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4년 여름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돈이 고팠던 저는 알바를 찾을때 종류를 가리지 않고 급여만 보고 알바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찾은게 일당 8만원이었던 T머니카드 문제해결직원(?)이었습니다.
이때 대중교통 시스템이 바뀌면서 엄청난 교통대란이 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 지하철 역에 아무것도 모르는 도우미를 보내
대신 욕을먹게 하는 알바였습니다.
교육같지도 않은 교육을 30분 받고 신용산역에 배치됐습니다.(나중에 알고보니 시청같은 환승센타에 배치된 알바는 거의 죽고싶었다고 했습니다)
하는일은 간단했습니다.
1. 카드가 갑자기 먹통이된 사람이 불만을 가득 품은체 역무실로 온다
2. 욕을 먹는다
3. 카드사용자의 이름과 핸드폰번호를 적는다
4. 지랄을 듣는다
5. 먹통이된 카드번호를 본사에 불러주면 그안에 충전되어 있는 금액만큼 T머니카드에 넣어준다
6. 배웅하면서 짜증을 듣는다.
7. 끝
하루에 많아봤자 열몇건이 전부였습니다. (환승센타에 배치면 직원은 백몇....)
그렇게 편하게 일을 하던중 한 외국인이 씩씩대면서 왔습니다.
낮선 이국땅에 와서 선진화된 대중교통을 체험하려는 찰나 카드가 먹통이 되니 얼마나 화가났겠습니까?
역무원에 계신 분들이 영어를 못하고 또 저도 못해서 어찌어찌 본사에 영어에 능통한 분과 연결시켜 드려 상황설명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상황은 다 파악되었고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으면 끝인데 아직도 외국인분은 분이 안풀렸는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계속 씩씩대셨습니다.
저도 좀 쫄았습니다. 머릿속에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치외법권'이란 단어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중학교때부터 6년간 외운 영어단어, 숙어를 닳고 닳도록 외운 문법대로 조합하여 최대한 정중하게 물어봤습니다.
나 : YOU↘ NAME↗?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과연 6년간 죽어라 영어를 배운사람의 입에서 나온말이 맞을까?란 의심이 들정도에 문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만국 공통어인 끝 올리기를 사용했으니 분명 그 외국인은 이것이 의문문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말이야 거의 모든말에 끝을 올리면 의문문이 되지만..
밥↗? (밥먹을래?)
응↗? (너지금 뭐라고 지껄인거지?)
헐↗? (이상황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어떻게 니가 나한테 그럴수가 있어?)
돈↗?(내가 돈이 어딨어?)
ㄹㅇㄱ↗?(피씨방갈레?)
다행이 그 외국인도 말을 알아들었는지 이름을 말하더군요 스펠링으로 쓸 실력은 안되고 그냥 한국말로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화번호를 물어봐야 했습니다. 이름 물어볼때는 그래요 조금 불친절했습니다. 굉장한 실례였을테죠
그래서 더욱히 신중하게 물어봤습니다.
나 : tell your number please~
소름, 전율...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은 성장하나 봅니다. 소유격인 your을 쓰면서 의사소통을 무리없이 진행하는 동시에 please란 말까지
쓰면서 더없는 정중함이 표현되었으며 얼굴까지 비굴한 표정을 지으니 일순간에 나를 낮추며 상대방을 높이는 경지까지 도달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도 외국인에 분을 풀기에는 모잘랐나 봅니다.
그 외국인은 좀 짜증이난 목소리로 '제로 원 제로 세븐 어쩌고 저쩌고' 이러더라고요 그것도 엄청빨리...
이 외국인분은 최소한 제가 그걸듣고 한번에 쓸지 알았나봅니다.
" 야이 새끼야 한국말로 그렇게 번호 빨리 부르면 적을수 있는사람 하나도 없어 "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hey / baby / korean / past number / can't write / nobody 이따구 라서 말을 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화난건 일단 상대방이니 정중히 다시 물어봤습니다.
나 : 응?↗ (응을 짧게 끝는 스타카토식으로 말하며 끝을 올려야지 죄송합니다 난 잘 못들었으니 다시 말해주세요라는 의미가 됩니다)
외국이이 좀 어이없어 하며 다시 말해주더라고요
' 제로 원 제로 세븐 나인 어쩌고 저쩌고....'
속으로 저는 "야이 새끼야 한번말할때마나 숫자가 하나씩 들린다...."라고 생각이 됐지만 영어를 못해서 말할수 없었습니다.
너무 답답했지만 어쩔수 없이 정말 정중하게 다시 물어봤습니다.
나 : 우~으~웅?↗ (똑같이 응↗? 이러면 무례합니다. 앞에 '우~으~' 이부분은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기지개를 피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어감으로 말을해야 하고 웅↗? 역시 스타카토가 아닌 릴렉스하게 풀리는듯한 어투로 해야합니다)
아무리 정중하게 했다고 해도 내 기준이었던 같습니다. 상대방 기준으로 공감하고 생각했어야 하나 아직 어렸던 저는 그렇게 까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외국인은 많이 화가난 듯한 말로 한자 한자, 또박또박, 잘들리게 말했습니다
" 공! 일! 공! 칠! 구! 삼! 삼! 이! 오! 팔! 삼!"(번호는 기억안나서 막 적었지만 이렇게 한글로 말해줬습니다)
누군가 들으면 ' 아 어떤 한국사람이 자기가 말해주는 전화번호를 잘 못알아듣자 또박또박 말해주는 거구나' 라고 뒤돌아가며 살짝 미소지을정도의
정확하고 확실한 발음이었습니다.
일은 잘 마무리 되었고 지금까지 확실히 기억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더 잘 대응할수 있을텐데 좀 아쉽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의 그때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말했을텐데요
나 : write yourself (니가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