간판’에 가까워진다. 폴록이나 뒤뷔페가 임파스토(두꺼운 물감칠)를 사용한다면, 탈회화적 추상은 화면에 아크릴을 얇고 평평하게 바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묽게 희석한 물감을 화면 위로 흥건하게 흘리기도 한다.
■ 연속과 단절
탈회화적 추상은 추상표현주의보다 더 평면적이다. 그것은 전통적 의미에서 회화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회화’가 화면에 물감을 칠하는 행위(painting)라면, 탈회화적 추상은 화면 위로 희석한 물감을 흘리는 자국 남기기(staining)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화가의 체취가 느껴지는 거친 터치(touch)를 통해 감동을 주는(touch) 작품이 아니라, 차라리 간판이나 인쇄물 같은 익명적, 비인격적 제작물로 느껴진다.
1950년대의 회화적 추상과 1960년대의 탈회화적 추상 사이에는 이런 ‘단절’이 존재한다. 하지만 탈회화적 추상은 동시에 회화적 추상의 ‘연속’이기도 하다. 왜? 그린버그에 따르면 회화에서 모더니즘이란 결국 화면에서 공간의 깊이를 몰아내고 평면성으로 나아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탈회화적 추상은 그 어떤 공간의 환영도 남기지 않고 화면 자체도 매끄럽다. 그것은 여전히 평면성을 향한 모더니즘 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다.
회화적 추상과 탈회화적 추상을 이어주는 또 다른 요소는 디자인의 개방성이다. 가령 폴록의 작품은 화면이 사방으로 무한히 연장돼도 괜찮을 것처럼 보인다. 페기 구겐하임의 저택에 그림을 걸 때 벽면이 모자라는 바람에 그림을 잘라내는 일도 있었다. 탈회화적 추상 역시 어떤 거대한 패턴의 일부를 뭉텅 잘라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하여 그림이 안으로 완결되지 않고 밖으로 연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 물리적 명료함과 개방성
이제 왜 그린버그가 탈회화적 추상을 “현대미술의 진화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린버그가 찾던 것은 결국 생명력이 다한 추상표현주의를 대신하여 모더니즘을 계속 추진해 나갈 예술적 대안이었다. 그 대안은 추상표현주의와 확연히 단절하면서도(“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 동시에 평면성을 향한 추상표현주의의 유업을 이어가야 한다(“현대미술의 진화”). 탈회화적 추상은 이 두 조건을 만족시켜준다.
그린버그는 탈회화적 추상의 특징으로 “선적 명료성”과 “물리적 개방성”을 든다. “명료성”이란 물론 추상표현주의의 ‘회화적’(malerisch) 특성과 대조되는 탈회화적 추상의 선적(linear) 성격을 말한다. ‘개방성’은 회화적 추상과 탈회화적 추상이 공유하는 특성을 가리킨다. 두 흐름은 관계주의(형태와 배경 사이의 적절한 미적 관계)를 배제하고 이미지가 화면의 사방으로 연장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공통성이 있다.
이 점이 또한 탈회화적 추상을 1920~30년대 유럽의 추상회화와 구별하기도 한다. 몬드리안과 바우하우스를 생각해 보라. 그들의 작품 역시 평면적 실루엣과 확고한 윤곽을 가진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추상에는 여전히 ‘관계주의’가 지배적이어서 프레임 안에 기하학적 도형이 들어 있고, 형태와 프레임이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탈회화적 추상에서는 이 비례의 관계가 사라진다.
■ 부드러움에서 딱딱함을
돌이켜 보면 세계대전 이전에는 ‘추상’이라고 하면 주로 종합적 입체주의에서 갈려나온 기하학적 추상을 가리켰다. “깔끔한 드로잉, 부드러운 색칠, 명료한 윤곽, 평면적이고 명확한 색채.” 이것이 추상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하지만 폴록과 뒤뷔페는 임파스토, 드리핑과 거친 브러시워크로 추상을 ‘회화’적 효과와 결합시켰다. 당대인의 눈에 이런 결합은 모순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는 회화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이미 상황이 달랐다. 진 데이비스의 회상이다. “1957, 58년 추상표현주의와 회화적 추상은 도처에서 지배적이었다. 모든 예술대학이 드 쿠닝과 폴록과 클라인의 것과 같은 작품들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관학적인(academic) 것으로 보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제 몫을 다했고, 우리는 어디론가 가야 했다. 그 반대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회화성(painterliness)에서 벗어나 깔끔해져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쟁 전 유럽의 기하학적 추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탈회화적 추상은 “회화적 추상 자체 내에서, 즉 (…) 뉴먼, 로스코, (…) 심지어 폴록의 작품 내에서 시작됐다.” 아마도 뉴먼과 로스코가 회화적 추상과 탈회화적 추상을 잇는 가교였을 것이다. 뜨거운 열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여전히 추상표현주의의 틀 내에 있으나 정작 그들의 화면은 기하학적 추상처럼 차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하드에지와 색면추상
탈회화적 추상은 몬드리안, 말레비치, 혹은 바우하우스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것은 추상표현주의의 부드러움에서 딱딱함을 배웠다. 비행기의 연착륙과 경착륙을 생각해 보라. 추상표현주의의 화면은 전체가 균등하여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행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케네스 놀랜드의 화면을 보라. 하나의 색면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색면과 뚜렷이 구별되면서 날카로운 색채의 대비를 이룬다. 이를 ‘하드에지’(hard edge)라 부른다.
사실 ‘회화적 추상’이라 불리는 흐름에는 크게 세 가지 경향이 뒤섞여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하드에지다. 이 흐름은 수직선으로 화면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뉴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색면추상’(color-field painting)이다. 뉴먼 역시 회화를 구성이 아니라 색면으로 간주했지만, 색면 추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로스코로 보인다. 프랑켄탈러의 화면은 물론 로스코의 것보다 색채와 윤곽의 대조가 뚜렷하다.
마지막은 후에 ‘미니멀리즘’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모리스 루이스는 색면추상의 화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업에는 그와는 또 다른 경향이 숨어 있었다. 그는 화면에 희석한 옅은 물감을 부어 화포와 물감이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이는 화폭에 물감을 칠한다기보다는 차라리 화포를 염색하는 것에 가깝다. 이 경우 화포의 거친 텍스처가 그대로 드러나 작품은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물처럼 느껴지게 된다.
■ 미니멀리즘과 팝아트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랭크 스텔라다. 이 “범례적인(paradigmatic) 탈회화적 화가”(어빙 샌들러의 표현)는 회화를 그림이 아니라 “오브제”(object)로 간주한다. 미니멀리즘의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셈이다. 그가 그림을 사물로 간주하는 것은 물론 회화에서 환영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림이 그림인 한, 아무리 추상적이어도 거기에는 모종의 공간감이 남을 수밖에 없다. 환영효과를 피하려면 그림은 아예 사물이 되어야 한다.
텅 빈 배경에 붉은 삼각형과 하얀 동그라미만 그려 넣어도, 우리는 거기서 공간을 느낀다. 이를 피하려면 형태만 남기고 배경을 없애야 한다. 이를 위해 스텔라는 캔버스를 형태와 똑같은 모양으로 잘라낸다. 이를 ‘세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라 부른다. 스텔라 외에도 케네스 놀랜드 등 몇몇 탈회화적 추상화가들이 세이프를 사용하곤 했다. 원조는 뉴먼이 아닐까? 그는 수직선(‘지퍼’)을 그리는 데에 같은 모양의 캔버스를 사용한 바 있다.
그린버그는 점점 막강해지는 팝아트의 위력에 탈회화적 추상으로 맞서려 했다. “아무리 팝아트가 재미있어도,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게 참신하지 않다. 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취향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는 그것은 취향의 역사에서 새로운 에피소드일지는 몰라도, 현대미술의 진화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는 아니다.” 그가 보기에 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는 역시 탈회화적 추상이다. 여기서 모더니스트의 고집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탈회화적 추상과 팝아트 사이에도 유사성이 존재한다. 가령 화가의 제스처를 지우고 생산의 익명성을 지향한다는 점, 인쇄한 것처럼 매끈한 표면을 가졌다는 점(이는 레오 스타인벡이 말한 ‘평판화면’을 연상시킨다), 공간의 깊이를 지우기 위해 평면성을 지향한다는 점(팝아트는 아예 평면적 사물, 즉 사진이나 만화를 그렸다), 스텔라의 경우처럼 종종 시리얼한 제작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시리얼 제작은 수공업과 다른 공업생산의 특징이다). 이는 탈회화적 추상이 팝아트와 공유하는 특성이다.
비록 추상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팝아트도 탈회화적이었다. 아마 그것이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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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모든 글들은 오브제에 대한 기술로서 이뤄져 있습니다.
이 글이 어려운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글이 어려울까요? 글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뭐가 어렵냐면 여러분이 '참조할만한 세계'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왜?
이 글은 그 예술작품(오브제)들을 보면서 그 오브제에 대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발화자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요?
여러분들은 머리속에 오브제가 있습니까?
정말 글을 읽는다는 건 아마 이런 과정일 겁니다.
발화자(오브제)-발화자가 염두에 두는 오브제
이 때에
발화자는 툭툭 오브제를 지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브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느낌과 반응들입니다.
이 때에
여러분들이 발화자만 보고 있다면 (학교에서 이렇게 배우셨을 겁니다. 독서교육이 이런식이죠. 책 쭉 읽는 방법. 터무니 없는 교육입니다.)
여러분들은 발화자가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도, 그게 뭔지는 모를겁니다.
이 때 여러분들은 이렇게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발화자가 지시하는 오브제
여러분들은 곧바로 발화자를 건너띄고 그 오브제를 쳐다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머리속에 그 오브제가 어떻게 '또아리를 트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실제로 오브제를 접촉하고, 느끼고 있는 촉감을 근거로, (이제 이래야 적어도 어떻게 발화자와 차이나는지 알 수 있고, 참조할 수 있습니다. 즉, '어 나는 이렇게 보는데, 얘는 이렇게 보네? 그런데, 아 나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 할 수 있는 겁니다. 왜? 참조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지금 진중권(발화자)이 염두에 두는 오브제를 직접 건너뛰어서 접촉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기껏해야 '진중권-오브제' 이렇게, 실제로는 진중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면 기껏해야 언어가 환기시키는 것을 보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발화자가 기껏해야 뭐라고?
여러분들이 말할 때, 여러분들 말을 누가 시시때때로 필기한다고 해보세요. 여러분이 기껏해야 뭐라고?
역시 제가 지금 이렇게 글을 막 쓰지만, 제 글이 정말 가치가 있을까요? 제 글이 기껏해야 뭐라고? 저도 기껏해야 오브제를 기술하는 것 뿐인데요?
(게다가 제 코기토가 기껏해야 뭐라고? ... 여러분들은 제가 오브제를 접하고 느끼고 충동하고 그런 것들이 정말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느끼시나요?
전 정말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기쁨을 누리고 감정과 상상을 맘껏 누비세요. 저의 내면풍경에 관심 안가지셔도 되니까요.
제가 선생님도 아니고 교수님도 아니고 총장님도 아닙니다. 저한테 잘보인다 해봐야 제가 학점 줄것도 아니고 상 줄것도 아니고 취직 알아봐주는것도 아니에요. 여러분들 발전에 힘쓰시면 되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의도를 알아달라'는 강박증에 빠져있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론 너무 의도를 몰라주는 게 문제인게 아닌가, 균형이 어긋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해봅니다.)
어쨌건, 진중권님의 글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글로만 읽으면 이해 못합니다.
발화자가 오브제를 염두에 두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오브제를 보면 한번에 끝납니다.
뜨거움에서 추상으로
추상표현주의 대 탈회화적 추상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역시 각각 오브제로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어에 너무 구속받을 필요 없고, 그냥 진중권님이 그 오브제에서 그런 느낌을 받고, 그 표현을 써야겠다고 판단한 것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건, 발화자가 그렇게 판단했다는 사실 밖에 없습니다.)
추상표현주의 탈회화적 추상
뜨겁 차갑
회화적 (윤곽선 끊김) (색채-채도 낮고 혼란) 선적 (윤곽 뚜렷) (색채-채도 높고 명료)
임파스토 (두꺼운 물감칠) 아크릴 (평평 또는 묽게 희석한 물감 흘리기)
평면적 (회화라고 하기 어려움, ↑ 자국남기기) = 작품보다는 간판/인쇄물/제작물 같음
탈회화적 추상은 회화적 추상의 연속이기도 함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론 = 화면에서 공간의 깊이 몰아내고 평면성으로, 탈회화적 추상은 공간의 환영 남기지 않고, 화면이 매끄러움, (평면성을 향한)
디자인의 개방성 = 화면이 무한히 연장되도 괜찬흘 것 같음. 그림이 밖으로 연장되는 것처럼 보임. (안으로 완결되지 않고)
그린버그가 탈회화적 추상을 옹호한 이유
1. 추상표현주의와 단절 (새로운 에피소드
2. 평면성을 양한 유업을 이어감
그린버그가 탈회화적 추상의 특징이라고 든 것
1. 선적 명료성 (회화적 특성과 대조되는 선적 성격)
2. 물리적 개방성 (형태와 배경 사이의 관계를 배제하고 이미지가 화면의 사방으로 연장되는듯한 느낌)
이 1,2는 유럽의 추상회화와 구별된다.
몬드리안 = 평면실루엣/확고한 윤곽 (기하학적 추상) = 그러나 형태와 배경 사이의 관계가 지배적, 프레임 안에 기하학적 도형이 들어있음. 비례.
그러나 탈회화적 추상에서는 이 비례 관계가 사라짐 (다시 말해 집합이 구별된다는 소리)
그 다음은 거의 스토리입니다.
1. 세계대전 이전 '추상' = 기하학적 추상 (깔끔 드로잉, 부드러운 색칠, 명료한 윤곽, 평면적 명확한 색채)
2. 플록 = 드리핑, 브러시워크, (추상을 회화적 효과와 결합) = 당대에 이 결합은 모순 같았음.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회화의 혁명 같았음
(과학계나 예술계나 비슷함)
3. 1960 = 회화적 추상이 지배적. 예술대학이 플록과 같은 작품을 대량으로 찍어냄. 그런 분위기에서 추상표현주의는 아카데믹하게 보임.
이제 추상표현주의는 생명을 다했고, 다른 대안이 절실해짐. => 역발상, 회화성에서 벗어나 깔끔해져야 했다.
(진중권님의 표현방식은 역사적 기술 (시간/공간 언급'을 주로 하고 인용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취하지만 (거의 저널리즘식) 솔직히 그런건 객관적 뉘앙스에 불과하고, 우리가 알면 되는것은 오브제의 관계만 보면 됩니다.)
4. 이 상황은 전쟁전 기하학적 추상으로 가는 게 아님.
그린버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 "탈회화적 추상은 플록에서 시작, 뉴먼/로스코는 뜨거운 열광을 추구하나 그들의 화면은 기하학적 추상처럼 차갑게 느껴진다. (여러분들은 이런 글을 보면 화를 내야 합니다. 왜? 이것은 오브제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몸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발화자가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건 그 사람이 느끼는 것만 말하는 것이지, 우리는 느낄만한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느낄려면 우리가 오브제를 봐야됩니다. 그래서 이 글에는 화를내는 게 좋습니다. 우리는 단지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느꼈구나'라는 정도 밖에 알 길이 없습니다.
이는 예가 적절하지 못할 것 같지만, 성관계를 맺을때와 비슷합니다. '아...아...아'하고 느끼고, 자기는 느꼈다고 하는데, 상대방은요? 상대방은 그냥 그 사람이 느끼는 것만 봤을 뿐입니다. 정작 상대가 느끼는 것은 아니죠. 그가 느낄려면 오브제에 적절한 작용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위 글이 더 잘 설명될려면, 로스코가 뭘 추구했고, 뭐가 느껴졌고의 문제가 아니라, 로스코가 실제로 오브제를 어떻게 그렸고 만들었는지를 언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래도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지만, 적어도 '형태'들을 유추하여 상상속에서 조립을 할 수는 있습니다.)
이후,
탈회화적 추상의 기원
바우하웃 아님
추상표현주의의 부드러움에서 딱딱함 배움
비행기 연착륙과 경착륙 제시 (진중권님이 비행기 좋아한다는 건 유명하죠. 하지만 비행기 모르는 사람은 이 비유 알 수 없습니다. 전형적인, 발화자에게 편리한 비유이군요.)
케네스 놀랜드의 화면을 보라!
고 하지만, 이것을 여러분이 직접 오브제로 보지 않으면 말짱 꽝입니다.
(이하 설명이 대개 오브제에 대한 기술, 그 기술 및 느낌에 대한 발화자의 '판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오브제 없으면 이해 불가능입니다.)
밑은'하드엣지'를 설명합니다.
뭔진 몰라도 하나의 색면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색면과 구별되면서 대비를 이루는 것.
(http://cafe.naver.com/fineartsandlife/6575 참조하세요. 한번 보는 게 낫습니다. 언어 자체가 세계 및 오브제 기술이니까)
회화적 추상의 3가지 경향
1. 하드에지
2. 색면추상 (회화를 구성이 아닌 색면으로 간주, 색채와 윤곽의 대조가 뚜렷) (설명 들어봤자에요 오브제 한번 보세요.)
3. 미니멀리즘 (화면에 흐석한 옅은 물감을 부어 화포아 물감이 하나가 되게 함. 화포를 염색하는것에 가까움. 거친 텍스처가 드러남. 사물같음)
(물론 이 사물같음, 이라는 것은 진중권의 판단이라고 보는 게 낫습니다. 거의 모든 게 다 오브제 기술이고 오브제에 대한 판단입니다.)
(여기서부터입니다.)
구질구질하군요.
지긋지긋하기도 하구요.
객관적 뉘앙스, 공적인 뉘앙스, 뭔가 객관적이다고 주장하는듯한 뉘앙스에 속아 넘어가지 마셔야 합니다.
모든 글은 오브제에 대한 기술이고, 그 기술을 '회화적으로 하느냐, 자기 느낌에 치중해서 하느냐' 등등의 차이만 있을 뿐,
오브제에 대한 기술은 변치 않으니까요.
물론 여기엔 인지가 가해져서 분류를 한다거나 하는 등의 작업이 있습니다.
제가 '관계'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그것은 거의 포괄적인 말입니다. 아직 저도 구체적으로 정의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들은 있습니다. 인과, 비교, 구조, 집합-원소, 위계, 감각, 느낌, 회화, 등등
오브제를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은, 위에서 보냐 아래에서 보냐 등 각도가 수없이 많듯이, 아주 다양하고 많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글을 읽는 방식을 보시면,
그 글쓴이의 글자 하나하나를 그렇게 공들여서 읽지는 않는다는 걸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도 제 글을 공들여 읽지는 마세요. 제가 안쓰러울 겁니다.)
심지어,
저는 글쓴이가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읽고는 합니다.
아까 보셨듯이, 진중권님이 '차라리 사물에 가깝다'라고 할 때, 저는 그게 진중권님의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고 보고 넘어갑니다.
이런 것은 진중권님이 직접 명시하지 않은 것이니, 그게 주관적 판단인지, 학자들의 지배적인 의견인지는 알 길 없으나 (알아도 정말 필요없는 정보)
근본은 '오브제에 대한 것'이라는 거죠.
사실 어쩔 수 없이, 글을 좀 요점 잡느라, 하나하나 뽑아서 드래그를 했지만,
실제로 이 글을 쓸때의 저자의 입장은 이랬을 것입니다.
오브제를 봅니다.
그 오브제를 군으로 봅니다.
그래서 '추상표현주의, 탈회화, 회화' 이렇게 그룹(오브제)을 잡은 다음, 각각의 집단에서 대표적인 인물(오브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오브제)를 뽑아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가락'을 잡아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거의 스토리이고, 진중권식의 가락짜기에 해당합니다. 중간중간 곳곳에 그린버그가 등장하고, 몬드리안이 등장하고,
다 전부 진중권 '연출/각본/편집'에 의한, 공연 한편이 펼쳐지는 식입니다.
결국 위 글을 오브제-관계로 보면
저런 집단에 속하는 작품들을, 오브제로 취한 다음,
그것의 '역사, 특성'이 뭔지, 그것을 '뽑아내고,' 그것들을 엮어서 하나로 묶어놓은 식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저 글을 읽을 때, (이미 경험하셨겠지만)
오브제가 없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오브제를 갖추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저 글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거희 암호 수준입니다.)
특히 '하드에지'라는 것을 제가 링크를 걸어두었는데, 여러분이 머리속으로 상상하면 시간만 낭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발화자는 오브제를 보고 그대로 기술하고 있는데, 여러분 그 언어의 정체가 거기 있지 않습니까? 오브제에 대한 대응이지 않습니까?
(저는 상상, 고민, 성찰도 내면의 오브제에 반응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몸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눈이 앞을 향해있다는 것에 기원이 있다고 봅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는데,
이 글을 되게 쉽게 읽으실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저는 앞으로 문법/언어 교육도 좀 바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의 쓸데없는 독서교육방법, (뭔진 모르겠으나)
독서는 글자를 한자한자 읽는 게 아니라, 오브제를 잡아낸 다음 곧바로 오브제-관계를 잡아내는 거라는 점,
그리고 대개의 언어가 (거의 모든 언어가) 그렇게 오브제에 대한 기생으로 나온다는 것.
그리고 언어가 아무리 많이 있다 하여도
"개가 아이를 물었다"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얼마나 생략된 게 많냐는 겁니다.
여기엔 생략도 많고, 인간의 '주의'라는 인지적 특징도 있습니다. 이런 거 다 건너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를 고려한 새로운 기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뭐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실제로 오브제를 보며, 오브제를 이해한다는 것이죠. (오브제 망각에 빠져선 안됩니다.)
실제로 글/언어는 쓰여진 언어를 보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쓰여진 언어에서 '접촉되었다고 여겨지는' 그 오브제를 찾고,
재빨리 그 오브제로 날아가서, 그 오브제를 마주하는 작업입니다.
즉 저자의 역할은 거기 있습니다.
저자는 독자(타자)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것은 정말 외로워서 자기 얘기 들어달라는거나 같습니다)
자신이 어떤 오브제를 보고 있었는지를 제시하며, 자기 주변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음악을 듣고 있는데' 자기가 어떻게 들었고 뭘 했고 그런 게 아니라, 저한테 조용히 이어폰 한쪽을 건네주는 것이죠.
그리고 같이 꽂으면서, 들으면서, 저랑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겁니다.
글쓰기가 그렇게 되어야, 저자/독자가 만날 수 있을 것이며,
독해가 그렇게 되어야, 독자/저자가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서로 '관점을 비교할 수' 있는 거겠죠.
그리고 그렇게 읽을려면, 애초에, 글을 쓰거나 읽는 방식이 달라야 될 겁니다.
한자 한자 단어 뜯어가며 읽는 게 아니라,
아주 재빠르게 어떤 오브제를 보고 있는지 알아내서, 같은 스코프 위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발화자)와 동시에 같이 오브제를 보면서, 같이 얘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발화자의 얘기만 듣는것은 시간낭비라는 것이죠.
그건 단지 '글자 수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글이 이번에도 길어졌는데,
실례로 분석한다고 좀 길어진 것이 있습니다.
헌데 그것은 쉽게 읽을 수 있으니, 무리는 없고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읽으면 굉장히 빨리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오브제를 찾으세요
1. 저 (오브제)
2. 여러분 (오브제)
3. 심리학 갤러리 발화자 (오브제)
4. 증권가 기사 발화자 (오브제)
5. 진중권님 (오브제)
그리고 나머지는 다 모두, 제가 오브제에 대해서 기술하고, 제가 느낀 것을 뱉어내고 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제가 뱉은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셔도 되고, 제가 뱉은것이 무조건 옳거나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버리셔도 되고,
어쩌면 제가 느낀것들, 뱉은것들에 대해선 거의 관심갖지 않고 '무관심'하게 대해셔도 괜찮고, 심지어 거리두고 낯설게 보고 관조하셔도 됩니다.
또한, 제 의도 따위를 보지 않으셔도 되고 (의도는 무슨, 그런 게 있겠습니까?, 설령 있다 해도 오브제부터 찾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어떤 판단을 했을지, 이 순간 나의 심정은 뭐였을지,
그런 거 찾지 마세요.
여러분 시간 낭비하는 거 제가 미리 막으려고 합니다.
그냥 오브제 찾고, (진짜 오브제를 찾아라는 겁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직접 오브제에 대면하세요.
어쩌면 저보다 더 예리하게 많은 것을 뽑아낼 지도 모릅니다. 제가 뽑아낸건 딱 제가 뽑아낸 것이고, 지면의 한계 및 인지의 한계로 뽑아낸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심정일까? 어떤 생각일까?" 하지마세요. 그렇게 찾아내봐야 여러분 투사이고,
그리고 더 중요한건,
여러분이 그걸 느꼈다해봐야, 제가 뭐 고맙다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걸 느낄때, 제 의도를 알았다고 '아하'할 때,
제가 뭘 하고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전 그 시간에 밥을 먹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즉, 여러분 혼자, 그 시간에 그런 '순간'에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가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누가 쓴 글에 대해서, 이 사람이 쓴 그 순간의 호흡과 리듬까지 싱크를 맞춰보고싶단 생각을 합니다.
착각인거죠. 왜? 그는 지금 그 시간에 자고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즉,
그가 그 글을 썼을 그 시점은, 분명 존재하곘지만,
제가 그 글을 읽고 있을 그 시점은, 분명 다른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저자는 밥을 먹고 있을지도 모르는거죠.
그러니 제가 그렇게 그 저자의 '심장소리, 느낌'등을 읽어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지나건 과거, 또는 사건, 한 순간'에 해당되는,
아주 스쳐지나가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전 의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 중, 너무 독해에 중독된 사람이 있어서,
제가 쓴 글의 의도와, 주장과, 근거와, 전제와, 그런것들을 하나하나 알고 싶으신분? 또는, 그런 구조적인 독해가 아니고서는 답답하신분,
그런 분들은 제 글을 엄청 구조적으로 읽을려고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한자한자 정성들여 읽는다거나)
하지만
저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1. 오브제부터 찾으세요
2. 그리고 그 오브제를 보러 오세요. 저랑 같이 보시는 겁니다. 저랑 같이 보면서 저랑 같이 대화를 나누시는 겁니다.
3.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나름대로 오브제를 보면서, 여러분들 의견을 말하셔도 됩니다. 여러분들은 저와 같은 오브제를 보면서 얘기하면 됩니다.
4. 그러니 제 얘기를 들을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냥 저는 여러분과 대화나누는 사람일 뿐입니다.
5. 제 생각에 관심을 가지시지 마세요. 그냥 저런 사람이 있구나 정도로 넘어가시고 여러분 인생에 도움되는 지식을 수집하세요.
논리훈련이 필요하면 논리 트레이닝을 하시고, 심리학 지식이 필요하면 심리학 책을 읽고 실험도 하시는 겁니다.
6. 제 글에 주장과 근거를, 전제와 결론을, 의도와 목적 및 방법을, 제 글에 기분과 느낌을,
아무튼 그런 것을 찾으려 들지도 말고, 그런것을 찾았다고 해서 기뻐하고 좋아하시지도 말고, 뿌듯해 하시지도 마세요. 쓸데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오브제를 찾고, 오브제에 대응하는 것만 몸의 반응만 확인하세요. (더 정확히 말하면 여러분은 자극과 반응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지 다른지 정도만 보세요 그냥.
7. 다른 버전으로 또 한번 말하지만,
제 글에 의도를 보려고 하지 마시고, 찾으려 들지도 마시고, 느끼려 들지도 마세요.
제가 어떤 심정일지, 어떤 사람일지, 어떤 환경에 있는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도 관심갖지 마세요.
여러분이 백배 더 재밌게 살고 있을 것이고, 백배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뭐든지 여러분 생각이 더 재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저 사람을 반드시 읽어내야 한다, 반드시 다 하나하나 맞춰야 한다, 라는 강박증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언어영역 및 언어시험의 폐해인거죠. 정답을 맞춰야 하고, 요지를 찝어야 한다는 언어시험적 사고방식이, 타자를 대할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언어시험은 언어시험이고, 그건 거기서 끝내야 될 일입니다. 오브제를 보고, 오브제를 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제 글에 의도를 찾아내지도 말고, 제 주장과 근거를 관심갖지도 마세요.
아. 주장과 근거는 필요한 거 아니냐는 얘기를 할 거 같은데,
오브제가 결국 뭐겠습니까? 그것 자체가 근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미 다 까발린 상태에서, 남는건 제 머리속의 구성 밖에 없는데, 그 구성이 얼마나 대단할 것이며, 의미있을 것이며, 가치있겠냐는 겁니다.
기껏해야 그건 제 인생에서나 가치있는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타자도 그렇게 대하기로 합니다. 그들의 구성이 얼마나 대단할까요?
제가 누군가를 정말 연구해야한다면, 그는 오브제를 대하는 구성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가령 스티브 잡스같은. 아인슈타인. 피카소 같은.
저는 그들의 구성을 배우고 싶어, 그들의 사고방식을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럴 때만 연구하고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충 보세요.
어차피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만 중요하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을 읽고 제가 말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고 해서, 제가 기뻐할 거란 생각은 하지마세요.
기쁜 게 있다면 그건 여러분이나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스타일로 스스로 구성'하는 것을 연습했을 뿐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좋아서 한 일이겠죠. (왜 그렇잖아요? 똑같은 수업을 들어도 어떤 아이는 필기가 잘 되있고 어떤 아이는 알아먹기 힘든 것처럼요)
어쨌건,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만약 열심히 읽으면서, 제 의도와 주장까지 찾아내신다면) 뭔가 알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무렵,
저는 그냥 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 글은 제 관심사 밖에도 멀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 어떤 오브제를 취하고 있는지 감이 오시나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글에 대해서 입니다.
이 마지막에 제가 쓴 말들은
제가 나중에 다시 고쳐 써보기도 해야겠습니다.
어쨌건 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는 아주 신중하게 읽어야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전 지금 제 글을 누가 신중하게 읽을거라고 생각해보니까, 으시시해집니다. 이런 글에 시간을 투자한다?
그리고 저는 좀 더 자유로운 독해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둘 다의 관점이 존중되면서, 같이 독해를 완성할 수 있는 게 없냐 하는 것이죠.
그럴 때 제 생각에 저자가 너무 비중있어지는 글은 실패한 글이거나, 무게잡은 글, 지나치게 사기치는 글, 지나치게 생색부리는 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애정결핍이 강한 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굳이 내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어떤 느낌일지, 그런것 하나하나 소상히 여러분이 다 독해하고 파악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그렇게 제 글을 읽어준다고 해서,
어떤 더 고차원적이 이해로 (성인의 경지로) 우리가 한층 성장하는것도 아닐뿐더러,
제가 여러분한테 삼겹살을 사드릴것도 아니고
여러분이 뭔가 의미심장한 아이디어를 얻은것도 아니며, 꿈이 달성될 것도 아니며, 시험점수 받을것도 아니며, (기껏해야 나르시즘 충족?)
그리고 여러분이 이런 글에 고정되야할 것도 아니며, 이 글이 반드시 읽지 않으면 안되는 명작선 (같은 협박성 과고)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며,
기껏해야
여러분은 어떤 찝찝함을 가질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읽지 못했다라는 어떤 억울함? 오기?)
그리고 여러분이 이 글을 '저자가 쓴 대로의 리듬, 및 느낌'을 읽어내지 못했다, 라는, 어떤 리듬과 관련된 환상.을 갖거나, 하는것도 좋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조차도, 막 쓰다가 샛길로 빠지고, 쓴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썼는지 대강만 기억하고,
쓸때 조차도 더 좋은 전개가 있었는데 하고 나중에 생각하게 된다면 어떻하실래요? 더 좋은 내용으로 넣을 수 있었는데 못넣었다면 어떻할까요?
어쩌면 여러분이나 저는 저자의 책을 읽을때 이상한 강요를 당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마치 '내가 오브제를 본대로, 너도 그렇게 봐'같은, 그래서 우리는 의도나, 주장과 근거에 집착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봣는지, 마치 그대로 봐야될것만같은, 그런 강요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거죠.
제가 이 글을 씀으로써 폭로하고싶은 것은, 저자에게 그 따위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쓰는 자기도 뭐라고 쓰는지 디테일하지 못할때가 있는데,
게다가 이 글을 쓰고 나면, 저는 밥을 먹을건데, 여러분은 제 글을 읽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무슨 ... 뭐가 그렇게 중요한거라고.
게다가 제가 여러분한테 '화를 낼 것도 아니며 벌점을 주는것도 아니며, (이게 사람을 길들이는 방식입니다. 독서교육과 언어시험이 그런식이죠)
그러하니, 여러분은 저와 같이 대화를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브제부터 찾고, 여러분이 오브제를 마주하세요. 그리고 저와 대화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군요.
저의 얘기 따윈 집어치워버리세요. 그냥 '아 저런 관점이 있나보네'하고, 위상적으로만 취급해주세요. 뭔 상관입니까?
글을 쓰면서 깨달았습니다.
글쓴이로서 개폼잡지 말아야하며, 자기 생각이 중요하다는 착각 따위 버려야 하며, 온갖 위협적인 뉘앙스는 집어치워야 하며 (그만큼 절박함을 표출)
오브제를 제시함으로써 같이 대화를 나누자는 태도를 취해야 하며, 독자가 쓸데없이 마치 애인처럼 내게 구는것을 막아야 하며 (내 기분 하나하나 맞출려고 들고 의도 맞출려고 하고 의미해석할려고 드는 그런 이상한 태도) 오히려 독자가 스스로 오브제를 접하며 기쁨을 느끼고 성장하는데 격려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제가 타자의 글을 읽으면서 하고 싶은것도 그것이죠. 그가 쳐놓은 그물에, 마치 그가 쳐놓은대로 읽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종래의 독해에 상당히 반대되는 접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도를 읽어내야한다'라는, 아주 출제자 의도 같은 소리에 가까운 접근을 요구받고 있으니까요.
저는 그 의도 따위는 몰라도 되고, 화합만 있으면 된다는 순진한 소리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생각은 몰라도 되니까, 자기 생각이나 제대로 하자,
그리고 정말 필요하다면 배울 수 있는 몇몇의 천재들의 사고를 연구하자,
우리는 위협만 없으면 자유로울 겁니다. (내 의도를 읽어주세요!!! 따위의 개소리 및 협박성 몰아세우기)
마지막에 잡설이 상당히 길었습니다.
헌데 글을 쓰면서 독해의 팁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가 밑에 막 쓴 글은 결국 하고싶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상술한 것입니다. 그러니 문장 하나만 캐취해도 나머지는 안 읽어도 될 것 같습니다.
더 강렬한 표현이 떠오르면, 쓰도록 하겠습니다.
독해 너무 열심히 하지 마세요.
그냥 오브제만 찾고 오브제에 눈을 두세요. 그게 남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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