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전화기를 귀에 대자 아기는 생글생글 웃었다. 금요일 저녁, 아내는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휴대전화의 단축번호 1번을 눌렀다. 집에 오는 시간을 물었다. "대통령이 내일 여기 내려올 것 같아. 밤샘작업을 해야 할지도 몰라. 그것 때문에 여기 사람들 신원조회까지 다 했어."
이번 주말엔 남편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주에 한번, 토·일요일을 모두 쉴 때마다 남편은 경북 의성의 공사장에서 전남 신혼집까지 차를 몰고 왔다. 5시간이 걸렸다. 남편은 돌이 지나지 않은 아들과 놀다 금세 곯아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 주말 남편의 귀가는 불투명해졌다.
결혼을 두달 앞두고 남편은 두산건설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4대강 공사를 맡은 두산건설이 사람을 뽑았다. "도급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회사야." 남편은 중견 건설사에서 3년째 토목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지방대를 다닌 남편은 대학 재학중 토목기사 자격증을 땄다. 경남 작은 도시에서 농사를 지어 외아들을 뒷바라지한 시부모에게 남편은 자랑거리였다. 남편은 2009년 가을부터 경북 의성 낙동강 32공구에서 일을 시작했다. 결혼하자마자 부부는 2주에 한번씩 주말에만 만났다.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 아내는 남편이 보내주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았다.
금요일 저녁
"대통령 내려오신대
밤샘작업 할 것 같아"
토요일 아침 10시30분
"밤새 일해 너무 피곤해"
오후 2시
"여기 병원인데요…
죄송해요 제수씨"
돌도 안된 아기는
그렇게 아빠를 잃었다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하는데, 새벽 4시까지는 일해야 될 것 같아." 금요일 밤 11시, 다시 전화를 받은 남편은 지친 목소리다. "계속 일하고 있어." 남편이 말했다. 올해 들어 야근이 잦아졌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돌아가면서 야근한다고 남편은 설명했다. 그래도 그날 밤은 달랐다. 야근을 해도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쉬었다가, 뒤이어 새벽 5시까지 일하는 게 보통이다. 그날 밤 남편은 쉬는 시간 없이 일했다.
남편은 공사장 근처 민가에 방을 얻어 동료 2명과 함께 지냈다. 올가을 4대강 공사가 끝나면 다른 일자리를 구해 처자식과 함께 살라는 장모의 말을 남편은 신경쓰는 눈치다. 아기 백일에도 세 식구가 함께 사진을 찍지 못했다. 곧 돌아올 돌로 미뤘다.
날이 바뀐 토요일 아침 10시 반, 남편의 전화가 걸려왔다. "밤새 한숨도 못 잤어. 쉬지도 못했어. 너무 피곤해." "일을 얼마나 더 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이따 전화 안 할 테니까 점심시간에 조금이라도 자." 남편은 아들 목소리를 듣고 싶다며 전화를 바꿔달라고 했다. 아기가 젖병을 물고 있어 바꿔주지 못했다. "우리 애기 보고 싶다."
2011년 4월16일 토요일 오후 2시, 남편의 발신번호가 아내의 휴대전화 화면에 찍혔다. 전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남편이 아니었다. 낯선 목소리의 여자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여기 병원인데요. 하철수(가명)씨가…." 남편의 동료라는 남자가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죄송해요. 제수씨. 죄송해요…."
쾅~
밤을 지새워 부은 콘크리트 속으로…
그이가 사라졌습니다
두 손에 통닭 봉지를 잔뜩 들고 오는 하철수(가명)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 야식 드시고 하시죠." 철수가 부르는 소리에 최기식(가명)은 목장갑을 벗었다. 금요일 밤 10시,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시작한 지 5시간이 지났다. 보 끄트머리 소수력발전소에 콘크리트 지붕을 덮는 작업이었다. 기식과 동료들은 지붕과 이어진 다리 위에 자리잡고 닭다리를 집었다. 철수는 종이컵에 콜라를 따랐다. 야간작업용 조명은 기어가는 개미도 보일 만큼 밝았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 소리가 작게 들렸다.
20년 가까이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 기식은 철수를 눈여겨봤다. 나이 어린 원청업체 관리직이 아저씨뻘인 하청업체 직원들을 다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놈이 건방지다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다. 서른두살 철수는 달랐다. 철수는 상대가 누구든 '형님'이라 불렀다. 형님들은 철수의 지시에 따라 젖은 콘크리트를 뿌리고 평평하게 폈다. 철수는 작업복 주머니에 캔커피를 넣어 와 기식에게 건네곤 했다. 두산건설에 계약직으로 들어온 철수는 공사가 끝나면 정직원이 될 거라는 소문이 들렸다. 통닭 한 점을 먹은 철수는 다른 형님들을 챙기러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4월16일 토요일 낮, 밤새 이어진 타설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었다. 강 건너 함바집의 점심 메뉴는 국수다. 철수는 국수를 좋아한다. 지붕 위로 올라오는 철수에게 기식이 물었다. "점심은 먹었냐?" "이것만 하고 먹어야죠." "빨리 하고 나와라. 밥 먹자." "알았어요. 형님." 철수는 지붕 위에 섰다. 하청업체인 영광건설 김일환 차장도 옆에 섰다. 마무리 작업을 하던 10여명은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다. 다른 7명은 다리 위에 앉아 철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콘크리트를 더 부으라면 더 붓고, 수평이 안 맞는다고 하면 맞춰야 한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이 지났을까. 쾅. 굉음이 귀를 찢었다. 기식의 눈 앞에서 두 사람의 몸이 바닥 아래로 사라졌다. 2∼3초도 아닌 한순간이었다. 굉음 속엔 두 사람의 비명 소리가 섞여 있었다. 마르지 않은 콘크리트는 무너지면서 먼지조차 내뿜지 않았다. 눈앞이 선명하다. 세 발자국 앞이다. 15m 아래 구부러진 철근과 마르지 않은 콘크리트 더미가 뒤엉켜 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성 낙단보 공사현장서
사고가 난 그 시각
상주 자전거축전에 온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4대강이 완성되면
모두가 수긍할 것"이라고…
경북 의성경찰서 강력팀 형사들은 낙단보 공사현장에 나와 있었다. 상주와 의성의 다른 경찰과 소방대원들 모두 비상대기 상태였다. 상주 자전거축전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의성 낙단보 공사현장에서 마애불이 발견되자 불교계는 다른 마애불이 매장돼 있을 수 있다며 공사를 반대해왔다. 의성경찰서 강력팀 형사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불교계의 집단행동에 대비했다. 4월16일 낮 12시17분 이들의 무전기에 황급한 목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사고가 났다. 현장에 도착한 상주·의성소방서 대원들이 주검을 수습했다.
사고 10여분 뒤인 낮 12시30분 대통령은 경북 상주시 상주여중을 방문했다. 주검 수습 직후인 오후 2시 대통령은 상주 북천시민공원에서 열린 제3회 대한민국 자전거축전 개막식 연단에 올랐다. "4대강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시는 분들도 많지마는, 아마 금년 가을에 4대강 완성된 모습을 보게 되면 모두가 수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이어 낙동강 33공구 상주보 공사현장을 방문해 현장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두 사람이 사고로 숨진 낙동강 32공구 바로 옆이었다.
황망히 달려온 아내는 그저 울었다. 저녁 8시 광주에서 찾아온 남동생을 보자 다시 울음이 터져나왔다. 상주성모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에는 남편의 동료 3명이 덩그러니 있었다. 친정 동생은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다들 어디 갔습니까? 왜 아무도 없어요?" 공사 책임자들은 경찰에서 조사받는 중이었다. 어디 물어볼 사람도 없이 하룻밤이 지나갔다.
이튿날 늦은 오후 두산건설의 부장이라는 남자가 빈소를 찾았다. "왜 안전하지도 않은데 올라갔던 겁니까? 근무일지에 이름도 없어요. 근무 지시도 없었다는데 누구 지시로 간 겁니까?" 부장은 한 가지도 답하지 못했다. "다른 거는 놔두고 일단 합의 금액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친정 동생은 흥분하여 부장에게 퍼부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지금 돈이 문젭니까?" 저녁이 되자 현장 동료들이 조문 왔다. 그들은 고개를 떨궜다.
"계속 힘들게 있게 하는 것보다 얼른 보내주는 게 좋다." "더 시간 끌면 법적 다툼도 해야 할 텐데 빨리 마무리짓는 게 나을 거야." 아내는 집안 어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부장이 준비해온 합의서에 서명했다. 죽은 남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통닭가게였다. 그제 배달시킨 통닭 10마리를 결제해달라는 전화였다.
아내는 남편을 화장해 시가가 있는 경남의 어느 납골당에 안치했다. 주말이 되어도 돌아올 남편이 없는 전남 신혼집으로 아내는 돌아왔다. 아내는 '낙동강 32공구 하○○'라 적힌 남편의 이름표를 작은 상자에 넣었다. 객지생활을 오래 한 남편은 신혼집에도, 현장 숙소에도 유품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아내는 아이에게 아빠의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20대 후반의 아내는 낙동강 32공구와 관련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있다.
경북 의성경찰서는 두산건설 및 하청업체 영광건설 관계자들을 수사중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소수력발전소 지붕을 떠받치는 임시구조물인 '동바리'의 연결부위에 고정핀이 꽂혀 있지 않은 점을 사고 원인으로 지목했다. 경찰은 "핀을 꽂지 않았다"는 작업자들의 진술도 확보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안전작업지침과 달리 동바리 이상 유무를 확인할 담당자는 현장에 배치되지 않았다.
송경화 박수진 권오성 유신재 기자
[email protected] 하씨와 함께 숨진 김일환씨
노심초사 홀어머니 남겨두고
불도저 몰던 아버지 곁으로…
경남 거창군 거창읍 사동마을 김채근씨의 1남2녀 가운데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다. 거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2m 가까운 큰 키 때문에 방위로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토목구조기술사 자격증을 따 전국 곳곳의 공사현장을 누볐다. 나이 마흔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아 노모를 안타깝게 했다.
일하는 현장이 어디건 김씨는 2주에 한 번씩 노모를 찾아 집에 왔다. 금요일 저녁 일을 마치고 몇 시간씩 차를 몰아 토요일 새벽이면 집에 도착했다. 올해 초 경북 의성 낙동강 32공구 하청업체 영광건설 소속으로 일을 시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매번 "걱정 말고 주무시라"고 말했지만, 노모는 잠자리에 들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며 아들을 기다렸다. 대대로 살아온 방 3칸짜리 작은 시골집은 아들이 오면 꽉 찼다.
김씨의 아버지도 공사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불도저를 몰던 아버지는 10여년 전 집으로 돌아와 큰집의 사과 과수원을 부쳤다. 5년 전 여름 아버지는 마을 길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덤프트럭에 치였고, 병원에 9개월 동안 누워 있다 세상을 떴다.
지난 4월16일 낮 12시17분 김씨는 하씨와 함께 낙동강 32공구 낙단보 소수력발전소 지붕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점검하던 중 바닥이 무너져 추락해 숨졌다. 김씨는 다음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집에 올 계획이었다.
유신재 기자
[email protected] ※ 2회 '죄와 벌'에서는 4대강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혼자 짊어지게 된 또다른 노동자의 사연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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