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반이 클럽.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강남엔 나이트클럽 문화가 있었지만
고삐리에게 그 문은 너무나 높았지..
바야흐로 18년전 고등학교 1학년때는
클럽 문화가 없었다.
친구들과 코묻은 돈을마아
건대에서 조그마한 클럽(락카페)을 하루동안 빌리기로 했다.
이른바 일일 락카페.
그때돈으로 하루빌리는데 80만원정도였던것 같다.
락카페 티켓을 친구들과 지역별로 나누어 판매에 들어갔다.
크게 맥을잡아 강남,서초,잠실에 고삐리를 대상으로해서
무분별한 강매를 시켯다 -_-
1장에 입장권 3000원 짜리를 200만원어치 팔았으니까...
야호! 돈벌었다 싶었다...
근데 너무 무분별하게 판매한 나머지 학부모의 신고로
교육청에서 수사를 시작해
일당 모두검거 당시 뉴스에도 나왔었다 -_-;;
경찰에게 수사받고 무기정학 -_-;;;맞았다.
아버지에게 동네 창피하다고 2박3일은 두드려 맞은것같다.
어머니 눈치를 보느라 매일 공부하는척 하다가
고무장갑 싸다구 엄청맞았었지...
그때에 엄청 유행했던 아이템이 있었는데
웨스트 우드, 켈빈클라인, 겟유스드, 마리떼프랑소와저버
마우이, 무크구두, 나이키 조던 시리즈!
나름 보수적인 아버지는 그런것들이 당연히 이해가
안되셔서 학생이 그런 아이템을
산다는걸 이해못하셨구 ,
혹, 산다해도 친구집에 맡겨놓구 입거나
신발은 복도끝 두번째 소화전에 숨겨넣고
신고나가곤 했었다.
장학기간인 어느 날, 그런아이템 들을
다사주신다고 아버지가 나가자고 하였다.
눈이 똥그라진 @_@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지.
한아름 서태지패션으로
쇼필을 한 나는 입이귀에 걸려서 하루종일
콩콩이 걸음으로 튀어다녔다.
아버지의 후광엔 빛이 났으며
위대한 이순신장군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그런데 웬걸...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김포강항가자"
뭐, 물어볼세도없이 대꾸 한마디 못하고
잔뜩 부풀어있는 나는 그렇게 짐을챙겨 나오게되었다.
공항에 도착을해서
아버지는 "잠시나갔다와 도착하면 영옥이아저씨 있을거니까
속썩이지말고..."
낚였다.
그렇게 눈을 떠보니 캐나다 -_-
당시 영옥이 아저씨는 아버지
친구셨는데 아버지와는
반대로 자상하시고 성격도
호탕했다. 술도 사주고 -_-
샀던 옷들은 한국에선 유행이었지만
외국에선 먹어주지도 않아서,
찐따취급당함.
탈선을 할수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곳은...캐나다 도시가 아니라
광활한 자연.
옆집을 가려면 자전거로 1시간남짓 가야지 집이 있었다
노랑머리 코쟁이를 본다는건
영화에서의 일이었다
영어실력은 늘일이 없었다.
암튼 여자저차해서 한국에다시 들어오게 된다
들어온 나는 친구도 많지않았고
적대심으로 가득해서
마음가는 친구와 항상둘이
다녔다.
또래에 애들이 다 그렇듯이
내주위에는
공부하는 부류 vs 노는부류가
정확했다.
신분들 위조가 가능한 시절이라
주민등록증 코팅을 쪼개어
향락문화를 쫓았다.
클럽문화에 심취하던중
하고싶다!라고 생각된 일이
있었다.
DJ...
당시에 알고지내던 클러버형이
힐튼호텔 파라오라는 곳에 취직시켜줬다.
미성년자라 고달펐다.
단속이 나오는날엔 오히려 내가
조명실 창고에 숨었다. 풉...
당시에는 아무르 잘난 클럽이라도
디제이 장비는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였다. 턴테이블.
디제이 막내생활은 고달펐다.
당시 최고디제이 신철, 이진, 배강일
등등의 디제이 가방은
군장비보다 더무거웠다.
매타임마다 브르스 타임에는
산더미같은 LP판을 지고 날랐다.
고작이중에 20장도 안쓸거면서..
왜 몇백장씩 내가 이걸날라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음악이 귀한터라
누가 희귀한 LP판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경쟁했다.
지금처럼 CD로 굽고 USB로
음악을 틀지 않았으니까 ...
영업시간에는 음악트는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영업시작전과 영업후 음악연습 하는것이 다였다.
DJ의 기본은 pitch를 맞추는게
기본이다. 이 피치라는게
쿵짝쿵짝 서로다른 음악속도를
믹싱단계부터 맞춰서 들어간다.
이걸 지금은 컴퓨터나
디지털 장비들이 대신해주고 있지만
아날로그 턴테이블에서
배우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BPM을 감으로 계산한다.
이곡이bpm138 이구나
bpm152 짜리구나 하는것은
오로지 연습에서만 나온다.
눈을 감고 빠르게 비피엠을
감으로 느끼고 피치를 계산해서 맞춘다.
턴테이블의 속도는 고무패킹이
속도를 돌려주기 때문에
너무빠르게 밀거나 약하게 밀거나
살살밀어서도 맞춰지지 않는다.
믹싱의 초기당계인 bpm을
10초안에 맞추는 연습만 2년을 했다.
당시월급이 50만원.
정품 LP는 너무 비싸서
복사본 빽판을 사려고 이태원 뒷골목을 언손 녹여가며
싼값에 구한날이면 내일
이걸로 연습할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LP판을 안고 잠든날도 많았다.
물론 정품처럼 음질이 좋지도 않았고
판이 자주 튀기도했지만
감수하고 연습했다.
technics턴테이블이
어떤클럽이나 기본사양이었지만,
가끔 자금력이 넉넉치못한
강남외 클럽들은 inkel턴테이블이 있는곳도 있었는데
이건 맞췄다고 생각하고 믹싱을 시작해도
맞질않아서 최악의 턴테이블 이었다.
당시 강남이외에는
나이트 클럽도 이었지만
돈암동 독신귀족이라던가,
신림동 빨강소(레드 옥스)에
클러버가 많았다.
나는 오히려 그 곳이 좋았다.
15년전에도 클럽씬을 있었다.
강북에는
파라오 (힐튼호텔) GIG(힐탑호텔)
가 대결 구도였고
강남에는 로터스(현 보스)
줄리아나(현 엘루이)
신생 바스키아(현 구힐탑호텔)
슐탄(노보텔)
nix&nox(현 에덴)가 있었다.
강남역에도 꼬맹이들의
딥하우스, 메스자리에 뭔가있었다.
단코도 있었고
당시에는 호텔클럽 이외에
다른곳들은 영업시간이 12시였다.
호텔들도 2시.
에프터영업이란건 꿈도 꿀수 없어서
영업종료후 다들 이태원으로 갔다.
이태원에는 하시엔다, 알함브라, 탱크, 까삐땅 등등
수많은 클럽이 있었다.
지금의 엘루이? 옥타곤?
예전 하시엔다라는 곳은 더 컷고
천장이 돔구장처럼 열였고,
천정에서 할리데이비슨이 내려와서
경품으로 막퍼주고 그랬다.
나는 파라오에서 솔직히
음악연습을 할수가 없었다.
호텔직영이기 때문에...
6개월정도후에 홍록기가
리버사이드호텔로 데려갔다.
당시에 최고의 개그맨이었고,
라이브디제이의 팬층이 두터웠다.
문제는 음악을
틀줄몰라서 록기형은 앞에서 춤추고
나는 뒤에서 음악트는 척만했다.
나도 잘 못틀었으니까 -_-
DAT라는 조그만 카세트 테잎이 있었는데
음질은 cd수준이고
카세트 테잎처럼 잘 늘어나지도 않았다.
믹싱셋을 3개정도 녹음해두고
레파토리를 요일마다 번갈아 가면서 틀었다.
당시에는 크게
라이브DJ. 멘트DJ. 믹싱DJ 가 있었다.
믹싱디제이들은 간지가났다.
믹싱디제이로 마음을 굳힌 이유가 딴게 없었다.
그냥 간디작살 이었으니까ㅋ
리버사이드나이트도
6개월만에 옮겼다.
당시 건달사장님은 무서웠고,
건달 파벌싸움이 심한 가게였고
턴테이블핀이 이유없이 고장나면
두려움에 벌벌 떨었어 ㅎㅎ
연습은 할수도 없었다.
조용히 연습해도 건달 지배인에게 혼이났다.
그래서 하우스로 옮긴곳이
타워호텔 GIG였다.
가장최첨단 장비였고 앞마당엔 타워호텔 수영장도 있었다.
이곳에서 연예인을 처음본날에 우와 뚜띠다! 언타이틀이다 코코다
했다가 형들이 말하는게 들렸다.
"저 촌놈색히 어디서 데려왔어"
나는 다신 촌놈짓은 안해야지 생각했다.
이곳의 지배인은 인심이 좋았다.
일찍 나와서 음악 연습을 해도
혼내지 않았고, 마감후 잘수있는
공간도 조명실에 마련해줬다.
지배인님은 후에 클럽아이(청단 리베라 호텔 지하 나이트)
회장님이 된다.
조명실 한켠에 갈아입을 옷을두고
가게에서 생활했다.
가게에서 먹고자며
영업종료후 가게화장실에서
양말을 빨고 양치를 하고 잠들었다.
눈뜨면 바로 믹싱 연습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냥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웨이터보조들이 출근하면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키고
용돈도 자주줬었다.
이곳의 월급은 더 적었고
남산 꼭대기에 있는 곳이어서
차가없이 출퇴근을 하려면 등산을 해야했다.
그곳에서 믹싱 실력이나
피치 맞추는 것 . 등등
많이 연습할수 있었다.
그렇게해서 옮긴곳이
노보텔엠버서더 호텔의
슐탄... 크기는 지금의 88수준으로 작았지만
아무나 출입을 하는 구조도 아니였다.
부스에는 항상
최민수, 고현정, 이정재, 정우성, 신성우 등등 그 당시
쟁쟁한 연예인들만 있었다.
별다른 기억은없다.
그러다 옆가게 리츠컬튼 호텔의
nix&nox 로 옮겼다
이곳은 신시계였다.
하야드 JJ마호니 같은 시스템 이였고
기타 나이트클럽과는 달랐다.
이른바 사람취급을 해주기 시작했다.
DJ메인이 외국인 프레디 였기때문에 생각이
한국 디제이들과는 달랐다.
폭행은 하지도 않았고
하우스DJ 에게도 음악을 틀수 있는
타임을 주었다 @_@
CD믹서기도 한창유행이었던 터라
최첨단 기기로 연습하고
장비의 구애가 없었다.
호텔직영의 클럽이기 때문에
호텔직원 수준의 복지혜택까지...
4대보험에 식사는 리츠칼튼 호텔내부의 직원식당에서
뷔페식 식사까지하고 호텔직원 수준의 급여도 줬다.
호텔 직원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퇴직금이나 보너스까지...
디제이 2년차였기 때문에
그냥 사람취급 받는다는 것만으로
좋았던것 같다.
당시에는 디제이 5년차 밑으로는
타임을 틀수있지도 않았고
오로지 가방모찌 그분이였으니까.
5년정도는 배워야 간신히
꼬마 DJ로써 명함을 내밀수 있었다.
그러다 당시 최고의
디제이들만 들어갈수 있다는
줄리아나에 하우스로 들어갈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당시 잘나간다는 디제이들은
줄리아나가 목표였기 때문에,
인맥을 쌓아서라도 들어가고 싶어했고
그만큼 힘들었다.
모든 복지여건을 포기하고
다시 월급 50만원 짜리의 길을 선택했다.
50만원이면 작지않은건 아닌가?
라고 할수있다.
지금이야 금, 토 만 영업하지만
그때는 월화수목금토일 휴무는 한달에 한번
그것도 눈치봐서 써야했다.
손가락아파서 여기까지...베스트가면 다음편올림
다음편엔 클럽의등장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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