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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47336
    작성자 : 뿡분
    추천 : 28
    조회수 : 2250
    IP : 112.146.***.64
    댓글 : 8개
    등록시간 : 2013/05/11 01:56:53
    http://todayhumor.com/?panic_47336 모바일
    단편] 네가 사는 세상

     

     

    <네가 사는 세상>

     

     

     

     

     

    나하고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목이 훤히 드러나는 앙증맞은 드레스를 입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상의에 회색 치마로 된 교복을 입은 나와는 달리, 파스텔 톤의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에게선 상쾌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며 난생처음 교복이란 걸 입어봤을 때, 나는 공주님의 드레스라도 입은 기분이 들어서 몇시간이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었다. 그때 내가 바랐던 건 바로 저런 원피스였다. 저런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고 상상했다. 아름답고 섬세한, 소녀라면 누구나 꿈꿔볼만한 옷. 그러나 단지 다른 옷을 입고 있어서 우리가 달라보인다고 납득하기엔 무리였다. 마치 그녀 주위에만 흐르는 것 같은 저 산뜻한 공기는 어떻게 설명할까.

     

    그녀는 멍하니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로 걸어와서 “안녕?”하고 싱긋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넌.....누구야?”

     

    나는 뒤로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저 손을 잡을 수 있을 리 없다. 오히려 도망치고 싶었다. 나하고 똑같이 생긴 여자애라니 소름이 쭈뼛 끼쳤다.

    그녀는 책가방 끈을 꽉 쥔 채로 굳어버린 내 손을 끌어당겨서 부드러운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손은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보드라웠다. 뿐만 아니라 내리쬐는 늦여름의 햇살을 받은 뺨과 이마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 보이는 투명한 피부엔, 사춘기를 맞은 소년소녀라면 누구나 고민거리로 삼을 여드름이나 피부 트러블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긴 속눈썹은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 그녀가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공작의 꼬리처럼 가볍게 올라갔다 내려앉길 반복했다.

     

    “나는 너야.” 

    “나....라고?”

    “나는 너고. 너는 나야.”

     

    생김새는 똑같았지만 그녀와 나한테서 풍기는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처럼,

    인간이 똑같이 열개의 손가락 발가락과 눈코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구분지어지는 것처럼,

    그녀와 나는 어떠한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첫만남에서 그 차이점을 눈치챌 수는 없었다. 나는 다만 그녀의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움과 가녀린 실루엣에 사로잡혀 있느라 바빴다.

    어째서 저런 사람하고 내가 얼굴이 똑같은 걸까. 일란성 쌍둥이라면 가능할 일이지만 부모님은 단 한번도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외동딸로 태어나 쭉 자라왔기 때문에 숨겨둔 자매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백일 사진이나 돌 사진을 봐도 나는 혼자였으니 말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생겨났을 때부터.”

    “우린 쌍둥인 거야?”

     

    그녀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짧게 쳐올린 단발머리가 찰랑찰랑 보기 좋게 흔들렸다. 나는 그 모습에 또한번 넋을 놓았다. 마치 이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손짓 하나, 목소리 하나까지도. '우리'라는 단어를 똑같이 발음했는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깊이 있었고 우아한 데가 있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건 외모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얼굴이야 매일 매일 수도 없이 거울을 통해 봐왔던 내 얼굴이었으니까. 그녀가 풍기는 저 분위기는 그녀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듯했다. 나에게는 없는 그녀의 영혼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울해졌다. 나는 저 사람하고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렇게 못났는데. 

    나는 그녀가 꼭 잡고 있는 내 손을, 내 손 위에 포개진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기 손으로 세수 한번 해보지 않은 것처럼 희고 뽀얀, 갓난아기의 살결처럼 보드라운 손이었다. 단정하게 손질한 손톱은 건강한 엷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왜....난 처음 알았을까? 쌍둥이가 있을 줄은 몰랐어.”

     

    그녀는 대답없이 빙긋 웃었다. 고개를 드니, 어딘가 싸늘한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 싸늘함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찰나, 그녀가 불쑥 제안을 하나 했다.

     

    “어때? 우리, 서로의 인생을 살아보는 거야.”

    “서로의 인생....?”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거지.”

     

    새삼스레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훑어보았다.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는 머릿결도,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큰 두 눈도....누가 봐도 유복한 집안에서 화목한 가정 속에서 자라나 곱게 키워진 소녀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지금 내 친구들이 그녀와 나란히 선 내 모습을 본다면, 우리가 쌍둥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얼굴도 똑같고 키도 똑같은데도, ‘누구야?’하고 물을 테지. 여드름투성이에, 주근깨에, 학교와 집만 오가면서 지내느라 햇빛 볼 틈도 없어서 거뭇한 눈밑까지...나하고는 너무 다른 사람이니까.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게 가능할까?”

     

    쌍둥이라고 해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몸 안에 깃든 영혼은 다를 테니까. 그래서 ‘나는 너고, 너는 나야’라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의 부모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우리를 따로 키우고 있다는 가정 하에도, 자기 딸을 못 알아볼 리 없다. 이렇게나 다른데.... 하루 아침에 저 싱그러운 피부가 여드름으로 뒤덮힐리 없고, 내 빳빳한 머리칼이 저렇게 윤기를 머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남이면 몰라도 부모라면 분명히 눈치채고 말 터였다.

     

    “걱정 하지마. 너는 나고, 나는 너니까. 아무도 모를 거야. 우리들 밖에는.”

    “하지만.....엄마가 걱정하실 텐데.....혹시 들키기라도 하면....시험기간이라서 학교도 가야되고...”

    “그럼 하루만. 딱 하루만 바꿔보자.”

    “하루?”

    “응. 하루니까 별로 문제될 거 없겠지?”

    “하루라면......”

     

    어차피 평일엔 부모님 모두 밤이 늦어야 퇴근하시는데다가, 학교는 시험 기간이었으니까 친구들한테 노출되는 시간도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다시 나를 부추겼다.

     

    “서로의 인생을 살아보는 거야.”

     

    나는 조금씩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잘됐다”며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이 황당한 일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넓은 정원까지 딸린 단독주택에는 그녀를 위한 넓은 방이 꾸며져 있었고, 옷장을 열면 그녀가 입고 있던 원피스와 비슷한 옷들이 옷걸이마다 차지하고 걸려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창문을 열면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거였다.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상쾌한 바람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척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어떻게 된일인지 내 어머니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내 어머니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에, 나를 '딸'이라 부르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엘리스처럼 나도 이상한 세상에 들어오게 된 모양이라고 이왕 이렇게 된거 즐겁게 시간을 보내자고 속편하게 생각해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와 똑같은 부분은 얼굴 밖에 없었다. 나와 그녀처럼.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집에 돌아온 나를 걱정하며 안색이 좋지 않다고 죽을 끓여 줄 정도였으니까. 언젠가 고열로 밤새 끙끙 앓고 등교했다가 학교에서 쓰러져 구급차로 응급실에 실려가고서야 슬며시 나타나 “그렇게 아팠으면 말을 하지”라고 내게 상처주었던 내 무심한 어머니와는 딴판이었다.

    내가 잠이 들때까지 침대 옆에 앉아서 이마에 물수건을 대어주던 어머니는 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방에서 조심스레 나갔다. 밖이 소란스러운 게 아버지가 퇴근한 모양이었다. 설마 아버지도 똑같을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1층으로 슬금슬금 내려갔다. 계단에서부터 부모님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늘 언성을 높여야만 대화가 가능했던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저렇게 조근조근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하는 게 가능했던 거구나, 하고 깨달으니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다. 나는 벽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그녀의 앞날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들의 인생은 오로지 딸을 위해 존재하는 것마냥, 숨 쉬는 사소한 행동조차도 그녀를 위하는 일이어야 된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질투심이 명치를 치고 올라왔다.

     

    그녀가 여태껏 받아온 사랑은 내가 받아야할 사랑이었다.

    그녀가 차지한 이 삶은 내가 받아야 할 거였다.

    어째서 우리는 함께 자라나지 못한 걸까.

    왜 나만 그 불운한 삶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걸까.

     

    재개발 이야기가 나도는 오래된 아파트에 있는 우리의 작은 집은,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이 집에 놀러온다고 하면 어쩌지, 하고 전전긍긍하게 만들었고, 아침저녁으로 겨우 얼굴이나 잠깐씩 보고 사는 맞벌이 부모님, 그리고 생일조차 챙겨주지 않는 그들의 무심함은 진즉 이골이 난 터였다.

    갑작스레 그녀의 삶으로 떠밀려 든 나는 마치 난생처음 사탕을 맛본 아이 같았다. 빼앗기기 싫어. 더 먹고 싶어, 조금만 더. 나는 이 삶을 도로 뺏기기 싫어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하지만 약속한 하루는 금세 지나갔고, 그녀는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주 낯익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내 교복이었다. 갈색 상의에 회색치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저 교복도 그녀가 입고 있으니 마치 맞춤복처럼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나와 비슷한 길이의 짧은 단발머리조차도 그녀가 하고 있으니 값비싼 헤어샵에서 다듬은 것처럼 보였고, 신고 있는 신발조차도 값비싸 보였다.

    나도 그런 집에서,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저렇게 반짝반짝 빛날 수 있었을 텐데.

     

    “안녕?”

     

    그녀는 처음 만났을때처럼 희고 고른 치아를 보이며 미소 지었다.

    나도 그때처럼 주춤 뒷걸음질쳤다.

     

    “하루가 지났어.”

     

    하루만 더 바꾸고 싶어. 딱 하루만 더 행복하게 해줘, 하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말들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고 덩어리진 채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내 불행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간 두 번 다신 원래의 삶으로 돌아오기 싫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나와 바꾸자고 했을까? 내 비참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려고?

    너는 도대체 누구지? 어디서 나타난 거지?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내가 묻는다면 그녀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대답할 테니까. '나는 너고, 너는 나야' 라고.

     

    “응.......”

     

    “정말 재미있었어, 네가 된 시간은. 너무 행복해서 꿈만 같았지.”

     

    “그래....? 그게 마음에 들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부모님은 9시가 넘어서야 퇴근해 들어와 각자 자기 할 일에 바빠서 너의 하루일과를 물어볼 시간도 없었겠지. 반가운 마음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관심은 있지만 어느새 훌쩍 자라나 사춘기 소녀가 된 딸의 변화를 지켜봐줄 관심은 없었겠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녀와 내가 뒤바뀌었다는 걸 눈치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거짓은 이만큼도 없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하루의 일탈이야 재미있었겠지. 다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집에서 살고 있는 주제에, 내가 된 시간이 행복했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안녕. 또 보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작별인사를 고했다. 나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그랬다간 내 영혼이라도 팔아, 서로의 인생을 바꾸어 살자고 매달릴 게 분명했으니.

     

     

     

     

     

    그녀가 다시 찾아온 건 한달 뒤였다.

    그녀는 처음 나타났던 그때처럼 예쁜 원피스를 입고 그림처럼 조용히 서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빙긋 웃었다. 나는 별로 웃을만한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쌀쌀맞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모른척 가버리는 거야?”

     

    “왜 왔어?”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비참했으며, 그녀의 삶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었다.

    그녀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우리, 또 바꿔볼까?”

     

    “.......뭐?”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나는 내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뛸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이번에는 좀 길게.”

     

     

     

     

     

     

     

     

    그 후로 2년 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처음 1년동 안은 언제 그녀가 다시 나타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할지 몰라서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하고 숨어지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그녀가 내 인생에 완전히 적응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내 인생을, 정말 마음에 들어하는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1년이 넘도록 나타나질 않는 거겠지. 그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그녀의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주었고, 아주 사소한 행동에도 크게 감동하며 큰 상을 주었다. 그런 부모 밑에서는 없는 재능도 피어나고, 나쁜 성적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수직으로 상승했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일만이 생각하면 됐다. 가지고 싶은 건 모두 가질 수 있었으며, 받고 싶은 사랑은 단지 쳐다보기만 하는 걸로 충족되었으니 더이상 바랄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원래 부모가 그리웠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좁아터진 아파트, 밤중에 옆집에서 말다툼이라도 하면 우리도 똑같이 밤을 새야되는 그 지옥같은 집에서 벗어나 이렇게 안락하고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다니. 이전의 그 끔찍한 삶이 그리울 리가. 그립긴 커녕 오히려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혐오스러웠다. 부모도, 학교도, 친구들도, 어린시절의 추억도 모두. 그동안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스무 살을 앞둔 어느 날,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들떠서 친구들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때였다.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돌아온 나는 집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보아도 그녀인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얼굴을 잊을리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나하고 완전히 똑같았으니까.

     

    “네, 네가 왜....”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가, 초췌한 몰골로 그곳에 서있었다.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에 찰랑대는 머리칼을 흩날리던 그녀가 후줄근한 셔츠에 바지를 입고 낡은 운동화를 끌고 나타나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를 옆으로 젖히며 빙긋 웃었다. 그럼에도 행복해보이는 저 미소는 뭐란 말인가. 나는 달려드는 벌레를 쫓아내듯이 손을 붕붕 휘저으며 그녀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저리가...왜 나타난 거야?!”

    “약속했던 시간이 됐어. 원래대로 돌아갈 시간이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뺏으려고 하는 거야!”

     

    "'이게' 너야."

     

    그녀가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게 나라고? 저런 게? 싫어...

     

    “이게 네 삶이야. 그게 내 삶이었고. 그러니까 내가 빼앗아 가는 건 없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야.”

     

    “아니야, 아니야, 그런거 필요없어! 네가 다 가져!! 나는 필요없으니까 네가 다 가지라구!!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행복했다고 했잖아!!!"

     

    정말? 하고 물으며, 그녀가 다시 빙긋 웃었다.

     

    그 순간 어둠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내 몸을 집어 삼켰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붙잡힌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비명을 쉴새 없이 질렀지만 목소리마저도 잡아먹혔는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녀를 처음만난 그 때로 돌아가 있었다.

    갈색 상의에 회색 치마로 된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꽉 쥐고는 학교 근처 골목에 서있었다.

    시험기간이라서 학생들이 모두 일찍 귀가한 학교 주변은 무척 한가로웠다. 지나는 행인 한명 없는 골목에는 오로지 나 홀로 우뚝 서있었다.

    발끝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내 원래 모습보다 훨씬 길었으며 조금 더 날씬해보였다.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그녀의 집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이 살던 집. 무작정 그곳에 찾아갔지만 낯선 사람이 문을 열며 "누구세요?"하고 물었다.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벽에 걸린 가족 사진에는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이 단란하게 모여 앉아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그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 어느곳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홀연히 나타났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몇시간을 헤매다가 내 원래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세상에 내가 '나의 집'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그곳으로.

    우중충한 회색 벽으로 된 아파트는 공동묘지의 비석처럼 우뚝 서있었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훅 맡아지는 곰팡내가 숨통을 조여왔다.

    집으로 돌아오기는 아주 쉬웠다. 열쇠는 여전히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꺼내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가족 사진은 현실감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이게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과 부유하고 다정한 부모님이 아니라,

    가난하고 일상에 찌들어있는, 나를 사랑할 시간조차 없는 부모님이 있는 게 나의 세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허덕이며 울기 시작했다.

    저녁이 돼서야 돌아온 부모는 무슨 일이냐며 닫힌 방문을 두드려댔지만 나는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며 귀를 틀어막았다.

     

    "죽어버리고 싶어. 다 끝내버리고 싶다고! 당신들이 미워! 내가 미워!!! 태어나지 말았으면!!!"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다면!!!"

     

    나는 그녀를 증오했고, 부모를 증오했으며,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를 증오했다. 나의 삶을.

     

    드르륵.

     

    베란다 문을 열자 거센 바람이 불어와 몸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10층이 넘는 그 아찔한 높이에 무릎이 휘청거렸지만 심장은 어서 뛰어내리라는 듯 쿵쾅거리며 뛰었다. 

    내가 방에 딸린 베란다 앞에 서있는 줄은, 부모님은 꿈에도 모르겠지. 방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느라 바빴으니까.

    이제와서 관심있는 척 하는 거야? 왜, 내가 사랑을 바랄땐 사랑해주지 않고.

     

    발 밑이 가벼워졌다. 나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치마가 정신없이 나풀거렸다. 속도에, 바람에 못이긴 치마가 벌렁 뒤집어 졌다. 하지만 그것을 손으로 가릴 시간 따윈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것으로 끝이었으니까.

     

     

     

     

     

     

    * *

     

     

     

     

     꿈을 꾸었다.

     아니, 꿈에서 깨어났다.

     아주 오랜 꿈을 꾼 기분이었다.  

     

     '이제 알겠지? 네 미래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녀였다. 나의 쌍둥이, 나의 반쪽.

     태어나면서부터 육체가 이어져 있었던, 육체도 영혼도 떨어질 수 없는 단짝으로 태어난 나의 '동생'

     나와 똑같은, 아름답지만 싸늘한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조금 전에 꾼 꿈들은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을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꿈속에서 우리는 십대 소녀들이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갓난아기처럼 작고 유약한 손가락들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쿡 찌르는 것도 같았다. 도움을 청하는 내 눈빛을 읽을 수 없는지, 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을 빛내며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동생의 코와 입에 연결된 호흡기들이 내 얼굴에도 이어져 있었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후각을 찌릿 자극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바쁘게 오가는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삐비빅,

     삐비빅.

     

     우리가 살아있음을 신호로 바꾸어 알리는 기계가, 우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쉴새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조금전부터 느끼고 있던 가슴의 통증이 더욱 심해졌음을 느꼈다.

     

     삐비빅.

     삐비비....

     삐----익------

     

     그녀가 바둥대는 내 손을 움켜 잡았다.  

     그녀는 굳어버린 내 손을 끌어당겨서 부드러운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손은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보드라웠다. 뿐만 아니라 형광등 불빛을 받은 뺨과 이마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 보이는 투명한 피부는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긴 속눈썹은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 그녀가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공작의 꼬리처럼 가볍게 올라갔다 내려앉길 반복했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포기해.'

     

    포기해.

    포기해.

    포기해.

     

    네가 버린

    네 삶을 나한테 줘.

     

      

     

     

     

     

     * *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새로 산 교복을 입고,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딸을 보는 부모의 눈빛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좁은 집안을 나비처럼 가볍게 훨훨 날아다니는 딸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일순, 어머니는 미소를 거두고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딸의 치마가 크게 펄럭일때마다 보이는 허벅지의 상처 때문이었다. 허벅지에서부터 가슴께까지 이어지는 흉측한 수술자국이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기대며 고백하듯 말했다. 

     

    “가끔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그때, 큰애가 그렇게 간게....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잖아요.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큰애를 살리려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그녀와 남편은 사랑스러운 두명의 딸 중에 한쪽을 선택해야했다.

    이 세상 어느 부모도 태어난지 얼마 안된 사랑스러운 딸들의 목숨을 저울질 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둘 다 잃지 않기 위해서는 냉철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고, 그들이 선택한 건 먼저 태어난 언니쪽이었다.

     야생에서 먼저 태어나는 새끼가 어미 젖을 차지해서 건강하게 자라듯이, 쌍둥이 중에 언니 쪽이 건강했다. 살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병원에서도 건강한 쪽을 선택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자칫, 분리 수술 중에 둘 다 잃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선택을 하고 두 애를 다 잃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

     

    수술일정이 잡힌 전날밤이었다. 쌍둥이 중 언니가 갑작스레 호흡이 멈췄다. 언니의 몸에 붙어있는 동생의 몸은, 언니가 발버둥칠때마다  함께 사지를 바둥거렸다. 둘 다 죽음과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끝까지 버텨낸 쪽은 동생이었다. 딸을 잃은 사실이 무척 슬펐지만 부모는 한편으로 조금 안도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아도 됐으니,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예정되어있던 분리수술을 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일찍 끝낼 수 있었다. 의사는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했지만 살아남은 딸은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병원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열살이 넘어서야 겨우 놀이터를 뛰어다니고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는 아내의 팔을 끌어 안아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는 한때 잘나가는 사업가로 이름을 떨친 때도 있었지만 딸의 병원비며 수술비로 가세가 기울어 가진 재산을 모두 팔고 이 좁고 낡은 아파트로 이사왔다. 그에게도 꿈이 있고 미래가 있었다. 안란하게 보장된 삶이 있었다. 쌍둥이들이 태어난 정원이 넓은 집에서 아직까지 살고 있는 상상을 해보던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의 정원도 있고 넓었던 집이 그립기도 하지만 그 대신 단란한 가정을 얻었으니 후회되진 않았다. 맞벌이로 밤늦게까지 일하느라고 딸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고, 생일을 챙겨주지도 못하는 못난 부모였지만 딸은 건강하고 구김살 없이 밝게 잘 자라주고 있었다.

     

    “언니가 동생을 위해서 인생을 양보한 셈이니까.”

     

    “정말 너무나 착하고 소중한 아이들이에요.....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천사같은 미소 좀 보세요.

     너무 사랑스럽지 않나요?”

     

     

     

     

     

     

     

     

     

     

     

     

     

     

     

     

     

    /

    저번에 올린 <1분 45초(그밤, 우리가 본 것은)>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삭제했습니다.

    평소에 쓰고 싶던 내용이라서 아쉽긴 한데 장편을 연재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안돼서...

    후에 좀더 다듬던지 해서 들고오든가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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