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의 마지막 가족사진. 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 엄씨.덕혜옹주. 촬영시기는 1915년경으로 추정된다. ◈ 비숍 여사 "고종은 온화하고 지식이 풍부했으며, 왕비는 지성미가 넘쳤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교회 강연을 들어보자.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포탄이 날아다니는데 황제는 점쟁이 말을 듣고 궁궐 기둥 밑에 큰 솥을 묻는 짓을 하느라 바쁘다, 우리 고종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능하고 나약하고 타락한 사람이었다 이거에요.
민비라는 사람도 똑같아요. 윤치호가 그러는데 영리하고 이기적인 이 여인은 미신을 섬기는 것 반만큼 백성을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안전했을 것이다"
문창극이 수없이 설교에서 인용한 비숍여사의 저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고종 황제 부부를 어떻게 묘사했나?
영국의 저명한 여류 여행가인 비숍 여사가 저술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 의 한 페이지. "왕비 전하는 당시 40세가 넘었으며, 멋있어 보이는 마른 체형이고, 머리는 윤기가 흐르고 칠흑같이 검었으며, 얼굴빛은 창백했으나 그 창백함은 진주빛 분을 발라 더욱 희게 보였다.
눈은 냉철하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 범절과 사려깊은 호의, 명랑함과 예리함 그리고 놀랄만한 그의 화술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왕은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었고, 조선의 역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해도 명확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통치자로서 지극히 근면한 사람이며, 각 부처의 모든 일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무수한 신하들의 보고도 지치지 않고 정성을 갖고 수렴했다"
문창극은 왜 이런 객관적인 외국인의 묘사를 무시하고, 악질 친일파 윤치호의 악평을 떠벌리고 다닐까?
그의 강연 곳곳에 나오는 조선인의 '게으르다'는 특성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민족은 역사발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식민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일본 극우 역사관과 정확히 일치한다.
어느 외국인을 만나도 이렇게 자기들의 왕실을 악의적으로 욕하는 국민은 만나본 적이 없다.
◈ 비숍 여사가 묘사한 조선 말의 풍경과 문창극의 사실 왜곡 조랑말을 타고 조선 여행을 떠난 비숍(오른쪽 끝) 여사 일행. 남장을 한 복장이다. 비숍 여사는 120년전인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 사이에 4차례에 걸쳐 조선을 여행한다.
이 시기는 조선이 갑오농민혁명,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을미사변이 벌어지는 격변의 시대였다.
비숍 여사는 여행을 다니면서 관리와 양반의 수탈에 분노하고, 조선인 평민들이 겪는 고통을 안타까와한다.
또, 지배계급의 착취와 부정, 가혹한 세금, 심약한 군주, 불안정한 국제정세를 자세히 묘사했다.
비숍은 "조선의 첫 인상은 재미없는 나라였으나 갈수록 흥미를 갖게 됐고, 가능성이 큰 나라였다"고 회고했다.
또 '간난에 견딜 줄 아는 강인하고 공손한 민족'이라고 묘사하면서도 "평민들은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에게 피를 공급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가마를 타고 한양에 들어선 비숍 여사 일행이 처음 마주친 마포의 강둑. 경성의 첫 인상에 대해 "지저분하고 가난했다"고 묘사했다. 방대한 이 저서에서 문 후보자는 긍정적인 면은 다 빼고 19세기 말 전세계 후진국가의 특징이었던 '더러움'과 '게으름'을 유독히 강조했다.
비숍 여사는 연해주에 있는 조선인 정착촌에서 부농 마을을 일군 영특한 조선인들을 만나 감격했다.
그녀의 회고를 들어보자.
"조선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연약하고 의심 많으며 위축된 농민들의 특성이 이곳에서는 솔직함과 독립심을 가진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조선에서는 관리들이나 꿈꿀 수 있는 아늑함과 평안함이 넘쳐 흘렀다"
그녀는 "한국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비숍은 "조선인은 절대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조선에 살아서 게을렀던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촌 가옥. 이런 긍정적인 묘사는 다 빼버리고 문 후보자는 강연에서 선교사 퀴츨 라프, 달레 신부, 비숍여사, 윤치호 등의 저서 중에서 특정 글을 총동원해 조선인을 깎아내리기 바빴다.
또 저서에 나오지도 않는 부산 동래의 깨끗한 일본인 거주지 모습을 장황하게 묘사하는가 하면, 양평에서는 이방 800명이 백성을 착취한다는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저서에는 단지 "양평이란 곳을 배타고 지나갔다"고 쓰여있을 뿐이다.
문창극은 저서에도 없는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어디서 끌어쓴 걸까?
비숍 여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근사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없다"
문창극의 눈에는 왜 이런 구절이 보이지 않았을까?
비숍 여사가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은 경회루. 그녀는 경복궁을 둘러본 후 조선 문화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 ◈ 역사학계 "문창극 후보자가 총리가 되면 제2의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을 접한 역사학계는 격앙돼 있다.
어떻게 글을 인용해도 하필이면 악질 친일파인 윤치호의 자학사관. 정체사관을 인용하고, 비숍 여사의 기행문을 의도적으로 편집해 왜 우리 민족을 비하하냐고 반문했다.
'게으름'을 조선시대 뿐아니라 지금까지 대물림하고 있다는 표현이나 위안부 발언 등을 보면 자기 자신이 '한국인'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독립운동사와 식민사관 문제의 권위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렇게 분석했다.
"문 후보자가 친일파인 윤치호 글을 인용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역사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일제 강점기 동안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된 기독교인들이 2천 명이 넘고, 폐쇄된 교회가 2백개에 달한다는데 이들의 희생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것인지 묻고 싶다"
이덕일 박사는 "문 후보자는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이며 신의 뜻을 왜곡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나라를 찾은지 벌써 69년.
아직까지도 식민사관을 두고 논란을 벌이는 모습을 지하에 계신 독립운동가들이 보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