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일
그는 토요일 오후에 떠났다.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그가 내 곁을 영영 떠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무한도전을 보며 깔깔 웃고 있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연락이 없는 그를 보면서, ‘오늘 많이 피곤한가보구나, 방해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2. 3일째
그가 나를 완전히 떠났음을 알게 된 건 우리가 연락이 안 된지 3일째가 되던 날 아침이었다.
사실 이틀째가 되던 날 나는 동생에게 “야, 나 남자친구가 없어진 것 같아”라고 이야기했었는데, 동생은 무심하게 “112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대답했었다.
결국 3일째가 되던 날 이 모든 정황을 ‘인지’하게 된 나는 이제 112가 아닌 119에 신고하고 싶었다.
“저기요. 119죠? 생각해보니 제 전 남자친구가 사랑에 대한 예의라고는 없는 정신이상자였던 것 같은데 얘 좀 데려가세요.”
3. 1주차
잠수이별은 말만 들었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겪은 이별 중 최악이었다. 나는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머리가 깨질 정도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타이레놀을 세어가며 자책을 시작했다.
이쯤 되니 그에게 연락이 올 것인가 말 것인가가 내 생활의 최대 화두가 되었다. 그래서 근 10일간 다섯 군데의 점집을 찾아다녔다. 다섯 명의 점쟁이들 중 3명은 ‘연락이 온다’고 했고 두 명은 ‘가망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근 십 만원에 가까운 복채를 날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점쟁이들은 과거는 기똥차게 맞추지만 미래는 한 치 앞을 못 본다는 것이었다. 결국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나를 더 미치게 했다.
4. 2주차
점집에 돈을 탕진했지만, 다행히 데이트를 하지 않으니 남은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갑 속에 박혀있는 카드를 들고 미친 듯이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있는 대로 옷을 사제꼈다. 백화점이 세일 기간이라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게 사들였다. 옷을 살 때는 행복했다. 그러나 이내 이것들을 입고 나갈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로 산 옷을 입고 또 쇼핑을 했다.
공허했다.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진탕 술을 먹었다. 진상은 떨지 않았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믿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연락이 올 거라고. 내가 좋아했던 너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5. 3주차
3주차가 되자 나는 자면서도 욕을 하기 시작했다. 시발, 이라는 내 목소리에 깨는 새벽이 몇 번 있었다. 신기했다. 꿈도 꾸지 않았는데 욕을 하다니. 그렇게 꿈에서 깨고 잠이 안 올 때면, 나는 노래를 틀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더니,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 클래식이란 이런 거지.
‘못.견.디.게 내가 좋다고, 달.콤.하.던. 말 그대로 믿었나.’
개자식.
이쯤 되니 내가 너를 기다리는 게 오기인 건지, 혹은 진짜 좋아했기에 그러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만 결론은 하나였다. 앞으로는 마음 줄 때 진심을 주는 건 좋지만, 그걸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 줘야지. 그렇게 지 밖에 모르는 놈과는 절대로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지
6. 4주차
물론 이러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가 아예 진상을 떨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애먼 놈 때문에 내 친구들이 고생을 좀 했다.
“야 이 나쁜 새끼야, 진짜 딱 너 같은 여자 만나서 똑같이 당해라. 너 진짜 내가 곱게 헤어져주는 줄 알아. 또 어디 가서 이 따위로 헤어지면 너 진짜 칼 맞아 죽어.”라고 벽을 보고 와구 와구이야기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내 친구들은 옆에서 같이 욕을 해줬다.
한 친구는 그런 새끼들은 잡아다가 박제를 시켜서 박물관에 전시해놓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안 돼, 박물관 임대료도 아까워”라고 말하는 내게, 그 친구는 “아냐 제 2차 피해자를 위해 ‘아, 저렇게 생긴 새끼들은 만나면 안 되겠구나’라는 데이터를 전 세계적으로 구축해야해. 무료개방을 해서라도!”라고 했다. 짜릿하고 사랑스러운 상상력이었다.
문득 그 놈한테 쓴 돈이 아까웠다. 걔한테 쓸 돈으로 내 친구들 고기라도 한 번 더 사먹일걸. 역시 친구가 짱이다. 최고다.
사랑 따윈 필요 없는 여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7. 한 달하고 일주 차
친구와 근교로 여행을 갔다. 계곡에 돗자리를 펴고 막걸리를 마셨다. 15년 지기라 우리는 할 말이 많다. 대부분 옛날이야기이긴 하지만.... 한참을 깔깔 웃다가 서로 멱살을 잡고 ‘나보다 먼저 시집가면 죽을 줄 알라’고 협박하며 우리의 이야기는 한 템포 마무리가 되었다.
막걸리에 취해 누워있던 친구가 소개팅을 하지 않겠느냐고 묻길래,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할래!”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는 안다. 저 대답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지금 상태의 나는 누굴 만나도 온전할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우리는 그냥 노래를 틀었다.
[international love song] - 나도 최근에 추천받은 노래인데 가사가 정말 예쁘다.
‘네가 없이 나는 하루 종일 잠만 잘 거야. 그럼 네가 내 꿈에 찾아와 나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이 노래를 틀어놓고 살짝 잠이 들었는데 정말 너무너무 신기하게도 그가 꿈에 나왔다. 미안하다며 나를 안아주려고 하는 걸, 나는 싫다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너 같은 새끼 싫다고. 꺼지라고.
그랬더니 전 직장의 상사가 나와서 나를 갈구기 시작했다.
후회했다. 아.. 그냥 가만히 있을 걸. 사실 그런 기회 흔치 않았을 텐데.
꿈에서조차 나는 자존심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아마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8. 어제의 이야기
천둥과 번개가 까르릉 까르릉 치던 날, 나는 미용실에 찾아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오랫동안 자르지 않던 앞머리를 툭, 쳐냈다. 염색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는데 두피가 너무 핫뜨뜨했다. 이거 제대로 되고 있는 거예요? 하고 물었는데 원장님은 그럼요!하고 웃었다. 겉이 뜨거우니 속은 좀 잠잠해졌다. 그래 인생은 이런 거지! 라는 논리라고는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깨달음이 들었다.
그 와중에 한 스타커플이 이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머리통이 뜨거운 와중에도 ‘그래, 저런애들도 헤어지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런 이쁘고 잘생긴 애들도 헤어지는데, 우리가 무슨 대단한 연애를 했다고. 니가 예뻤으면 얼마나 예뻤다고.
완성된 머리는 썩 마음에 들었다. 문득 황경신의 글귀가 생각이 났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내가 아니라면 너는 다시 나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문득 네가 전에 밥을 먹다 젓가락을 떨어트린 내게 “왜 그렇게 건성이야”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내가 진짜 유소년 양궁단에 들었어야 했다. 그 젓가락을 그대로 집어 들어서 네 이마에 쏘아버렸어야 했는데. 젓가락 따위로 나를 건성인 사람 취급하는 남자와는 다시 연애하고 싶지 않다. 절.대.로.
내가 겪은 잠수이별은 현재진행중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헤어진 이후로 단 한 번도 너를 위해, 너로 인해 울지 않았다. 그게 다시 네가 돌아온다고 해도 -그럴 일 또한 절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 자다가도 욕을 해가면서 너를 그리워했지만,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결코 너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는 것.
너는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이별이었는지 알아야 한다.
문득 “영원이라는 건 '영원하다는 말' 뿐이지!”라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끝은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대. 우리에게 정말로 예의가 필요한 순간은, 지금이다.
모든 것은 끝나가고 있으니까.
나 또한, 너를 떠나가고 있으니까.