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스마트 폰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소녀 마음에 들고 있는 폰을 얼굴에 떨어트렸는데, 난 내 코뼈가 부러진 줄 알았다.
나: 아오 이런 열여덟같은...
막내: 나나. 내일 모해? 할 일 없지? 없잖아? 여행 갈래?
나: (아파서 하나도 못들음) 뭐라고???
막내: 가. 가자.
뭐 이렇게 시작 된 여행.
나는 요즘 놀고 있고, (가정주부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주부습진을 호소력 짙게 떠드는 중) 막내는 복학을 해서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는데, 갑자기 여행이라니까 얘가 마음 속에 뭔가 있구나 싶었다.
별 준비도 없이 그냥 가방에 옷 가지만 챙겨서 그 다음 아침에 떠났다.
큰오빠는 오랜만에 떠나는 막내의 여행에 용돈을 좀 쥐어주면서 말하기를
큰오빠: 사고 치지말고, 돈 달라고 하면 그냥 줘. 둘이 싸우지 말고.
작은 오빠는 큰 마음 먹고 차키를 넘겨주려고 했지만, 막내의 평소 운전 실력을 알고 있는 나는
나: 그거 집어 넣어라.
작은오빠: 초코묻은 빵이나 사와라 이새끼들아.
아무튼 막내랑 나는 사고를 최소화 할 수있고 신뢰할 수 있는 기차를 타고 전주로 떠나기로 했다.
왜 전주냐면, 어릴 때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막내랑 나랑 전주 어느 골목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기억이 가끔, 어렴풋이 날 때가 있어서 그 골목을 좀 찾아보자 했던 적이 있어서다.
아침부터 기차 시간에 늦었는데 한가롭게 커피를 쳐사고 있는 막내 엉덩이를 발로 차가면서 역에 갔고,
간신히 기차에 올라 탈수 있었다. (못탔으면 내가 너를 작살냈을수도)
막내: 커피 사오길 잘했지?
라고 말하며 창밖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막내는 정확히 십분 있다가 곯아떨어졌고, (...)
도대체 왜 커피를 산다고 난리를 쳤나 싶었지만 나라도 간만의 여행을 좀 즐겨야겠다 생각하는 찰나,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정신을 차렸다. 막내가 화장실 가고싶다고 비키라고 깨워서...
막내: 나나 참 잘자. 진짜 잘 자. 머리대면 그냥 막 자.
나: 허, 참. 내가? 야 너한테 들을 소리는 아니지.
칙칙폭폭
나: 너 여자 있냐?
막내: 여자? 여자들이 나를 다 좋아해서 문제지.
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정색) 근데 왜 갑자기 수업도 째고 여행?
막내: 아 그냥.
나: 그냥? 진짜?
막내: 갑자기 그냥 가고 싶잖아. 답답하고.
나: 그래 그렇다 치고.
애가 우리한테 말은 안해도 복학하고 여러모로 내적으로 힘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졸업한 동기들도 있고, 대회에서 입상하는 친구들도 있고, 하지만 막내는 부상으로 계속 쉬었고 늦게 학교에 복학했다는 부담감이
상당할 것이라는 게 오빠들의 추측. 워낙 긍정적인 애라서 신경 안쓰는 척 하는 거겠지만...
가끔은 그런 막내의 모습을 잊게 된다. 대학 입시를 잘 못 보고 와서 자책하며 엉엉 울던 소년을 말이다.
기차 안에서 몇 년 전 막내의 얼굴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이제는 다 커서 소년도 아닌데.
전주 역에 내리자마자 숙소를 잡고, 짐을 내려 놓고 식사를 하러 갔다. 도시가 굉장히 많이 변해있어서 1차 놀람.
사람들이 많아서 2차 놀람... 생각보다 더워서 3차 놀람.
밥을 먹으면서 "우리 어릴 때 엄마 기다리던 골목 기억 나?" 라고 물으니 막내는 멍청한 표정으로 "어디?" 라고 물었다.
역시... 넌.... 진상... 찡긋.
그렇게 기억도 가물가물한 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숙소 어머님께 설명을 열심히 해서, 대충 길을 물어보고
마실 걸 사서 (혹시 못찾더라도) 기분 좋게 걸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떠났다.
우리는 그냥 걸었다. 엄청나게 번화한 길을 걷기도 했고, 사람이 많은 관광지를 걷기도 했다.
그러다 주택가에 접어 들기도 했고, 아주 오래된 골목에도, 뒷골목에도 발길을 두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릴 때 할머니 집에 있었던 이야기도 했고, 작은 오빠가 최근에 여자친구랑 깨진 이야기(ㅋㅋㅋ),
평소에 하지 못했던 엄마 아빠 이야기, 그리고 나와 막내의 이야기도.
나: 초조하지 않냐? 다들 멀리 잘 가는데, 너만 제자리인 거 같고.
막내: 그렇지.
나: 근데 잘 하고 있는 거야. 보통은 다들 모르면서 가거든. 지금 우리처럼.
막내: 나나는 안 불안해?
나: 불안하지. 이 나이에 놀고 있고, 다들 결혼하는데 나는 놀고 있고, 다들 뭐라도 하는데 뭘 해야할지 몰라서 놀잖아. 불안해.
막내가 한숨을 쉬었다.
나: 이건 큰오빠가 해준 말이야. 누구도 제 자리에 있진 않아. 더 멀리 가려고 제자리에 있는거래.
막내: 닭살 돋는 말 하지마.
나: 그래? 다른 얘기 할까?
막내: 무슨 얘기?
나: 그러니까... 지금 길 잃어버린 거 같다는거? 그리고, 우리 그 골목 못찾을 거 같아.
막내가 막 웃었다.
나: 어, 오늘 처음 소리내서 웃었다. 올. 역시 내가 좋긴 좋구나.
막내는 주택가 골목에 쭈그리고 앉더니 나한테도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래서 옆에 쭈그리고 앉았더니, 대뜸 말하기를...
막내: 그냥 오늘 여기 앉아서 있었으니까, 시간 지나면 또 그때 앉았던 골목 하면 기억날 거야.
나: 오늘 앉아 있던 건 좀 궁상 맞다고 기억 나겠지?
막내: 찌질하고.
나: 찌질하고 궁상맞고, 그리고 다 커서 징그러웠고. 그래도 나쁘진 않았고.
막내: 그렇다고 칩시다.
어릴 때, 그 골목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을 기다리던 날처럼.
우리 둘은 낯선 골목에 앉아서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랑 쪼꼼 달라진 것은 저녁에 막걸리 먹을래 쏘주 먹을래? 했던 대화정도랄까.
막내가 좀 더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나는 네 누나라서, 너는 내 동생이라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