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은 모든 것을 마무리 하는 시기이지만
여자와 나는 내가 너를 사겨준거다, 아니다 내가 니를 거둬준거다 하며
12월 31일에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1월 1일
여자가 일을 했던 터라 느즈막히 우리는 다시 만났다.
"배 안고파요?"
"응 괜찮아. 나 보고싶었지?"
여자의 쓸데없는 추측과 자신감은 늘 나를 당황시켰지만
그새 민첩성이 좋아지고 있던 터였다.
"보고 싶었으니까 왔죠"
한적한 곳에 앉아
여자는 자기의 이야기를 잔뜩 풀어놓았다.
도대체 몸 어디에도 저만한 이야기가 들어갈 주머니 따위는 없을 것 같은데
여자는 늘 자기 이야기에 한창이다.
오늘은 일이 힘들었지만 할만 했고
점심은 귀찮아서 김밥으로 때웠으며
너랑 하고 싶은걸 생각하니까 너무너무 많아서 집에가서 정리좀 해야할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너는 스케쥴을 비워놔라 등등의 이야기였다.
"주로 무슨 스케줄인데요?"
"맛있는 케이크도 먹으러 가야하고, 내가 그때 봐둔 카페가 있는데 거기도 너랑 가면 좋을 것 같고, 여행도 가고싶고..."
"아 돈 많이 벌어야 겠네"
"돈이 뭐가 필요해!! 그냥 너랑 나랑 마주보고 앉아있는게 좋은거지"
여자는 빨랐다.
특히나 자기가 하고 싶은건 무지막지하게 빨리 하곤 했다.
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빨리 알았으면 했는지 셀프로 과거를 탈탈탈 털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교때는 문학 동아리였는데...내가 쓴 시 한번 보여줄까? 웃기지"
"내 친한 친구는 열 명 정도 있는데, 미자는 사랑꾼이고, 미숙이는 오랜남친과 결혼을 앞두고 있고, 미선이는 지금 누구랑 썸을 타고 있는데...웃기지"
"외국에서도 잠깐 살다 왔고, 거기서 홈스테이 하던 주인이랑 싸우고 그래서 완전 난리났었다? 웃기지"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뱉어내며 웃기지를 반복하는 통에
저 여자는 나를 웃기려고 이야기를 하는건지, 아니면 정말 웃겨서 하는 이야기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전에 몇명의 사람들을 만났었는데 제일 길게 연애한게 두 달 이야. 푸하하 웃기지"
"(정색)"
"...왜?"
나는 연애를 오래 하는 타입이다.
적어도 상대방 생일, 나의 생일 한 번씩 함께 보내고, 4계절을 모두 보내봐야
'저 사람이 여름에는 좀 못생겨지고, 겨울에는 살이 좀 찌는구나.. 그러면 일년 내내 못생긴거네' 정도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제일 길게 연애한게 두 달 이라니.
골치가 아팠다.
"어떻게 그렇게 다 짧게 만나요? 애도 아니고"
"몰라 나는 너무 너무 사랑했는데 다들 내가 부담스럽다며 떠났어. 나 다 차였어 ㅠㅠ 웃기지"
아!
부담스러웠다면 이해가 된다.
우리는 오늘 연인으로 처음 만났고
나는 두 시간째 여자의 인생타임라인을 모두 듣고 있으니 상대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그리고 끝까지 '웃기지'를 강요했던 여자는 이내 지쳤는지 집으로 떠났다.
다시 만난 여자는 맥주를 한 잔 하자고 했다.
워낙 맛집 탐방대인 나와 여자는 알고 있는 맛집도 비슷했다.
"오늘은 왠지 국물이 땡기는데?"
"부대찌개?"
"음...그런거 말고 좀 가벼우면서도 맑지만 뭔가 맛있는것이 가득차 있는..."
"골뱅이?"
"오! 나 아는 곳 있어!"
"나두!!"
여자와 나는 서로 각자 자주가던, 하지만 같은 곳이었던 골뱅이집에 자리를 했다.
여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골뱅이가 몸을 틀지도 못하게끔 자신이 사랑꾼이라는걸 강조했다.
"나는 정말 사랑만이 인간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매일 연애시를 읽으면서 연애를 꿈꿨고, 내가 꿈꾸는 사랑은 늘 평화로워야 하지"
역시 두 달 연애의 경력이 여기서 드러났다.
사랑은 평화라니, 사랑은 전쟁이지.
여자는 지금까지 서로 트러블이 생길만 하면 관계를 끝냈던 터라 늘 사랑에 대해 저렇게 말하곤 했었다.
첫 연애의 '오구오구 먹는것만 봐도 배불러' 단계만 거치고
무르익은 연애의 '왜 남은 한 점 말도 없이 니가 먹니, 날 사랑하지 않는거니. 이런식으로 할거면 헤어져' 단계를 거쳐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저렇게 평화로울 수 밖에.
그래도 아직 우리는 처음이니, 나는 여자가 골뱅이를 한큐에 빼서 초장에 담그고 한입에 다 넣은것을 보며
"먹는 모습도 예쁘네" 라고 (예의상) 말했다.
주량이 두 병인 여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옆에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넓은 한 테이블에 의자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였는데
주인 아줌마는 무심한듯 시크하게 멸치 똥을 따고 계셨고
우리는 구석 자리에 앉아 서로 하트를 발사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딸랑' 하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 예술가다' 라고 온몸으로 소리치는 아저씨 한 분이 들어오셨다.
우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고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시더니
이내 기타를 잡으셨다.
그리곤 데미안 라이스의 볼케이노를 락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오신 것 마냥 쩌렁쩌렁 부르기 시작했다.
직감으로 저것이 구애의 몸짓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에이 내가 옆에 있는데 그럴리가'
하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데미언 라이스 아저씨는 내 여자친구에게 말을 트고 있었다.
원체 사람들과 트러블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고
여자가 좋아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아저씨가 나보다 쎄보였기 때문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맥주만 삼키고 있었다.
여자는 늘 그러듯 생글생글한 눈웃음으로 대답하고 있었고
나는 맥주를 추가했고,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한참 뒤 여자와 가게를 나와
"아뉘 구뤠도 구권 아뉘좌놔!! 뉘가 아무뤼 위뿨둬 내과 여페 있는뒈!!!"
를 외쳤고 여자는 귀엽다는 듯이 나를 안아줬다.
그리고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원래 저런 예술하는 아저씨들이 나 되게 좋아해"
나쁜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