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어린이집 방학을 맞은 삼삼이와 놀아주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낯선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왔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 내게 걸려오는 전화는 삼삼이의 안부를 세세히 캐묻는 하지만 내 안부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와이프, 아주 가끔
"노니까 좋냐?" 라며 은근 부러워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제발 돈 좀 빌려 가라는 대부업체의 전화뿐이라 혹시 현재 FA 상태인 나를 영입하려는
제갈공명에게 삼고초려를 했던 유비 같은 사장님이 계신 회사인가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물론 아니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처음 듣는 목소리의 낯선 아저씨였다.
"저기 성성씨 핸드폰이죠?"
"네 맞는데 누구세요?"
"저는 FC *** 총무 ***입니다. 요즘 성성씨가 조기 축구회에 나오지 않으시길래 무슨 일 있나 전화해봤죠."
"아.. 그러셨군요. 날씨가 더워서 안 나갔습니다만..."
순간 경기력 향상을 위해 유로 2016 관람차 유럽에 다녀왔다고 말도 안 되는 뻥을 치고 싶었지만 총무님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하셔서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조기 축구회를 외면했던 진실을 말씀드렸다.
총무님께서는 여름이라 그런지 나 같은 회원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토요일에 FC *** 멤버들끼리 친선시합과 시합 후 다 같이 함께 여름 보양식을
먹는 자리를 마련한다고 토요일에 꼭 참석하라고 말씀하셨다. 축구보다 보양식이라는 말에 그동안 채식만 즐기던 내 입가에서 침이 흘렀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리고 주말이면 특히 더 나를 애타게 찾는 삼삼이를 그냥 외면할 수 없었다.
"저기 총무님 그날 한 명 더 데려가도 되나요?"
"축구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이죠. 데리고 오세요."
"저희 아들이긴 한데.."
"아드님이 축구 좀 하시나 봐요? 몇 살이죠?"
"세 살입니다만...그래도 또래보다 공은 좀 차는 편.."
"그냥 혼자 오세요."
총무님 말씀은 단호했다.
토요일 아침부터 축구를 하러 간다고 하면 와이프가 싫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제발 나가서 운동 좀 하라면서 내 등을 떠밀었다.
그날 조기 축구회 모임이 있는 곳은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우리 조기 축구회원들을 제외한 일반인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조기 축구회라는 아재 소굴로 안내한 세탁소 아저씨 아니 회장님께서는 나를 보더니 반가움을 표현하셨다.
"어이고.. 지단 감독님 오셨네.. 요즘 레알 마드리드 감독하시느라 바빠서 못 오는 줄 알았는데.."
나는 절대 실력 때문이 아닌 어린 나이에 대머리가 된 관계로 조기 축구회에서 지단이라 불린다. 그리고 내가 아주 가끔 경기 중 큰 맘 먹고
드리블을 하면 아저씨들은 중랑구 지단의 '면목동 턴'이라고 놀린다. 제길..
아무튼... 간단한 회장님의 연설이 끝난 뒤 팀을 두 개로 나누고 시합을 했고, 경기는 역시 실질적 조기 축구회의 리더이신 가장 나이가
많은 전직 회장이자 고문님이 계신 팀의 압승으로 끝났다. 군대 축구나 무슨 차이인가 싶지만 승부에 관심이 없던 나는 열심히 그늘을 찾아
뛰어다녔다.
경기가 끝난 뒤 이동한 곳은 닭, 오리 백숙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다. 예약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기 전 또다시 회장님의 연설이
있었고 총무님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오늘은 특별히 닭이 아닌 오리 백숙으로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부족하시면 말씀하시고 많이들
드세요!" 그때 한 아저씨가 큰소리로 불만을 이야기했다.
"난 오리 못 먹어요. 꽥꽥.."
"왜요?"
"기름이 많아 느끼해요!"
마치 어린 시절 삼겹살 비계가 싫다면서 고기 투정하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역시 남자는 나이 들어도 애인가..
"그럼 쟁반 국수를 먹으면 되잖아!"
고문님의 일갈이 있었고 오리가 싫다는 아저씨는 삼삼이가 사탕을 주지 않을 때처럼 뾰토통한 표정으로 새침하게 있었다.
잠시 후 식당에서 미리 준비한 오리 백숙이 나왔고 그전까지 무리뉴와 즐라탄의 맨유 입성, 올해 발롱도르는 호날두지.. 등의 중랑구를 벗어난
글로벌한 축구 이야기를 나누던 아재들에 침묵이 흐르고 치열한 오리 쟁탈전이 벌어졌다. 내가 조기 축구회에 입단해 공을 찬 이후로
아재들의 이런 진지한 표정과 열정 어린 마에스트로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손놀림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토실토실했던 오리는 어느새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술이 몇 잔 오고 간 이후 본격적으로 아재들의 대화가 시작됐다.
자식 자랑하는 아재, 얼마 전 뽑은 차를 자랑하는 아재, 여전히 해외 축구를 이야기하고 있는 아재..등 다양한 대화가 오고 갈 때
한 아재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요즘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나는 요즘 아침에 안 서는데 다들 아침에 서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
순간 아재들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고, 하나둘씩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어느 하나 당당하게 "나는 서요!" 라는 아재가 없었다.
"이 자식이 좋은 날 분위기 깨는 소리 하고 있어.."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마 부위가 붉어진 고문님께서 삿대질하며 말씀하셨다.
나는 속으로 "연로하셔도 그라운드에서 정력이 넘치는 고문님이시지만 아침에는 고개 숙인 남자구나.." 라고 생각했다.
순간 조기 축구회의 젊은 피인 나까지 가만히 있다면 우리 조기 축구회는 이대로 지나치게 겸손한 축구단이 될 거 같아 말했다.
"저기 저는 아침에 서요!! 그것도 매일... "
모든 아재가 부러움 반, 분노 반의 시선으로 나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재들에게 뭐라 해야 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팔딱.. 팔딱..벌떡.."
그리고 고문님의 "저 자식 집에 보내!!" 라는 외침이 있었고 분노에 찬 아재들에게 쫓겨났다.
비록 쫓겨는 났지만 영화 아가씨에서 끝날 때 즈음 하정우가 했던 명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