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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외교관께서 쓰신 글인데 정말 대단한 글이네요.
동아시아 고대사의 맨얼굴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어 올립니다.
다양한 의견 환영하고요.
출처: http://blog.daum.net/hongsungmog/1650142
대강 15년 전의 3년간이었던 (1990, 1991, 1992) 지난 번 필리핀 근무는 "생각할 겨를없이 바빴던" 때로 내 기억에 늘 남아 있었다. 열대더위와 공해(소음과 배기가스)에 질려 책을 읽는 것은 진작부터 포기해야만 했고 업무량은 매일 300 건의 비자심사 - 한 건에 1분이라는 초인적인 스피드로 심사, 서명날인, 수수료처리, 장부정리를 모두 마쳐도 꼬박 5시간 업무분량 - 에 더하여 끊임없이 터지는 한국인 연루 사건사고를 혼자서 처리하느라 제3국 영사들이나 이 나라의 관리들로부터 "Super Consul" 이라며 놀림받던 기간이었다. 그런데 다시 부임하여 돌이켜 생각하니 나름대로 "쳇바퀴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당시의 모습이 보인다. 교민소식지인 "한인신문"(월간)의 고정란으로 "영사칼럼"을 쓴 것도 그 예의 하나일 것이다.
어느 날 한인회에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교민들에게 소식을 알릴 신문을 간행하는 것이 어떠냐. 비용은 광고수입으로 해결하면 될 것 아니냐"고 제의하였다. 즉각적인 반응이 "누가 시간을 내어서 지면을 채울 글을 쓰겠느냐"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그것이 어려우면 나도 영사로서 매회 기고하겠다"고 장담을 하였다. 그리고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자신을 원망했다. "내 이름으로 글을 쓴 것은 20년전 한벗 저널이 마지막인데... 그 때도 1년에 한 번 발간되던 저널에 실을 글을 쓰지 못해 쩔쩔 매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매달 하나씩 글을 쓰겠다고... 그나마 지금처럼 읽는 것도 포기한 상태에서... 열대더위에 내가 맨 정신이 아니구먼... " 하여튼 이렇게 해서 교민신문에 "영사칼럼"이라는 글이 연재되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은 대개 영사업무를 수행하면서 일어나거나 생각나는 일화(episode)를 중심으로 한 "신변잡기"의 가벼운 것들이었지만, 그 중 마지막 글이었던 <잊혀진 나라 "부여">는 성격이 좀 달랐다. 영사업무와는 무관한 개인적 관심사항을 다룬 것이다. 한국사의 근본에 대해 의문을 던진 것으로서, "한국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을 지금처럼 고구려를 위시한 3국으로 잡으면 한국사는 '한반도의 역사'가 될 뿐이고, 만주에 있던 '부여'를 포함시켜 4국으로 하여야 비로소 '민족의 역사'가 된다"는 입장을 개진한 글이다.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 심지어는 일본의 뿌리국가인데 이 뿌리를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의 정확한 관계도 보이지 않고 나아가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도 잘 보이지 않는다" - 이러한 결론은 삼국사와 건국설화에 얽힌 "수상쩍은" 의문들을 책을 통해 (특히 <김 성호>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그리고 어떤 부분은 내 방식대로 풀어나가다가 마침내 다다른 결론이다. "수상쩍은" 의문에는 다음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 "<주몽>은 그 비범함으로 인하여 (북)부여의 태자 <대소>의 시기를 받아 급히 졸본부여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비범하다"는 식의 막연한 칭송은 대개 사후에 권력투쟁의 승자에게 붙여지는 것이지 당대의 사람들이 옆에서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주몽>은 왕이 되어서도 기록에 남을만한 신통한 업적 하나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아 위인으로 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의문스럽다. 그런데 <대소>태자가 <주몽>의 비범함을 시기하였다니... 더우기 <대소>의 시기심때문에 <주몽>이 아내를 뒤에 남겨두고 "갑자기" 도망하였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부여에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급히 도망간 것으로 보아야겠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왕자인데도 용서를 기대할 수 없었을까?
(나) 왕이 된 <주몽>은 왕비와의 사이에 태어난 왕자인 <비류>와 <온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전처 소생에다 궁중의 이방인에 불과한 <유리>를 태자로 지명한다. 고대사회의 왕위계승은 서열보다는 혈통우선 아닌가? 단순히 형이라는 이유로 서자가 적자를 순조롭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쿠데타 아닌가? 도대체 왕으로서 무슨 꿍꿍이로 이런 쿠데타를 감행했을까?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식임이 분명하다면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다) <비류>와 <온조>는 "형"인 <유리>가 나타나 태자로 지명되자 남하하여 백제를 세웠다고 한다. 이는 궁정의 큰 세력이 왕인 <주몽>을 버리고 권력승계에서 밀려난 왕자들을 따라갔다는 뜻이다. <주몽>의 자질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이들은 실권자인 왕을 버리고 굳이 밀려난 두 왕자를 따라 방랑생활을 나서기로 결심한 것일까? 백제가 초기에 고구려보다 힘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궁중의 반 이상이 왕자를 따라 움직인 것이겠지. 왜 그랬을까?
(라) 백제는 '동명제'라는 연례축제를 통해 <주몽>을 모시는 등, 고구려와는 기본적으로 혈연국가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을까? 그렇다면 왜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상대방의 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짓을 예사로 했을까? 백제의 근초고왕은 사냥 나온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기습하여 죽여버리고 (서기 371년), 고구려도 백제의 개로왕을 포로로 잡자 참살해 버린다 (서기 475년). 도무지 "혈연국가 간의 화기애애함"은 커녕 서로 살기등등하기까지 하다. 7세기에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는 국가존망의 위기에서도 동병상련하지 못하고 끝내 각자의 길을 걷다가 멸망한다. 두 나라의 관계는 앙숙으로 보는 것이 더 논리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동명제는 <주몽>이 아닌 다른 사람을 모시는 축제이겠지. 누구를 모신 것일까? 왜 하필이면 그 이름이 <주몽>을 연상케 하는 '동명제'라야 했을까?
(마) 백제는 63년간 4명의 왕이 웅진(공주)을 도읍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공주에는 왕릉으로 추측되는 고분이 수 십 기에 달할까? 또 중국 사서에 "백제의 시조는 <구태>이고 그 무덤이 웅진에 남아 있다"고 하였다는데, 이는 당초부터 웅진이 수도였다는 말 아닌가? 그리고 한국의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 <구태>는 누구일까? 백제의 시조라면 백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일본에 그 이름이 남아있지 않을까?
(바) 광개토왕릉 비문의 백제토벌 기록에 "왕이 이잔은 토멸하고 백잔으로부터는 항복을 받았다"고 했는데 백제에 두 개의 왕국이 병존했다는 뜻이 아닐까?
(사) 고구려가 망한 후 같은 땅에 발해가 건국되었으나 "지배계층인 소수의 고구려인과 피지배계층인 다수의 말갈족(만주족) 간의 반목이 심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수의 일반 고구려인(피지배계층)은 어디로 사라졌으며, 또 말갈족(만주인)은 느닷없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정말 고대부터 이들은 서로 이민족이란 의식이 있었을까? 무엇에 기초로 한 민족의식일까?
(아) 일본은 왜 백제를 꼭 '구다라'라고 부르면서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할까? '구다라'란 일본사람들은 잊어버린 우리말에서 나온 이름이 아닐까?
이러한 일련의 의문들을 풀었다고 믿고서 쓴 것이 바로 <잊혀진 나라 '부여'>이다. 부여가 왜 한국사에 그다지도 중요한지, 부여가 빠진 한국사는 왜 '한반도의 역사'에 불과하고 진정한 '한민족의 역사'가 될 수는 없는지, 이제 아래 글을 읽으면 자명해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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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는 중국 사서에 의하면 "그 백성이 굳세고 용감하여 조상이래로 다른 국가와 싸워 진 일이 없는" 강국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에 무려 200년 앞선 기원전 3세기에 이미 강국으로 만주에 자리잡고 있었다. 후에 자신에게 뿌리를 둔 고구려와의 힘겨루기에서 밀려 서기 494 년에 고구려에 병합되기까지 1000 년 전후를 지속해 온 왕국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건국 후에도 500 여 년 간 이들과 병립해 온 우리 민족의 '뿌리'국가인데 이를 빼 버리고 한반도에 기반을 둔 '가지'국가만을 다룬 것이 <'삼국'사기>이고 또 <'삼국'유사>이다. 이제 (북)부여가 어떻게 우리 민족의 뿌리국가인지 역사를 재구성해 살펴보기로 하자.
(북)부여의 왕 <해 금와>는 사냥을 나갔다가 만난 <유화>를 궁정에 데려와 후비로 삼으니 서자 <해 주몽>이 태어난다. 성년이 된 <해 주몽>은 왕위를 탐하여 형이자 정비 소생의 태자인 <해 대소>를 해치려다가 음모가 발각되자 부여 연맹의 변방국가인 졸본부여로 급히 도망간다. 때마침 졸본부여에서는 태자였던 <해 구태=우태>가 죽은 직후였고 태자비 <소서노>가 미망인이 되어 어린 <해 비류>와 <해 온조> 왕자형제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해 주몽>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졸본부여의 왕은 부여 연맹의 중심국가인 (북)부여에서 온 왕자 <해 주몽>을 의붓아들로 삼아 (같은 <해>씨 성을 가진 부여왕가의 혈통이다. "썩어도 준치"라던가. 더우기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이고 차선책도 보이지 않는다) 장차 세손 <해 비류>가 왕위를 계승할 때 이의 후견인(섭정)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안으로 새는 쪽박이 어찌 밖으로 새지 않으랴! (북)부여에서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 <해 주몽>이라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하며, 당연히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왕위는 정통 왕위계승권자인 <해 비류>에게 돌아갈 것"으로 신하와 백성들이 기대하는 한, 이들의 충성심이 <해 비류>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기가 어렵다. 따라서 쿠데타를 단행하여 스스로 왕이 되는 동시에 <해 비류>의 왕위계승권을 찬탈하여 친아들인 <해 유리>에게 넘겨 준다. 이로써 졸본부여의 왕통은 순식간에 (북)부여에서 도망온 <해 주몽>의 혈통으로 바뀌게 된다.
<주몽>을 곤경에서 구해내어 새 남편으로 받아들였던 태자비 (이제는 왕비가 된) <소서노>는 왕위를 자식한테서 찬탈해 가는 새 남편의 배신행위를 목도하고서 억장이 무너진다. 그 뿐 아니라, 전 남편 <해 구태>의 어린 왕자들이 왕위계승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이들의 신변조차 위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소서노>는 배은망덕한 왕위찬탈자 <주몽>과 결별하기로 결심하고, 이제는 날개를 잃고 생명조차 담보받을 수 없는 어린 왕자들을 데리고 죽은 남편 <해 구태>에 충성하던 무리들과 함께 새로운 땅을 찾아 남하한다.
<해 구태>의 어린 왕자들, 즉 <비류>와 아우 <온조>는 졸본부여를 떠나 자신들과 함께 남하한 무리를 세력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워나가는데 성공한다. 왕자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이들의 어머니인 왕비 <소서노>였다. <소서노>는 졸본부여를 떠나면서 원래의 왕위계승권자였던 전 남편 <해 구태>의 유해를 가슴에 품고 왔다. 그리고 웅진에 다달아 그 곳에 <해 구태>의 유해를 묻으며 이 곳을 새 나라의 수도로 삼고 어린 왕자들로 하여금 아버지 <해 구태>를 건국시조로 모시게 한다. 수 년이 지나 성장한 <해 온조>는 인근에 별도의 왕조를 세운다. 이는 부여에 중심국가(북부여)와 주변국가(졸본부여)가 있다거나, 가야에서 형제들이 동시에 여러 나라를 건국한 것과 마찬가지다.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 중심국가(주나라)의 변방에 같은 성씨의 제후왕조를 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해 주몽>의 후손 왕들은 (북)부여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부여 연맹에서 벗어나 독자적 왕조임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즉, 나라이름을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꾸면서 <주몽> 이전의 졸본부여의 역사를 지워버리고[역사기록의 1단계 훼손], <성왕 주몽>을 고구려의 시조왕으로 만들어 <동명 성왕>으로 추대한다. ['동명왕'의 의미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한다.] 이에 더하여 왕조의 성씨마저 <해>씨를 <고>씨로 바꾸면서 시조왕으로 모시게 된 <주몽>할아버지에게까지 새로운 성씨를 소급 적용한다. <해 주몽>이 죽은 후에 <고 주몽>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강대국 (북)부여와 자웅을 겨룰 만큼 스스로 육상의 강국으로 성장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비류 왕조>의 백제는 점차 중국의 동해안과 일본의 남해안을 아우르는 해상의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이로 인해 중국의 동해안에는 오늘날에도 '백제성' 등 '백제'라는 이름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4세기말 앙숙국가인 고구려에 천재적인 전략가가 나타나자 <비류 왕조>의 운명은 급격히 변한다. 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에 <광개토왕>의 기습공격을 받아 웅진(공주)에 있던 왕성이 순식간에 함락된 것이다. 이에 <비류 왕조>의 백제왕은 식민지인 일본으로 "일시" 피신한다. 그리고 <광개토왕>은 백제의 변방에 있는 <온조 왕조>의 항복을 받아 내고 <온조 왕조>로 하여금 백제 전체를 관리하게 한다. 광개토왕릉에 "왕은 이잔을 토멸하고 백잔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다"고 기록된 것은 <비류 왕조>를 쫓아내고 <온조 왕조>를 친 후 후자를 꼭둑각시로 삼아 백제를 관리하도록 남겨두었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수 백 년의 졸본부여의 역사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어 버리고 <주몽>을 자신의 역사의 시작으로 삼은 것에 비하여, <온조 왕조>는 일본으로 건너간 <비류 왕조>의 백제 역사를 지워버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를 변조해 나간다. 이 단계에서 (북)부여와 졸본부여의 남은 역사 기록마저 불가피하게 훼손된다[역사기록의 2단계 훼손]. 그러나 웅진(공주)이 <비류 왕조>의 수도였던 역사의 흔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온조 왕조>에서는 불과 4명의 왕 만이 웅진을 수도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웅진(공주)에 <비류 왕조>의 수많은 왕릉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시조인 <구태>의 무덤이 웅진에 있다"는 중국 사서의 기록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시조왕의 무덤이 웅진에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웅진을 도읍으로 삼았다는 뜻일 수 밖에 없다.
고구려가 태생적으로 (북)부여에서 나오고 또 졸본부여의 연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졸본부여의 역사와 단절하고 (북)부여를 적대시한 반면, 백제의 <비류 왕조>,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온조 왕조>는 졸본부여의 진정한 승계자이자 (북)부여의 연고자임을 자부한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는 "화기애애한 혈연지간"이 아니라 당연히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다. 그리고 서기 494년 고구려가 (북)부여를 멸망시키자[역사기록의 3단계 훼손] 이러한 앙숙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백제가 중흥을 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하고 새로운 왕성(사비성)이 있는 수도를 '부여'로 부르는 것은 이제 자신이 졸본부여 뿐만 아니라 (북)부여의 '계승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어쨌거나 중국마저 그렇게도 흠모하던 부여가 아니었던가!
다른 한편, 일본으로 "일시" 피신한 <비류 왕조>의 왕은 일본에서 7년간의 정복전쟁(통일전쟁)을 거친 후 초대천황으로 등극한다[<신무천황>; 실제로는 4세기말의 <응신천황>과 동일인물임]. <신무천황>은 등극하기 전에도 이미 왕이었다고 일본 사서에 나오는데 언뜻 수긍이 가지 않는 상황이고 일본 역사가들도 이를 잘 설명하지 못하지만, 실은 백제왕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확한 말이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해>씨의 <비류 왕조>는 한반도에 돌아오려던 의지가 약화되면서 점차 한반도에서의 쓰라린 경험(고구려에 패퇴)과 그 이전의 역사를 잘라내어 버리고 당초부터 일본에서 시작한 것으로 역사를 꾸민다[역사기록의 4단계 훼손]. 그리하여 일본은 점차 한반도와는 남남이 되어간다. 그러나 <해>씨 왕조의 나라라는 점은 '일본'이라는 나라이름으로 각인된다. ['해'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한자로 표기하면 날 '일'이 됨.]
백제의 '동명제'를 고구려의 동명왕인 <주몽>을 기린 축제로 보는 것은 큰 오류이다. 이는 마치 <왕 건>이 태조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고려가 <태조>를 추모한다"는 기록을 보고서 이를 "<이 성계>를 추모하는 것"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해석이다. 부여계통의 국가에서는 시조왕을 '동명왕'이라고 부른 것이다. 즉 태조 또는 고조의 뜻이다. 그러기에 (북)부여의 시조왕도 동명왕이라고 사서에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백제도 건국시조를 동명왕이라 부르면서 이를 모시는 동명제를 지낸 것이다. 일본 사서에 "백제의 건국시조는 도모왕(都慕王)이고 일본의 여러 귀족들이 이 도모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도모왕'이란 '동명왕'의 일본식 표기일 것이다. 또 중국 사서에서 "백제의 시조는 <구태>"라고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동명왕으로 섬긴 대상은 이 <구태>임이 분명하다.
다만 <구태>가 누구인지에 대해 나는 한 때 <비류>를 건국시조로 보아 <비류>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버지는 <우태>이고 자식은 <구태>가 되어 부자간의 이름이 너무 비슷한 점이 이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구태>는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인 <우태>와 동일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기에 백제의 주도적 지배세력이 <비류 왕조>에서 <온조 왕조>로 바뀌어도 동명제는 자연스럽게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백제를 '구다라' 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구태라' , 즉 '<구태>의 나라'라는 뜻일 것이다. ['신라' 또는 '가라' 라고 할 때의 '라'는 '나라'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며, 이를 따르면 신라는 '새나라'란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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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씨는 동북아에서 부여, 고구려, 백제, 일본의 4개 왕조의 주인공이 되어, 서로 협력하고 각축한다. 그러나 수차에 걸친 "기록의 말살과 위조.변조"로 역사의 전체 그림은 사람들의 눈에 점점 가려지게 된다. 후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쓰일 무렵이면 부여민족의 큰 그림은 잊혀지고 그 범위를 한반도에 국한시킴으로써 민족의 집단의식도 한반도 인으로 전락한다. 만주에 살던 부여인은 <말갈족>으로 분리되어 한반도인의 냉대를 받고, 일본인은 <왜인>으로 한반도인의 경멸을 받으며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이와 같이 민족사가 한반도로 위축되어가는 중심에 <주몽>이 있다. 특히 부여인이 <말갈족>으로 떨어져 나가는 결정적 계기는 <주몽>이 쿠데타를 통해 부여 왕조의 정통성을 단절시킨 것을 부여의 백성들이 수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부여의 일반 백성들은 정통성이 결여된 지배계층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점차 역사에서 이민족으로 되어간다. <주몽>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고구려가 민족의 영광스런 역사로 기록되는 한, 이를 수긍할 수 없는 다수의 부여족이 이민족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역사적 인물을 너무 냉혹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몽>같이 권력을 찬탈하고 지도자로서 남긴 업적은 보이지 않는 자가 민족의 영웅으로 숭상 받는 것을 보면서, 왜 이 나라의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데는 그렇게 집착하면서도 업적을 남기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는 인색한지 이해가 간다. 그래서 "아, 아직은 우리 민족이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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