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히 알아들어 놓고도 “에?” 반문이 나왔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는 “밥이요. 밥.” 두 차례 연달아 물었다. 다 들린다.
한 번만 말해도…. 방에 널브러진 3분 카레며 햇반 따위를 돌아보았다. 이젠 레토르트 식품을 보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날판이다.
그가 무슨 음식을 준비해 왔을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 되고 싶지 않아 금방 다시 대답했다.
“밥은 괜찮아요!” “그동안 굶은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먹을 거 여기 다 있어요.”
바스락 거리는 봉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입 안에 침이 가득 들어찼다.
“별건 아니지만, 요 앞에 빵집에서 샌드위치랑 우유 좀 사왔어요. 미안해요, 괜히 귀찮게 해서.”
샌드위치? 먹고 싶다. 방부제 첨가되지 않은 음식이 얼마만인가.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 봉투를 빼앗고만 싶다. 하지만 무슨 염치로. 어제 내 손에서 흘러내린 볼펜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무슨 생각으로 볼펜을 손에 쥐었는지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겁줘서 미안해요. 그럴 생각 아니었어요.
가슴이 내려앉는다. 그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사과를 하려면 문을 열어야 하지만, 문을 여는 건 또 겁이 났다. 미련하다. 곰 같다. 미련 곰 같다. 문 밖에 비닐봉투가 바스락바스락 하더니,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란다 즘까지 나가서 소리치듯 하는 소리였다.
“저 멀리 있으니까, 문 앞에 샌드위치 드시려면 드셔도 괜찮아요.”
아아, 나는 왜 저 사람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까. 그의 호의가 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불안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심호흡 했다. 내 방에 한 구석에 있는 모나미 볼펜이 보였지만 무시해버렸다. 방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문 열었어요?”
그는 보이질 않았다. 내 방 문 앞에는 천정부터 바닥까지 닿는 커튼이 처져있다. 나와 그의 사이에 두꺼운 커튼 벽이 생긴 것이다. 그의 배려일까. 그가 다시 소리쳤다.
“얼마나 지나야, 대화를 좀 해볼 수 있을까요?” “……하실 말씀이 뭔데요?” “가까이 가도 될까요? 커튼 안으론 안 들어갈게요.”
집주인을 위한 배려는 내 쪽에서 해야 맞는 것이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는 고작 의심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 정도였다.
“괜찮아요….” “예?” “괜찮아요. 가까이 오셔도.”
그는 커튼 앞에 와 앉았다. 거실에서 쏟아지는 빛에 의해 그의 실루엣이 은근히 커튼에 그려진다.
“커튼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커튼은 왜 치신건가요?”
그의 코웃음이 들렸다. 커튼의 실루엣이 자신의 턱을 어루만진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 한숨처럼 이야기를 했다.
“저는 인테리어 업자에요. 실내 디자인과 공사 두 가지를 전부 하는 사람이죠. 아! 샌드위치 드세요. 지금 막 만든 거라서 더 맛있을 거예요.”
그도 나의 실루엣이 보이는 걸까. 대답 없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는 빠르지 않게 이따금 이해가 되나요? 아시겠어요? 되 집어가며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자신이 집을 꾸며 파는 방식이며 자기 자신이 특히나 좋아한다는 벽지와 고급 필름지의 질감. 집과 선의 만남과 공간과 식물의 조화. 창문과 빛과 주거공간의 멋들어진 세계관.
그는 이 집을 새롭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같은 모양 같은 공간 안에서 펼칠 수 있는 마법 같은 설명들로 그는 가슴을 벅차했다.
“이 집을 꾸미기 위해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신이라고 하기도 뭐하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수연이요. 차 수연.”
이 집을 꾸미기 위해, 내가 방 밖으로 나와 주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 그의 설득이었다. 나와 함께 방 밖으로 나오는 일에 힘써주세요. 돕겠습니다.
내쫓는 게 아니라, 당신을 그리고 저를 위해 우리 힘써요. 그런 설득이었다. 그는 조바심 내지 않으며 천천히 말했다. 상냥한 말투가 가슴을 울린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이 커튼은 벽 대신입니다.” “어떻게 커튼이 벽을 대신하죠?” “그렇군요. 벽보단 문이네요. 이 커튼이 수연 씨의 새로운 방문입니다. 앞으론 이 커튼 안의 모든 공간이 수연 씨의 방문이고요.”
조금은 어설펐지만, 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방을 정식으로 넓혀 주었으니, 이전까지의 방문쯤은 넘어 올 수 있을 거다.
내가 이 집의 주인이니, 내가 당신의 방을 할당하겠다. 그러니 방문을 나서보아라. 하는 시늉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상냥하게 나를 설득해 줄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어설펐지만, 그가 설치한 커튼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가 고마웠다. “한 번 해보실래요?” 하며 그가 물었다.
커튼이 동그랗게 처져있는 공간 안으로 내 방과 안방. 그리고 꿈에 그리던 욕실이 있었다. 꿈에 그리던 샤워기. 꿈에 그리던 물줄기. 눈을 감고 그 시원한 감촉이 얼굴을 때리는 것을 상상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수건 좀 있을까요?” 물었다. 그는 “욕실 안에 다 있어요.” 대답했다. 그리고 금방 덧붙여 말했다.
“이게 안 된다면 우리, 방의 벽을 부숴 봐요.” “예?” “하하하, 문 같은 게 없다면 못 나온 다는 것도 논리에 어긋나지 않을까요?”
벽을 부숴 버린다? 생각도 못해봤다. 내 방의 문과 벽은 그저 그 곳에 있어 존재하는 것이지, 부수고 지우며 재구축 되는 것이라 생각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과연 인테리어 업자다운 말솜씨다.
몇 마디 말로, 내 방을 네 배나 늘려버리고, 같은 공간의 세 가지 방을 하나로 묶어버렸으며, 내 방과 문을 허물어트렸다. 그래서인지, 정말 커튼 안의 모든 공간이 내 방처럼만 느껴졌다. 마음이 포근했다. 이전까지 없던 깊은 안도감이 몸을 감싸왔다.
“저는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해요. 혼자서 자기 방 정도는 한 번 돌아다녀 보세요. 새로 꾸며 드린 방이니까요.”
꾸며드린 방? 그는 공간의 마법사가 아니라 언어의 마법사라도 되는 걸까. 사람을 쉽게, 쉽게 설레게 만든다. 이다음은요? 그 다음은요? 또 있어요? 더 줄 건가요?
자꾸만 묻고 싶어진다.
그가 떠나고 방문턱에 발목을 올려놔 보았다. 아직 깜빡… 하는 징조는 보이질 않는다.
다리를 문턱에서 빼고 욕실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꿈에 그리던 욕실이 보이고 있었다. 고갤 돌려 커튼을 올려다보니 집주인의 말이 메아리친다.
“이 커튼이 수연 씨의 새로운 방문입니다.”
빼꼼히 내민 머릴 따라서 오른 팔을 가만 밖으로 뻗어보았다. 깜빡… 하지 않는다. 내친김에 오른 다리도 문턱을 넘겼다. 몸의 거진 반이 문턱을 넘었다. 벽을 잡고 똑바로 일어났다. 방 안에 있던 왼쪽 다리를 오른 쪽다리와 교차시키며 거실로 내딛었다. 아직도 깜빡… 하지 않는다.
“거짓말….”
숱하게 시도하고 또 실패했던 것들이 거짓말만 같다. 나머지 왼팔을 잡아 빼자, 드디어 몸이 방 밖으로 완전히 나왔다. 허탈했다. 허탈하고 기뻤다. 허탈하고 기뻐서 기가차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집주인이 오면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할까.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욕실의 문을 열자 상콤한 비누향이 진동했다. 눈을 감고 그 그리웠던 비누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꾸며준 방은 안방일까? 당장 안방으로 가보려 휙 몸을 돌리는데, 끈적거리는 머리칼이 찰싹하고 뺨을 때렸다.
긴 머리칼을 뒤로 젖히고 옷을 벗어 던졌다. 허물을 벗듯 옷을 팽개치며 욕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먼저 할까? 샤워기 앞에 서서 몸을 먼저 적실까?
집게손가락으로 세면대의 물 손잡이를 툭 처서 올렸다. 솨 하는 물소리가 욕실을 가득 채운다.
물줄기에 오른손을 태우니 미지근한 물이 손을 감싸며 흘러내린다. 세면대의 물을 잠구고 샤워기를 틀었다. 욕실 바닥으로 비가 내리는 듯하다.
처음엔 왼손을 그리고 오른손을 물에 적셨다. 미지근한 물이 은근하게 시원한 것이 청량감이 느껴진다. 수십 가닥의 물을 뿜는 샤워기 밑으로 들어가 머리를 적셨다. 끈적거리는 머리칼을 따라 물줄기가 무수히 갈라지며 몸을 타고 흐른다.
머리끈을 풀었다. 두꺼운 머리칼이 마치 한 묶음처럼 느껴진다. 그 묵직하고 두꺼운 한 올의 머리칼은 철썩하며 허리를 감았다.
샴푸를 다섯 번을 짜내어 머리를 빨았다. 다섯 번을 짠 샴푸도 모자라 다섯 번을 더 짜내어 머리에 덧발랐다. 빳빳하고 거칠던 머리칼이 점차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감긴다.
머리에 잔뜩 샴푸를 묻힌 채 온 몸을 바디샤워로 도배했다. 집요하게 온 몸에 거품을 만들었다. 거품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세면대에서 세수를 했다.
얼굴에 뽀득뽀득 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몇 번이고 비누와 헹굼을 반복했다.
샤워기로 샴푸와 바디샤워를 말끔히 지워냈다. 지워내고도 한 참을 물줄기 앞에 서선 시간을 보냈다.
맨살 위에 또르르 흐르는 물방울들이 정겹다. 샤워기를 끄고, 거울 앞에 섰다. 말끔한 내 모습이 거울에 비춘다.
조금은 살이 빠졌을까. 전에는 갈비뼈가 이렇게 도드라져 보이진 않았던 것 같다.
머리를 말리는데 수선 한 장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세 장 째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욕실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얼어버렸다.
“다 씻었어요?”
집주인이 소리쳤다. 거실 바닥에 냉큼 주저앉으며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커튼이 원래 자리가 아니라 저 멀리 현관에 가서 달려있다. 집주인은 그 커튼 밖에서 소리치고 있는 듯 했다.
“아무래도 방이 좀 좁을 것 같아서, 더 넓혀봤어요. 문을 여기에 달아봤는데? 어때요? 괜찮나요?”
집 전체를 내 방이라 주장하고픈 그의 설득은 잘 알아듣겠다. 하지만 지금은 맨몸이었고, 아직 물기를 말리지도 못했다.
“혹시 다시 방 안으로 몸이 이동해 버린 건 아니죠?! 괜찮아요?!” “느느느 네! 거기에 가만 계세요! 들어오시면 안 돼요!” “당연하죠. 천천히 하세요. 저는 점심이나 좀 사올게요.”
샌드위치 먹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안았다. 점심은 너무 이른 것 아니야? 생각이 들면서도 임에 침이 고인다. 뭘 사올까? 말리고 싶지 않다.
그가 현관문을 닫으며 떠나는 소릴 듣곤 얼른 방에 들어가 옷을 주워 입었다. 머리를 아직 한참은 더 말려야 했지만, 일단 뽀송뽀송한 새 옷을 입고 싶었다.
집주인이 곧 돌아올 테니 브레지어도 입어야 했다. 오랜만에 입는 브레지어의 압박감이 거슬리면서도 반가웠다.
그동안 열지 않았던 옷장을 열어 흰 면 티셔츠 한 장과 암갈색 면바지를 꺼내 입었다. 내 방 전신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니, 드디어 좀 거지같지 않고 사람다웠다.
아직 스물일곱 먹은 여자사람. 그렇게 생각하자, 자기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왈칵 눈물이 터지지만 동시에 기쁘고 또 고마운 마음도 가슴에 일었다.
집주인이 돌아오면 뭐라고 고맙다 전해야 하지? 나는 그에게 도대체 얼마만큼의 빚을 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