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머니는 38년생이고 나는 88년생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정확히 반백년의 세월이 존재한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4년 전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보고 나서이다.
“할머니! 나랑 50살이나 차이 나네? 우와 늙긴 늙었다...”
“그래?? 몰라. 나 어쨌든 토끼띠야.”
“나는 용띠인데. 근데 무슨 토끼가 풀은 싫어하고 맨날 고기만 먹어?”
“......고기나 한 번 사다주고 말을 해 이년아.”
“.......어제 마늘 햄 먹었잖아... 햄도 고기거든?”
이렇듯 서로의 사이에 오십 년의 세월이 존재하다보니, 우리가 쓰는 언어는 조금 다르다. 한 번은 할머니가 장터에서 오 천원 짜리 티를 사 입고 왔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길래 “오! 박 여사, 티가 간지 좀 나는데?!”라고 칭찬을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간지’라는 단어를 모르는 할머니는 내게 그 단어의 뜻이 뭐냐고 물었고, 나는 ‘응? 멋지다는 뜻이야.’라고 대충 설명을 했다.
그 후 언젠가 안경원에서 큰 맘 먹고 선글라스를 구입한 그녀는, 내 앞에서 안경다리를 올리며 물었다.
“야, 나 간지 좀 나냐?”
2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같이 티비를 보면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뜬금없이 할머니가 내게 “아이, 러브, 유”라며 영어로 말을 걸었다.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했던 나는 수줍게 “미 투”라고 대답했는데, 할머니는 급서운해 하며 “아냐! 유 러브 미라고 해야지!”라며 나를 다그쳤다.
“아냐~ 할머니 유 러브 미는 ‘너는 나를 사랑 한다’라는 뜻이고, 미 투는 ‘나도’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내가 한 대답이 맞는 거야~”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아이, 러브, 유”라고 할 땐 “유, 러브, 미”라고 대답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었다며 끝내 아쉬워했다.
그래서 나는 “외할아버지가 잘못 가르쳐주었지만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므로 ‘유, 러브, 미’라고 대답할게”라며 생색을 냈다.
그녀는 그제야 웃었다.
3.
이렇게 일본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일흔 여덟의 그녀이지만, 틀니가 빠지는 순간만큼은 한국말을 해도 내가 잘 못 알아먹는 지경에 이른다. 한 번은 둘이 밥을 먹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으이-미 싀브ㄹ”하는 욕지기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할머니의 틀니가 입 밖으로 툭, 빠져 입술에 걸려있었다. 생소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나는 ‘아 밥알을 코로 뱉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할 정도로 웃었다. 할머니도 어이가 없었는지 따라 웃었다.
틀니를 움켜쥔 채 웃는 그녀는 엄마보다 친근했고 귀여웠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저녁, 그녀의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이 잘 버텨주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었다.
더불어 우리 할머니는 욕도 잘한다. 할머니에게 주로 욕을 먹는 사람들은 나의 구남친들이다. “할머니, 나 남자친구 생겼어!”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할 때면 할머니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꼭 띠를 물어본다. “걔는 여름 소(여름에 태어난 소 띠)라 일은 좀 덜하겠네.”, “걔는 가을 토끼라 먹을 게 많겠네.”라며 띠 품평회를 한다.
하지만 이런 덕담은 내가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 욕설로 바뀐다.
“그놈새끼 그거 꼭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서 별로였어. 잊어버려.”
“뭐 그런 놈이 다 있다냐? 상놈 자식 같으니, 때려 쳐 그냥. 베레 먹을 놈”
한 번은 내가 정말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고 몇 날 몇 일을 운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안쓰러웠던지, 할머니가 “내가 그놈 쫓아가서 허벅지를 물어뜯어줄까?”라고 나를 달랬다. 순간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고, 나는 “됐어, 할머니. 틀니나 잘 챙겨. 저번처럼 밥 먹다 빠트리지 말고”하며 애꿎은 할머니만 놀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생각해보니까, 그 때 내가 족발에 꽂혀서 일주일 내내 그것만 먹었더니 이빨에 족발을 맞았나봐. 그래서 그래...”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일주일 만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4.
나는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늘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한다. 사실 그녀는 내게 일상이라서, 그리고 나는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가족 중의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이 없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 없이 스물 네 해를 버텨온 그녀는 강하니까. 욕도 찰지게 잘하고, 보험금 계산도 빠르고, 한 번 가르쳐준 건 잘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그렇게 오래오래 정정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그녀가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게 이건 단순히 치과치료나 그녀의 고질병인 팔 다리의 물리치료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할머니가 아프다고.
엄마는 울었고, 나는 멍했다. 결국 ‘삼촌은 알아? 아빠한텐 얘기했어? 외숙모가 뭐래?’라는 사무적인 질문만 되풀이 한 채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비로소 크게 울었다.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뚝뚝.
5.
라일락을 태우던 그녀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다가 그녀가 할아버지한테 영영 가 버릴까봐 너무 무섭다. 아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이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담배부터 끊게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에 건망고와 해바라기 씨 아몬드 등을 잔뜩 사서 그녀의 머리맡에 가져다 두었다.
“할머니 앞으로 담배피우고 싶을 땐 이거 먹어. 그리고 이제 담배 피우지 마.”
그녀는 쿨 하게 이야기한다.
“냅 둬, 죽으면 못 피워. 너 내일 생일이지? 점심에 고기나 먹자”
“아 됐어, 지금 고기가 문제야?”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한참 다른 곳을 쳐다보다가, 괜히 틱틱거리며 이야기했다.
“아 몰라,.. 그리고 할머니 걱정하지마. 그런 병은 요즘 아무것도 아니래. 괜찮아.”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 그녀의 배를 토닥토닥 거리며.
할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그래.”라고 대답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살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