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아가야, 아가야>
“사또. 저는 억울하옵니다.”
여인의 소복자락이 눈물에 젖어들었다.
미신을 맹신하는 이들은 이미 겪어본 적 있었기에, 박희완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그는 업무에 시달려 노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원통함을 호소하는 여인 앞에 마주섰다.
고을 밖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고운 눈초리보다도, 수려한 아미보다도, 흰 소복에 꽃잎처럼 점점이 퍼져있는 붉은 얼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선혈이었다. 여인이 지난밤 멍석말이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양반가의 곱게 자란 부인이 험한 꼴을 당하다니 애석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권세 있는 집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으니, 박희완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여인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혹독한 매질에 까무룩 혼절했다가, 깨어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을 터였다.
여인을 바라보던 박희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 배는........”
여인은 달덩이처럼 동그랗게 솟은 배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아기를 가진 여인을 멍석말이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배의 크기로 보건데 산달이 다가왔을 게 분명했다. 저 몸으로 용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니....여인의 눈꼬리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방울을 보면서 그는 새삼 죄책감을 느꼈다. 여인의 미목수려함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박희완은 여인을 똑바로 응시하는데 곤란함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젓자 머리에 쓰고 있는 전립에 달린 하얀 깃털이 가볍게 흔들렸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이리도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오. 어제 일을 주도한 자가, 장자인 김천주라고 들었소.”
“제 시아자비께선 저를 가문을 멸망시킬 요물이라 하시며, 종들을 시켜 저를 문초하셨습니다. 시모께선 병환으로 병중에 계신 터라 제 이야기를 들어줄 이 하나 없었습니다. 오로지 살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사또, 제 억울함을 풀어주옵소서.”
장자인 김천주가 주도해서 멍석말이를 명령한 거라면, 시댁 전체가 며느리를 쫓아내려고 벌인 일일 터. 끔찍한 일을 당한다고 한들 도망칠 수 있는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출가외인이라 하여 남은 평생을 시가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달리 돌아갈 곳조차 없다. 자기를 문초하고 쫓아낸 시댁으로 돌아가 받아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부인의 편이라 하면 백년해로를 약속한 지아비밖에 달리 없다.
“부군은 어디 계신게요?”
“한양에 가신 뒤로 연락이 두절 된지 벌써 수년이 되어갑니다.”
그렇다면 의지할 곳이 전무했다. 지아비와 생이별을 하고 과부 아닌 과부로 살고 있는 여인의 무엇이 그리 거슬렸을까. 박희완의 앞에 앉아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여인은 비를 맞은 꽃잎처럼 청초해 보였다. 게다가 그 눈빛이 얼마나 선한지 생전 악행한번 저지르지 않은 사람 같았다. 저런 여인을 대체 왜....
“소첩은 요녀도, 요괴도 아니옵니다. 그렇다고 구천을 떠도는 원혼은 더더욱 아니옵니다. 그저 평범한, 길 떠난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는 평범한 아낙네이옵니다.”
여인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뺨을 저고리 자락으로 훔쳐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또다른 눈물이 차올라 새로운 눈물길을 열었으니까. 여인은 제 눈물로 젖은 옷자락을 꽉 손에 쥐고 박희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서방님이 한양으로 떠나실 적에 소첩은 홀몸이 아니었습니다. 뱃속의 생명이 태동하는 것이 느껴지던 즈음이었죠. 다음해 봄이 되면 아기가 태어날 거였습니다. 서방님께선 낙방하지 않고 단번에 급제해 하루빨리 돌아오시겠다고 맹세하셨지마는, 어디 세상일이 자기 맘대로 되든가요. 저는 그때 이미 기다림이 길어질 수도 있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아기가 젖니가 나기 시작하고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도, 어쩌면...어미를 부르는 첫마디를 내놓았을 때도 못 돌아 오실지도 모른단 걸요. 하지만 서운한 속낼 내비치지 않고 고이 보내드렸습니다.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하시겠단 말을 철썩같이 믿었기 때문이죠.
서방님이 떠나고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세상은 하얗게 뒤덮였습니다.
저는 축시 무렵 잠에서 깨어,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터 오르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손 많은 집안이라면 식전바람부터 소란스럽기 마련이죠. 저는 곧 세숫물을 퍼 나르느라 소란해질 우물가를 상상하며 누워있었죠.
바로 그때 밖에서 작은 소리가 났습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였지요.
유달리 동물을 좋아했던 저는 동장군을 물리치고 찾아온 새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른 배를 손으로 가만히 감싸고 밖으로 나가보니 작은 새 한 마리가 옥빛 깃털을 뽐내며 조로롱거리고 있지 뭐예요. 분명 기억 속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탐나는 깃털을 가진 신묘한 새는 보기 드물었거든요. 태기를 느끼고 영험한 절에 치성을 드리러 갔을 적에 보았던 새였어요. 서방님은 부처님께서 우리 아기의 복을 빌어주러 보내신 거라고 하셨어요.
저는 서방님 생각에 반가워, 얼른 디딤돌 아래로 내려섰지요.
‘네가 여길 어떻게 찾아왔니?’
조로롱. 조로롱.
노랫소리가 아름다워 몰래 향낭에 감춰뒀던 주전부리를 꺼내 잘게 부숴 뿌려주었지요.
작은 새는 저를 한참 물끄러미 보더니 한입 한입 쪼아 먹었답니다. 옥빛 새는 그 뒤로 얼마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어요. 저는 그게 반가워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가 모이를 주었지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찬바람 쐬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일까요, 엿새되던 날 하혈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혼절한 동안 산파가 다녀갔지요. 불룩 솟았던 배는 평평하게 꺼져버렸답니다. 시모의 극진한 간호가 있었지만 저는 쉬이 일어나지 못했어요.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땐 새는 이미 떠난 뒤였어요. 축시가 지날 때면 저절로 눈이 떠지곤 했지만, 작은 새가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났으리라 생각하며 마음에서 애써 지웠지요.
그때부터 시모와 함께 가까운 절에 치성 드리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서방님의 안위와 금의환향하시길 빌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부처님께 절을 하는 동안에도 제 마음속엔 서방님에 대한 그리움보다 잃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컸답니다. 불룩한 배 때문에 우스운 모양새로 걸어 다니던 때가 그리워 홀쭉해진 배를 가만히 쓸어보았지요.
그리움이 점점 커져서
하루는, 저도 모르게 다시 아이가 살아 돌아오길 빌고 말았지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어요. 시모께선 비 오는 날에 준험한 산을 돌아다니면 기가 흐려진다고 하셨어요. 이대로 아낙네들끼리 산을 내려가긴 부정 탈 염려가 있으니, 하루 절에 묵어가자면서요. 시모께서 주지스님과 담소하시는 걸 기다리는 동안 무료함을 떨치려고 주위를 거닐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웬 삵 한 마리가 나타나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를 보는 삵의 눈이 신묘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를 찾아왔던 그 작은 새를 닮은 옥빛이었어요. 마치 따뜻한 곳으로 떠난 새가, 제가 혼자 외로워하는 걸 염려해 친우를 보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저는 부엌간으로 들어가 밥을 작게 뭉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때까지도 삵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보잘것 없는 음식이었지만 삵은 그것을 아주 맛나게 먹어치웠습니다.
‘아가. 썩 이리로 오거라.’
시모는 서늘한 얼굴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제가 얼른 곁으로 다가가자 시모께선 저를 절 안으로 데려갔습니다.
‘짐승에게 쉬이 마음을 줘선 안 되느니라. 특히 지금처럼 건강하지 못해 기가 약할 때에는 더욱 조심, 또 조심하여야 한단다.’
‘예, 어머님.’
그런데 어찌된 영문일까요.
그 삵이 저를 뒤따라 왔지 뭐예요. 참 기이한 일이었죠.
축시였어요.
작은 새가 조로롱 지저귀던 그 시간,
산짐승의 그르렁 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놀라 등불을 켜고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삵 한 마리가 옥빛 자태를 뽐내며 앉아 있더군요. 그날 보았던 그 짐승이 분명했습니다.
‘돌아가렴, 여긴 네가 있을 곳이 못된단다.’
부러 싫은 소리를 하며 손을 휘휘 내저어 쫓아내려했습니다. 그런데도 삵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놀라 도망가라고 문을 쾅 닫아버렸답니다. 몰래 빼꼼 내다보았더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조반을 짓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지만요.
삵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저를 찾아왔습니다.
작은 새가 찾아오던 것과 달리, 차츰 마음이 무거워지더군요.
보름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저는 결판을 지으려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삵은 가만히 앉아서 디딤돌 아래로 내려서는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정녕 내가 보고 싶어 찾아온 게냐. 난 너를 내쳐야할지, 거두어야 할지 모르겠다...서방님이 계셨더라면 너를 거두라 하셨겠지만 지금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
삵이 그 작은 코로 무언가를 쓱 내밀었습니다. 검고 동그란 열매였어요. 언뜻 콩처럼 보이기도 했답니다. 제가 절에서 밥알을 뭉쳐 주었던 게 떠올랐습니다. 아마 보답하려는 거였겠지요.
‘먹으란 거냐?’
제 물음에 답 할리 없던 짐승은, 재차 열매를 앞으로 쿡쿡 밀더군요.
‘이걸 주려고 예까지 따라온 거로구나. 난 것두 모르고 널 매정하게 대했으니....’
정체모를 열매를 먹기에 망설여졌지만 작은 벗의 선물을 받아야 축시의 방문이 종지부를 찍을 것 같아 입에 쏙 넣었답니다. 그저 시큼하고 달달한 맛이었어요. 산에 지천으로 대롱대롱 열린 나무 열매를 따다 입에 넣은 마냥, 토옥- 하고 혀 위에서 터졌답니다.
그것을 다 먹고 나자 삵은 만족스러운 듯이 자리를 떠났어요. 저는 그것으로 우리의 인연도 끝이라고 여겼답니다. 한편으론 다행이었고, 한편으론 아쉬웠지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다음날 일어나보니, 배가 묵직한 게 아니겠어요.
쑥 가라앉았던 제 배가 동그랗게 솟아올라 있었어요. 저고리 왼섶을 젖히고 아랫배를 만져보니 작은 둔덕이 만져졌어요. 마치 가여운 아기가 어미 품이 그리워 아기집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건 비단 제 기분만이 아니었어요. 매 달 찾아와야 하는 달거리가 끊어졌습니다. 배는 점점 모양을 잡아가기 시작했지요.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어요. 다른 사내를 불러들여 통정을 한 것도 아닌데, 지아비도 없이 홀로 배가 부른 아녀자의 말을 믿어줄 이가 어디 있을까요.
저는 내쫓길 게 두려워 시모의 눈을 피해 배를 꽁꽁 싸매었습니다. 끼니를 굶어보기도 하고, 밤중에 몰래 산에 올라가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모두 무용했습니다. 배는 점점, 더, 숨길 길 없이 크게 부풀어 갔답니다. 시모가 제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챈 것도 이상치 않았지요.
‘감히 네년이....!!’
시모는 저를 끌어내어 패대기쳤습니다. 매서운 눈길로 저를 쏘아보는 시모의 손에는 제 머리카락이 한움큼 쥐어져 있었지요. 그제야 비녀가 뽑혀 바닥을 나뒹굴고,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곧 저를 내치실 건 천치라도 예측 가능한 일이었죠. 저는 결백을 주장하며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시모는 이미 제가 사내를 끌어들여 통정했다고 결론내리신 모양이더군요. 제 목을 매달아 열녀문을 세우겠다고 길길이 날뛰셨어요. 저는 납작 엎드려 짓지도 않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싹싹 빌었습니다.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볏단이 옆으로 툭 넘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지요. 고개를 들어보니 시모가 쓰러져 계셨습니다.
‘어머님.....!! 정신 차리시옵소서!’
아랫것들을 불러 시모를 안채로 뫼시고, 다급하게 의원을 불렀지만 별다른 차도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사경을 헤매셨던 건 아니에요. 달리 이렇다할 증세도 없이 그저, 그저 누워만 계셨습니다. 오로지 자유로운 두 눈으로 저를 힐난하시면서요. 문안드리러 갈 때마다 절 벌레 보듯 바라보셨지요. 당장이라도 절 내쫓고 싶으셨을 겁니다.
천벌을 받을 얘기지만 시모께서 병중에 계신 것이 저에겐 다행이었어요. 때때로 시모의 눈빛이 괴로워 뛰쳐나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서방님이 돌아오시면....그분께서 오시면 모든 오해가 풀릴 테니, 꾹 참고 기다리기로 했지요. 서방님에 대한 애달픔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안도한 것도 잠시였습니다.
저 멀리 떠나셨던 시아자비께서 돌아 오셨으니까요.
시아자비는 병환으로 누워계신 시모를 보고, 아무리 꽁꽁 싸매도 감춰지지 않는 제 배를 보곤 저를 끌어내라 명하셨지요. 그리곤 무참하게 짓밟으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를 요물로 몰아세우며 문초를 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끼이익....쾅!
돌연 대문간에서 천둥이 쳤다.
박희완은 뛰어 들어온 무뢰배들을 쏘아보았다.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비단으로 지은 도포를 두르고 바다 건너에서 들여온 귀한 옥로를 갓에 달고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사내였다.
사내는 천지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크게 호통을 쳤다.
“예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늘어놓는 것이냐!”
그리곤 박희완을 향해 돌아서며 조금전의 무례를 사과했다.
“저 요망한 것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으셨는진 모르나, 필시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었을 터. 제가 진실을 말씀드리겠사옵니다.”
이로써 양측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박희완은 피곤함도 잊고 흥미롭게 사태를 관망하였다. 사내, 여인의 시아주버니 되는 김천주는 호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입장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여인이 해준 이야기와 거의 흡사했다.
후반부에 가선 큰 차이를 보였지만.
“이 모든 게 두 해 전의 일입니다.”
“이년전의 일이라함은......?”
여인의 부군이 한양으로 떠난 때를 말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박희완의 예상은 무참히 깨어졌다. 김천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쓰러지시고, 저것의 배가 혼자서 달덩이처럼 차오른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두 해 전이라는 뜻이옵니다.”
순간, 박희완의 머릿속에서 벼락이 치고 지나갔다. 시모가 일을 알아차렸을 때 여인은 이미 배가 만삭처럼 불러 있었다고 했다. 그게 두 해 전이라면, 저 뱃속엔 도대체
“허허!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오? 달을 채운 임부는 출산하기 마련이거늘!”
“저년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인의 거죽을 뒤집어쓴 요물이지요. 연락이 끊긴 제 동생도 저 년이 잡아먹은 게 분명합니다.”
그는 당장 여인을 패대기칠 기세였다.
“그쯤 하시오. 부인은 당분간 내 관리 하에 두겠소.”
“한고을의 원님께서 사악한 요물을 싸고돌겠단 말씀이십니까?”
“누구의 편도 아니오. 시일이 지나 부인께서 출산을 한다면 저절로 증명 될 것 아니겠소?”
“저 요물은 이미 두 해가 지나도록......!”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 가지오. 증명할 유일한 길은 기다림밖에 없소. 기일이 지나도록 출산이 미뤄진다면 그때야로 요물이란 게 증명될 터. 배의 모양을 보아하니 가까운 시일 내에 진실이 판가름 날 것이니, 선비된 자로서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아주시오.”
그리하여 여인은 박희완의 감시 하에 지내게 되었다. 김천주와 여인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일지는 여인이 출산을 하게 되면 증명될 터였다. 박희완의 마음은 반이상 여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임부가 열 달을 채우면 출산하는 건 자연의 이치였다. 사람에 따라 열 달에서 일찍 출산할 수도, 조금 늦게 출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를 두 번이나 넘길 때까지 뱃속에 품고 있는 건 불가능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하여, 박희완은 가여운 여인이 안전하게 출산할 때까지 감시를 가장한 보호를 해주려고 제 집으로 들였지만, 또 한편으론 등골이 서늘했다. 박희완의 눈길을 느꼈는지, 남들 보기에 민망해 숨고 싶었는지, 여인은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종일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여인의 낙이라곤 오로지 방에 틀어박혀, 배를 어루만지며
“아가야, 아가야....우리 아가야. 어서 빨리 세상에 나와 어미 설운 마음을 달래주렴.”
하고 읊조리는 것뿐이었다.
여인은 아사하기라도 하려는지 통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시름시름 앓아가고 있는 게 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볕을 쬐지 않아 허옇게 뜬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달포가 넘은 어느 날이었다.
그르릉대는 짐승의 소리가 여인을 잠에서 깨웠다. 여인은 무언가를 직감하고 차분히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하얀 털을 가진 늑대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무장한 병졸들로 가득찬 원님이 머무는 곳에 맹수가 숨어들어오다니, 이는 불가능했다. 늑대는 옥색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여인의 안색을 살폈다.
“또 너로구나. 매번 모습을 바꿔 찾아오지만 영혼이 같다는 걸, 내 느낄 수 있다.”
여인의 처연한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자신을 찾아오는 저 옥빛 동물들이 범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요물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었다. 매번 다른 짐승의 모습으로 찾아왔지만 같은 놈이었다. 동물의 작은 육체론 요력을 버텨내질 못하는지 이 몸 저 몸으로 갈아타고 있었다.
늑대는 어디서 났는지, 웬 고깃덩어리를 물고 있었다. 여인에게 먹으라는 듯이 앞에 툭 떨어뜨려놓았다.
“나를 살리려는 게냐?”
사냥해온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먹으려고 손질해 놓은 질좋은 고깃덩어리를 어디서 났을까.
“시모께서 짐승에게 정을 줘선 안 된다 하셨거늘, 어쩌면 난 요물한테 정을 주어버렸는지도 모르겠구나. 저리 가거라. 이제는 네가 원망스럽다.”
툭.
늑대가 고깃덩어리를 앞발로 툭 차댔다. 어서 먹으라는 듯이. 여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그저 멀리 떠나고 싶구나. 그만 평온을 찾고 싶어. 아기가, 서방님이 보고파.....그리워.....이대로 삶을 놓아버리고 싶구나.”
늑대는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찾아왔다.
모두 잠든 축시에 찾아왔기 때문에 맹수의 방문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여인만이 잠에서 깨어나 늑대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이었다.
늑대가 물고 온 것을 여인 앞에 내려놓았다. 배내옷으로 감싼 무언가였다. 그 배내옷이 무척 낯이 익다.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얕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이건.....이건......”
선산에 묻혀있어야 할 아기의 시신이었다. 배내옷을 손수 지었으나, 사산된 채로 세상에 나온 아기는 어머니가 지은 옷을 입을 수 없었다. 그게 배냇저고리를 입혀 묻었던 까닭이다.
‘아기가, 서방님이 보고파.....그리워.....이대로 삶을 놓아버리고 싶구나.’
여인은 자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두 그 때문이다. 제 입으로 그립다 했기 때문에 가여운 아기를 파헤쳐 물어온 것이리라.
“썩 물러가라, 이 사악한 것!”
여인은 “서방님, 서방님”하며 먼 곳에 있는 지아비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 바람에 박희완을 비롯한 사람들이 잠에서 깨 우르르 몰려 나왔다. 나와 보니, 여인이 아기 옷을 끌어안고 혼절해 있었다. 아기 옷 안에는 작은 아기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여인이 사산한 아기가 분명했다. 어찌된 영문일까. 제대로 먹지도 못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여인이 산을 올라가 시체를 파내는 건 불가능했다. 박희완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 깊은 고뇌에 빠졌다.
여인은 꼬박 이틀을 고열에 시달렸다.
박희완은 이틀 밤을 몸을 숨기고 사건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그는 직감적으로 여인을 중심으로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기 시체를 파내서 어미 앞에 던져주다니, 사람의 짓인지 요물의 짓인지는 모르나 잡아내고 말 터였다.
그가 밤새 여인의 방 앞을 지키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때였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흙 위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피니 물기 묻은 발자국이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네 이놈!!”
박희완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비대한 사내가 여인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여인의 얼굴을 온통 적시고 있었다. 사내는 머리칼은 물론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물에서 건져낸 사람처럼.
박희완은 입을 틀어 막았다.
“....우욱....”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바로 이러했다.
그는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내는 박희완이 나타났는데도 신경쓰지 않고 여인의 위에서 고요히 서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비대한 게 아니라 퉁퉁 불어 있었던 거였다.
장마철이면 종종 저렇게 퉁퉁 불은 시신이 물 위로 떠오르는 일이 벌어졌다.
박희완의 팔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저 사내는 살아있는 게 아니다. 익사한 모습이었다. 언제 익사했는진 모르지만 가까운 시일은 아닐터였다. 이미 부패가 진행되어 반은 썩어버렸고,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으흐흑......”
어느새 깨어난 여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기 위에 올라탄 시체의 끔찍한 몰골에 놀란 여인이 도와달라 요청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인은 가만히 손을 뻗어 시체의 얼굴을 쓸어 내렸다. 불어터진 살점이 고름과 함께 투둑, 투둑 떨어졌지만 여인은 개의치 않았다.
“서방님.....어쩌다.....어쩌다 이리되셨습니까.....”
서방님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몸은 차디 차가웠다.
여인은 서방님을 찾으며 울부짖었드랬다. 요물은 여인이 입 밖에 내놓는 대로 바람을 이루어주고 있었다. 여인이 적적해하면 찾아와 노랫소리를 들려주어 쓸쓸함을 달래주고, 여인을 내쫓으려던 시모를 쓰러뜨려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 시름시름 앓아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들을 데려왔다.
모두 뱃속에 들어있는 ‘그것’ 때문일 터였다.
사람의 씨라면 진즉 태어났어야 할 뱃속의 ‘그것’ 때문에.
처음 여인이 태기를 느끼고 절을 찾았을 때부터 뱃속을 차지하려 노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원래 들어있던 아기를 밀어내고, 자기가 안에 들어앉기 위해서.
그러나 여인이 그리워한 건 이미 썩어버린 시신이 아닌, 응애 울음을 터뜨리며 젖을 빨아댈 살아있는 아기였다. 여인이 보고팠던 건 퉁퉁 불은 시체가 아닌 살아있는 지아비였다. 금의환향해 돌아와 그간 마음 고생했을 부인을 꼭 안아줄 지아비의 따뜻한 품을...
여인은 이제야 깨달았다. 제 뱃속에 있는 것이 서방님과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가야, 아가야....소중하게 쓰다듬고 보듬으며 키워낸 아기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순간, 박희완의 칼이 번쩍거리며 검광을 토해냈다. 여인은 번쩍거리는 빛이 눈부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의 몸은 허망하리만치 쉽게 허물어져 내렸다. 여인은 제 위로 쓰러지는 서방님의 몸을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그렇게 일단락되는 줄 알았다.
박희완이 직접 목격한 바로는 여인 또한 요물에게 홀린 피해자였다.
여인의 결백이 밝혀졌기 때문에, 박희완은 날이 밝는 대로 김천주를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마음먹었고 침소로 들었다. 그런데 동이 트기도 전에 몸종이 박희완을 급히 깨웠다.
“나으리. 나와보십시오.”
“왜 그러느냐. 혹, 부인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냐?”
“그것이......밤사이 목을 매다셨습니다.”
“뭣이?”
“쇤네가 발견했을 땐 벌써 숨이 끊어져있었습니다. 짐승에게 당했는지 배에 휑하니 구멍이 뚫려서는...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대체 어디에서?”
“성황당 나무에 붉은 천이 이리저리 나풀대고 있어서 가까이 가보니, 웬 여인의 몸이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습니다요. 하얗던 소복이 온통 붉게 젖어선....멀리서 봤을 땐 영락없이 늘어진 천처럼 보였던 거예요.”
“아기는, 뱃속 아기는 어디로 갔느냐. 시신이 그 자리에 있더냐?”
몸종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얼굴이 핼쓱해져 있었다.
“잡아먹힌 건지 짐승의 발자국만 동그랗게 점점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더냐?”
“산으로.... 산으루 이어져 있었습니다.”
몸종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송구스럽다는 듯 말을 더듬더듬 이었다.
“그런데 나으리, 참 이상스러운 게.... 어찌된 영문인지,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그 모양이 꼭 갓난아기의 손바닥, 발자국 모양이지 뭡니까요."
"........."
"마치.....,, 마님의 배를 찢고 나와 산으로 기어간 것처럼 말입죠.......”
/
시대물이라서 어색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ㅠㅠ
단편이라 하기엔 좀 길지도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