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박노자의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발췌 및 요약한 것입니다]
역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역사서술방식이다.
랑케로 대표되는 사실의 역사, 카로 대변되는 기록의 역사는 역사를 배운 뒤 지겹도록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배우고 익히면서 간과하는 것 또한 이 역사서술방식이 아닌가 싶다. 기록으로서의 역사, 즉 역사는 현재의 선택에 의해 다시 쓰는 기록이라는 것을 생각치 않고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많다. 역사쓰기란 현재적 선택의 문제다. 타자에 대한 적대심을 부각시켜 민족주의적 내부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속의 전란을 '민족의 영웅적 항쟁'으로 쓸 수 있는가 하면, 타자들과의 섞임/어울림/교류를 중심으로 놓은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국경을 넘는 지역공동체 만들기를 지향할 수도 있다. 역사는 고정불변의 과거가 아니다. 현재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추구하는 것에 따라 과거사실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밖에 없다.
세계각국의 민족주의적 사학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현대사를 서술할 때 "우리들의 피해"를 강조하여 민족의 象을 역사적 전통성이 있는 피해자로 그리면서,
고대사의 象은 "우리들의 위대성"위주로 그린다는 점읻.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타자를 침략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로 인식되지만, 고대사에서는 위대한 정복군주들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곤한다. 고대사를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면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따를 때도 있고 사료와 고고학적 유물을 무시하며 무리한 가설을 세울 때도 있다.
이스라엘 관변 사학자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다윗과 솔로몬에 무한한 애착을 보이듯 한반도 민족사학자들도 상상에 의해 배가된 고조선/고구려/발해 등 북방국가의 힘에 이끌린다. 그러면서도 중국식민지로 폄하되어온 낙랑문화 보급의 중요성이나 고구려와 중원 여러 왕조들의 동맹관계, 고구려에서의 중국귀화인의 역할은 철저히 무시된다. 우리 선조의 영광은 우리만의 업적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동시에 근현대사는 피해기조로 쓴다. 친미반공국가인 대한민국이 미국의 베트남침략에 종범으로 기꺼이 따라나선 것과 베트남 민중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쉽사리 잊혀진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외세로부터 피해만 입었다는 민족주의적 도그마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든 한반도든 관변 내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위대한 고대사와 수난의 근현대사를 유독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많지만 그 중 하나가 양국의 높은 군사화 정도다. 종교, 교육 등 다양한 기능을 가졌던 화랑이 임전무퇴만이 강조되며 군 정신훈련용으로 이용되는 일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화랑문화에서 보이는 동성애적 요소들은 동성애를 계간으로 호칭해온 군에게 별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고대사의 군사적 영웅담은 현재의 군사주의를 은근히 정당화하기도 한다. 더불어 솔로몬 왕국의 강성이나 광개토대왕의 제국건설은 오늘날 지역적 중진국인 이스라엘이나 대한민국의 팽창적 야망과 오버랩된다. 이스라엘의 경우 군사적 야망위주고 대한민국의 경우 경제적 팽창 중심이지만 본질은 같다. 이와 동시에 우리들의 피해위주의 근현대사는 팽창을 도모하는 우리들의 모든 행위를 무조건 정당화한다. 돌을 던지려는 팔레스타인 소년에게 조준사격을 하든 아시아 민중들에게 재앙을 안기면서 경제적 세계도약을 하든 피해자 지위를 세습한 우리들은 절대 자신을 가해자로 인식하지 않는다.
漢昭烈 將終 勅後主曰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유비가 유선에게 남긴 유언이다.
"선이 작다고 해서 아니 행하지 말 것이고,
 악이 작다고 해서 행하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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